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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 aside some jobs for humans.
My dad died of Alzheimer’s in 2020. In the later stages of his illness, he was cared for day and night by paid caregivers who understood him even when he struggled to express himself. He couldn’t always tell them when he was hungry, but they always knew.
My family and I will always be grateful to that amazing group of professionals. Something in the care they gave my dad was irreplaceably human. No robot could or should have done it.
I think about that team when the question of which jobs will disappear and which will remain comes up. I believe that as AI and robots improve, we’ll set aside certain things for only people to do. I’ve started calling this domain Human Reserved, and it’s an example of the kinds of ideas we’ll need to consider.
I like the phrase Human Reserved because it makes me think of nature reserves—places where we could put buildings and roads, but we choose not to because the loss would be too great.
We might set something aside as Human Reserved for economic reasons. For example, we may do it because allowing machines to take over a certain role will displace a large number of people who can’t easily change jobs. You can’t tell a 55-year-old who has worked in construction their whole career that they need to go work at an elder care facility and expect them to find it fulfilling.
Sometimes the decision to make something Human Reserved will be driven by other factors. In health, for example, imagine a robot giving you the awful news that you have an incurable disease. There’s no technical reason why it couldn’t. Yet it shouldn’t.
The Human Reserved domain will evolve over time—for example, we should consider setting aside some jobs now and phasing in AI slowly over years or decades with a commitment to preserve some jobs. Some areas, like education and mental health care, will be a mix, with a human in charge who’s using the technology to extend what they can do.
The lines will also vary from place to place. Some countries might insist on having humans take care of the elderly. But a country like Japan, which has a shrinking workforce and not enough young people to care for the old, may welcome a caregiving robot.
The idea of Human Reserved raises a host of questions I don’t have answers to. Who gets to decide what we reserve for humans? What criteria should we use? How do you keep companies from cheating and using robots anyway? What happens to international trade when one country lets robots make something and another country doesn’t? These will need to be worked out in public as part of the transition plan."

: 인간을 위한 일자리를 따로 남겨두어야 한다. 내 아버지는 2020년에 알츠하이머로 사망했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아버지는 밤낮으로 유급 간병인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실 때에도 아버지를 이해해 주었다. 아버지는 배고프실 때를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항상 알아차렸다.
내 가족은 그 놀라운 전문가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아버지께 베풀어준 보살핌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로봇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어떤 일자리가 사라지고 어떤 일자리가 남을지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 간병인들을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따로 남겨두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영역을 '인간 전용 영역(Human Reserved)'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앞으로 고려해야 할 아이디어의 한 예이다.
'인간 전용 영역'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자연 보호 구역을 떠올리게 하기 때이다. 건물과 도로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의 자연이 너무 많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특정 분야를 '인간 전용'으로 지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계가 특정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 직업을 쉽게 바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건설업에 종사해 온 55세 남성에게 노인 요양 시설에서 일하라고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라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요인들이 특정 분야를 인간 전용으로 지정하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의료 분야에서 로봇이 당신에게 불치병에 걸렸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한다고 상상해보라.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도 안된다.
인간 전용 영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일부 직종을 인간 전용으로 지정하고, 인공지능을 수년에 걸쳐 또는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도입하면서 일부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이나 정신 건강 관리와 같은 분야는 인간이 기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역할을 확장하는 혼합형 체제가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보고 경악했다.
빌게이츠가 주장한 휴먼리저브: 인간보호영역은 여성돌봄보존과 동일어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를 시집온 아내에게 맡기는 돌봄전가를 오랫동안 봐 왔다. 빌게이츠는 부친을 유급으로 돌봐준 사람들로부터 느낀 감사함을 미래에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를 위해 보존하고, 본인이 가진 돈과 권력으로 지금 뭔가 말 하는 모양이다.
나는 빌게이츠을 유급으로 돌본 사람들 중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임을 확신하고, 본문의 55세 건설업 남성이 돌봄노동으로 전직해 느낄지도 모를 불만족감은 돌봄노동에 밀어넣어진 여성들이 지금 느끼는 불만족감이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안썼지만, 이 글은 늙은 흰수염 여우가 교묘하게 쓴 여성차별이다. 빌게이츠가 만든 컴퓨터 산업의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가부장남성성은 단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적이고 따뜻해 보이는 글의 인간성이 누구의 노동을 말하는 지 입을 다문다. 빌게이츠도 차마 여성의 돌봄노동을 AI에 맡기지 말고 계속 여성이 떠맡게 하자는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는다.

1. 게이츠가 말하는 ‘인간성’은 평등하지 않다.
게이츠의 출발점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의사소통이 어려워졌음에도 간병인들이 아버지의 배고픔이나 불편함을 알아차렸다는 경험이다. 빌게이츠는 그 관계에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첨예한 논란를 일으키고 있는 그것이다.

누가 그 ‘인간적인 무언가’를 제공하는가? 왜 그 인간적인 능력은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요구되어 왔는가?


돌봄에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행동 변화, 감정 상태를 읽고, 말하지 못하는 욕구를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능력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여성성 또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어 왔다. 좋은 엄마라면 알아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좋은 아내라면 남편의 상태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며, 좋은 딸이라면 부모의 필요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그래서 좋은 간병인이라면 환자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이다.
'기계는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적인 돌봄을 보존해야 한다.' 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따뜻할 수 있지만, 성평등 맥락에서는 위험하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인간적 돌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어 온 돌봄 노동을 계속 여성에게 떠맏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 인간보호능력에 얼마나 낼까?
아기 돌보기, 아픈 노인 돌보기, 남편 부모 안부 챙기기, 집안 장애인 돌보기, 멀쩡한 남편 돌보기, 청소년 자녀의 감정 파악하기 등
이 감정 돌봄 노동에 제대로 값이 지불된 적은 없다. 남성은 삽입섹스를 하는것이 여성이 지배당하는 질서라 주장했고, 남성의 소유물인 여성을 남성의 사적 영역에 가두어두고, 가족내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에 착취해왔다. 부자집 여성은 다른 여성을 데려와 여성의 돌봄노동을 건넸고, 부자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을 데려와 떠맡겼다.
돌봄 노동은 가정에서는 무급 노동이었고, 시장으로 나오면 상대적으로 저임금 노동이 되어 성별임금격차를 만들고 있다.
여성운동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왜 인간에게 필수적인 노동일수록 경제적 가치가 낮을까?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사회가 재생산되지 않는다.환자를 돌보지 않으면 병원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다. 노인을 돌보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돌봄은 생산노동보다 낮게 평가되어 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돌봄이 오랫동안 여성의 역할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갑자기 '돌봄은 인간적인 일이니까 인간에게 남겨야 한다.'? 라고 선언하는 것은 과거의 성별 노동분업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것을 ‘인간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재포장할 위험이 있다.


3. 더 위험한 것은 ‘인간 노동의 보호’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AI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일부 직업은 인간에게 남겨두자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할 것인가?"
예를 들어 고임금 전문직과 저임금 돌봄노동자가 있다고 보면,
AI가 전문직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할 수 있다면 사회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판단과 창의성이 중요하니 전문직에는 인간을 남겨두자.”
그런데 돌봄노동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접촉이 중요하니 돌봄에는 인간을 남겨두자.” 라고 한다.
겉으로 보면 똑똑한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공평하지 않다. 누가 그 인간 노동을 제공하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임금 전문직의 ‘인간성’은 고임금으로 보상될 수 있는데, 반면 돌봄노동자의 ‘인간성’은 종종 저임금으로 구매된다. 그 노동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정책이 실제로는 고소득층의 인간성을 보호하면서 저소득 여성의 노동을 보존하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계급적, 젠더적 문이다.

4. ‘돌봄을 자동화하지 말자’는 말은 누구에게 좋은가?
만약, 로봇이 장애 노인의 식사 준비, 청소, 세탁, 이동 보조, 약 복용 알림, 야간 상태 확인, 단순한 신체 보조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치면,
인간보호영역 원칙에 따라, 돌봄은 인간적인 일이므로 인간이 해야 한다며 인간 노동자를 계속 고용한다.
혹은 인간노동자의 만족을 위해 로봇을 고용한다. 로 선택이 주어진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하루 12시간 동안 간병인이 청소하고 빨래하고 몸을 들어주는 것과 간병인이 제공하는 감정노동이라면, 간병인이 감정노동 후 겪는 스트레스와 피로가 다시 다른 감정노동자로부터의 돌봄으로 이어진다면, 로봇이 돌봄 노동 전체 혹은 상당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음을 외면하는 기만이다.

인간보호영역 원칙 이라는 명목하에 인간을 고용하는 것은 고결한 윤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신체적 수고와 감정적 소진을 합법적으로 매매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봇이 24시간 내내 불평 없이 몸을 들어 올리고, 밤새 환자의 반복되는 푸념을 들으며 완벽한 미소와 친절한 음성으로 응대하면, 인간 노동자가 겪던 스트레스의 순환 고리는 여기서 끊어진다.
자동화와 인간성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동화가 인간에게서 노동에서 해방시켜 인간에게 관계를 돌려줄 수도 있다.

5. AI가 돌봄을 빼앗는가? AI가 누구를 돌봄에서 해방하는가?
흔히 AI가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고 한다. 근데 제발 뺏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AI가 이미 대체하고 있는 노동이나 로봇이 대체하는 일 말고, 가사노동에 로봇이 빨리 투입되기를 바란다.
돌봄과 가사노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여성과 아이를 착취하는 무급 노동으로 치부되어 왔다. 생산성을 숫자로 측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리고 주 노동 주체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였다는 이유로 가치 평가에서 늘 뒤로 밀려났다.  AI와 로봇은 가사노동자와 간병인을 돌봄에서 해방한다. 빌게이츠 같은 부자는 수십 명의 간병팀을 꾸려서 간병노동의 질을 관리할 수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24시간 돌아가는 간병노동과 돌봄노동에 장기간 돈을 쓸 여력이 없다.
현실적인 대안은 감정노동의 99%를 AI와 로봇으로 대체하고, 남은 1%의 인간적 교감에 압도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24시간 요구되는 기본적인 말벗 역할, 그리고 신체적 수발에 들어가는 정서적 에너지를 AI가 99% 흡수하면 소모적인 감정 소비를 기술에 맡김으로써 인간 노동자는 감정적 방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술이 감정의 껍데기를 대체할 때, 비로소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공감, 깊은 맥락의 이해, 존엄성을 보장하는 마지막 1%의 연결이 희소하고 귀한 가치로 인정한다.
결국 핵심은 돌봄은 인간, 특히 여성이 해야만 하는 거룩한 노동 이라는 고정관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AI와 로봇이 돌봄 노동을 100%에 가깝게 대체하여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성은 마침내 돌봄의 지정 담당자 라는 억압적 역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노동의 상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로봇이 이 돌봄 노동 전체, 혹은 물리적, 감정적 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감정의 윤리적 외주화 가 완성된다. 로봇은 24시간 내내 불평 없이 몸을 들어 올리고, 밤새 환자의 반복되는 푸념을 들으며 완벽한 미소와 친절한 음성으로 응대한다. 인간 노동자가 겪던 스트레스의 순환 고리는 여기서 끊어진다. 사회는 비로소 '감정적 가성비'를 확보하며, 돌봄은 소진되는 인간 노동자 없이도 유지되는 완벽한 시스템이 된다.
둘째, 인간성에 대한 정의가 재편된다. 돌봄을 로봇에게 위임한 사회에서 노인은 더 이상 타인의 피로를 미안해할 필요가 없고, 가족은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견디는 공감의 이음새를 제거한다. 타인의 노동과 감정에 의존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빚을 지며 유지되던 인간적 유대감은 규격화된 기술적 서비스로 대체된다.
사적 영역에 갇혀 있던 비가시적 노동자가 해방되는 오랫동안 가정 내 돌봄을 전담해 온 여성, 혹은 가족의 병간호를 위해 자신의 삶을 유예해야 했던 이들에게 로봇의 투입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 삶을 되찾는 생존의 문제다. AI가 돌봄을 맡음으로써, 인간은 누군가의 수발을 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진하지 않아도 되는 최초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해방은 지극히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이 남성권력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장착하고 있는 중, 해방을 누리는 것은 고가의 돌봄 로봇을 구매할 자본력이 있는 계층이며,  반면, 저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제공하던 이들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 수단마저 빼앗기는 현실에 직면한다. 돌봄 노동이 고되고 피곤한 일 이긴 했으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열린  몇 안되는 노동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AI가 돌봄을 빼앗는가, 해방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AI에 가르칠 미래 사회 구조에 달려 있다. 해방의 이점이 보편적 복지로 환원된다면, AI는 인간이 인간을 수발하느라 서로를 마모시키던 오랜 비극을 끝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6. 인간보호영역은 결과가 아닌 원인이 다.
빌게이츠는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단 일부 영역은 인간만 하도록 지정한다, 돌봄은 인간적인 영역이므로 남겨둔다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돌봄이라는 노동을 왜 보존해야 하냐고 질문하자면, 돌봄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따뜻한 인간의 영역 이라는 감정적 호소가 따라온다. 결국 그 따뜻함을 제공할 주체로 다시금 여성을 호출한다. 정작 자신들은 고차원적인 지식 노동과 자본 소유를 독점하면서, 고단한 신체, 감정 노동은 인간성 보존 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성별에게 밀어 넣는 것이다.
자본과 기술이 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AI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 가사, 간병, 돌봄 로봇 개발에는 그만큼 속도를 내지 않을까? 돌봄 노동을 수행할 여성과 약자라는 대체 불가능한 저렴이 인간 자원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매우 위험하다. 돌봄을  인간다운 따뜻함 이라는 미사여구로 덮어씌워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묶어두는 순간, 그 고된 감정노동과 신체적 고갈은 다시금 성역할의 탈을 쓰고 여성에게 전가된다. 결국 인간 보호 영역 이라는 명목은 여성과 약자를 계속해서 돌봄이라는 노동 감옥에 저렴하게 가두어 두는 원인으로 작동할 뿐이다.

