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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폭력 사건보도 권고기준 1.0」 5대 원칙 및 행동강령

1.여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조명하는 보도의 원칙
여성폭력을 개인의 일탈로만 보지 않고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하여 보도합니다.
  여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통념과 편견을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사건 발생의 사회적 맥락과 제도적 환경을 살피고 예방과 제도 개선에 주목하여 보도하며, 사건 이후의 회복 과정 및 구제 지원 정보를 함께 제공합니다.

2.정보의 정확성 확인 및 신속한 사후 조치의 원칙
  사실관계가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나 다른 매체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확인 없이 재인용하는 보도를 해서는 안 되며, 객관적인 검증 절차를 마련하여 이를 거친 정확한 정보만을 전달합니다.
  오보가 발생하거나 보도로 인해 인권침해가 발생한 경우, 사안에 따라 기사 수정·정정보도·삭제 등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하고, 유사한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체계적인 사실 검증 및 사후대응 절차를 마련합니다.
  판결 또는 수사 결과에 중대한 변화가 있는 경우, 새롭게 확인되거나 변경된 사실관계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후속 보도에 반영합니다.

3.선정적·자극적 보도 금지의 원칙
  선정적·자극적 제목 배치, 묘사, 시각 자료 사용을 지양하고, 정확한 법적·객관적 용어를 사용하여 사건의 심각성을 엄정하게 보도합니다.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신상이나 사적관계를 과도하게 부각하지 않고, 범죄사실을 중심으로 보도합니다.
  가해방법의 자세한 묘사나 자극적인 시각 자료 사용을 지양하며, 보도 시 절제된 표현을 사용합니다.
4.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 방지 책임의 원칙
피해자 보호와 공익성을 고려하여 정보의 공개 여부와 범위, 보도 방식과 시점 등을 신중하게 판단합니다.
  취재·제작·보도 전 과정에서 피해자 등의 신원이 드러나거나 특정될 수 있는 직·간접적인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개인정보와 사생활을 보호합니다.
  경쟁적인 취재·보도 과정에서 피해 회복을 저해하거나 피해자에게 부당한 낙인을 강화하는 등 2차 피해를 초래할 수 있는 보도는 지양합니다.

5.디지털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관리 책임 준수의 원칙
  디지털 성범죄의 제작·보도 시 재현물을 사용하지 않으며, 제작 방법·생성 경로 등 자세한 기술 정보를 보도하지 않습니다.
  제목과 본문에서 피해 영상물이나 디지털 성착취물을 특정하거나 검색을 용이하게 하는 명칭, 키워드, 파일명 등을 사용하는 것은 2차 피해를 초래할 수 있으므로 사용에 유의합니다.
  보도기사 댓글창의 관리 체계를 구축하여 무분별한 2차 피해를 방지하고, 피해자의 잊혀질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기사와 관련된 디지털 기록에 대한 사후 관리 체계를 마련하여 이행합니다.


성평등가족부가 한국기자협회와 '여성폭력 사건보도 권고기준 1.0'을 마련해 여성폭력 사건 보도 과정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를 예방하고 책임 있는 보도 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추진한 후속 조치이다.

2026년 7월부터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따라 처음 마련된 이번 권고기준은 여성폭력 사건 보도 시 피해자 보호와 인권 존중을 위한 기본 원칙과 권고 사항을 담고 있다.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의 연구를 바탕으로 현직 기자들의 자문과 지난 6월 개최된 '더 나은 여성폭력 사건보도를 위해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포럼에서 제시된 언론계, 전문가 의견도 반영됐다.

권고기준의 5대 원칙은
1. 여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조명하는 보도의 원칙
2. 정보의 정확성 및 신속한 사후 조치의 원칙
3. 선정적·자극적 보도 금지의 원칙
4. 피해자 보호 및 2차 피해 방지 책임의 원칙
5. 디지털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관리 책임 준수의 원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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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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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설거지 거지 거지 거지>
시모가 된 첫 추석.아들 내외가 다녀간 뒤 식탁에는 빈 접시만 남았다. 시모는 설거지통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싱크대로 눈물이 떨어졌다.
친구와 긴 통화를 한 뒤, 시모는 며느리를 불러 앉혔다. 지난 추석의 서운함을 쏟아내고, 며느리에게 며느리 노릇을 가르쳤다.
생일날 아침, 며느리가 차린 생일상이 놓였다. 원하던 선물도 받았다. 저녁에는 외식까지 했다. 시모는 비로소 대접받는 사람이 된 듯했다.
며칠 뒤, 버스 안에서 옆자리 젊은 여자가 창문을 열었다. 시모가 닫으라고 버럭 하자 그 여자가 창문을 닫았다.시모의 어깨가 묘하게 펴졌다.
동 주민센터 라인댄스반에 등록한 지 일주일 만에 축제 봉사원으로 뽑혔다. 비교적 젊고 건강하며 여자라는 이유였다.
축제 날, 시모는 낯선 좁은 주방에서 국수를 삶았다. 늙은 남자들은 식당에 모여 앉아 국수를 먹었고, 늙은 여자들은 주방과 식당 사이를 오갔다. 잠시 후 음악이 흘렀다. 라인댄스반 늙은 여자들이 무대에서 늙은 남자들을 향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들 역시 국물을 턱에 흘리며 국수를 먹고 있는 늙은 남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나이였다.
시모는 문득 자신의 젊은 날이 떠올랐다. 평생 밥을 차리고, 상을 치우고, 남은 음식을 먹고, 남편의 가족들을 돌보며 살아온 날들. 그때도 많이 서러웠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그  서러움을 며느리에게 물려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음악이 쿵쿵 울리는 잔치방 옆 주방 설거지통에 그릇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시모는 물 속에 손을 담근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떨어졌다. 그제야 며느리에게 미안했다. 평생 여자에게만 설거지를 시켜온 세상이 미안해졌다. 며느리에게까지 같은 앞치마를 둘러준 자신이 가장 미웠다.
며느리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우리 ○○아, 지난번에 고생시켜서 미안하구나. 사랑한다."


이 이야기 속의 문제는 “여성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라는 이분법보다, 여성이 가부장적 질서의 유지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가를 봐야한다. 결론적으로 가부장제에 협력한다고 해서 여성이 그 질서의 동등한 주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 여성이 남성 가부장제의 부역자가 되는 과정
여기서 부역자는 여성을 비난하기 위한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의 생존, 보상, 안전을 위해 가부장적 규칙을 받아들이고 다른 여성에게도 그 규칙을 강요하는 위치를 뜻한다.
• 순응 단계
원래 남자가 결정하는 것이라며 남성의 권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한다.
• 내면화 단계
여자는 원래 이래야 돼 라며 외부의 규범을 자기 판단처럼 받아들인다.
• 감시 단계
다른 여성의 옷차림, 연애, 성적 행동을 평가하며 가부장적 규범의 감시자가 된다.       
• 재생산 단계
딸 후배 며느리 등에게 같은 규칙을 요구한다. 다음 세대에 규범을 전달한다.            
• 징계 단계 
규범을 어긴 여성을 비난하거나 배제한다. 남성이 하지 않아도 되는 통제를 여성이 대신 수행한다.
• 보상 추구 단계
나는 저런 여자들과 달라서 인정받을만 하다며 여성 간 경쟁을 통해 기존 질서에 편입한다.
• 정당화 단계
나도 참고 살았으니 너도 참아야지라며 자신의 희생을 제도의 정당성으로 전환한다.
• 대리 권력 단계
남성에게 인정받은 지위를 이용해 다른 여성을 통제하며 제한적인 권력을 얻는 대신 구조를 유지한다.
단순히 사회 이데올로기 남성가부장적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부역이 아니라 다른 여성에게 강요하는 순간이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따르는 규칙을 다른 여성도 따라야 하는 규칙으로 바꾸는 순간이 부역이다.
여성들이 성평등을 원할 때, 가장 처음 만나는 저항이 거대 가부장제가 아닌 여성 부역자들이다. 그들은구조에 대한 순응을 넘어 구조의 재생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부역자들이다.

