공식1 : 말 ‹ 행동
내가 그나마 이 나이까지 살면서 다행스럽게도 터득한 지혜 하나는 상대방을 판단할 때 그가 허공에 대고 떠드는 말 보다 말 아래에 깔린 실질적인 행동, 즉 과거에 했거나 현재 하고 있는 행동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말들을 늘어 놓지만 가만히 따지고 보면 말 뿐일 경우가 많으며, 실제 행 하는 행동이야말로 그 사람의 말 중에서 본인이 진짜 믿고 있고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 사람의 가장 솔직한 모습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20대 혹은 30대 남성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었던 나는, 그 모임을 통해 얻으려 했던 원래 목적 에다가 덤으로 색다른 기회까지 가질 수 있을 것 같다 는 긍정적인 기대를 했었다.
처음 보는 사람끼리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자리라는 것을 떠올리더라도 행동은 전혀 확인이 안 되는 말이 넘쳤고, 나에게 자신의 서브 역할을 하라고 한 것에서 그의 미숙함이 드러났다. 아마도 그 남성에게는 내가 자신이 도움을 주어야 하는 사람 정도로 보였나 보다. 나는 적어도 그 남성보다는 이 분야에서 경력이 많았고 정식 자격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티가 안 나 유감이다. 남들로부터 평가를 받게 될 때, 그 평가에 대해 평가를 하는 것도 재미 지다.
한국인이자 40대 여성인 나에게 자주 닥치는 차별적 시선이나 무례함으로 인한 불쾌함은 어느 곳 어느 자리 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역치의 선 만 넘지 않으면 참으려 하고 간혹 못 참겠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소극적으로나마 표현을 하곤 했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니고 의미 없는 대상으로부터 상처 받지 않으려 노력한다.
당시는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 남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연습을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던 때 였었다. 나는 사람들의 진심에 관심이 있었고 내가 알고 싶은 그 진심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말 속에 먼저 등장하고 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장, 거짓말이라도 어느 정도는 참고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듣자 마자 이건 헛소리 구나 라고 생각이 드는 이야기도 참고 듣다 보면 어느 순간 화자의 마음 속 진심이나 도저히 포장이 안 되는 사실이 튀어 나오는 것을 알아냈다. 사실 이것이 독심술이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기회만 있으면 자신에 대해 과대 포장해서 말하거나, 우연히 얻은 운에 대해서 마르고 닳도록 써 먹으며 이야기한다. 내가 관심을 가지고 찾아내려 했던 이야기는 그런 텅 빈 내용보다는 그 사람이 결정적으로 변하게 된 계기, 혹은 전과 다른 용감한 행동을 하게 만든 이유가 무엇인 지, 바로 그것 이었다.
쏟아지는 사람의 말 속에서 숨어있던 진실을 발견할 때 생기는 반가운 기분이 있다. 자발적으로 경청 훈련을 시작했던 나는 그 남성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툭툭 튀어 나오려는, 내 솔직한 감정에서 오는 반응을 필사적으로 누르려 애썼다. 그 과시적이었던 30대 초반 어쩌면20대 후반 남성의 말을 들으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나는 무표정 하려고 애썼다.
평소에 내 얼굴 표정이 비교적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고 내 주변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릴 때 얼굴을 문에 바짝 대고 서 있던 사람의 얼굴을 갑자기 볼 수 밖에 없던 상황에서,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떴던 내 표정을, 엘리베이터 문 앞에 얼굴을 대고 서 있던 그 사람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오히려 어이 없다는 표정을 보였던 적이 있었다. 평소 감정을 숨기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던 나는 모르는 사람과 너무 솔직한 감정 교류를 해 버렸던 순간이었다.
내 감정을 숨기는 일, 다시 말하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상황을 그냥 넘겨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유치하고 또 이기적으로 보일까 자기 검열 차원에서 스스로 감정을 자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의 눈치를 보거나 거짓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 한다. 그리고 무례한 상대도 주변의 솔직한 반응을 볼 의무가 있다. 아, 물론 평등한 관계에서 말이다.
투명한 내 표정은 내가 굳이 감정을 숨기면서 살아 야 하는 생존 훈련 과정을 겪지 않음에서 온 것 같다. 만약 엘리베이터 문 밖에서 얼굴을 대던 엉덩이를 대던 간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서 있던 그 사람이 그 건물 에서 쥐꼬리만한 권한이라도 지닌 사람이었더라면, 그 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솔직하게 드러낸 나에게 어떻게 든 앙갚음 하고자 했을지 모른다. 바로 사회 생활 못 해서 손해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함은 뭐 라도 있는 사람이 주로 애용하는 감정이면서, 또한 자유로운 영혼들이 애용하는 감정이다.
개인적 이익을 위해 솔직함을 요령껏 잘 숨기는 사람 이 많을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사람은 본심을 그리 오래 숨기지 못하는 편이다. 편집 화면이 아닌 연속 화면, 롱 테이크로 어떤 사람의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그 사람의 진심을 알 수 있다. 단지 시간과 노력이 조금 필요할 뿐이라는 이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포장도 능력인가
그 날 나는 백 명 이상이 모인 어느 모임에서 여러 젊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보여 주는 말이나 태도에서 어떤 공통점을 찾게 되었다. 특히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이 는 남성들이 마치 그룹 토의 면접을 준비하는 듯한 자신감이 고취된 모습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모임 에서 젊은 여성들 역시 상당수를 이루었었는데 20대를 갓 넘어선, 혹은 그 이상의 나이쯤으로 보였던 그들의 에너지 역시 대단했다.