7.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성 저임금 노동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무급 돌봄을 담당했고, 현대 복지국가와 노동시장이 발전하면서 일부 돌봄이 사회화되었다. 하지만 돌봄이 사회화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탈젠더화된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하던 일을 국가가 제도화하면, 어머니가 하던 돌봄이 여성 보육교사, 여성 요양보호사, 여성 간병인, 여성 사회복지사, 여성 방문 돌봄 노동자 등의 직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 다시 질문해야한다.
가정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하던 일을 국가가 로봇 대신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다시 구매하면 여성은 해방되나? 아니다. 가정의 무급 노동이 시장의 저임금 노동으로 이동했을 뿐이라면, 노동의 장소와 계약 형태는 바뀌었지만 젠더화된 노동분업은 유지될 수 있습니다.이것이 돌봄의 사회화가 가진 역설이다.

8. 남성 기득권의 재소환
전통적인 가부장제는 남성을 생산자, 여성을 재생산 담당자로 구분했다.남성은 임금노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여성은 가사, 출산, 양육, 돌봄을 통해 가족을 재생산했다. 이 과정에 남성이 여성을 종속하고 강간하고 죽였다. AI가 등장하면 이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AI와 로봇이 과거에 남성이 특히 여성에게 요구했던 수동적 역할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은 AI가 하고, 인간적인 돌봄은 인간이 한다는 원칙을 세우면, 남성 중심의 생산 영역은 계속해서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여성 중심의 재생산 영역은 인간적 가치 라는 이유로 노동집약적인 상태로 남게 되어 역설적으로 AI가 남성의 노동을 대체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노동을 보존하게 된다. 기계화된 생산영역과 인간화된 돌봄영역이라는 전통적 분업이 생존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새로운 가부장제이다.

9. 인간성은 여성의 희생을 미화하는 말가장 비판적으로 보면 빌게이츠의 문장에서 ‘인간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인간적인 돌봄”이겠으나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정적 육체적 소진을 부르는 일 일 수 있습니다.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는 인간성으로 미화되더러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노동이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를 돌본 사람들의 노동에서 인간적 아름다움을 보았으나, 그 아름다운 인간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 노동자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10. 감정노동의 자연화
빌게이츠는 아버지가 말하지 않아도 돌봄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챘다고 하는데, 이것은 상대의 감정을 눈치를 살피는 감정노동으로 오랫동안 여성에게 이 능력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이것을 여성은 원래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돌봄에 적합하고 관계를 잘 이해한다 고 사실화하는 것은 문제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기술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오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려서부터 타인의 감정을 읽도록 사회화를 강요했고, 남성에게는 허용하지 않은 정서적 노동을 여성에게 요구해 왔다. 그런데 AI 시대에 이것을 다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칭찬하면,
인간만이 혜택을 누리는 여성만의 서비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AI가 오히려 여성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AI가 돌봄노동을 당장 대체할 수는 없어도, AI가 돌봄에서 어떤 부분을 없애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은 지금 해야한다.

빌 게이츠 자신도 글 마지막에서 누가 인간에게 남겨둘 일을 결정하는가?를 물었다. 인간에게 남겨야 할 일 을 결정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술정책을 결정해온 사람들은 대체로 기업, 국가, 자본, 전문가 남성 집단이었다. 그런데 돌봄노동자 자신이 그 결정 과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가는 돌봄에 로봇을 도입하지 말자 고 할 수 있고, 국가는 돌봄노동에 여성 고용을 보존해야 한다 고 할 수 있고, 부자는 인간적인 돌봄이 필요하다 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임금 돌봄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돌봄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
이 목소리가 정책에서 사라지면 안된다.
그리고 돌봄받는 사람의 인간성 과 돌봄노동자의 인간성을 동등하게 봐야 한다
빌게이츠는 아버지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동등하게 돌봄노동자의 존엄성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노인에게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 돌봄을 제공하는 노동자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환자가 인간답게 돌봄받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도 인간답게 일할 권리가 있다. 환자가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에게 자신의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도 필요하다. 환자가 인간적 접촉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이 인간적 접촉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남성에게는 AI가 노동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면서, 여성에게는 “인간적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을 계속 요구한다. 이는 AI는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기술적으로 재구성하는 기술이 된다.

- 무엇을 인간에게 남겨야 하는가?

- 누구를 어떤 노동에서 해방해야 하는가?

- 어떤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야 하는가?

- 자동화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 자동화 때문에 없어지는 일자리의 노동자에게 사회는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 돌봄노동을 인간에게 남긴다면 왜 그 인간은 여성인가?

- 남성과 여성이 돌봄을 똑같이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 왜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인간의 희생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AI 시대는 남성에게는 AI가 더 많은 생산성을 제공하고, 여성에게는 인간성을 이유로 더 많은 돌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여성과 남성 모두를 생존을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불필요하고 반복적인 노동, 감정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결과 발생한 시간과 부를 성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그리고 돌봄처럼 정말 인간적인 관계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높이고, 권한을 강화하고, 남성의 참여를 의무화하며, 돌봄을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 책임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이룰지를 생각해야한다.


솔직히 말해봐.
빌게이츠가 쓴 글이라서 주목을 받은 거면, 하필 빌게이츠가 쓴 것이라 비딱하게 보고말고 이다.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및 재단 여성 직원들에게 이른바 찝쩍거려 2019년 이사회 조사를 받고 사퇴.
개인 자산관리회사(카스케이드) 대표의 여성직원 성희롱 및 언어적 학대 행위를 인지하고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음.
2023년 개인 사무실 채용 과정에서 보안업체가 여성 지원자들에게 성병 여부, 불륜, 누드 사진 촬영 등 부적절한 질문을 던진 사실이 드러났음.
가장 큰 건은 미성년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오래 만나 오다가 논란이 되었으며, 멜린다 게이츠와의 이혼 사유 라고 알려졌음.

빌 게이츠가 AI를 갖다대어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주장하는 것의 이유를 대보겠다.
빌게이츠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여성이 돌봐야 한다 는 주장은 없다. 그러나 현실의 돌봄노동이 여성화되어 있다는 조건에서 이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이렇게 전개된다.
" AI가 나를 돌보는 것은 싫다. 나는 사람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나를 이해하고, 감정을 읽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여성???
여기서 그 사람을 여성으로 바꾸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의 욕구를 이해하고, 남성을 위로하고, 남성의 생활을 관리하고, 남성의 감정을 받아주는 존재로 길러져 왔고, 반항하는 여성들을 바로 죽여왔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돌봄을 원한다” 라는 욕망은 "여성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한다. 여성은 원래 돌봄을 잘한다. 여성의 따뜻함과 공감은 남성이 누릴 수 있는 인간적 자원이다”
라는 사고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빌게이츠의 인간보존영역이 성적 대상화와 연결되는 지점은 여성의 몸과 감정이 남성을 위한 자원으로 취급되는 것 이다. 성적 대상화의 핵심을 단순히  여성을 성적으로 바라본다 라고만 이해하면 이 연결이 안된다. 더 넓게 봐서 대상화에는 한 사람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포함된다.성적 대상화에서는 여성의 몸이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전환된다다. 돌봄의 대상화에서는 여성의 몸, 시간, 감정, 관심, 공감 능력이 남성의 생활과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바로 전환될 수 있다.
“나를 돌봐주는 여성”과 “나를 욕망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항상 결합되어왔다.
남성을 돌보는 사람. 남성이 욕망할 수 있는 사람.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고
성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하며 남성의 감정을 이해해야 하고 남성을 위로해야 하며 집안일을 해야 하고남성이 힘들 때 보살펴야 하며 남성의 욕구를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는 상반된 요구가 동시에 부과되는데, 이것은 단순한 “돌봄”도 아니고 단순한 “성적 대상화”도 아니라 여성의 몸과 감정 전체를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패키지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로봇보다 인간 여성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젠더화될 때, 여성은 단순히 노동자가 아니라 ‘나에게 인간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존재’ 성적 대상화로 소비된다.

빌게이츠가 말한 간병인이 아버지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배고픈지 알아차렸다는 것은 아름다운 장면이나, 이 능력을 여성에게 기대하는 문화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알아줘야 하나? 말을 해야알지! 이렇게 되면 여성에게 초과적인 감정 인식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남성에게는 상대적으로 그런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다.성적 대상화에서도 남성의 욕구가 출발점이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기를 원한다.” 이러면 돌봄을 제공하는 여성의 욕구는 뒤로 밀려난다. 여성이 일을 안하고 싶을 때도, 남성이 여성의 이해를 원하면, 이 순간 여성의 주체가 사라지고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객체가 된다.
성적 대상화와 돌봄 대상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더 위험한 것은 ‘여성의 돌봄 능력’ 자체가 여성성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남성은 AI에게는 없는 것을 여성에게서 찾는다. 그런데 이 능력들이 여성적 특성 으로 정의되면, 여성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여성의 인간성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간성을 남성이 소비한다.
왜 남성의 노동은 기술로 해방되어야 하고, 여성의 돌봄은 인간적 가치라는 이유로 보존되어야 하는가? 왜 남성은 AI에게 노동을 맡길 수 있으면서, 자신의 정서적·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간은 여성으로 남겨두기를 원하는가?
이것을 ‘돌봄의 성적 대상화’라고까지 확장해서 보면, 여성의 돌봄 능력을 여성의 성적 매력과 결합시키는 문화적 구조는 분명히 있다. 남성은 여성을 욕망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돌봐주기를 기대한다. 빌게이츠는 점잖게 말했지만 조만간 아무도 자신을 정성스럽게 돌봐주지 않을까 불안해서 한 소리가 섞여있는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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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지칭하는 유럽과 미국은 그들의 역사적 발전을 유일한 표준 모델을 가지고 있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문화적 확산을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단계적으로 겪어왔다. 하지만 한국은 서구가 수백 년 동안 거친 개혁과 변혁을 50년이라는 극도로 짧은 시간 내에 차례차례가 아닌 한꺼번에 달성해버렸다.

서구적 모델에서는 산업화 이후 민주화, 그 이후의 고도 사회 안정화가 순차적 공식이지만, 한국은 놀라운 발전(경제발전) 속도 속에 정신까지 바짝 차리며(민주화) 서구의 공식을 넘어버렸다.
서양은 중세까지 기독교로부터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고, 근대에 이르러 개인주의, 서양 자유주의, 그리고 이어지는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한국의 발전은 강한 국가 주도형 기획과 집단주의 라는 전통적 가치를 교육열이 이끄는 형태를 보였다. 서구 관점에서는 이런 발전이 현재 중국이 보이고 있는 전근대적 요소나 독재국가 경제로 단정짓기 쉽다. 실제로는 정부-기업-국민이 자발적, 혹은 집단주의에 이끌려 단결해 이룬 공동체의 성공이다.

아직도 서구는 세상이 서구 중심으로 돌아간다 믿는다.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선택이 인류의 방향이라 믿는다. 미국은 자국 부채 스트레스를 동맹국들에게 풀며 누가 대빵인지에 대해 계속 소리지르고 있고, 유럽은 가난하고 불안한 현실을 과거 번영의 그림자에 숨기고 갈길을 잃고 말았다.
지난 서구의 발전을 보면, 다른 대륙으로 쳐들어가 같은 인간인 노예를 잡아다 죽이고, 모자라다 싶으면 개의치않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가져갔다. 그러면서 돈도 가지고 여유도 생겼고, 여러 기계들까지 만들어 내, 발전은 이렇게 하는 거라는 공식을 세웠다.

아시아의 너무 다른 문화를 접하며 마치 신화를 뜻하는 듯한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이해를 멈췄다. 대신 많은 학자들이 자기이해에 몰두했다.
모든 비서구권은 서구의 과거를 따라해야만 발전한다고 믿었고, 그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못했으니 종교의 교리로 갖다붙었고도 남았다. 서구 자신들이 규정한 규칙과 한계를 넘어서는 한국의 발전 양상을 기존 서구 이론 틀에 억지로 맞추어 보고 판단하거나 이상한 돌연변이 예외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이 단순히 서구를 따라가는데서 멈추지않고 새로운 길을 만든 것을 서구는 쉽게 폄하한다. 서구가 이룩한 산업 발전과 정치제도의 추격을 넘어, 매력 터지는 문화와, 첨단 산업과 전통산업의 공존, 디지털 문화, 안전한 치안까지 서구의 기준을 넘는 현실을 한국은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구 역사관에서 자신들의 발전 모델이 유일한 인류의 정답이 아님을 증명하는 강력한 반례인 한국을 받아들이는데 게으르거나, 그냥 무시하거나, 별도 목록에 넣어두고 닫아버리기 쉽다.
그런 게으름은 한국을 매우 단편적으로이해하게 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드라마 속 멋지고 매력적인 주인공만 보고 한국 남자들은 다 저럴 거라는 드라마 오리엔탈리즘, 한국인들의 매끄러운 피부를 보고 성형과 시술에 중독된 자아없는 사람으로 보는 질투. 솔직히 말해.