보잘것 없는 보상에 좌절
하지만 여성이 여성을 배반하고 받는 상은 그다지 좋은 것도 아니다. 부역자들은 절망한다. 협력했는데 권력이 오지 않아서.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아주 복잡한 거래를 제안한다. 규칙을 따르면 튿별히 여성이지만 안전과 인정과 지위를 준다고 유인한다. 그래서 여성은 실제로 그 규칙을 열심히 수행한다. 열녀가 되고, 칠거지악을 되세기며 단계들를 착착 밟아간다. 하지만 어느 순간 한계를 깨닫는다.
아무리 잘 따라도 최종 결정권은 자신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 자기 인생조차 자기가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
남편의 직업이 가족의 생활을 결정하고, 남편의 경제력이 가족의 지위를 결정하고, 남편의 가족이 중요한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남성 중심 조직에서 자신의 공로가 남성의 성취로 환원된다.
내가 이렇게 많이 남성들을 위해 희생했는데, 왜 나는 아무 권한이 없나? 이것이 한계적 좌절이다.

그럼 대리 권력이라도
권한을 선물받지 못하면 그 대신에 권력 옆에 붙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붙든다.
와이프는 내 남편이 누군지 알아? 라고 하고
딸은 내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 라고 하고
어머니는 내 아들이 누군지 알아? 라고 권력을 빌려와 행사한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권자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행사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수 있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이것을 준다며 유인한다.
그래서 어떤 여성은 남성 권력과 자신의 권력을 동일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남성 권력이 사라지면 자신의 권력도 바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여성을 통제한다.
자기 삶을 결정할 실질적인 권한은 부족한데, 다른 여성에게는 명령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일종의 대체 주체성이 생긴다. 자기 인생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어도, 며느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기생 구조이다. 그러면 자신이 받았던 억압을 아래쪽 여성에게 전달함으로써 자신이 권력자라는 감각을 확보하게 된다. 이것이 세대 간 여성 갈등에서 흔히 작동하는 구조이다.

주체성이라는 착각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가부장적 질서가 제공하는 지위는 관계적이다. 남편의 아내, 아들의 어머니, 집안의 며느리, 아버지의 딸, 남성 상사의 신임을 받는 부하.
즉, 내가 누구인가 보다 어떤 남성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가 지위의 근거가 된다. 그러니 주체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 남성에 의해 관계가 변경되면 관계적 권력의 근거는 쉽게 흔들린다.

패배자단
그나마 기대하던 내 곁의 남성이 사회적으로 충분한 성공이나 권력을 얻지 못했다면 문제가 더 복잡해진다. 가부장제는 남성에게도 일종의 약속을 한다. 남자가 가장이 되면 가족을 지배하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그런데 남성들이 구축한 질서는 모든 남성을 성공한 가장으로 만들어줄 생각이 없다. 경제적으로 실패하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불안정 노동에 종사하거나, 경쟁에서 밀리거나 대다수는 실패한다. 그러면 가부장적 권위는 남아 있는데 그것을 뒷받침할 실질적 자원은 부족한 상태가 된다. 패배자단들이다.
경제적, 사회적 성공은 이루지못했어도, 가족 내부에서는 남성 가장으로서의 권위는 유지하고 싶어하는 집단이다.

억울한 남성성 폭발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남성이 사적 관계 가족 안에서 만큼은 대단하다는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내가 남자니 내가 가장이고 내 말이 법이다.
이때 가장 만만한 대상이 가족 구성원, 특히 여성이나 아이가 된다.
더 비극적인 것은 여성이 그 남성의 실패를 대신 보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거나 사회적으로 독립하면, 가족이 불화를 겪는 일이 과거에 많았고, 여전히 있다. 가부장적 관계에서 여성이 성공하는 것을 남성의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남편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와이프는 잘 해낸다면, 여성은 가족내 성공을 남편의 기여로 돌리거나 남편에 의한 성공적 결과일 것이라고 남들이 인식한다. 여기서 여성은 다시 자신의 주체성을 양보해서 남성의 상징적 주체성을 유지해주는 역할을 맡는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남자는  이 질서를 충실히 수행했는데도 삶의 최종 주체가 되지 못한 여성과  한팀이 된다. 슬프게도 이 두 좌절이 만나는 곳이 가족이다. 남성은 가족에서 권위를 확보하려 하고, 여성은 그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가족의 안정과 자신의 지위를 확보하려 한다. 그러면 일종의 좌절의 교환이 일어난다. 그런데 양쪽 모두 실제로 원하는 것을 충분히 얻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성은 원하는 사회적 성공을 얻지 못하고, 여성은 실질적 자기결정권 조차 얻지 못한다. 그래서 가족 내부의 긴장이 계속 쌓인다.

좌절의 하향식 전달
남성의 사회적 실패는 가족 내 권위 집착으로 이어지고 아내에 대한 통제는 아내의 주체성을 축소시키고 아내의 좌절에 이어, 더 약한 사람에 대한 통제가 발생하고, 자녀, 며느리, 다른 여성에 대한 통제로 절망은 전가된다. 이 구조는 단순 피해자-가해자 직선 구조가 아니라 하향 연쇄적 구조이다. 시모가 며느리를 아래로 억압하면서 동시에 남편에게는 위로 복종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여성은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므로 책임이 없다, 시모가 며느리를 억압했으니 가부장제의 가해자일 뿐이다 는 단순화는 틀렸다.

부역을 거부한다.
부역 거부는 가부장제 대리 권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음이 여려서 착해서 남에게 강요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제한적인 권력을 사용해서 더 약한 사람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았으니 너도 그렇게 살아야한다 가 아니라 나는 그렇게 살았지만 너는 그렇게 살지마라 이다.

쉽지않다.
아래 여성보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사는 특혜를 포기하기 쉽지않다.
가부장제는 여성에게 남성 질서에 협조하면 다른 여성보다 조금 더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차등적 보상을 제시한다. 따라서 여성이 그것을 거부하려면 자신이 이미 누리고 있는 상대적 특혜까지 포기해야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가부장제가 나쁘다는 것을 깨닫고 탈출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가 되지 못한 좌절을 마주할 때, 가장 중요한 기본은 대리 권력을 주체성으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① 이 결정은 정말 내가 주체적으로 내리는 것인가? 가부장제인가?
② 내가 가진 권력의 근거는 무엇인가? 남성과의 관계인가?
③ 내가 다른 여성을 통제할 때 누가 이익을 얻는가?
④ 내가 누리는 보상을 잃을까 봐 다른 여성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⑤ 내가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다른 여성에게도 고통받을 이유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당했으니까 너도 당해야 한다.” 이 말은 곧 다죽자 이다.

남성 주체성이 아니다
여성도 남성처럼 가족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바꾸면 가부장제는 그대로 있는데 주체 자리를 남성에서 여성에게 교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으로 바꿀 것은 누구도 성별 때문에 다른 사람의 삶을 결정할 수 없는 상태이다. 가장을 여성 혹은 남성으로 뽑는 문제가 아니라 가장이라는 절대적 권력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야 여성도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고, 남성도 가장 역할 때문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국 부역하지 않는다는 것은 권력을 전혀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종속을 대가로 얻는 권력을 거부하고 자기 삶에 대한 실질적인 결정권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패배자단 문제가 단순히 실패한 남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실패와 성별 권위가 결합하면서 가족 안에서 좌절을 재분배하는 구조적 문제로 봐야한다.


2. 부역하지 않으려면
나는 살아남기 위해 규칙을 따를 수 있지만, 그 규칙의 집행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여성 전체의 의무로 만들지 않는다. 내가 결혼을 했으니 여자는 결혼해야 한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경력을 포기했으니 엄마라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 나는 조직에서 상사의 지시를 따랐으니, 여자 후배도 상사의 부당한 요구를 참아야 한다 로 변형하면 개인의 선택이 규범으로 변하게 되고 이를 경계하는 것이다.
가장 실천적인 방법은 여성에게 고정관념을 적용하는 것을 다른 여성에게 그대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성 간의 감시를 거부하는 것이다.
저 여자는 저렇고, 저 여자는 문제라는 말을 안하면 가부장제의 일상적인 재생산을 상당 부분 끊을 수 있다.