조금 과장하여 약간 공격적으로까지 느껴졌던 그들의 자신감은, 과거에 비해서 열심히 노력하면 어떤 수준 까지는 성취가 가능하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는 사회 수준에서 본인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실력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요즘 청년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과 더불어 자신을 드러내야만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청년 취업 시장의 녹록지 않음까지 도 엿볼 수 있었다.
아쉬웠던 부분은, 자신감은 언제나 필요한 것이지만 때로는 그 자신감의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겸손하기도 해야 하는 것, 또 근거가 없는 자신감은 허풍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뽑히고 누가 떨어지는 취업 면접장이 아니었음 에도 확신에 찬 모습과 자신을 과대 포장하려는 이들 의 모습을 보며, 내가 잊고 있었던20대, 30대 남성 일부의 자기 중심적 특성을 다시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그들의 말과 현실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참가자들의 개인적 사정을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모임에 초대를 받은 것 자체가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이 경력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아직 아무도 그들이 말하는 성공다운 성공을 못했다는 것 이다. 그러면 겸손한 편이 유리 했다. 태도나 말투에서 해외에서 오래 산 것처럼은 안 보였던 그 사람은, 서로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적정한 정보를 공개 하고, 겸손하면서 혹은 필요에 따라 근거를 통해 말하 는 것이 서로를 잘 모르는 관계에서 신뢰를 줄 수도 있었던 점을 잊고 있었다는 점이 아쉬웠다. 그런데 어쩌면 그 모임 후 대부분의 시간을 글을 쓰며 보내는 나에 비해 그 남성은 점점 일이 많아져 안정된 수입을 얻기 시작했을 지는 알 수 없다.
젊은 꼰대들이 출몰했던 그 날 여기 저기에서 들려 오던 말 속에 어김없이 자기 과시는 드러났다. 거기에 다 조금 더 용기를 낸 일부는 타인에 대한 오지랖을 넘어 결국 라떼(‘나 때는 말이야’라고 시작하는, 자신 보다 모자라 보이는 타인을 향한 훈계)가 등장했다. 아무리 많게 보아도 고작 30년 남짓을 산 이들의 ‘라떼’ 는, 삶의 경험과 성찰에 의해 얻은 지혜나 어떤 깨달음이 아닌, 그들 인생에 있어서 나름대로 특이했던 경험 이라고 치는 군대 경력과 해외 경험과 단기 취업 경험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의 말마따나 그렇게 대단한 경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들이 40대 아줌마인 나 를 경쟁자로 보고 이겨 먹으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참 모자라 보여, 꼰대 본능에서 오는 오지랖을 편안 하게 부린 것이었다고 생각하기는 싫지만,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기성 세대에게는 나이에 의한 위계문화가 아주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같은 성별 간에서는 나이를 거스르 는 이른바 하극상 꼰대가 흔하지는 않다. 물론 성별이 달라 지면 거기에는 나이 위계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대부분의 꼰대에게는 성차별 의식도 강하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서 만났던 그 젊은 꼰대 는 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여성이라는, 단지 눈에 쉽게 보이는 정보 만으로 자신감에 차올라 꼰대 본심 을 자연스럽게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만약 내가 민감 하게 반응했더라면 그 대화는 적당한 선에서 끊어졌을 지도 모른다. 당시 나는 자발적으로 경청 트레이닝을 하는 중이었고, 점점 더 자신감을 가지고 타인의 말을 경청을 했으며 지금까지 의미 있는 이야기들을 모을 수 있었다. 그 젊은 꼰대가 가진 지나친 자기 확신은 평소 부터 있어 왔고 그 날 하필 나를 상대로 보여졌던 것 이라 생각한다.
갈가 말까 고민하는 자리는 보통 안 가는 게 맞지만 때로는 기대 없이 참석한 자리에서 뜻 밖의 특별한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 남성뿐만 아니라 그 남성과 가까이 대화를 하던 겉 모습이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 은 그 날 모임을 주선한 업체 직원들과 아주 긴밀한 모습을 보였다. 이런 모습은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낯선 사람들이 모인 자리를 어색해하는 다수의 사람들 과 달리 자신이 뭔가 특별하다는 것을 내보이기 위해 서둘러 주최 측 혹은 내부 관계자 등 뭔가 핵심적인 위치의 사람들과 잘 알고 있고 친밀하다는 것을 보이려 하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사회성이 남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은 행동이다. 모임이 끝나고 나서 관계가 이어지던 어떻게 되던 그것보다는 일단 자신이 특별 하다는 과시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자신 보다 모자라 보이는 나 같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 만의 기발한 사회 생활 요령 이라도 가르치려는 듯 한참을 떠들며 존재감을 보이고 싶어한다. 의도가 너무 얕은데 있고 충분치도 않아 금새 바닥이 드러나 버리는 아쉬 운 전개이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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