서구 근대철학에 쳐발쳐발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더이상 한국 사회와 겹쳐지지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 가치를 해체한다는 이론이다. 강력한 서구 기독교 문명이 구축해 온 특정 전제들에 대한 반발과 해체에서 나온 이론이라 구조와 역사 자체가 다른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은 넘어 라는 뜻의 포스트에 근대적 가치인 모더니즘이 합쳐져서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넘어섬을 의미하는데, 전쟁 후 사회 자아 분열 속에 정신을 붙들고자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한가지 거대 구조 절대적 진리는 없고 세상에는 다양한 구조와 가치가 있다는 것.
갑자기 다른 말이긴 한데, 포스트모더니즘이 페미니즘에 들어오면, 페미니즘 이론이 주장하는 길러진 성이라는 젠더에 부여된 역할이, 그 거대 구조가 부인되어 여성이 생물학적 성별이 성역할과 분리되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다. 라고 할뻔! 아무튼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딱 들어맞지 않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는 가치가 뿌리내리고 근대성을 다시 세워하는데, 천부인권, 법제도가 사회를 지배하기 전에 없는 뭐를 해체하자는 것이 안 맞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작용은 종교에서 왔다. 신이 무엇이라고 명확하지 않은 한국에서 유교, 불교, 도교, 무속은 해체할 구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다양한 구조가 있었다.
오히려 근대 이후로 돌아가려는 기독교근본주의가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스르고 있다.
한국인들은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속에서 입체적 시각,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신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자연스럽게 훈련해 왔다.
한국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파편화나 상대주의 를 이론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산업화의 발전 속에서 몸으로 경험해왔다

전통을 잘 활용하고, 근대성을 추억하고, 첨단산업을 열망한다. 그 근본에는 절대적 공동체 가치보다는 생존-돈이 먼저 있는 것 같다.
AI가 우리에게 바짝 가까이 오고 있는데 서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새로운 관계를 반기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은 일단 가보자는 호기심을 발휘하고, 과거 서구열강에 침략당하고 모욕당한 경험을 다시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고리타분한 유교이론이나 불교의 허무성을 정리하는 이론적 해체에 시간을 들이기보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빠르게 판을 새로 짜는 상황적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이들이 아닌 것은 불타는 교육열의 끝에서 여전히 지성을 원하고 남들하는 것은 따라 하려고 한다. 많은 서구인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주어졌을 거라 믿는 소명만을 끌어안고 외로워하는 동안.

케이팝 남자 아이돌들보고 다 게이같다는 조롱은 불과 몇년만에 조용해졌고, 한국여성들이 화장과 성형에 미쳤다는 조롱은 자기관리로 조용히 교체되고 있다. 서구가 한국을 따라오건 말건 우리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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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 뭐든 할수 있을것 같았는데...

방 한구석을 채우고 있던 대형 링조명과 고성능 미러리스 카메라, 마이크를 중고 거래 앱에 헐값으로 올렸다.
올려두기가 무섭게 구매 희망 알림이 울렸다. 화려했던. 엑셀녀 성아의 흔적들은 단돈 수십만 원의 현금 뭉치로 바뀌어 빠르게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휑해진 방 안을 둘러보던 성아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어 택시 호출 앱을 터치하려던 손가락을 다시 접었다. 통장 잔고의 압박이 머릿속을 스쳤다. 성아는 씽끗 웃고는 야무지게 신발을 신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얼마 만에 타는 버스인지 기억조차 아득했다. 몇년전에 알바 면접갈때 탄게 마지막인 것 같았다. 삑~ 카드 찍는 소리와 함께 올라탄 버스는 덜컹거리며 출발했고, 성아는 빈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정류소에서 탄 한 노인이 성아 옆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찌든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코끝을 강렬하게 찔렀다. 언제나 집앞에서 기다리던 택시 안에 혼자 앉아 유튜브 라이브를 켰었는데, 마치 트럭에 실린 택배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뭐. 옆자리 노인은 양 다리를 마음껏 쩍 벌렸다.

도착한 일자리센터의 직업상담 창구. 상담사는 성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눈빛으로 성아가 내민 서류를 훑어보았다.

"최근 2년간 경력이 비어 있네요. 방송 일을 하셨다고요? 어떤 내용이었죠? 사업자 등록은 되어 있었나요? 소득 증빙은요?"

세세하게 파고드는 질문에 성아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액셀 방송에 나갔었다고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나는 생각이 들었다. 밑바닥까지 캐묻는 상담사의 시선에 수치심과 불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던 상담사가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촬영이나 편집 같은 방송일을 하셨다면 일자리를 추천드릴 수 있는데, 그게 아니면... 여기 지금 당장 내일이라도 국비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직업훈련 과정이에요."

종이에 '미용사', '간호조무사', '보육교사', '요양보호사'라는 단어가 보였다. 몇 시간 방송만 하면 수백만 원은 우습게 벌던 다른 차원의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철저하게 노동력을 요구하는 현실의 직업들이었다.

빈속에 버스 멀미까지 겹친 성아는 갑작스러운 피로감과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오늘은 좀 몸이 안 좋아서요. 다음 주에 다시 오면 안될까요?"

성아는 빤히 쳐다보는 상담사의 낯선 눈빛을 피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숨을 내쉬었다.
20대인 성아에게 요양보호사가 무슨 말이며, 최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이 뻔한 보육교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증 교육을 수개월 받아야만 할 수 있다니 한숨이 나왔다.

용감하게도 엑셀방송을 때려치우고 나올 때만 해도 속으로 물류센터에서 라도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혹시 누가 성아를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마스크를 쓰면 모르겠지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자존심은 이미 바닥을 쳤고, 당장 한 달 뒤 낼 월세조차 아득했다.
명품옷과 가방을 팔면 꽤 돈이 될 것이고, 배달을 끊고 밥을 해먹으면 생활비도 줄일 수 있으며, 당장 오피스텔에서 저렴한 원룸으로 이사를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성아는 화려했던 과거와 초라한 현재의 거대한 갭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성아의 사진을 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낯이 익은 누군가가 서있었다.

"성아님, 오랜만이에요. 엑셀 그만두셨더라고요. 어디 다른데 가세요? 퇴사 기념으로 저랑 사진 한번 찍어주실수 있으세요? 제가 컴백방송에 1번으로 쏠게요."

성아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가 엑셀 밖이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성아는 더이상 엑셀녀가 아니다. 성아는 언젠가 개인적으로 데이트를 했던 그 큰손 후원자에게 아무말 못하고 뒤돌아 걸어갈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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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하는 남자 채집하는 여자/ 최성락
106p 왜 대다수 남성은 일, 업무를 우선하고 조직과 집단에 충성할까? 왜 대다수 여성은 업무와 일상 사이의 균형을 원하고 조직 자체에 상대적으로 덜 충성할까? 이런 현상도 남자는 사냥, 여자는 채집이라는 진화심리학적 이론으로 설명할수 있다.

작가에겐 충격이겠지만 종이에 주절거린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많이 읽었다는 책을 다 똥꾸녕으로 읽었나... ) 이른바 레드필로 소문난 진화심리학을 지하철역에서 업뎃오류난 버그가 받아쓴 거구만.

선사시대 여성도 대형 동물을 사냥했다는 증거가 분명이 나오고 있다.
남성=사냥, 여성=채집 이라는 고정된 성별 분업 프레임 자체가 현대의 편견이 반영된 통설이다.
상식적으로 토끼 한 마리도 문명적 총으로 쏴서 잡기 쉽지 않은데 창들고 멧돼지를 잡았다고? 사냥은 늘 실패했고, 남자들도 매일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음이 사실이다.

일터에 맹목적 충성을 하는 남자들을 노예 근성이라고 봐야하나? 약탈적 자본주의와 기업 조직이 만든 조직에 복종문화나 장시간 노동을 수만년 전 수렵, 채집 본능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억지다. (서울대 나와서 학벌로 먹고 잘먹고 잘살아서 헛소리 좀 하시나?)

성별간 일터에서 태도 차이 현실적인 환경 차이라는 점에 눈을 딱 감고, 뻔뻔하게 쓴 글 따위를 안 읽은 눈 구해야 겠다. 왜 이 책이 페미니즘으로 분류되어 있었는지 답답하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 역할을 강요받고 사회적 역할을 자아로 여겨 일터에서 스스로 부품을 자처하고, 여성은 독박 육아, 가사 부담으로 균형이 생존이며 조직 내 유리천장 때문에 복종해봐야 올라가지 못하는 숱한 예를 보고 살아, 주어진 대로 따라는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영향은 막강하게 발휘된다.

할만많지만 그만한다. 2024년 출간 책이라는 데에 기가 차서.
똥밟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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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 개봉후
이른바 평론가들이
높은 별점을 던지고 있는데,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이
다음과 같을때 :
1. 알던 모르던 오디세이아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일단 와~
(고전 패티시)

2. 볼만한 괴물이나 장면 나오면
와~  (돈안아깝네)
3. 쏟아진 이야기들이
적당히 이해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면
와~ (자신만 이해한듯 만족)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9세기부터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뒤에 여러번
각색되어 양이 불어난 작품.
특별한 점은,
서양문화에서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운명, 소명을
거룩하게 따르는게
기본틀인데, 오디세우스는
온갖 수를 써서 인간적인 해결을
하는게 (마치 힌두교의
오디세우스 신이 된 느낌.
신과 다른길로 간다면
왜 성차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눔이그눔)

다른 점이라면,
서양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확장해왔다는 점.

개인적으로 그 감독 영화를
안좋아해서인가,
지루한 데가 꼭 있고,
관객을 가르치려는 듯
여기 이해됐니?  라고
계속 지루하게 이어가는 점.
감독 스타일은 특이하지만
더이상 특이할 것이 없어진
느낌. (나이드니 그렇겠지..)


고전 패시즘은
지적 선민의식으로
너 그거 읽었니로 시작하는
꼰대 출현.
스스로 별 의견이 없으면
검증된 권위에 의존하려하는데
고전, 위인, 종교서 등
깊은 사색이나 성찰을 하고
나만의 관점을 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워
오디세이아 읽었니?
삼국지 아직도 안읽었어?
자유론도 안 읽어봤니
라는 식의 접근은
아주 적은 노력으로
제 지적 우위를 증명하려는
가장 가성비 높은 허세이자
지적 게으름이다.

가치관이 얕은 이들에게
고전은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남들 앞에 서기 위한
메이크업같아서
책 한 권을 독파했다는 사실
자체를 마치 특정 자격증으로
자랑하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넓어졌는가 이지만,
이들은 읽었니 or 안 읽었니
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묻는 이들에겐
정직한 답을 선물하기 싫음.

세상과 사람관계를
오디세이아가 다
담고 있지는 않다.
그 모든 다양함을 포용할 만큼
관점이 넓지 못하니
자신이 겨우 이해한 고전
한 두 권의 틀 안에 세상을
강제로 맞춰 넣으려 하는
무리수를 두고,
고전이던 뭐던 적어도 작가가
수명 줄여서 쓴 단 한 권의
책을 아주 깊게 읽고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멍청함, 무식함,
다양한 세상, 시대적 한계를
깊이 깨닫는데,
특정 고전 하나를 전지전능한
교양의 기준으로 삼는 행위
자체가 해당 고전을 제대로
읽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증.


그렇다고 책을 읽지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책 저책
보다보면 내 생각의 형체를

그려주는 똑똑이를 만나게 되고

그 순간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초월감을 느끼는 순간
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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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카메라 꺼졌다고

성아는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왔다. 택시에 앉아 떠오른 생각은 뒷수습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엑셀방송을 떠나버리면 많은 사람의 연락에 어떻게 다 답할까 어떻게 해명할까 그냥 연락두절 할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지난 2년간 주 3회 방송을 해오며 그 안에 얽혀 있던 수많은 관계들. 방송이 끝난 후 수십, 수백 개의 카톡이 폭주해 해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성아를 가십거리로 삼아 뜯어먹으려 들까 걱정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들에게 오빠, 아빠 라 부르며 연인 행세를 해왔고, 채널운영자의 요청에 언제나 협조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BJ들의 순서에도 최선을 다해 노래 불렀고, 새벽에 다같이 밥을 먹으며 나눈 솔직한 대화들은  갑자기 전부 입을 다물었다. 성아의 휴대폰 화면은 고장난 듯 조용했다.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끊겠다는 메시지를 남길 필요조차 없었다. 돈으로 증명되던 가치가 사라진 순간, 관계의 고리 또한 선을 그어버린 듯 단칼에 끊겨 나갔다. 성아는 아무런 메세지 없이, 자신을 얽매고 있던 수많은 관계자 단톡방들을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성★아님 월수금 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반짝단 _성★아_공식소통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성★아님이 방을 떠났습니다]
[레이블 1부장 성★아님이 단체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채팅방 관리자가 회원님을 내보냈습니다.]

성아는 무표정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내일 예약 시간이 잡혀 있던 미용실 담당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밀려 있던 외상값을 계좌이체로 전부 송금한 뒤,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미용실 단톡방마저 나왔다. 집 앞까지 부르면 언제든 오던 전담 택시기사에게도 ‘기사님, 이제 이용 안 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는 짧은 문자를 남겼다.

다음 차례는 개인 방송 채널이었다. 채널에 접속해 게시글과 영상들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삭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숏폼 플랫폼에는 '엑셀녀 성아 레전드 방송 모음', ‘성아 충격 방송 사고 캡처’라는 타이틀로 편집된 짤과 짧은 영상들이 이미 퍼져있었다. 자극적인 썸네일 속 성아의 얼굴과 몸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은 끝도 없었다.

막막함과 공포가 밀려왔다. 방송을 끌 때는 자신만의 결정이라 믿었지만, 이미 세상에 박제된 성아의 그림자들은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디지털 장례사를 찾아보던 성아는 마침내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분기마다 통장에 찍히던 수천만 원의 숫자가 이제는 제로(0)가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돌 전문샵에서 받던 헤어와 메이크업, 비싼 옷들, 비싼 스튜디오 대관비, 동료들 따라 사던 명품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의 줄기가 단번에 잘려 나간 것이었다.

현실감이 몰려오자 진짜 현실로 돌아가려는 듯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방의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참고 있는 식욕을 생각해냈다.
성아도 깡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지난 수년간 필사적으로 다이어트를 해왔었다. 프로틴 음료만 먹다가 심한 변비로 고생했었고, 순간 폭식을 하며 울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먹지만 성아가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그 고칼로리 음식들을 배달 앱으로 주문했다. 매운 로제 떡볶이와 치즈 감자튀김.