남성들은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을 다른 여성들이 배제해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부역자 여성들은
자신의 가부장제 충성심을 증명하려 : 나는 저 여자들과 달라, 나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나는 여자지만 남자들하고 일하는 게 더 편해, 나는 저 페미들이 이해가 안가. 이런 자기증명을 해야할 순간이 왔을때, 내가 이 말을 함으로써 얻는 것은 무엇이고, 그 대가로 다른 여성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를 잠깐 생각해보면 고민할 것도 없다.
보상은 권력이 아니다. 남성에게 인정받는 순한 여성이 되어 얻는 지위는, 그 남성이나 그 질서가 인정하지 않는 순간 바로 사라진다. 따라서 인정받기 위한 순응이 자기 가치와 동일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다른 여성의 선택을 통제해서 내 지위를 지키지려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여성이 기존 규범을 거부하면 그 여성 때문에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는 위협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랬지만 너는 그럴 필요 없다 라고 공존할 수 있다.
언젠가 권력을 얻었을 때, 규칙을 바꾼다. 나도 당했으니 너희도 견뎌야 한다는 기존질서의 재생산이고,
내가 겪었던 불합리한 규칙을 다음 사람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질서의 변화이다. 따라서 여성에게 권력이 주어졌을 때 기존의 규칙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생각해야한다.
가부장제 안에서 가장 쉬운 생존 전략은 나는 다른 여자들과 다르다 이나 더 똑똑한 전략은 다른 여성도 나처럼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다.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사실은 여성이 다른 여성을 억압하는 것을 면죄하지 않지만, 여성이 가부장제를 재생산한다고 해서 그 구조의 동등한 권력 주체가 되는 것도 아니다.
부역을 거부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가부장제와의 모든 접촉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받은 규칙을 다른 여성에게 다시 집행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순응할 수는 있어도 규범화하지 않는다. 살아남을 수는 있어도 다른 여성을 희생시키지 않는다. 권력을 얻을 수는 있어도 기존 권력의 대리인이 되지 않는다. 내 선택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다른 여성의 의무로 만들지 않는다. 남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다른 여성을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받은 억압을 다음 여성에게 상속하지 않는다.
가장 핵심적인 경계선은 결국 "나는 이 질서에 적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 질서가 다른 사람을 통제하도록 내가 대신 집행하고 있는가?”라는 자기반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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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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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 aside some jobs for humans.
My dad died of Alzheimer’s in 2020. In the later stages of his illness, he was cared for day and night by paid caregivers who understood him even when he struggled to express himself. He couldn’t always tell them when he was hungry, but they always knew.
My family and I will always be grateful to that amazing group of professionals. Something in the care they gave my dad was irreplaceably human. No robot could or should have done it.
I think about that team when the question of which jobs will disappear and which will remain comes up. I believe that as AI and robots improve, we’ll set aside certain things for only people to do. I’ve started calling this domain Human Reserved, and it’s an example of the kinds of ideas we’ll need to consider.
I like the phrase Human Reserved because it makes me think of nature reserves—places where we could put buildings and roads, but we choose not to because the loss would be too great.
We might set something aside as Human Reserved for economic reasons. For example, we may do it because allowing machines to take over a certain role will displace a large number of people who can’t easily change jobs. You can’t tell a 55-year-old who has worked in construction their whole career that they need to go work at an elder care facility and expect them to find it fulfilling.
Sometimes the decision to make something Human Reserved will be driven by other factors. In health, for example, imagine a robot giving you the awful news that you have an incurable disease. There’s no technical reason why it couldn’t. Yet it shouldn’t.
The Human Reserved domain will evolve over time—for example, we should consider setting aside some jobs now and phasing in AI slowly over years or decades with a commitment to preserve some jobs. Some areas, like education and mental health care, will be a mix, with a human in charge who’s using the technology to extend what they can do.
The lines will also vary from place to place. Some countries might insist on having humans take care of the elderly. But a country like Japan, which has a shrinking workforce and not enough young people to care for the old, may welcome a caregiving robot.
The idea of Human Reserved raises a host of questions I don’t have answers to. Who gets to decide what we reserve for humans? What criteria should we use? How do you keep companies from cheating and using robots anyway? What happens to international trade when one country lets robots make something and another country doesn’t? These will need to be worked out in public as part of the transition plan."

: 인간을 위한 일자리를 따로 남겨두어야 한다. 내 아버지는 2020년에 알츠하이머로 사망했다.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아버지는 밤낮으로 유급 간병인들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들은 아버지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실 때에도 아버지를 이해해 주었다. 아버지는 배고프실 때를 직접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항상 알아차렸다.
내 가족은 그 놀라운 전문가들에게 영원히 감사할 것이다. 그들이 아버지께 베풀어준 보살핌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로봇은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었고, 해서도 안 됐다.
어떤 일자리가 사라지고 어떤 일자리가 남을지에 대한 질문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그 간병인들을 생각한다. 인공지능과 로봇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는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따로 남겨두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영역을 '인간 전용 영역(Human Reserved)'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우리가 앞으로 고려해야 할 아이디어의 한 예이다.
'인간 전용 영역'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드는 이유는 자연 보호 구역을 떠올리게 하기 때이다. 건물과 도로를 지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의 자연이 너무 많이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특정 분야를 '인간 전용'으로 지정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계가 특정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 직업을 쉽게 바꿀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생 건설업에 종사해 온 55세 남성에게 노인 요양 시설에서 일하라고 하면서 만족감을 느끼라고 할 수는 없다.
때로는 다른 요인들이 특정 분야를 인간 전용으로 지정하는 결정을 내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의료 분야에서 로봇이 당신에게 불치병에 걸렸다는 끔찍한 소식을 전한다고 상상해보라.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도 안된다.
인간 전용 영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화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장 일부 직종을 인간 전용으로 지정하고, 인공지능을 수년에 걸쳐 또는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도입하면서 일부 일자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교육이나 정신 건강 관리와 같은 분야는 인간이 기술을 활용하여 자신의 역할을 확장하는 혼합형 체제가 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보고 경악했다.
빌게이츠가 주장한 휴먼리저브: 인간보호영역은 여성돌봄보존과 동일어이다. 우리는 자신의 부모와 조부모를 시집온 아내에게 맡기는 돌봄전가를 오랫동안 봐 왔다. 빌게이츠는 부친을 유급으로 돌봐준 사람들로부터 느낀 감사함을 미래에 자신을 돌봐줄 누군가를 위해 보존하고, 본인이 가진 돈과 권력으로 지금 뭔가 말 하는 모양이다.
나는 빌게이츠을 유급으로 돌본 사람들 중에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임을 확신하고, 본문의 55세 건설업 남성이 돌봄노동으로 전직해 느낄지도 모를 불만족감은 돌봄노동에 밀어넣어진 여성들이 지금 느끼는 불만족감이다. 여성이라는 단어는 안썼지만, 이 글은 늙은 흰수염 여우가 교묘하게 쓴 여성차별이다. 빌게이츠가 만든 컴퓨터 산업의 업적과는 별개로 그의 가부장남성성은 단 한발도 나아가지 못했다.


인간적이고 따뜻해 보이는 글의 인간성이 누구의 노동을 말하는 지 입을 다문다. 빌게이츠도 차마 여성의 돌봄노동을 AI에 맡기지 말고 계속 여성이 떠맡게 하자는 말을 솔직하게 하지 않는다.

1. 게이츠가 말하는 ‘인간성’은 평등하지 않다.
게이츠의 출발점은 개인적인 경험이다.
아버지가 알츠하이머를 앓았고, 의사소통이 어려워졌음에도 간병인들이 아버지의 배고픔이나 불편함을 알아차렸다는 경험이다. 빌게이츠는 그 관계에서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회에서 첨예한 논란를 일으키고 있는 그것이다.

누가 그 ‘인간적인 무언가’를 제공하는가? 왜 그 인간적인 능력은 역사적으로 여성에게 집중적으로 요구되어 왔는가?


돌봄에는 단순한 기술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표정, 목소리, 행동 변화, 감정 상태를 읽고, 말하지 못하는 욕구를 파악하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능력이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여성성 또는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요구되어 왔다. 좋은 엄마라면 알아서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하고, 좋은 아내라면 남편의 상태를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하며, 좋은 딸이라면 부모의 필요를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그래서 좋은 간병인이라면 환자의 감정을 직관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식이다.
'기계는 인간의 감정과 욕구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인간적인 돌봄을 보존해야 한다.' 는 문장은 그 자체로는 따뜻할 수 있지만, 성평등 맥락에서는 위험하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인간적 돌봄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에게 부과되어 온 돌봄 노동을 계속 여성에게 떠맏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2. 인간보호능력에 얼마나 낼까?
아기 돌보기, 아픈 노인 돌보기, 남편 부모 안부 챙기기, 집안 장애인 돌보기, 멀쩡한 남편 돌보기, 청소년 자녀의 감정 파악하기 등
이 감정 돌봄 노동에 제대로 값이 지불된 적은 없다. 남성은 삽입섹스를 하는것이 여성이 지배당하는 질서라 주장했고, 남성의 소유물인 여성을 남성의 사적 영역에 가두어두고, 가족내 감정노동과 돌봄노동에 착취해왔다. 부자집 여성은 다른 여성을 데려와 여성의 돌봄노동을 건넸고, 부자나라는 가난한 나라의 여성들을 데려와 떠맡겼다.
돌봄 노동은 가정에서는 무급 노동이었고, 시장으로 나오면 상대적으로 저임금 노동이 되어 성별임금격차를 만들고 있다.
여성운동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왜 인간에게 필수적인 노동일수록 경제적 가치가 낮을까?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사회가 재생산되지 않는다.환자를 돌보지 않으면 병원 시스템이 돌아가지 않는다. 노인을 돌보지 않으면 가족과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돌봄은 생산노동보다 낮게 평가되어 왔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돌봄이 오랫동안 여성의 역할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근데 갑자기 '돌봄은 인간적인 일이니까 인간에게 남겨야 한다.'? 라고 선언하는 것은 과거의 성별 노동분업을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그것을 ‘인간성’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재포장할 위험이 있다.