배달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성아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배달 비닐봉지를 뜯었다. 봉지가 열리자 짙은 고소한 기름향과 매콤달달한 로제 소스 향이 썰렁한 방 안에 순식간에 퍼졌다.


성아는 떡볶이를 한 입 가득 밀어 넣었다. 실컷 먹어서 이 짓눌리는 기분을 음식으로 채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씹어 넘기려 하자 토할 것만 같았다.

성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방송 화면에 뼈말라로 나오고자 주기적으로 맞았던 다이어트 주사, 마운자로의 효과가 아직 몸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성아는 속눈썹도 떼어낸 맨 얼굴에, 손톱도 비어있고, 온몸을 가리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  더 이상 화려한 조명 아래의 엑셀녀 성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아의 몸은 여전히 그 가혹했던 방송을 준비하듯 식욕을 거부하고 있었다. 화면은 꺼졌지만, 카메라 밖의 성아는 여전히 라이브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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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화: 성아가 양교성이었어?

"토마 오빠 10공수(1백만원) 감사합니다! 앙!"

조명이 뿜어내는 열기와 쿵쿵거리는 비트에 스튜디오 안이 후끈거렸다.
성아는 짧은 탑과 스커트 차림으로 화면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익숙하게 춤을 췄다. 1년 전만 해도 골반을 흔들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 감정이 마비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모니터 우측 상단에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엑셀표의 숫자 뿐이었다.

[8월 14일 후원 현황]
1위: 공주단_한강뷰 - 198
2위: 영차단_준수한사람 - 175
3위: 반짝단_마이나스 - 151

자정을 넘어가자 순위표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3위 '마이나스'의 숫자가 멈춰 서자, 성아는 한손으로 마이크를 들고 부르던 노래를 계속 부르며 다른 손으로는 테이블의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익숙한 테크닉이었다. 풀단(후원단) 메신저방에 긴급 메시지를 남기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큰손'들에게 빠르게 톡을 보냈다.

[너의 성아♡: 오빠, 오늘 너무 아슬아슬해요ㅠㅠ 우리 식데(식사데이트) 일정 잡기 전에 양기 한번 더 쏴 주세요💪💪]

[ 반짝단 여러분, 성아 기 한번 살려주세요~ 아, 나 지금 너무 걱정돼. 제발 순위 안떨어지게 도와줘.💙 우리 지금부터 가열차게 영끌할래?]

잠시 후, 꽃가루가 펑 터지며 큰손(고액후원자)이 등장했다. 그 큰손은 성아의 후원그룹인 반짝단 태그를 달았고, 성아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골반을 흔들었다.

성아는 큭 하며 헛웃음을 삼켰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드디어 통장 잔고가 7억 원을 돌파한다. 24살. 청춘을 담보로, 타인의 도파민과 욕망을 자양분 삼아 긁어모은 돈이었다. 처음 엑셀판에 들어오며 2년 안에 20억은 벌어서 나가리라 결심 했었다. 목표 금액을 채우면 미련없이 이 바닥을 떠나 조용히 과거를 숨기고 살아갈 계획을 세웠었다. 엑셀을 시작하고 한동안 큰돈이 들어오지 않았으나 어느순간 큰손이 들어오며 터!졌!다! 1년만에 번 7억원은 성아의 처음 계획을 잠시 접게 만들었다. 29살까지 주사맞고 다라이(외모) 가꾸며 100억은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창 라이브가 진행되는 도중, 정신없이 올라가던 채팅창에 눈에 띄는 문장 하나가 멈춰 섰다.

[나그네 : 성아님 혹시 중앙중학교 졸업한 양교성 아닌가요? 암만봐도 맞는데... 와 동창 중에 엑셀 하는 애가 있다니ㅋㅋㅋ]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 비트 소리도, 번쩍이는 조명도 순간 아득해졌다. 채팅창의 속도가 워낙 빨라 메시지는 금방 위로 올라갔지만, '중앙중학교'와 '양교성'이라는 여섯 글자는 성아의 머리 속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성아는 잠시 서있다 화면 밖으로 나왔다.

"성아, 왜 그래? 렉 걸림?"

"시그(시그니쳐 춤) 안 하냐? 큰손이 쏜 게 얼마인데 뭐해? 먹튀 또 나왔네 ㅋ"

모니터 너머 댓글러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성아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가명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하고 두꺼운 가면 뒤에 숨으면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믿었던 세계관이 단 몇글자의. 채팅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분이었다. 누군가 교성을 알아보았다. 나의 과거와, 내 진짜 이름과, 내가 한때 순수하게 웃었던 그 시절을 아는 누군가가 지금 이 미친 엑셀방송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슴을 튕길 때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부끄러움이 소멸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돈 뒤에 숨어있었을 뿐이었다.

성아는 화면 밖에서 레이블 진행자에게 카톡을 보내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방송 여기까지만 할게요.]

[뭐! 방송 중간에 빠지면 후원 몰수인거 알지? 성아야... 너 왜 그래? 잠깐 쉬고와.]

[저 그냥 갈게요...]

성아가 진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자 진행자는 성아가 몸이 안좋아 응급실 간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욕설 채팅이 쏟아졌다.

"야, 미쳤냐? 10억 판인데 지금 끔?"

"먹튀냐?"

"돌은뇬 또나왔네. 퇴출시키자!"


채팅창이 욕으로 도배되었고, 성아의 개인유튜브와 오픈 채팅방에도 불이 났다.
성아는 카톡 알림 소리를 껐다.
라이브 스튜디오 밖으로 동료 여캠(여성 카메라 방송인)들이 따라 나왔다.

"언니 진짜 가는 거야?"

"성아 너 이제 돌아오려면 한달은 욕받이 되야할걸?"

성아에게 조언인지 회유인지 말하는 엑셀여들을 쳐다보는데, 자신과 똑같아 보였다. 눈속 욕망마저 똑같았다.

성아는 조용히 뒤로 돌아 문을 열고 나갔다. 건물 밖은 어두웠다. 환한 조명과 카메라 필터 속에서 웃던 성아가, 두꺼운 화장을 한 벌건 눈의 양교성으로 어두운 길거리에 서 있었다.

성아는 핸드폰을 열어 통장 앱을 켰다. 찍혀 있는 숫자, 708,458,940원. 7억.

"끝이야."

성아는 읊조렸다. 7억을 모았다. 아마 실제 번 것은 30억 가까이 될 것이다. 레이블에서 수수료로 떼가고, 화장하고 다이어트 하고 주사맞고도 7억이나 남았다.

원래 계획이 조금 당겨진 것 뿐이었다.
이제 엑셀녀 성아를 지구상에서 완벽히 지워버려야 했다.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나의 엑셀방송 짤과 캡쳐사진, 쇼츠 영상들, 그리고 성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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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를 비롯한 클래식 명작들이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를 가졌음에도 문화적 완성작으로 추대되는 현상은 대중문화 예술계의 오랜 관행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흔히 '인간 보편의 서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나, 그 기저에는 남성 중심의 시각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성이 이야기 주변의 조연, 혹은 남성 주인공의 동기 부여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소품-도구로 소비되는 구조는 단순한 연출의 선택을 넘어, 남성 중심 사회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편으로 학습시켜 온 역사 그 자체다.


1. 남성 서사의 보편화와 여성의 부재

예술 매체에서 남성 중심적 시각이 보편성으로 둔갑하는 방식은 정교하다. 온갖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누아르나 서사극 장르에서 남성들의 권력 투쟁, 배신, 그리고 가부장적 유대는 곧 인간의 본성이나 시대의 비극으로 격상된다.

반면,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주체로서 서는 순간 작품은 종종 여성 영화라는 하위 범주로 격리되거나 예외적 장르로 취급받는다.

BTS를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가두려는 그래미상이 바로 예외적 장르로 나누는 것이다. BTS라는 대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 백인 주류와 세상의 반 이상인 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남성의 본질은 같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서사를 이끌지 않거나 철저히 배제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남성의 경험만이 인류의 표준 경험으로 주입되어 왔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를 해체하거나 고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조차도, 결국 그 권력의 주체와 객체 모두를 남성으로 설정함으로써 가부장적 문법을 재생산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2. 한국 남성은 백인 남성인가 한국 여성인가?

인종과 성별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한국 남성의 위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백인 중심의 서사 구조 안에서 아무리 잘난 한국 남성이라도 종종 타자화되거나 비주류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들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헤게모니에 비판적일지라도, 가부장제라는 더 넓은 틀 안에서는 백인 남성의 서사나 그들이 누리는 남성 성역에 무비판적으로 공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아시아 남성이 동시에 가부장적 남성 연대 속에서는 여성에 대한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모순을 보인다.

백인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가 구축한 남성성의 가치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을 겪으면서도 성별 차별의 수혜자는 되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가 발생한다. 이는 인종차별보다 성차별이 훨씬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내면화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3. 구조적 성차별

사회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남성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구조적 특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누리는 이점을 개인의 능력이나 자연스러운 질서로 환원한다.

기득권을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며, 일상과 제도로 이어진 실질적인 특권을 내려놓는 데는 극도로 저항한다. 유색 남성들이 인종차별은 역사적 단절이나 법적 철폐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사적 영역과 문화 깊숙이 침전되어 있어 훨씬 더 구조적이고 끈질김을 지닌다.


4. AI의 가부장성

인간 사회의 데이터로 학습된 인공지능 AI가 남성 기득권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AI는 인터넷에 축적된 방대한 역사적, 문화적 기록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이 기록의 상당 부분은 남성 중심의 시각과 언어로 채워져 있다.

AI는 객관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 사회의 편향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 거울을 보며 학습한 AI가 내놓는 답변은 내 주변 남성이 내놓을 것 같은 답변이다.

따라서 기술의 산물인 AI마저도 남성 중심적 서사를 표준값으로 설정하고, 여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은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이 기술이라는 외피를 쓰고 재생산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

완전한 성평등이 결국 인간에 의한 재생산의 중단과 맞물려 있다는 비관적 의견은, 인류의 생물학적•사회적 재생산 시스템 자체가 철저하게 여성의 착취와 통제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왔음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사회 구조는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을 무임금 혹은 저임금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구조적 착취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서사와 문화, 그리고 기술의 영역에서 성평등은 언제나 미완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평등은 단순히 남성 서사에 여성을 예외적으로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라, 서사의 기준과 권력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며, 그 시작은 남성 기득권의 철저한 박탈에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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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진짜 평범한 회사원이에요.
아 그냥 믿어줘!🙃]

# 1화 : 쉬운 길을 찾아서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똑똑하면서 성실하거나, 덜 똑똑하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윤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윤기는 어릴 적부터 단 하나만 믿었다.

'힘들게 살 필요가 있나?'

윤기는 중학생 시절부터 책상에 진득하니 앉아 공부 하는 대신, 공부잘하는 친구 옆자리에 앉아 답안지를 배꼈고, 수행평가는 인터넷에서 검색해 대충 만들어 냈다. 운동회에서는 숨차게 뛰는 대신 눈치껏 빠져나왔고, 팀 과제에서는 이름만 올리고 다른 팀원들과 같은 점수를 받았다.

윤기는 열심히 애쓰는 친구들을 비웃으며 말했다.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니냐?"

사람들은 윤기를 머리가 좋다고도 했고,  보통이 아니라고도 했다.

윤기는 과정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손해 보지 않는 것이었다.

윤기는 집에서 멀지않은 대학교를 다니다 초라한 성적표를 받고 졸업했고 당연하게도 취업은 쉽지 않았다.

윤기는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를 쓰는 것도 귀찮았다. 면접 준비도 왜 해야하는지 이해가 안됐다.

'뭘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월급이 고작 그거 주는데. '

그러던 어느 날 윤기는 한 인터넷 게시판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욕을 실컷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용도 였다. 기발한 욕설이나 논리에 댓글을 달고 추천을 누르고, 욕설하는 서로를 칭찬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곳은 현실보다 편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윤기를 찾지 않았지만, 게시판에서는 닉네임 YK1818 하나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쪽지가 도착했다.

'혹시 같이 일해볼 생각 있습니까?'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안은 진심이었다.

- 회원 관리.

- 댓글 참여 독려.

- 활동 실적 정리.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한 온라인 관리 업무였다.

그런데 성과에 따라 돈을 준다고 한다.

댓글만 다는 것이 아니라, 활동 실적에 따라 돈이 계산되는 구조였다.

취업 준비를 계속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였다.

윤기는 고민할 것도 없었다.

그렇게 윤기는 댓글 조작 단체 속에 들어가서 일하기 시작했다.

주변 누구도 몰랐다.

부모도.

친구도.

윤기는 스스로를 IT 관련 재택근무하는 사람 이라고 소개했다.

그 말이 일부 진짜라고 믿었다.



시간이 흘렀다.

게시판에서는 친구들의 자랑이 끝없이 올라왔다.

"여자친구랑 여행 다녀왔다."

"결혼 준비 중이다."

"이번 달 보너스 받았다."

윤기는 그런 친구들 계정의 포스팅들을 빠짐없이 천천히 꼼꼼히 읽었다.

현실의 자신과 비교할수록 마음속 어딘가 화가 치밀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결국 돈 때문이야. 여자들이 날 안좋아하는 건 여자들이 돈만 좋아하기 때문이야.'

처음에는 숫기없는 자신을 탓했으나. 조금씩 이상하게 이유를 갖다붙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잘못됐다고.

마음보다 조건을 본다고.

연애도 거래일 뿐이라고.

그 생각은 어느새 사람을 숫자로 바라보는 습관이 되었다.