3. 더 위험한 것은 ‘인간 노동의 보호’가 누구를 보호하는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AI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래서 일부 직업은 인간에게 남겨두자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정치적 질문이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할 것인가?"
예를 들어 고임금 전문직과 저임금 돌봄노동자가 있다고 보면,
AI가 전문직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할 수 있다면 사회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판단과 창의성이 중요하니 전문직에는 인간을 남겨두자.”
그런데 돌봄노동에 대해서는
“인간적인 접촉이 중요하니 돌봄에는 인간을 남겨두자.” 라고 한다.
겉으로 보면 똑똑한 것 같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전혀 공평하지 않다. 누가 그 인간 노동을 제공하느냐가 다르기 때문이다. 고임금 전문직의 ‘인간성’은 고임금으로 보상될 수 있는데, 반면 돌봄노동자의 ‘인간성’은 종종 저임금으로 구매된다. 그 노동자의 상당수가 여성이다. 따라서 “인간의 일자리를 보호한다”는 정책이 실제로는 고소득층의 인간성을 보호하면서 저소득 여성의 노동을 보존하는 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계급적, 젠더적 문이다.

4. ‘돌봄을 자동화하지 말자’는 말은 누구에게 좋은가?
만약, 로봇이 장애 노인의 식사 준비, 청소, 세탁, 이동 보조, 약 복용 알림, 야간 상태 확인, 단순한 신체 보조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치면,
인간보호영역 원칙에 따라, 돌봄은 인간적인 일이므로 인간이 해야 한다며 인간 노동자를 계속 고용한다.
혹은 인간노동자의 만족을 위해 로봇을 고용한다 로 선택이 주어진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이 하루 12시간 동안 간병인이 청소하고 빨래하고 몸을 들어주는 것과 간병인이 제공하는 감정노동이라면, 간병인이 감정노동 후 겪는 스트레스와 피로가 다시 다른 감정노동자로부터의 돌봄으로 이어진다면, 로봇이 돌봄 노동 전체 혹은 상당 부분을 대체할 수 있음을 외면하는 기만이다.

인간보호영역 원칙 이라는 명목하에 인간을 고용하는 것은 고결한 윤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신체적 수고와 감정적 소진을 합법적으로 매매하는 것에 불과하다. 로봇이 24시간 내내 불평 없이 몸을 들어 올리고, 밤새 환자의 반복되는 푸념을 들으며 완벽한 미소와 친절한 음성으로 응대하면, 인간 노동자가 겪던 스트레스의 순환 고리는 여기서 끊어진다.
자동화와 인간성은 반드시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동화가 인간에게서 노동에서 해방시켜 인간에게 관계를 돌려줄 수도 있다.

5. AI가 돌봄을 빼앗는가? AI가 누구를 돌봄에서 해방하는가?
흔히 AI가 일자리를 뺏을 것이라고 한다. 근데 제발 뺏어주기를 바라기도 한다. AI가 이미 대체하고 있는 노동이나 로봇이 대체하는 일 말고, 가사노동에 로봇이 빨리 투입되기를 바란다.
돌봄과 가사노동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여성과 아이를 착취하는 무급 노동으로 치부되어 왔다. 생산성을 숫자로 측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리고 주 노동 주체가 여성과 사회적 약자였다는 이유로 가치 평가에서 늘 뒤로 밀려났다.  AI와 로봇은 가사노동자와 간병인을 돌봄에서 해방한다. 빌게이츠 같은 부자는 수십 명의 간병팀을 꾸려서 간병노동의 질을 관리할 수 있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24시간 돌아가는 간병노동과 돌봄노동에 장기간 돈을 쓸 여력이 없다.
현실적인 대안은 감정노동의 99%를 AI와 로봇으로 대체하고, 남은 1%의 인간적 교감에 압도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24시간 요구되는 기본적인 말벗 역할, 그리고 신체적 수발에 들어가는 정서적 에너지를 AI가 99% 흡수하면 소모적인 감정 소비를 기술에 맡김으로써 인간 노동자는 감정적 방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기술이 감정의 껍데기를 대체할 때, 비로소 인간만이 제공할 수 있는 진정성 있는 공감, 깊은 맥락의 이해, 존엄성을 보장하는 마지막 1%의 연결이 희소하고 귀한 가치로 인정한다.
결국 핵심은 돌봄은 인간, 특히 여성이 해야만 하는 거룩한 노동 이라는 고정관념 자체를 해체하는 것이다. AI와 로봇이 돌봄 노동을 100%에 가깝게 대체하여 수행할 수 있다면, 여성은 마침내 돌봄의 지정 담당자 라는 억압적 역사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노동의 상실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으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을 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로봇이 이 돌봄 노동 전체, 혹은 물리적, 감정적 노동의 상당 부분을 대체할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첫째, 감정의 윤리적 외주화 가 완성된다. 로봇은 24시간 내내 불평 없이 몸을 들어 올리고, 밤새 환자의 반복되는 푸념을 들으며 완벽한 미소와 친절한 음성으로 응대한다. 인간 노동자가 겪던 스트레스의 순환 고리는 여기서 끊어진다. 사회는 비로소 '감정적 가성비'를 확보하며, 돌봄은 소진되는 인간 노동자 없이도 유지되는 완벽한 시스템이 된다.
둘째, 인간성에 대한 정의가 재편된다. 돌봄을 로봇에게 위임한 사회에서 노인은 더 이상 타인의 피로를 미안해할 필요가 없고, 가족은 죄책감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이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견디는 공감의 이음새를 제거한다. 타인의 노동과 감정에 의존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빚을 지며 유지되던 인간적 유대감은 규격화된 기술적 서비스로 대체된다.
사적 영역에 갇혀 있던 비가시적 노동자가 해방되는 오랫동안 가정 내 돌봄을 전담해 온 여성, 혹은 가족의 병간호를 위해 자신의 삶을 유예해야 했던 이들에게 로봇의 투입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적 삶을 되찾는 생존의 문제다. AI가 돌봄을 맡음으로써, 인간은 누군가의 수발을 들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진하지 않아도 되는 최초의 시대를 맞이한다.
그러나 이 해방은 지극히 불평등하게 분배될 가능성이 높다. 기술이 남성권력 구조를 그대로 가져와 장착하고 있는 중, 해방을 누리는 것은 고가의 돌봄 로봇을 구매할 자본력이 있는 계층이며,  반면, 저임금으로 돌봄 노동을 제공하던 이들은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 수단마저 빼앗기는 현실에 직면한다. 돌봄 노동이 고되고 피곤한 일 이긴 했으나,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에게 열린  몇 안되는 노동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AI가 돌봄을 빼앗는가, 해방하는가? 라는 질문의 답은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AI에 가르칠 미래 사회 구조에 달려 있다. 해방의 이점이 보편적 복지로 환원된다면, AI는 인간이 인간을 수발하느라 서로를 마모시키던 오랜 비극을 끝내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될 것이다.