정치인 누구누구 공격은 100만원 짜리이고, 또 다른 정치인은 50만원 짜리라서 쉽고, 유명인 누구는 수백만원이 들어가야 이미지에 타격이 간다는 가격표를 매기고 있었다.

게시판에 적당한 논리를 갖다붙인 혐오 글을 올리면 좋아요 를 많이 받았다. 윤기는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껴져서 기뻤다.

추천이 올라갔다.

공감 댓글이 달렸다.

윤기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기 시작했다.

"고생할 필요 없다."

현실에서는 흔히 보이는 평범한 청년.

인터넷에서는 여론을 움직이는 댓글 조직의 중간 관리자.

두 모습의 간격은 점점 멀어져갔다.

여보세요, 최윤기 팀장입니다

# 2화. 익명뒤 혐오


윤기는 이제 댓글 게시판 관리보다 오픈 채팅방에서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익명은 사람을 솔직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때로는 가장 추한 모습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게 했다.

처음에는 정치 경제 이야기가 주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대화는 점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투자.

해외여행.

여성.

채팅방내에 익명의 누군가는 불법으로 번 돈에 대해 마치 무용담처럼 이야기했고, 다른 누군가는 그 말에 하트 이모티콘으로 화답했다.

윤기는 처음엔 그저 구경만 했다.

'설마 저게 진짜겠어.'

하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백 번쯤 듣고 나니 의심은 무뎌졌다.

대신 호기심이 자리 잡았다.

현실에서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던 윤기는 온라인에서는 조금씩 존재감을 얻어 갔다.

회원들을 관리하고, 글을 정리하고, 댓글 참여를 독려할수록 사람들은 윤기를 "형님", "관리자님"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작은 호칭이 윤기에게는 매달 150만원의 입금보다 달콤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편의점 도시락과 커피로 끼니를 때우고,

투자한 코인은 올라갈 줄을 모르고,

술집 옆 테이블 여성에게 용기내어 명함을 건네줘봤지만 번번히 외면당했다.

친구들 SNS에는 여행 사진과 연애 이야기가 넘쳐났다.

윤기는 남의 SNS를 보다가 창을 닫았다.

'결국 돈이 있어야 사람 취급받는 거야.'



그 생각은 점점 사람을 보는 시선까지 바꾸기 시작했다.

친구는 없고 모두가 경쟁자이며,

사진 속 여성들은 윤기와 같은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채워 줄 대상으로만 보였다.

그는 자신의 열등감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세상이 여성들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믿었다.

온라인에서는 그런 생각을 혐오로 표현 할수록 박수를 받았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말들이,

익명의 공간에서는 수백 개의 추천으로 돌아왔다.

윤기는 그것을 공감이라고 착각했다.

사실은 서로의 편견을 확인해 주는 메아리였을 뿐이었다.

직접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신의 글에 달린 공감 숫자를 확인하며, 현실에서 잃어버린 자존감을 익명의 계정 속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윤기는 자신이 평범하다고 믿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악인이 아니라,

평범하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3화. 스카우트


온라인 게시판에서 활동한 지도 2년이 넘었다.

윤기는 이제 단순한 회원이 아니었다.

총괄 관리자에게서 가끔씩 개인 메시지가 왔고, 돈주고 산 불법 계정들을 정리해 팔아 넘기기도 했다.

어느 날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번 주말 오른자유당 행사가 있습니다. 청년 회원 자격으로 참석하실수 있으신가요?"

굳이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윤기도 묻지 않았다.

방문한 행사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정장을 입은 노인도 있었고, 야구모자를 눌러쓴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도 있었다.

간단히 참석자들을 소개하는 시간에 온라인에서만 보던 닉네임들이 들려왔다. 그 닉네임들이 실제 사람의 얼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윤기는 놀랐다.

게시판 화면 속에서 거칠게 욕하던 사람들이 현실에서는 서로 눈치를 보며 수줍게 악수를 하고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몇몇 참석자들은 글이 적힌 종이를 들고 거리로 나갔다.

윤기도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 섞였다.

사진을 찍고, 구호를 외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았다.

돌아오는 길.

중년의 간부 한 사람이 윤기를 불렀다.

"거기 청년."

"예?"

"말을 조리 있게 하네."

윤기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 네"

" 얼굴도 반듯하고"

"별 말씀을요"

간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청년 당원으로 활동해 볼 생각 없나?"

윤기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평생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취업 면접에서는 늘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고,

학교에서는 평범한 학생에 불과했다.

그런데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픽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다.

행사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기는 휴대전화를 꺼내 게시판에 접속했다.

닉네임 옆에는 관리자 표시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오른자유당이 스카우트한' 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이 생겼다.

그날 밤 윤기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드디어 누군가가 나의 가능성을 보고 나를 인정한 걸까.'

그러나 그것은 인정이라기보다 이용의 시작이었다.

윤기는 아직 그 차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자네, 나와 일해보지 않겠나?

# 4화. 거래


회의실은 조용했다.

당협위원장 장모혁은 서류를 덮고 윤재를 바라봤다.

"온라인 쪽 일을 오래 했다면서."

윤기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

"관리 정도는 할 줄 압니다."

"관리?"

"여론을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압니다."

장모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뒤에서 일보던 보좌관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제야 윤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전처럼은 안 됩니다."

"왜?"

"감시가 훨씬 심해졌습니다. 계정도 줄었고요. 티 나지 않게 움직이려면 사람도 더 필요합니다."

장모혁 위원장은 이 정도 돈을 줄 수 있다며 계산기로 찍었다.

실제 필요한 비용보다 훨씬 큰 숫자였다.

하지만 윤기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네, 이 정도는 있어야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장 위원장은 윤기가 계산기에 두드린 숫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네."

며칠 뒤 돈은 보좌관을 통해 현금으로 전달됐다.

윤기는 일부만 게시판 활동계정들에게 지급했고, 나머지는 현찰로 자기 방에 두었다.

윤기는 게시글의 방향을 정하고, 활동 시간을 정하고, 댓글이 서로 다른 사람인 것처럼 여론으로 생성되도록 지시했다.

며칠이 지나자 인터넷에는 비슷한 문장이 반복해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확인되지 않은 의혹은 '제보'가 되었고,

추측은 '논란'이 되었으며,

논란은 어느새 기사 제목으로 바뀌었다.

윤기는 기사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생각보다 쉽네.'

며칠 뒤 다시 호출이 왔다.

위원장은 이번에는 자리에 앉으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최윤기."

"예."

"생각보다 일을 잘하네."

윤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정치에는 관심 있나?"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없지는 않습니다.."

위원장은 책상 바로 위 의자에 앉아 문 옆에 서있는 윤기를 보며 찌이익 등을 기댔다.

"다음 지방선거에서 시의원 후보를 찾고 있어."

윤기의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평생 취업도 어려울 것 같았던 자신에게 공직이라는 단어가 들렸다.

하지만 위원장의 다음 말은 훨씬 낮은 목소리였다.

"정치는 능력만으로 되는 곳이 아니야."

침묵.

"도와줄 사람도, 준비도 필요하지."

윤기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척 고개만 끄덕였다.

회의실을 나서는 순간 윤기는 이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치도 결국 거래인가.'

그 질문에 답을 찾기도 전에,

윤기는 이미 거래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었다.

"정치하고 싶은가?"

# 5화. 끝장


윤기는 당협위원장과의 만남 이후 며칠 동안 계산기를 두드렸다.

시의원 공천헌금 1억 원은 없었다.

대신 자신에게는 온라인 조직이 있었다.

"현금은 어렵습니다. 대신 그만한 가치의 선거 지원은 가능합니다."

윤기는 그렇게 제안했고, 정치는 언제나 숫자로 움직인다는 듯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윤기는 이것을 기회라고 믿었다.

정주시 최연소 시의원.

평범한 삶을 건너뛰고 권력을 얻는 가장 빠른 길.

하지만 밤이 되면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경찰 조사를 받았던 일.

윤기는 오래 전에 끝난 사건이라고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기록은 남지 않을 거야.

아무도 모를 거야.'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최근에 범죄를 저질렀던 미성년자 피해자였다.

윤기는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받지 않았다.


다음날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시팔, 당신 끝이야. 사진 다 가지고 있어!"

분노에 찬 목소리였다.

윤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했다. 넌 끝이다."

전화는 짧게 끝났다.

윤기 손에서 휴대전화가 미끄러 떨어질 뻔했다.

며칠 뒤, 선거 준비를 하던 윤기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정주경찰서입니다. 사건 관련 조사를 위해 출석을 요청드립니다."

짧은 안내였다.

그 순간부터 윤기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조사실에 들어선 그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직업이 어떻게 됩니까?"

"회사원입니다."

그는 준비해 온 말만 반복했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몰랐다고. 오해라고.

사실과 다르다고.

경찰조사관은 무표정한 얼굴로 건조한 질문을 했다.

준비된 자료를 하나씩 확인하며 필요한 질문만 이어 갔다.

윤기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인터넷에서는 수없이 사람들을 속여 왔지만,

조사실에서는 말보다 기록이, 변명보다 증거가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조사실 문을 나서는 순간,

윤기는 더 이상 자신의 앞날을 계산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자신의 과거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경찰입니다."


# 6화. 니가 안고 가라

윤기는 새벽까지 휴대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마지막 희망처럼 지역위원장 장모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위원장님...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한참 침묵이 흘렀다.

"할만큼 했네, 나는. 더 뭘 말하는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제가... 조사받고 있습니다."

"왜 구속이 안됐는지 아나?"

"아, 위원장님께서 힘쓰신 거군요.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꼭 집행유예를 받아야 합니다. 한번만 힘써주십시오. 정주지검장이 후배잖습니까?

"그건 자네가 해결해야 할 일이지."

통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윤기는 그제야 깨달았다.

권력은 필요할 때 손을 내미는 것이 아니라,

위험해지는 순간 가장 먼저 손을 놓는다는 것을.

며칠 뒤 사건은 언론에 알려졌다.

미성년 피해자의 가족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피해자 아버지는 시의원 최윤기의 성범죄와 수사 지연 사실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호소했다. 어머니는 옆에서 악을 쓰고 울었다.

이 기자회견은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분노에 휩싸인 가족은 딸이자 피해자 아름의 사적인 자료까지 공개하려 했다.

가족이 토해내는 분노의 이유를 잞알지 못하는 아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분노에 취해 있는 얼굴이었다.

곁에서 함께 현직 시의원 최윤기를 향해 온갖 욕을 쏟아내는 어머니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지키려 하기보다,

사건을 세상에 증명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아름은 차갑게 생각했다.

' 왜 그랬냐고 묻는 사람이 없지?"

가해자는 자신의 존엄을 짓밟았고,

가족과 언론은 자존감 마저 증거로 소비하려 했다.

그날 기자들은 제목을 만들었고,

인터넷은 자극적으로 사건을 소비했다.

아름을 도와주겠다는 센터에서 온 사람들은 당장 아름의 몸을 검사해야한다고 다그쳤다.

어린 아름은 속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냥 뛰어나가고 싶었다.


한편 윤기는 조용한 집 안에서 컴퓨터를 켰다.

검색창에는 같은 단어만 반복해서 입력됐다.

'형사 전문 변호사'

'미성년 성범죄 사건 변호'

'구속 가능성'

검색 결과가 끝없이 이어졌지만,

어느 화면도 그의 두려움을 지워 주지는 못했다.

처음으로 윤기는 이제 곧 들이닥칠 자신의 미래이자 현실을 걱정했다.

성범죄 전문 변호사를 찾습니다

# 7화. 나랑 가자

아름은 책상 위에 놓인 폰을 한참 바라봤다.

그 아저씨가 연락하면 받으라고 준 중고 아이폰이었다.

아름은 한 때 그것만이 혼자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이 집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사는 길.

하지만 이제는 손에 쥐고 있는 그것을 부숴버리고만 싶었다.

쾅.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정은 거미줄처럼 갈라졌고, 아름는 가위를 세워 다시 폰을 찍었다.

상담센터 사람들이 또 찾아왔다.

응답이 없으니 그냥 돌아간 것 같다.

집에는 아무도 없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사건을 캐물었으며,

정작 아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제대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부모님 방 서랍들을 다 열어보고 보이는 대로 현금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집을 나섰다.

십 분쯤 걸으면 지하철역 4번 출구가 나온다.

근처 골목 안에는 늘 비슷한 얼굴들이 있다.

좋은 친구들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가끔 아름을 때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걔들은 아름에게

"네가 잘못했다."

"왜 그런 일을 당했냐."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전 길에서 친구가 된 이민도 그 자리에 있었다.

"괜찮아?"

아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따가 한잔해."

둘은 한동안 말없이 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이민은 돈을 쉽게 벌 수 있다는 이야기와 법을 피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름은 듣기만 했다.

그 순간, 아름은 자신이 또 다른 잘못된 길의 문 앞에 서 있다는 건지 그러면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경찰서와 센터 어른들이 아름을 피해자라고 불렀지만 그들의 눈은 텅비어 보였다.

멀리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눈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상처를 이용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길.

그리고 도망쳐온 길로 다시 돌아가는 길.

아직 어느 쪽으로 걸을지는 몰랐다.

아름 옆에 털썩 앉아 핸드폰을 보던 이민은 말했다.

"아름아, 너 나랑 그 센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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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릴로그

1.우주 정지 : 우주적 상전이, 우주의 상태가 한순간에 완전히 바뀌는 현상.

2.  테라 튜브 : 지구에서 우주까지 직통으로 올라가는 초거대 엘리베이터이자 우주에서 내려온 밧줄

3. 이벤트 호라이즌 : 사건의 지평선, 블랙홀의 되돌아올 수 없는 출입문.

4. 스파게티 화 : 블랙홀에 발부터 들어간다면, 발에 작용하는 중력이 머리에 작용하는 중력보다 수백만 배 강해서 몸이 가래떡이나 스파게티 면처럼 쭉 찢어지며 늘어나는 현상.