6. 인간보호영역은 결과가 아닌 원인이 다.
빌게이츠는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 일자리가 사라지고, 단 일부 영역은 인간만 하도록 지정한다, 돌봄은 인간적인 영역이므로 남겨둔다 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돌봄이라는 노동을 왜 보존해야 하냐고 질문하자면, 돌봄은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따뜻한 인간의 영역 이라는 감정적 호소가 따라온다. 결국 그 따뜻함을 제공할 주체로 다시금 여성을 호출한다. 정작 자신들은 고차원적인 지식 노동과 자본 소유를 독점하면서, 고단한 신체, 감정 노동은 인간성 보존 이라는 명목으로 특정 성별에게 밀어 넣는 것이다.
자본과 기술이 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AI에는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 가사, 간병, 돌봄 로봇 개발에는 그만큼 속도를 내지 않을까? 돌봄 노동을 수행할 여성과 약자라는 대체 불가능한 저렴이 인간 자원 이 사회에 여전히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러한 프레임은 매우 위험하다. 돌봄을  인간다운 따뜻함 이라는 미사여구로 덮어씌워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묶어두는 순간, 그 고된 감정노동과 신체적 고갈은 다시금 성역할의 탈을 쓰고 여성에게 전가된다. 결국 인간 보호 영역 이라는 명목은 여성과 약자를 계속해서 돌봄이라는 노동 감옥에 저렴하게 가두어 두는 원인으로 작동할 뿐이다.

7.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성 저임금 노동이다.
역사적으로 여성은 가정에서 무급 돌봄을 담당했고, 현대 복지국가와 노동시장이 발전하면서 일부 돌봄이 사회화되었다. 하지만 돌봄이 사회화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탈젠더화된 것은 아니다. 가정에서 어머니가 하던 일을 국가가 제도화하면, 어머니가 하던 돌봄이 여성 보육교사, 여성 요양보호사, 여성 간병인, 여성 사회복지사, 여성 방문 돌봄 노동자 등의 직업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면 다시 질문해야한다.
가정에서 여성이 무급으로 하던 일을 국가가 로봇 대신 여성에게 저임금으로 다시 구매하면 여성은 해방되나? 아니다. 가정의 무급 노동이 시장의 저임금 노동으로 이동했을 뿐이라면, 노동의 장소와 계약 형태는 바뀌었지만 젠더화된 노동분업은 유지될 수 있다.이것이 돌봄의 사회화가 가진 역설이다.

8. 남성 기득권의 재소환
전통적인 가부장제는 남성을 생산자, 여성을 재생산 담당자로 구분했다.남성은 임금노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여성은 가사, 출산, 양육, 돌봄을 통해 가족을 재생산했다. 이 과정에 남성이 여성을 종속하고 강간하고 죽였다. AI가 등장하면 이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AI와 로봇이 과거에 남성이 특히 여성에게 요구했던 수동적 역할을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고, 생산적인 일은 AI가 하고, 인간적인 돌봄은 인간이 한다는 원칙을 세우면, 남성 중심의 생산 영역은 계속해서 기술적으로 고도화되고, 여성 중심의 재생산 영역은 인간적 가치 라는 이유로 노동집약적인 상태로 남게 되어 역설적으로 AI가 남성의 노동을 대체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노동을 보존하게 된다. 기계화된 생산영역과 인간화된 돌봄영역이라는 전통적 분업이 생존하게 되면 이것이 바로 AI 시대의 새로운 가부장제이다.

9. 인간성은 여성의 희생을 미화하는 말가장 비판적으로 보면 빌게이츠의 문장에서 ‘인간성’이라는 단어 자체를 의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누군가에게는 “인간적인 돌봄”이겠으나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감정적 육체적 소진을 부르는 일일 수 있다. 혜택을 받는 사람에게는 인간성으로 미화되더러도 다른 사람에게는 그냥 노동이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를 돌본 사람들의 노동에서 인간적 아름다움을 보았으나, 그 아름다운 인간성을 제공하기 위해 그 노동자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포기했는지를 물어야 한다.

10. 감정노동의 자연화
빌게이츠는 아버지가 말하지 않아도 돌봄노동자들이 원하는 것을 알챘다고 했다. 이것은 상대의 감정을 눈치를 살피는 감정노동을 의미하고 오랫동안 여성에게 이 능력을 요구해왔다. 그런데 이것을 여성은 원래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돌봄에 적합하고 관계를 잘 이해한다 고 사실화하는 것은 문제이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한 기술을 여성의 타고난 본성으로 오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려서부터 타인의 감정을 읽도록 사회화를 강요했고, 남성에게는 허용하지 않은 정서적 노동을 여성에게 요구해 왔다. 그런데 AI 시대에 이것을 다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칭찬하면, 인간만이 혜택을 누리는 여성만의 서비스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AI가 오히려 여성해방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AI가 돌봄노동을 당장 대체할 수는 없어도, AI가 돌봄에서 어떤 부분을 없애야 하는가에 대한 결정은 지금 해야 한다.

빌게이츠 자신도 글 마지막에서 누가 인간에게 남겨둘 일을 결정하는가?를 물었다. 인간에게 남겨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기술정책을 결정해온 사람들은 대체로 기업, 국가, 자본, 전문가 남성 집단이었다. 그런데 돌봄노동자 자신이 그 결정 과정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가는 돌봄에 로봇을 도입하지 말자고 할 수 있고, 국가는 돌봄노동에 여성 고용을 보존해야 한다 고 할 수 있고, 부자는 인간적인 돌봄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임금 돌봄 여성 노동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나는 돌봄노동을 하고 싶지 않다.”
이 목소리가 정책에서 사라지면 안된다.
그리고 돌봄받는 사람의 인간성 과 돌봄노동자의 인간성을 동등하게 봐야 한다
빌게이츠는 아버지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보았는데 동등하게 돌봄노동자의 존엄성도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야한다. 노인에게 인간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면, 그 돌봄을 제공하는 노동자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환자가 인간답게 돌봄받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도 인간답게 일할 권리가 있다. 환자가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에게 자신의 가족과 함께 있을 시간도 필요하다. 환자가 인간적 접촉을 받을 권리가 있다면, 간병인이 인간적 접촉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남성에게는 AI가 노동에서 벗어날 기회를 제공하면서, 여성에게는 “인간적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을 계속 요구한다. 이는 AI는 가부장제를 해체하는 기술이 아니라 가부장제를 기술적으로 재구성하는 기술이 된다.

- 무엇을 인간에게 남겨야 하는가?
- 누구를 어떤 노동에서 해방해야 하는가?
- 어떤 노동을 기계가 대신해야 하는가?
- 자동화의 이익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 자동화 때문에 없어지는 일자리의 노동자에게 사회는 무엇을 제공할 것인가?
- 돌봄노동을 인간에게 남긴다면 왜 그 인간은 여성인가?
- 남성과 여성이 돌봄을 똑같이 수행하도록 만들 수 있는가?
- 왜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인간의 희생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AI 시대는 남성에게는 AI가 더 많은 생산성을 제공하고, 여성에게는 인간성을 이유로 더 많은 돌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AI가 여성과 남성 모두를 생존을 위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불필요하고 반복적인 노동, 감정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그 결과 발생한 시간과 부를 성평등하게 분배하는 것. 그리고 돌봄처럼 정말 인간적인 관계가 필요한 영역에서는 인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임금을 높이고, 권한을 강화하고, 남성의 참여를 의무화하며, 돌봄을 여성의 본성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동 책임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이룰지를 생각해야한다.


솔직히 말해봐.
빌게이츠가 쓴 글이라서 주목을 받은 거면, 하필 빌게이츠가 쓴 것이라 비딱하게 보고말고 이다.
빌게이츠는 마이크로소프트 및 재단 여성 직원들에게 이른바 찝쩍거려 2019년 이사회 조사를 받고 사퇴했다.
개인 자산관리회사(카스케이드) 대표의 여성직원 성희롱 및 언어적 학대 행위를 인지하고도 방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23년 개인 사무실 채용 과정에서 보안업체가 여성 지원자들에게 성병 여부, 불륜, 누드 사진 촬영 등 부적절한 질문을 던진 사실이 드러났다.
가장 큰 건은 미성년자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오래 만나 오다가 논란이 되었으며, 멜린다 게이츠와의 이혼 사유 라고 알려졌다.

빌 게이츠가 AI를 갖다대어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주장하는 것의 이유를 대보겠다.  빌게이츠의 서술에는 직접적으로 여성이 돌봐야 한다는 주장은 없다. 그러나 현실의 돌봄노동이 여성화되어 있다는 조건에서 이를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이렇게 전개된다.
" AI가 나를 돌보는 것은 싫다. 나는 사람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좋겠다. 특히 나를 이해하고, 감정을 읽고, 세심하게 챙겨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여성???
여기서 그 사람을 여성으로 바꾸면 문제의 차원이 달라진다. 왜냐하면 가부장제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의 욕구를 이해하고, 남성을 위로하고, 남성의 생활을 관리하고, 남성의 감정을 받아주는 존재로 길러져 왔고, 반항하는 여성들을 배제해 왔기 때문이다. 즉, “인간적인 돌봄을 원한다” 라는 욕망은 "여성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한다. 여성은 원래 돌봄을 잘한다. 여성의 따뜻함과 공감은 남성이 누릴 수 있는 인간적 자원이다”
라는 사고로 연결될 수 밖에 없다.