5. 화이트홀 : 무엇이든 다 뱉어내기만 하는 블랙홀의 반대말.

6. 엔트로피 무질서화 : 서서히 가만히 두면 무질서 해진다는 법칙.

7. 인드라 망 : 우주 모든 존재는 거대한 그물망처럼 서로를 비추며 촘촘히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

#제1화 : 우주정지

"승객 여러분의 탑승을 환영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우주정지」 예고일을 맞아, 에베레스트 테라튜브 베이스캠프 VIP 라운지는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대형 투명 홀로그램 스크린 속 아나운서가 격양된 목소리로 인산인해를 이룬 지상 베이스 캠프의 열기를 전하고 있다.

"시공간 파괴 거품이 대기권 진입을 눈앞에 둔 지금, 인류의 마지막 송출을 시작합니다.
지난 한 달간 우리는 공포와 부정, 그리고 혼란의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암흑에너지의 진공 붕괴가 관측되고, 우주의 팽창이 멈춘다는 장 박사의 계산이 증명되던 날, 그것이 인류의 완전한 종말인 줄로만 알았었죠.

그대로 였다면 바로 지금이 멸망이었을 것이었으나, 장 박사 연구팀이 남긴 위대한 계산이 가리킨 최종 목적지는 파멸이 아닌 재부팅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제 몇 초 뒤면 이곳의 엔트로피가 역전되고, 시공간이 한 점으로 무섭게 압축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압축의 끝에는 암흑에너지가 거대하게 튕겨 나가는 '우주 반등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간이 거꾸로 흐르며 백업된 우리의 모든 기억과 인류의 정보는, 다시 켜질 새 우주의 새벽에 고스란히 재조합될 것입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우리는 잠시 로그아웃할 뿐입니다.

우주 정지 전 인류의 마지막 방송을 마칩니다. 시청자 여러분, 다음 우주의 아침에 다시 뵙겠습니다."

광장 채광창 너머로는 해발 8,848미터의 만년설이, 그리고 그 최고봉을 짓누르듯 하늘 한복판으로 곧게 뻗어 올라간 거대한 탄소나노튜브 기둥인 '테라튜브'가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지상의 소음과 달리, 인당 1000억 원에 달하는 탑승권을 쥐고 온 자들만 모인 VIP 라운지는 클래식 음악과 함께 우아함이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단 다섯 명.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만, 그들은 이미 사회적 지위와 교양이라는 가면을 완벽하게 쓴 채 서로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2화 : 테라튜브

그들 중 한 명이 전 세계에 단 한 장 뿌려진 공짜 '로또', 즉 이벤트 당첨자라는 사실은 아직 수면 아래 묻혀 있었다.

"다들 명상 중이신가요? 분위기가 아주 아늑하고 좋네요. 제 직원들이 빠지니 이제 좀 진짜 같네요. 전 시동이라고 합니다."

가장 먼저 가식적인 친근함을 떨며 입을 연 것은 시동이었다. 그는 실크 셔츠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주스 컵을 가볍게 흔들며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과학계가 수학적으로 계산을 끝냈으니 걱정할 건 없겠죠. 「우주정지」라니, 참 환상적인 단어 아닙니까? 입자의 진동이 멈추는 동결이 아니라, 우주 전체의 시공간 격자가 딱 10분간 고정되는 현상이라니 말입니다. 팽창하던 고무풍선의 표면이 잠시 멈추는 것처럼 말이죠."

창밖을 보던 민하가 와인 잔을 들고 우아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저명한 과학자이자 이번 사건의 관측 책임자라는 직함에 걸맞게 지적이고 세련된 미소를 지었다.

"시동 씨의 비유가 아주 명쾌하시네요. 보충하자면 일종의 우주적 상전이 현상이죠. 물이 얼음이 될 때 순간적으로 상태가 고정되듯, 우주 전체의 무질서도인 엔트로피 증가가 제로가 되는 완벽한 대칭성의 순간이에요. 인류 역사상 가장 정돈된 우주를 보게 되는 셈이죠. 다들 이런 위대한 순간에 동행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박사님 말씀 들으니까 더 안심이 되네요."

핸드폰으로 셀카를 찍던 차영이 생긋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는 옷 매무새를 만지며 교양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사실 우주가 멈춘다고 해서 지구가 폭발하거나 쪼개지거나 할까 걱정이었는데, 그런데 지상과 우주 궤도를 잇는 이 안전한 테라튜브 안에서 우주의 정적을 관람한다니, 1000억이라는 비용이 전혀 아깝지 않네요. 여기 계신 품위있는 분들과 함께라 더 든든하고요."

차영의 과장된 칭찬에도 구석에 앉아 태블릿 PC만 들여다보던 준희는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과학이 입증한 안전이니까요. 공간의 가속도가 사라지는 것뿐이니, 우리 같은 일반 관람객들은 그저 우주가 주는 가장 고요한 10분을 즐기면 그만입니다. 서로 배려하면서 좋은 추억 만들었으면 좋겠네요."

준희는 철저히 자신을 낮추며 이 화목한 분위기에 동조하는 척했다. 지독한 개인주의자인 그에게 이 라운지의 가식은 훌륭한 방패막이였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며 마지막 탑승자인 영영이 들어왔다. 영영은 고급스러운 라운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헐렁한 후드티 차림에, 한 손에는 과자봉지를 들고 있었다.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천억짜리 라운지에 등장한 불청객. 민하는 본능적으로 저 무지해 보이는 자가 바로 그 이벤트 당첨자 일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민하는 불쾌감을 감추고, 세상에서 가장 자애로운 학자의 미소를 지으며 영영에게 다가갔다.

"여기 마지막 승객분이시군요. 환영해요. 혼자 오셨군요. 우주정지 현상이 아무래도 직관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죠? 겁먹지 말아요. 쉽게 말해서 온 우주가 잠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영영은 손가락에 묻은 과자가루를 옷에 슥슥 닦으며 해맑게 웃었다.

"아, 일시정지요? 만화 영화 멈추는 것처럼요? 좋네요! 근데 다들 옷 진짜 멋지게 입으셨다. 여기 주스 공짜예요? 엄청 맛있다."

영영의 격 없는 태도에 차영은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지만, 대외용 미소를 유지하며 시동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시동 씨, 저 영영 친구 참 순수해 보이죠? 우리 중에 그런 '행운의 주인공'이 섞여 있으니 격조 높은 라운지가 한층 더 생기 있어지네요."

"하하, 그렇고말고요. 자본의 가치를 떠나 모두가 평등하게 우주를 즐기는 모습, 참 아름답습니다."

시동 역시 거만한 속내를 감춘 채 적당히 웃으며 신사적인 매너를 유지했다.

"안내 말씀 드립니다."

그때 스피커에서 부드러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테라 튜브 01호기, 탑승 시작합니다. 우주정지 카운트다운 2시간 40분 전. 승객 여러분께서는 게이트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럼 우리 인류의 새 지평을 보러 가볼까요?"

시동이 앞장서며 매너 있게 문을 열었고, 민하와 차영은 서로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가식적인 몸짓을 취했다. 영영은 주스를 마시며 신나게 걸어 나갔고, 준희는 가장 뒤에서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웠다.

완벽한 교양과 배려로 포장된 5명의 사람들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향하는 그들만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순간, 솔직한 얼굴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




#3화 : 리셋 대 리부트

한 달 전, 우주 정지 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이 선포된 이후 세상은 기묘한 티켓 전쟁으로 번져나갔다. 이른바 종말의 마지막 10분을 우주 한복판에서 목격하려는 부유층의 움직임이었다.

그들은 지구와 우주 사이에서 지워지지 않을 ‘유일무이한 절대 목격자’가 되고 싶어했고, 우주선 객실은 그들이 갈망하는 최후의 우주쇼 관람석이 되었다. 자산가들의 탐욕으로 티켓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했고, 지상에 남겨진 대다수의 인류는 무력감과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들이 그토록 우주로 향하려 한 이유는 명확했다. 종말의 거품이 대기권을 강타할 때 지상에서는 극심한 기상 이변과 대기 비틀림으로 인해 하늘이 완전히 가려질 터였다. 반면 대기가 없는 외우주에서는 은하들이 마치 한 송이 꽃처럼 오그라들며 푸르게 타오르는 시공간의 종말을 그 어떤 가림막도 없이 날것 그대로 목격할 수 있었다.

지상의 진흙탕 속에서 평범한 인간들과 휩쓸려 수동적 두려움을 맞이하는 대신, 우주 한복판에서 파멸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내가 현 우주의 마지막 관찰자로서 임무를 완수했다'는 지독한 오만과 선민의식을 만족시키려는 계산이었다.

전격 발표. 에베레스트 상공과 궤도 정전기지를 초강력 탄소 나노튜브로 연결해 낸 독점 기업 테라튜브가 전 세계를 뒤흔든 파격적인 선언을 했다. 전 인류를 대상으로 우주 관람석 무료 티켓 이벤트를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황당한 자선 사업의 이면에는 테라튜브 이사회의 철저한 계산이 숨어 있었다. 직전에 열린 최고 극비 회의에서 사내 과학자들의 의견은 극단으로 갈렸다. 한 임원 겸 수석 과학자는 우주 정지가 말 그대로 잠시 멈춤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시공간이 일시적으로 동결되었다가 아무런 물리적 변화 없이 곧바로 다시 움직일 것이라는 의견이었고, 이사회의 다수가 이에 동조했다.

하지만 반대편에 선 또 다른 천체물리학자는 우주 정지가 단순한 정지가 아닌 재부팅이라고 반박했다. 몇 시간 뒤 우주가 완전히 리셋되면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기술과 자산, 자본 시스템이 통째로 무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고였다.

"부자들이 수천억에 산 좌석 바로 옆자리에 평범한 노동자, 청년을 앉힐 것이다. 리셋이 되든 재부팅이 되든, 우주는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우리 회사의 가치를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새기는 기회이다."

테라튜브의 젊은 야심가이자 대표인 케일럽 손은 이 팽팽한 두 가지 가설 모두를 회사의 이익으로 치환할 신의 한 수를 떠올렸다. 그것이 바로 무료 티켓 이벤트였다.

케일럽의 머릿속은 냉정했다. 만약 후자의 의견대로 우주가 완전히 리셋되어 파멸한다면 어차피 이판사판, 손해 볼 것은 없었다. 반대로 전자의 의견대로 우주가 잠시 멈췄다 다시 움직이는 재부팅에 성공한다면, 종말의 공포 속에서 전 인류에게 구원의 밧줄을 내려준 테라튜브는 구시대를 종료하고 새 시대를 지배할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초월적 기업이 될 터였다.

그는 밀려오는 푸른 시공간의 거품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확률은 반반. 하지만 어느 쪽이든 테라튜브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제4화 : 시공간의 늪

"마하 3 통과. 외부 기압 급강하 중.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바를 다시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차분한 인공지능 안내음과 달리, 승객들은 가면을 빨리도 벗었다. 탑승 캡슐 내부를 채운 기류는 폭발하기 직전의 화약고 같았다.

"이봐요, 민하 씨. 아까부터 무슨 무임승차자 타령입니까? 사람 불쾌하게."

시동이 특수 제작된 완충 시트에 몸을 묻은 채 셔츠깃을 매만지며 쏘아붙였다.

"난 내 영수증을 당장이라도 보여줄 수 있어. 기분 잡치게 하지 말고 당신 논문 자료나 마저 정리하시지."

"난 내 안전이 최우선이라 물어본 것뿐이에요."

민하가 손목의 스마트 패드를 톡톡 두드리며 차갑게 받아쳤다.

"천억짜리 정당한 티켓을 가진 승객들 사이에 규칙을 모르는 불청객이 섞여 있다면,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렸을 때 통제에 따르지 않을 확률이 가장 높으니까요."

"어머,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핸드폰을 보던 차영이 날카롭게 콧방귀를 꼈다.

"행색으로 사람 급 나누는 것들 치고 제대로 된 인간 못 봤어. 난 내 돈 내고 내 자리 앉았으니까 그 입 좀 다물어줘요. 멀미 나니까."

구석에 처박혀 태블릿 피시만 들여다보던 준희는 이 유치한 탐색전에 끼어들 가치도 없다는 듯,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들의 유치한 갈등을 비웃듯, 캡슐은 인간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무자비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들이 타고 있는 '테라 튜브'는 인류 공학의 한계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초거대 구조물이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시작해 대기권을 뚫고 지상 70킬로미터 위의 정적 궤도 플랫폼까지 수직으로 뻗어 있는 이 튜브는, 지구 자전의 원심력을 이용해 팽팽하게 당겨진 거대한 탄소나노튜브 레일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던 탑승객들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갈등을 집어삼킬 만큼 압도적인 물리적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기 때문이다.

둥근 캡슐의 사방을 둘러싼 강화 유리를 통해 보이는 하늘은 이미 푸른빛을 완전히 잃어가고 있었다. 짙은 남색을 거쳐 완벽한 암흑의 우주로 변해가는 경계선, 그 아래로 지구의 부드러운 곡선과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 산맥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지구가 발밑으로 실시간으로 멀어지는 시각적 충격은 공포에 가까웠다.

웅— 하는 둔탁한 소음과 함께 미세한 진동이 캡슐 바닥을 울렸다.

"가속도가 장난이 아니네…"

시동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테라튜브 내부의 가속 시스템은 일반 우주선처럼 연료를 태우는 화학 로켓이 아니었다. 레일 전체에 흐르는 초전도 자기장을 이용해 캡슐을 위로 밀어 올리는 자기부상 방식이었다. 가속할 때마다 캡슐 외벽의 유도 코일이 번쩍이며 희미한 푸른빛의 잔상을 허공에 남겼다. 눈을 돌릴 때마다 마하 3, 마하 4로 치솟는 속도계가 빨갛게 깜빡였다.

문제는 대기권의 경계에 도달하면서 시작됐다.

지상보다 공기가 극도로 희박해진 고도 5만 미터의 중간권. 캡슐이 대기의 저항을 뚫고 지나갈 때마다 외벽 마찰열로 인해 창밖의 풍경이 아지랑이처럼 붉게 일렁였다. 완벽하게 밀폐된 내부 공조 시스템 시스템 덕분에 산소는 유지되었지만, 기압 제어 밸브가 작동할 때마다 귀가 먹먹해지는 '퍽, 퍽' 하는 기계음이 고막을 때렸다.

"윽, 숨이 좀……."

차영이 결국 핸드폰을 떨어뜨린 채 가슴을 움켜쥐었다. 지구 중력을 거스르며 수직으로 가해지는 3G 이상의 중력가속도가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몸이 시트 속으로 깊숙이 파묻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호흡을 길게 하세요."

민하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콘솔 화면을 응시했다.

"대기 밀도가 낮아지면서 테라튜브 가이드레일의 장력 변화가 감지되고 있어요. 지구 자전축과 우주정지 전조 현상이 부딪히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때, 맨 뒷좌석에서 노트북 키보드를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던 준희가 차가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데이터가 이상합니다. 가이드 레일의 마찰 계수가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어요. 레일이 미세하게 비틀리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시동이 무거운 몸을 억지로 돌리며 준희를 쏘아보았다.

"안전성 테스트는 완벽하다고 보고받았어! 내가 여기 투자한 돈이 얼만데!"

"우주정지 라는 전대미문의 현상 앞에서는 당신 돈도, 최첨단 기술도 다 변수일 뿐입니다."

준희의 태블릿 화면에는 기하급수적으로 꺾이는 붉은색 경고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지상과 연결된 유일한 생명줄인 탄소 나노 튜브 기둥이, 우주 정지 직전의 미세한 시공간 왜곡에 반응해 마치 거대한 현악기 줄처럼 미세하게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 공포스러운 진동 속에서, 오직 영영만이 후드티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창문에 이마를 대고 있었다.

"우와…… 지구 진짜 예쁘다. 근데 저기 검은 구멍 같은 건 뭐예요? 저것도 원래 저기 있던 건가?"

영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 대기권 너머 새까만 우주의 한복판에 빛조차 흡수하는 완벽한 '검은 구체'가 일그러진 빛의 고리를 두른 채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테라튜브의 종착지인 궤도 플랫폼 근처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미시 블랙홀이었다.

아직 궤도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블랙홀의 찌그러진 사건의 지평선이 그들의 눈앞에 너무도 선명하게 다가와 있었다.

"말도 안 돼…… 저게 왜 벌써 보여?"

민하의 스마트 패드가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콰르릉!

캡슐 상단부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굉음이 나며 승객들의 몸이 허공으로 붕실 떠올랐다. 정적 궤도 플랫폼 진입과 동시에,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시공간의 늪이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5화 : 특이점 진입

"이게…… 정적 궤도 플랫폼?"

안전바를 풀고 가장 먼저 캡슐 밖으로 부유해 나온 차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암흑의 우주와 푸른 지구가 한눈에 들어왔지만, 플랫폼 내부의 분위기는 기괴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 상주하는 관리 직원 하나 없이, 차가운 금속 벽면과 홀로그램 안내판만이 백색광을 내뿜고 있었다.

"우주정지 카운트다운 완료까지 5분 남았습니다."

벽면의 시스템 음성이 에코처럼 울렸다. 민하는 곧바로 플랫폼 중앙의 메인 콘솔로 향했다. 그의 손가락이 키패드 위를 바쁘게 움직였다.

"이상하네. 왜 외부 관측 데이터가 리프레시되지 않지? 지상과의 통신망이 완전히 먹통이에요."

"거봐요, 내가 뭐랬습니까."

준희가 자신의 태블릿을 띄우며 다가왔다. 화면에는 기하급수적으로 꺾이는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통신이 끊긴 게 아니에요. 시공간의 격자가 굳어지면서 전자기파의 전달 속도가 지연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저겁니다."

준희가 가리킨 통유리창 바깥, 지구의 지평선 너머 어두운 우주 한구석에 빛조차 흡수하는 완벽한 '검은 구체'가 일그러진 빛의 고리를 두른 채 존재하고 있었다. 테라튜브 완공과 함께 관측용으로 지정된 마이크로 블랙홀이었다. 원래는 안전거리 궤도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이었다.

"저게 왜 이렇게 가깝게 보이지? 원래 저 위치였나?"

시동이 창가로 다가오며 미간을 눕혔다.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방울 맺혔다.

"이봐, 민하 씨. 당신 물리학자라며? 저거 안전한 거 맞아? 내가 여기 오려고 건설사에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데, 시스템이 이 따위야?"

"오만 떨지 마세요, 시동 씨."

민하가 고개를 번쩍 들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우주정지라는 전대미문의 현상 때문에 중력 균형이 깨진 거예요! 내 계산대로라면 저 미시 블랙홀의 사건의 지평선 반경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고 있어요. 지금 당장 캡슐로 돌아가서 하강해야 해요!"

"하강이라니? 이제 곧 우주가 멈추는 역사적 순간인데 내려가자고?"

차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난 내 인스타 라이브에 이거 무조건 띄워야 해! 100억짜리 타이틀이라고! 이제 와서 그냥 가자니, 당신이 내 손해배상 청구 감당할 수 있어?"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이 멍청한 새끼야!"

민하가 참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여기선 내가 전문가야! 다들 내 말대로 캡슐로 들어가!"

그때, 구석에서 홀로그램 광고판에 붙은 사은품 스티커를 만지작거리던 영영이 툭 한마디를 던졌다.

"근데…… 캡슐 문 이미 잠긴 것 같은데요?"

"뭐?"

모두의 시선이 그들이 타고 온 01호기 캡슐로 향했다. 테라튜브와 연결된 해치 도어의 인디케이터가 이미 붉은색 잠금잠금 상태로 고정되어 있었다. 시공간의 왜곡으로 인해 플랫폼의 메인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었다.

"우주정지 60초 전."

안내음과 동시에, 플랫폼 전체가 둔중한 진동과 함께 비틀리기 시작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준희의 손이 멈췄다. 화면에 뜬 메시지는 절망적이었다.

[경고: 이벤트 호라이즌 반경 내 진입 30초 전]

"말도 안 돼……."

준희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감정이 묻어났다. 방관자로 일관하던 그의 눈이 흔들렸다.

"우주가 정지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멈춘 공간을 향해 블랙홀의 중력이 급팽창하고 있어요. 튜브 상단부가 견디지 못하고 찢어질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야! 너 잘났다며! 방법 좀 내봐!"

차영이 시동의 멱살을 잡을 듯이 흔들어댔다. 시동은 패닉에 빠져 거만하던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너만 믿으라며! 민하 씨, 뭐라도 해봐!"

시동이 소리쳤지만, 민하 역시 메인 콘솔의 제어권이 완전히 상실된 것을 보며 절망하고 있었다.

"규칙대로…… 규칙대로만 작동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민하는 제어 불가능한 상황 앞에서 독선적인 통제력을 잃고 얼어붙었다.

"아하, 다들 되게 시끄럽네."

영영이 귀를 막으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다 끝난 것 같은데."

"우주정지 5, 4, 3, 2, 1."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테라튜브의 최상단 외벽이 종잇장처럼 뜯겨 나갔다. 진공의 우주로 플랫폼의 모든 공기와 파편이 빨려 들어가는 순간, 블랙홀의 주위를 감싸고 있던 비틀린 빛의 고리가 다섯 사람의 시야를 덮쳤다.

숨을 쉴 수 없는 암흑. 그리고 중력이 무한대가 되는 지점.
민하, 차영, 준희, 시동, 영영은 서로의 비명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이벤트 호라이즌의 경계를 넘어, 시공간이 완벽하게 붕괴된 4차원 너머의 5차원 영역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제6화: 산소와 물

"……하아, 윽!"

숨이 턱 막히는 감각에 민하가 눈을 번쩍 떴다.

사방은 칠흑 같은 암흑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서로의 형체는 흐릿한 백색 윤곽선처럼 눈에 들어왔다. 시공간이 찌그러진 특이점의 내부였다.

"여기…… 어디야? 나 살아있는 거야? 원래 블랙홀에 빠지면 국수 가닥처럼 찢어져 죽는 거 아니었어?"

차영이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팔다리를 더듬었다. 사지가 멀쩡히 붙어 있는 것에 스스로도 놀란 눈치였다. 민하가 제어 장치가 녹아버린 스마트 패드를 쥐어짜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찢어지지 않은 건 기적이에요! 아니, 우주정지 덕분이야. 공간 격자가 통째로 얼어붙은 상태에서 추락했기 때문에, 블랙홀의 중력이 우리 몸을 시차를 두고 찢어발기지 못한 거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동시에' 압착된 거라고. 하지만 안심하긴 일러요. 지금부터는 철저히 내 지시에 따라야 해!"

"지시? 하, 참나."

차영이 바닥을 차며 일어났다. 그가 히스테릭하게 허공을 더듬자, 손끝에서 희미한 빛의 입자들이 스파크처럼 튀며 작은 아메바 형태의 공간 주머니가 생성되었다. 그 안에 플랫폼에서 빨려 들어온 비상용 산소 캔과 비상 식량 몇 개가 대롱대롱 떠올랐다.

"필수품이다!"

시동의 눈이 번뜩였다.

"만지지 마!"

민하가 경고했지만, 차영이 더 빨랐다. 차영은 이기적인 본능으로 산소 캔 세 개를 품에 와락 안았다.

"이건 내가 먼저 잡았어! 솔직히 여기 있는 사람들, 밖에서 내 급에도 안 맞는 인간들이잖아. 내가 왜 나눠줘야 해?"

민하가 다가가 차영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독점하지 마, 차영! 산소는 한정되어 있고 공간은 닫혔어. 자원을 효율적으로 쓰려면, 우선 이 중에 있는 '무임승차자'부터 가려내야 해."

"무임승차자?"

시동이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그래."

민하가 얼음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훑었다.

"여기 산소는 제한되어 있어요. 1000억을 내고 정당하게 탑승한 우리 4명과 달리, 전 세계 로또 이벤트로 공짜 표를 얻어 탄 인간이 이 중에 섞여 있잖아. 솔직히 그 행운권 양아치는 생존 자원 배분에서 후순위로 밀려야 공평한 것 아닌가? 누구야? 당장 밝혀."

"그거 아주 자본주의적으로 합당한 말이군."

시동이 셔츠깃을 털며 끼어들었다.

"대가는 지불한 만큼 받는 법이지. 난 테라튜브 건설사에 수천억을 투자한 사람이야. 그러므로 저 산소들은 내 돈으로 산 것이란 말이야. 자, 공짜로 탄 인간 누구야? 저기 구석에 박혀서 말도 안 섞는 저 새끼인가?"

시동의 손가락이 준희를 향했다.
준희는 무릎을 안은 채 고개도 들지 않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시공간이 고정되어 갇힌 마당에 1000억이든 공짜든 무슨 상관이야? 쓸데없이 범인 찾기 하면서 에너지 낭비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둬. 난 안 낄테니까."

"방관하는 거 보니 저 새끼가 범인이네!"

차영이 악을 썼다.

"돈도 없는 게 우리 사이에 껴서 우주 구경 하려다가 이 사단을 낸 거잖아! 산소 아까우니까 저 인간한테는 한 모금도 주지 마!"

"이봐, 다들 나만 빼고 재밌는 얘기 하네."

그때 영영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비상식량 주머니 속에서 빼꼼 내밀고 나온 젤리 하나를 툭 채서 입에 물었다. 그는 이 기괴한 공간이 무섭지도 않은지, 마치 놀이터에 온 아이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집었다.

"야! 그거 내 거야! 뱉어!"

차영이 빼악 소리를 질렀다.

"행색을 보니 너이구만? 1000억은 커녕 100만 원도 없어 보이는 후드티 조각이 어디서 남의 자원에 손을 대? 네가 그 공짜 표지?"

"내가 공짜 표인지 아닌지 니가 어떻게 알아?"

영영이 맹하게 웃었다.

"혹시 알아? 여기 있는 사람 중에 겉으로는 제일 폼 잡으면서 속으로는 '돈 굳었다, 개꿀!' 하고 외치는 진짜 사기꾼이 숨어있을지? 다들 돈 냈다는 영수증 여기 까놓고 증명할 수 있어?"

영영의 뼈 있는 말에 순간 공간이 얼어붙었다. 시동과 차영의 눈이 거칠게 떨렸고, 서로 산소 캔을 더 쥐기 위해 육탄전을 벌이려는 찰나...

"...잠깐만."

준희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목소리에 기묘한 이질감이 섞여 있었다.

"다들 조용히 해봐.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저 새끼 찔리니까 헛소리를……."

"아니, 내 말 좀 들어봐!"

준희가 차영의 말을 사납게 끊었다.

"우리 지금 몇 분째 소리를 지르고 싸우고 있지? 이벤트 호라이즌을 넘어온 지 최소 5분은 지났어."

민하가 본능적으로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폐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갈비뼈는 고정되어 있었고, 기동해야 할 횡격막은 미동조차 없었다.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고 박치기를 하며 싸우는 동안, 그 누구도 '숨'을 쉬지 않았다. 아니, 숨을 쉴 필요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민하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우주정지로 시공간 격자가 고정되면서…우리 몸의 생체 대사도 완전히 고정된 거야. 세포가 산소를 소비하지 않아요. 이산화탄소도 만들어내지 않고 있어."