빌게이츠의 인간보존영역이 성적 대상화와 연결되는 지점은 여성의 몸과 감정이 남성을 위한 자원으로 취급되는 점 이다. 성적 대상화의 핵심을 단순히 여성을 삽입하고 싶은 욕구로 바라본다 라고만 이해하면 이 연결은 안된다. 더 넓게 보아서, 대상화에는 한 사람을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성적 대상화에서는 여성의 몸이 남성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전환된다. 돌봄의 대상화에서 여성의 몸, 시간, 감정, 관심, 공감 능력이 남성의 생활과 정서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원으로 바로 전환된다.
“나를 돌봐주는 여성”과 “나를 욕망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항상 결합되어 왔다. 남성을 돌보는 사람. 남성이 욕망할 수 있는 사람. 여성은 아름다워야 하고 성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하며 남성의 감정을 이해해야 하고 남성을 위로해야 하며 집안일을 해야 하고 남성이 힘들 때 보살펴야 하며 남성의 욕구를 먼저 알아차려야 한다 는 상반된 요구가 동시에 부과되는 것, 이것은 단순한 “돌봄”도 아니고 단순한 “성적 대상화”도 아니며 여성의 몸과 감정 전체를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패키지로 만드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나는 로봇보다 인간 여성이 나를 돌봐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젠더화된 욕망은, 여성은 단순히 노동자가 아니라 ‘나에게 인간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존재’ 성적 대상화로 소비되지 않으면 뭔가? 뭐니?

빌게이츠가 말한 간병인이 아버지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도 배고픈지 알아차렸다는 것은 눈물나게 아름다운 장면으로, 이 능력을 여성에게 기대하는 문화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여자는 남자의 마음을 알아줘야 하나? 말을 해야알지! 이렇게 되면 여성에게는 초과적인 감정 인식 능력이 요구된다. 그런데 남성에게는 상대적으로 그런 능력이 요구되지 않는다. 성적 대상화에서도 남성의 욕구가 출발점이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이해해주기를 원한다.” 이러면 돌봄을 제공하는 여성의 욕구는 뒤로 밀려난다. 여성이 일을 안하고 싶을 때도, 남성이 여성의 이해를 원하면, 이 순간 여성의 주체가 사라지고 남성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객체가 된다. 성적 대상화와 돌봄 대상화가 만나는 지점이다.
더 위험한 것은 ‘여성의 돌봄 능력’ 자체가 여성성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남성은 AI에게는 없는 것을 여성에게서 찾는다. 그런데 이 능력들이 여성적 특성으로 정의하면, 여성은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제공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여성의 인간성이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인간성을 남성이 소비하는 것이다.
왜 남성의 노동은 기술로 해방되어야 하고, 여성의 돌봄은 인간적 가치라는 이유로 보존되어야 하는가? 왜 남성은 AI에게 노동을 맡길 수 있으면서, 자신의 정서적, 신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인간은 여성으로 남겨두기를 원하는가?
이것을 ‘돌봄의 성적 대상화’ 라고 보면, 여성의 돌봄 능력을 여성의 성적 매력과 결합시키는 문화적 구조는 분명히 있다. 남성은 여성에게 삽입성교를 욕망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어머니로서 돌봐주기를 기대한다. 빌게이츠는 점잖게 말했지만 조만간 아무도 자신을 정성스럽게 돌봐주지 않을까 불안해서 한 소리가 섞여있는 글이었다 라고 할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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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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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지칭하는 유럽과 미국은 그들의 역사적 발전을 유일한 표준 모델을 가지고 있다.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 문화적 확산을 수백년에 걸쳐 서서히 단계적으로 겪어왔다. 하지만 한국은 서구가 수백 년 동안 거친 개혁과 변혁을 50년이라는 극도로 짧은 시간 내에 차례차례가 아닌 한꺼번에 달성해버렸다.

서구적 모델에서는 산업화 이후 민주화, 그 이후의 고도 사회 안정화가 순차적 공식이지만, 한국은 놀라운 발전(경제발전) 속도 속에 정신까지 바짝 차리며(민주화) 서구의 공식을 넘어버렸다.
서양은 중세까지 기독교로부터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고, 근대에 이르러 개인주의, 서양 자유주의, 그리고 이어지는 국가 권력에 대한 견제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한국의 발전은 강한 국가 주도형 기획과 집단주의 라는 전통적 가치를 교육열이 이끄는 형태를 보였다. 서구 관점에서는 이런 발전이 현재 중국이 보이고 있는 전근대적 요소나 독재국가 경제로 단정짓기 쉽다. 실제로는 정부-기업-국민이 자발적, 혹은 집단주의에 이끌려 단결해 이룬 공동체의 성공이다.

아직도 서구는 세상이 서구 중심으로 돌아간다 믿는다.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선택이 인류의 방향이라 믿는다. 미국은 자국 부채 스트레스를 동맹국들에게 풀며 누가 대빵인지에 대해 계속 소리지르고 있고, 유럽은 가난하고 불안한 현실을 과거 번영의 그림자에 숨기고 갈길을 잃고 말았다.
지난 서구의 발전을 보면, 다른 대륙으로 쳐들어가 같은 인간인 노예를 잡아다 죽이고, 모자라다 싶으면 개의치않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가 가져갔다. 그러면서 돈도 가지고 여유도 생겼고, 여러 기계들까지 만들어 내, 발전은 이렇게 하는 거라는 공식을 세웠다.

아시아의 너무 다른 문화를 접하며 마치 신화를 뜻하는 듯한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이해를 멈췄다. 대신 많은 학자들이 자기이해에 몰두했다.
모든 비서구권은 서구의 과거를 따라해야만 발전한다고 믿었고, 그 선입견이 깨지는 경험을 못했으니 종교의 교리로 갖다붙었고도 남았다. 서구 자신들이 규정한 규칙과 한계를 넘어서는 한국의 발전 양상을 기존 서구 이론 틀에 억지로 맞추어 보고 판단하거나 이상한 돌연변이 예외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한국이 단순히 서구를 따라가는데서 멈추지않고 새로운 길을 만든 것을 서구는 쉽게 폄하한다. 서구가 이룩한 산업 발전과 정치제도의 추격을 넘어, 매력 터지는 문화와, 첨단 산업과 전통산업의 공존, 디지털 문화, 안전한 치안까지 서구의 기준을 넘는 현실을 한국은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구 역사관에서 자신들의 발전 모델이 유일한 인류의 정답이 아님을 증명하는 강력한 반례인 한국을 받아들이는데 게으르거나, 그냥 무시하거나, 별도 목록에 넣어두고 닫아버리기 쉽다.
그런 게으름은 한국을 매우 단편적으로이해하게 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드라마 속 멋지고 매력적인 주인공만 보고 한국 남자들은 다 저럴 거라는 드라마 오리엔탈리즘, 한국인들의 매끄러운 피부를 보고 성형과 시술에 중독된 자아없는 사람으로 보는 질투. 솔직히 말해.