차영이 품에 안고 있던 산소 캔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000억짜리 목숨줄이라고 생각하며 추악하게 움켜쥐었던 철통들이, 이 정지된 세계에서는 한낱 무겁고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럼…… 기를 쓰고 범인을 찾을 이유도, 이 장난감 같은 산소통을 가질 이유도 없었던 거네?"


영영이 배를 잡고 킥킥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형태는 유지했으나 생물학적 생명 활동이 멈춰버린 기괴한 상태. 산소 없이도 살아 움직이는 자신들의 현실을 깨닫는 순간, 방금 전까지 공간을 채웠던 추악한 탐욕이 허무하고 기괴한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제7화 : 특이점 내부

"산소가 필요 없다고? 하! 그딴 비과학적인 소리가 어디 있어!"

시동이 거칠게 실소를 터뜨리며 품에 안았던 산소 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텅- 하고 울려야 할 금속음은 시공간이 찌그러진 암흑 속에서 기괴하게 먹혀버렸다. 그는 자신의 존재 증명이자 힘의 원천이었던 '자본과 자원'이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시동은 허공에 가상의 수식을 그리며 엄숙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운영하던 양자 컴퓨터 연구소의 데이터에 따르면, 특이점 내부에서도 질량과 에너지는 보존되어야 해. 다들 내 지식과 분석이 유일한 정답이니 토 달지 말고 내 통제를 따라야 해! 내 자산의 가치가 곧 내 지능의 증명이야!"

"하! 어디서 오만을 떨어?"

민하가 실소를 터뜨리며 시동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깟 거시 물리학 공식은 여기선 쓰레기나 다름없어요. 차원 간 제어권을 잡으려면 양자 얽힘과 엔트로피 역전 현상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여기선 내가 유일한 전문가니 내 통제를 따르란 말이야!"

자신만이 정답을 쥐고 있다고 믿는 시동의 독단과, 학문적 통제력만이 구원이라 믿는 민하의 강압이 날카롭게 부딪혔다.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던 차영이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둘 다 잘났네, 정말! 준희, 저 인간들 좀 말려봐. 진짜 머리 아파 죽겠네!"

구석에 완전히 파묻혀 있던 준희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대꾸했다.

"말려서 뭐 합니까? 어차피 저 두 사람의 오만은 현실의 계급장을 여기로 끌고 들어온 부작용일 뿐이야. 서로 잘났다고 물어뜯다 고사하든 말든, 내버려 둬. 난 안 낀다고."

타인의 추악한 생존욕에 오염되지 않겠다는, 지독하리만치 냉소적인 방관이자 고립 선언이었다.

그때, 논리와 이성 따윈 안중에도 없는 영영이 공포와 답답함이라는 원초적 본능에 사로잡혀 허공에 떠 있던 에너지 바들을 향해 무모하게 몸을 날렸다.

"야! 그거 내 거라니까!"

차영이 발악하며 영영을 저지하려 몸을 던졌고, 민하와 시동까지 엉겨 붙어 흩어지는 자원들을 낚아채려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민하의 강압, 차영의 이기심, 시동의 독점욕, 영영의 통제 불능한 본능이 암흑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부딪히는 바로 그 순간, 시동의 손이 영영의 어깨를 밀치려다 그대로 스르륵 '통과'해 버렸다. 물리적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악! 내 손! 내 손이 왜 이래!"

시동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바닥에 떨어졌던 산소 캔의 금속 외벽이 그의 손가락 피부 속으로 진흙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하지만 더 기괴한 일은 그다음에 일어났다. 정작 비명을 지른 시동이 아니라, 저만치 떨어져 있던 차영이 자신의 손을 감싸 쥐며 바닥을 뒹굴었다. 두 사람의 손가락 끝이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동시에 하얗게 변색되어 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물리적 전이 현상이지? 말도 안 돼."

민하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스마트 패드를 켜려 했으나, 패드의 액정 화면은 이미 그녀의 손바닥 피부와 녹아붙어 하나의 기괴한 생체 조직처럼 변해 있었다. 차영이 민하를 향해 욕설을 뱉는 순간, 민하의 입안에서 쇠비린내가 진하게 풍겼고 혀가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 제발 꺼져!"

준희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과 코에서 희미한 백색 빛의 입자들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시동 당신의 그 오만한 목소리, 민하 당신의 그 숨 막히는 통제욕이 내 뇌세포를 갉아먹고 있어! 왜 당신들 생각이 내 머릿속에서 실시간으로 울리는 거냐고! 난 당신들 싸움에 끼기 싫단 말이야!"

철저히 방관자로 남으려 했던 준희의 장벽마저 처참히 허물어졌다. 시동이 느끼는 탐욕스러운 갈증이 준희의 목을 조여왔고, 차영의 이기적인 공포가 준희의 심장을 쥐어짜고 있었다.

"와, 이거 진짜 신기하다."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영영만이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영영이 손가락을 구부리자, 시동과 민하의 손가락이 동시에 같은 각도로 구부러졌다.

"저기요. 여러분, 우리 지금 서로 다른 사람인 척 엄청 싸우고 있잖아. 근데 나 지금 저 사람이 무슨 생각 하는지 다 보인다? 되게 외로워했구나. 내 동생처럼."

"그 입 다물어! 비지성적인 헛소리 하지 마!"

민하가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차영의 목소리와 겹쳐져 기괴한 이중창처럼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들은 공간의 이상 현상 때문에 감각이 일시적으로 동기화되고 있다고 착각했다.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고, 탓하고, 고립시키려 발버둥 칠수록 감각의 혼선은 촉각을 넘어 의식과 기억의 영역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암흑의 특이점 내부에서, 5개의 독립된 자아라는 견고한 성벽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제8화 : 인드라망


"내 생각이…… 왜 저 자식 입에서 나오는 거지?"

시동이 핏발 선 눈으로 준희를 노려보며 더듬거렸다. 시동이 머릿속으로 지상에 두고 온 자산과 성공의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준희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그 내밀한 액수와 사치들을 정확히 읊조렸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 생각을 읽는 건 아니야."

준희가 피학적인 실소를 터뜨렸다.

"그냥 내 머릿속에 당신의 그 천박한 탐욕이 들어차 있는 거라고. 내 뇌가, 당신 뇌와…… 완전히 유착됐어."

공간은 이제 완전히 형태를 잃어가고 있었다. 암흑의 사방 벽면은 끈적한 유체처럼 흘러내렸고, 민하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다섯 개로 분리된 형태가 아니었다. 뭉툭하게 덩어리진 반투명한 물질이 되어 흐물거렸다. 시동의 무릎 아래는 이미 차영의 허리춤과 완벽하게 유착되어,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옷감과 피부 조직이 마치 열에 녹은 플라스틱처럼 한데 엉겨 붙어 있었다.

"우린 처음부터 여기에 개별적으로 들어온 게 아니었어."

시동이 마침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 오만의 빛이 꺼지고 지독한 경외감이 번져나갔다.

"이벤트 호라이즌을 통과하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린 이미 분자 단위로 쪼개졌던 거야. 그리고 지금, 단 하나의 '거대한 단일 분자 덩어리'로 다시 합쳐진 거야. 물리적으로 우린 이미 한 몸이라고!"

"말도 안 돼! 그럼 지금 우리가 서로를 보고 얘기하는 건 뭔데!"

민하가 현실을 부정하며 소리쳤다.

"의식의 잔상이지."

어둠 속에서 영영이 융합된 살덩어리 위로 자신의 손을 얹었다. 영영의 손 역시 그들의 몸속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스며들었다.

"여러 사람의 마음이 한 그릇에 갑자기 담기니까, 서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거야. 꼭 대가리가 다섯 개 달린 괴물처럼."

그들이 겪은 감각의 혼선은 물리 법칙의 결과였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물질이었고, 그 안에서 여전히 자아가 충돌하며 대립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동의 거부 반응은 덩어리 내부에 극심한 염증을 유발했고, 의식의 충돌은 물리적인 고통이 되어 정신을 찢어발겼다.

그러나 그 극심한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이한 자각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5명의 기억과 감정이 하나의 댐이 무너지듯 서로에게 완벽하게 흘러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깨달았다. 겉보기에는 자산가, 학자, 연예인, 개인주의자, 부적응자라는 전혀 다른 '인종'처럼 서로를 급 나누고 밀어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이 뱉어내던 모든 말과 비명은 완벽하게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시동이 가졌던 성공 뒤의 지독한 공허함은, 차영이 명품과 외모 뒤에 숨겨두었던 결핍과 정확히 같은 크기였다. 민하가 최고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느꼈던 숨 막히는 압박감은, 준희가 타인과 엮이기 싫어 스스로를 방에 가두었던 고독의 무게와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지상에서 겪어온 삶의 궤적은 달랐으나, 인간이라는 종으로서 태어나며 느꼈던 최초의 울음과, 다가올 소멸에 대해 느끼는 근원적인 공포는 완벽하게 복사판처럼 똑같았다. '나만 특별하다'고 외치던 오만과 이기심의 성벽들이 허물어지자, 그 안에는 똑같이 나약하고 두려움에 떠는 하나의 '인간'만이 남아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인드라망의 거울처럼, 타인의 추악함이 곧 나의 추악함이었고, 타인의 슬픔이 곧 나의 슬픔이었다. '나'를 지키려는 고집을 버리고 '우리'라는 전체를 받아들이는 순간, 지독했던 통증이 가라앉았다. 민하의 통제욕도, 차영의 이기심도, 시동의 오만도, 준희의 방관도 하나의 거대한 동질성의 흐름 속으로 부드럽게 녹아들었다.

다섯 명의 파편화된 자아는 마침내 완벽한 통합을 이루며 소멸했다.



# 제9화 : 화이트홀

암흑 속을 채우던 인간들의 비명과 소음은 완전히 사라졌다.

민하, 차영, 준희, 시동, 영영이라는 다섯 개의 이름과 배경, 은행 잔고, 학문적 성취 같은 경계선들은 우주의 거대한 용광로 안에서 완벽하게 기화되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우주의 순리를 완전히 이해한 '단 하나의 완성된 의식'이었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분별심 속에 살았구나.'

통합된 의식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인간은 스스로를 자연과 분리된 특별한 존재로 여겼지만, 본질적으로는 고정된 실체가 없는 무아의 상태이자 우주의 한 조각에 불과했다. '나'라는 집착을 내려놓는 순간, 고통 역시 함께 소멸했다.

그 자각이 완성된 순간, 압축될 대로 압축되어 단 하나의 점이 되었던 분자 덩어리 내부에서 물리 법칙의 거대한 뒤틀림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파괴하는 블랙홀의 수축 에너지가 임계점에 도달하자, 전 우주적인 법칙의 반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엔트로피의 역전이었다.

가만히 두면 엉망진창으로 흩어지고 붕괴해야 할 우주의 에너지가, 정지된 시공간과 통합된 의식의 완벽한 대칭성 속에서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무질서를 향해 가던 시간이 되돌아가듯, 닫혀 있던 시공간의 격자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엎질러진 물이 다시 잔으로 모여들고, 녹아내린 얼음이 다시 가장 단단한 결정으로 구조를 갖추듯, 우주의 에너지가 극도의 질서를 향해 대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쿠구구구궁—!

소리 없는 폭발이 어둠을 찢었다. 빛조차 빠져나갈 수 없다던 사건의 지평선 반대편, 수학적 가설로만 존재하던 화이트홀의 문이 활짝 열렸다. 엔트로피 역전이 만들어낸 눈이 멀 것 같은 순백의 광휘가 암흑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방출한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도 아니었으나 모두의 의지였다.

한 덩어리로 뭉쳐 있던 분자들은 화이트홀의 무한히 밀어내는 힘에 밀려 다시 우주 공간으로 세차게 뿜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처럼 추악하게 부딪히던 살점과 뼈를 가진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은하수의 강물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성간 물질이자, 가장 순수하고 미세한 우주의 입자 형태였다. 5명의 의식이 융합된 입자 무리는 테라튜브가 무너져 내린 지구의 궤도를 지나, 광활한 성간 우주로 퍼져 나갔다.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다시 바다가 되며 끊임없이 순환하듯, 그들의 원자는 우주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로 끊임없이 생멸을 반복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주적 차원의 윤회이자, 색이 공이 되고 공이 다시 색이 되는 대자연의 법도였다.

그들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타인을 밀어내고 고립되려 발버둥 치던 집착의 굴레에서 벗어나, 우주와 자연, 그리고 거대한 질서의 가장 완벽한 부속품으로.

푸른 지구의 지평선 위로, 화이트홀이 뿜어낸 순백의 입자들이 오로라처럼 아름다운 띠를 그리며 서서히 흩어져 갔다. 우주는 다시 소리 없이 팽창하기 시작했고, 그 위대한 흐름 속에 '그들'이었던 우주의 먼지들은 영원한 적멸과 평온을 맞이했다.



에필로그

지상에 남은 인류는 테라 튜브가 무너지고 우주가 다시 흐르는 과정을 보며, 이를 단순한 천체 물리학적 현상 - 블랙홀의 폭발과 화이트홀의 출현 으로만 기록한다.

인간이 겪은 영혼의 대립과 융합이라는 거대한 서사도, 거대한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저 자연스러운 물질의 순환 주기 중 하나일 뿐이라는 냉정한 대조를 보여준다.

서로 대립하던 다섯 인물의 왜곡된 자아는 완전히 소멸했지만, 그들의 정신적 속성은 화이트홀이 뿜어낸 성운 속에서 우주를 구성하는 물리적 기능으로 완벽하게 치환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을 집단, 지구, 자연으로부터 분리해 특별한 존재로 격상시키려 발버둥 치지만, 본질적으로는 우주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낱 부속품이자 먼지 더미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확인한다.

인간이 세운 오만의 탑은 부서졌지만, 자아를 버리고 물질로서 우주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가장 완벽하고 새로운 별로 빛나는 영원한 존재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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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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