서구 근대철학에 쳐발쳐발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더이상 한국 사회와 겹쳐지지않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 가치를 해체한다는 이론이다. 강력한 서구 기독교 문명이 구축해 온 특정 전제들에 대한 반발과 해체에서 나온 이론이라 구조와 역사 자체가 다른 한국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은 넘어 라는 뜻의 포스트에 근대적 가치인 모더니즘이 합쳐져서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넘어섬을 의미하는데, 전쟁 후 사회 자아 분열 속에 정신을 붙들고자 학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한가지 거대 구조 절대적 진리는 없고 세상에는 다양한 구조와 가치가 있다는 것.
갑자기 다른 말이긴 한데, 포스트모더니즘이 페미니즘에 들어오면, 페미니즘 이론이 주장하는 길러진 성이라는 젠더에 부여된 역할이, 그 거대 구조가 부인되어 여성이 생물학적 성별이 성역할과 분리되는 이상한 말이 되어버린다. 라고 할뻔! 아무튼 한국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딱 들어맞지 않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이라는 가치가 뿌리내리고 근대성을 다시 세워하는데, 천부인권, 법제도가 사회를 지배하기 전에 없는 뭐를 해체하자는 것이 안 맞는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강력한 작용은 종교에서 왔다. 신이 무엇이라고 명확하지 않은 한국에서 유교, 불교, 도교, 무속은 해체할 구조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다양한 구조가 있었다.
오히려 근대 이후로 돌아가려는 기독교근본주의가 시간의 불가역성을 거스르고 있다.
한국인들은 관계를 중시하는 문화속에서 입체적 시각,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자신을 다르게 표현하기를 자연스럽게 훈련해 왔다.
한국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말하는 파편화나 상대주의 를 이론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산업화의 발전 속에서 몸으로 경험해왔다

전통을 잘 활용하고, 근대성을 추억하고, 첨단산업을 열망한다. 그 근본에는 절대적 공동체 가치보다는 생존-돈이 먼저 있는 것 같다.
AI가 우리에게 바짝 가까이 오고 있는데 서구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다. 새로운 관계를 반기지 않는 것 같다.
한국은 일단 가보자는 호기심을 발휘하고, 과거 서구열강에 침략당하고 모욕당한 경험을 다시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고리타분한 유교이론이나 불교의 허무성을 정리하는 이론적 해체에 시간을 들이기보다,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빠르게 판을 새로 짜는 상황적 실용주의자들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는 멍청이들이 아닌 것은 불타는 교육열의 끝에서 여전히 지성을 원하고 남들하는 것은 따라 하려고 한다. 많은 서구인들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서 주어졌을 거라 믿는 소명만을 끌어안고 외로워하는 동안.

케이팝 남자 아이돌들보고 다 게이같다는 조롱은 불과 몇년만에 조용해졌고, 한국여성들이 화장과 성형에 미쳤다는 조롱은 자기관리로 조용히 교체되고 있다. 서구가 한국을 따라오건 말건 우리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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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 뭐든 할수 있을것 같았는데...

방 한구석을 채우고 있던 대형 링조명과 고성능 미러리스 카메라, 마이크를 중고 거래 앱에 헐값으로 올렸다.
올려두기가 무섭게 구매 희망 알림이 울렸다. 화려했던. 엑셀녀 성아의 흔적들은 단돈 수십만 원의 현금 뭉치로 바뀌어 빠르게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휑해진 방 안을 둘러보던 성아는 외출 준비를 마쳤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어 택시 호출 앱을 터치하려던 손가락을 다시 접었다. 통장 잔고의 압박이 머릿속을 스쳤다. 성아는 씽끗 웃고는 야무지게 신발을 신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얼마 만에 타는 버스인지 기억조차 아득했다. 몇년전에 알바 면접갈때 탄게 마지막인 것 같았다. 삑~ 카드 찍는 소리와 함께 올라탄 버스는 덜컹거리며 출발했고, 성아는 빈자리에 앉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음 정류소에서 탄 한 노인이 성아 옆자리에 앉았다. 노인의 찌든 담배 냄새와 땀 냄새가 코끝을 강렬하게 찔렀다. 언제나 집앞에서 기다리던 택시 안에 혼자 앉아 유튜브 라이브를 켰었는데, 마치 트럭에 실린 택배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남들 다 이렇게 사는데 뭐. 옆자리 노인은 양 다리를 마음껏 쩍 벌렸다.

도착한 일자리센터의 직업상담 창구. 상담사는 성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눈빛으로 성아가 내민 서류를 훑어보았다.

"최근 2년간 경력이 비어 있네요. 방송 일을 하셨다고요? 어떤 내용이었죠? 사업자 등록은 되어 있었나요? 소득 증빙은요?"

세세하게 파고드는 질문에 성아는 답답함이 몰려왔다. 액셀 방송에 나갔었다고 솔직히 말할 필요가 있나는 생각이 들었다. 밑바닥까지 캐묻는 상담사의 시선에 수치심과 불쾌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컴퓨터 모니터를 보던 상담사가 종이 몇 장을 내밀었다.

"촬영이나 편집 같은 방송일을 하셨다면 일자리를 추천드릴 수 있는데, 그게 아니면... 여기 지금 당장 내일이라도 국비 지원으로 시작할 수 있는 직업훈련 과정이에요."

종이에 '미용사', '간호조무사', '보육교사', '요양보호사'라는 단어가 보였다. 몇 시간 방송만 하면 수백만 원은 우습게 벌던 다른 차원의 세계와는 완전히 분리된, 철저하게 노동력을 요구하는 현실의 직업들이었다.

빈속에 버스 멀미까지 겹친 성아는 갑작스러운 피로감과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 오늘은 좀 몸이 안 좋아서요. 다음 주에 다시 오면 안될까요?"

성아는 빤히 쳐다보는 상담사의 낯선 눈빛을 피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와 숨을 내쉬었다.
20대인 성아에게 요양보호사가 무슨 말이며, 최저임금에 장시간 노동이 뻔한 보육교사와 간호조무사 자격증 교육을 수개월 받아야만 할 수 있다니 한숨이 나왔다.

용감하게도 엑셀방송을 때려치우고 나올 때만 해도 속으로 물류센터에서 라도 일하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혹시 누가 성아를 알아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마스크를 쓰면 모르겠지 하고 순진하게 생각했었다. 현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자존심은 이미 바닥을 쳤고, 당장 한 달 뒤 낼 월세조차 아득했다.
명품옷과 가방을 팔면 꽤 돈이 될 것이고, 배달을 끊고 밥을 해먹으면 생활비도 줄일 수 있으며, 당장 오피스텔에서 저렴한 원룸으로 이사를 나가야겠다 생각했다.
성아는 화려했던 과거와 초라한 현재의 거대한 갭 사이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성아의 사진을 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돌아보니 낯이 익은 누군가가 서있었다.

"성아님, 오랜만이에요. 엑셀 그만두셨더라고요. 어디 다른데 가세요? 퇴사 기념으로 저랑 사진 한번 찍어주실수 있으세요? 제가 컴백방송에 1번으로 쏠게요."

성아는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만지며 미소를 지었다가 엑셀 밖이라는 현실을 깨달았다. 성아는 더이상 엑셀녀가 아니다. 성아는 언젠가 개인적으로 데이트를 했던 그 큰손 후원자에게 아무말 못하고 뒤돌아 걸어갈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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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하는 남자 채집하는 여자/ 최성락
106p 왜 대다수 남성은 일, 업무를 우선하고 조직과 집단에 충성할까? 왜 대다수 여성은 업무와 일상 사이의 균형을 원하고 조직 자체에 상대적으로 덜 충성할까? 이런 현상도 남자는 사냥, 여자는 채집이라는 진화심리학적 이론으로 설명할수 있다.

작가에겐 충격이겠지만 종이에 주절거린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많이 읽었다는 책을 다 똥꾸녕으로 읽었나... ) 이른바 레드필로 소문난 진화심리학을 지하철역에서 업뎃오류난 버그가 받아쓴 거구만.

선사시대 여성도 대형 동물을 사냥했다는 증거가 분명이 나오고 있다.
남성=사냥, 여성=채집 이라는 고정된 성별 분업 프레임 자체가 현대의 편견이 반영된 통설이다.
상식적으로 토끼 한 마리도 문명적 총으로 쏴서 잡기 쉽지 않은데 창들고 멧돼지를 잡았다고? 사냥은 늘 실패했고, 남자들도 매일 도토리를 주우러 다녔음이 사실이다.

일터에 맹목적 충성을 하는 남자들을 노예 근성이라고 봐야하나? 약탈적 자본주의와 기업 조직이 만든 조직에 복종문화나 장시간 노동을 수만년 전 수렵, 채집 본능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억지다. (서울대 나와서 학벌로 먹고 잘먹고 잘살아서 헛소리 좀 하시나?)

성별간 일터에서 태도 차이 현실적인 환경 차이라는 점에 눈을 딱 감고, 뻔뻔하게 쓴 글 따위를 안 읽은 눈 구해야 겠다. 왜 이 책이 페미니즘으로 분류되어 있었는지 답답하다. 남성은 생계 부양자 역할을 강요받고 사회적 역할을 자아로 여겨 일터에서 스스로 부품을 자처하고, 여성은 독박 육아, 가사 부담으로 균형이 생존이며 조직 내 유리천장 때문에 복종해봐야 올라가지 못하는 숱한 예를 보고 살아, 주어진 대로 따라는 수 밖에 없는 구조적 영향은 막강하게 발휘된다.

할만많지만 그만한다. 2024년 출간 책이라는 데에 기가 차서.
똥밟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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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디세이 개봉후
이른바 평론가들이
높은 별점을 던지고 있는데,

영화를 본 관객의 반응이
다음과 같을때 :
1. 알던 모르던 오디세이아를
영화로 만들었다면,
일단 와~
(고전 패티시)

2. 볼만한 괴물이나 장면 나오면
와~  (돈안아깝네)
3. 쏟아진 이야기들이
적당히 이해되는 선에서
마무리되면
와~ (자신만 이해한듯 만족)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8-9세기부터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를 뒤에 여러번
각색되어 양이 불어난 작품.
특별한 점은,
서양문화에서는
신으로부터 주어진 운명, 소명을
거룩하게 따르는게
기본틀인데, 오디세우스는
온갖 수를 써서 인간적인 해결을
하는게 (마치 힌두교의
오디세우스 신이 된 느낌.
신과 다른길로 간다면
왜 성차별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을까? 그눔이그눔)

다른 점이라면,
서양 이야기들이 이 소설에서
여러 아이디어를
확장해왔다는 점.

개인적으로 그 감독 영화를
안좋아해서인가,
지루한 데가 꼭 있고,
관객을 가르치려는 듯
여기 이해됐니?  라고
계속 지루하게 이어가는 점.
감독 스타일은 특이하지만
더이상 특이할 것이 없어진
느낌. (나이드니 그렇겠지..)


고전 패시즘은
지적 선민의식으로
너 그거 읽었니로 시작하는
꼰대 출현.
스스로 별 의견이 없으면
검증된 권위에 의존하려하는데
고전, 위인, 종교서 등
깊은 사색이나 성찰을 하고
나만의 관점을 세우는 것은
고통스러워
오디세이아 읽었니?
삼국지 아직도 안읽었어?
자유론도 안 읽어봤니
라는 식의 접근은
아주 적은 노력으로
제 지적 우위를 증명하려는
가장 가성비 높은 허세이자
지적 게으름이다.

가치관이 얕은 이들에게
고전은 세계를 이해하는 도구가
아니라, 남들 앞에 서기 위한
메이크업같아서
책 한 권을 독파했다는 사실
자체를 마치 특정 자격증으로
자랑하는데,
진짜 중요한 것은
그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넓어졌는가 이지만,
이들은 읽었니 or 안 읽었니
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게 묻는 이들에겐
정직한 답을 선물하기 싫음.

세상과 사람관계를
오디세이아가 다
담고 있지는 않다.
그 모든 다양함을 포용할 만큼
관점이 넓지 못하니
자신이 겨우 이해한 고전
한 두 권의 틀 안에 세상을
강제로 맞춰 넣으려 하는
무리수를 두고,
고전이던 뭐던 적어도 작가가
수명 줄여서 쓴 단 한 권의
책을 아주 깊게 읽고
이해한 사람은
자신의 멍청함, 무식함,
다양한 세상, 시대적 한계를
깊이 깨닫는데,
특정 고전 하나를 전지전능한
교양의 기준으로 삼는 행위
자체가 해당 고전을 제대로
읽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증.


그렇다고 책을 읽지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책 저책
보다보면 내 생각의 형체를

그려주는 똑똑이를 만나게 되고

그 순간이 몸과 정신이 분리되는
초월감을 느끼는 순간
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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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카메라 꺼졌다고

성아는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왔다. 택시에 앉아 떠오른 생각은 뒷수습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엑셀방송을 떠나버리면 많은 사람의 연락에 어떻게 다 답할까 어떻게 해명할까 그냥 연락두절 할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지난 2년간 주 3회 방송을 해오며 그 안에 얽혀 있던 수많은 관계들. 방송이 끝난 후 수십, 수백 개의 카톡이 폭주해 해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성아를 가십거리로 삼아 뜯어먹으려 들까 걱정이 들었다.

얼굴도 모르는 후원자들에게 오빠, 아빠 라 부르며 연인 행세를 해왔고, 채널운영자의 요청에 언제나 협조하려고 노력했고, 다른 BJ들의 순서에도 최선을 다해 노래 불렀고, 새벽에 다같이 밥을 먹으며 나눈 솔직한 대화들은  갑자기 전부 입을 다물었다. 성아의 휴대폰 화면은 고장난 듯 조용했다.

관계자들에게 연락을 끊겠다는 메시지를 남길 필요조차 없었다. 돈으로 증명되던 가치가 사라진 순간, 관계의 고리 또한 선을 그어버린 듯 단칼에 끊겨 나갔다. 성아는 아무런 메세지 없이, 자신을 얽매고 있던 수많은 관계자 단톡방들을 하나씩 나가기 시작했다.

[성★아님 월수금 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반짝단 _성★아_공식소통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성★아님이 방을 떠났습니다]
[레이블 1부장 성★아님이 단체방에서 퇴장하셨습니다.]
[채팅방 관리자가 회원님을 내보냈습니다.]

성아는 무표정하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내일 예약 시간이 잡혀 있던 미용실 담당 실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밀려 있던 외상값을 계좌이체로 전부 송금한 뒤, 감사했다는 인사와 함께 미용실 단톡방마저 나왔다. 집 앞까지 부르면 언제든 오던 전담 택시기사에게도 ‘기사님, 이제 이용 안 할 것 같아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라는 짧은 문자를 남겼다.

다음 차례는 개인 방송 채널이었다. 채널에 접속해 게시글과 영상들을 비공개로 전환하고 삭제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운다고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숏폼 플랫폼에는 '엑셀녀 성아 레전드 방송 모음', ‘성아 충격 방송 사고 캡처’라는 타이틀로 편집된 짤과 짧은 영상들이 이미 퍼져있었다. 자극적인 썸네일 속 성아의 얼굴과 몸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영상은 끝도 없었다.

막막함과 공포가 밀려왔다. 방송을 끌 때는 자신만의 결정이라 믿었지만, 이미 세상에 박제된 성아의 그림자들은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디지털 장례사를 찾아보던 성아는 마침내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분기마다 통장에 찍히던 수천만 원의 숫자가 이제는 제로(0)가 된다는 사실이다. 아이돌 전문샵에서 받던 헤어와 메이크업, 비싼 옷들, 비싼 스튜디오 대관비, 동료들 따라 사던 명품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의 줄기가 단번에 잘려 나간 것이었다.

현실감이 몰려오자 진짜 현실로 돌아가려는 듯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톡방의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참고 있는 식욕을 생각해냈다.
성아도 깡마른 몸을 유지하기 위해 지난 수년간 필사적으로 다이어트를 해왔었다. 프로틴 음료만 먹다가 심한 변비로 고생했었고, 순간 폭식을 하며 울기도 했었다. 다른 사람들은 매일 먹지만 성아가 필사적으로 외면했던 그 고칼로리 음식들을 배달 앱으로 주문했다. 매운 로제 떡볶이와 치즈 감자튀김.

배달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성아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배달 비닐봉지를 뜯었다. 봉지가 열리자 짙은 고소한 기름향과 매콤달달한 로제 소스 향이 썰렁한 방 안에 순식간에 퍼졌다.


성아는 떡볶이를 한 입 가득 밀어 넣었다. 실컷 먹어서 이 짓눌리는 기분을 음식으로 채워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억지로 씹어 넘기려 하자 토할 것만 같았다.

성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방송 화면에 뼈말라로 나오고자 주기적으로 맞았던 다이어트 주사, 마운자로의 효과가 아직 몸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는 것을.
성아는 속눈썹도 떼어낸 맨 얼굴에, 손톱도 비어있고, 온몸을 가리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어  더 이상 화려한 조명 아래의 엑셀녀 성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아의 몸은 여전히 그 가혹했던 방송을 준비하듯 식욕을 거부하고 있었다. 화면은 꺼졌지만, 카메라 밖의 성아는 여전히 라이브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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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화: 성아가 양교성이었어?

"토마 오빠 10공수(1백만원) 감사합니다! 앙!"

조명이 뿜어내는 열기와 쿵쿵거리는 비트에 스튜디오 안이 후끈거렸다.
성아는 짧은 탑과 스커트 차림으로 화면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익숙하게 춤을 췄다. 1년 전만 해도 골반을 흔들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고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없다. 감정이 마비된 자리에 남은 것은 오직 모니터 우측 상단에 실시간으로 집계되는 엑셀표의 숫자 뿐이었다.

[8월 14일 후원 현황]
1위: 공주단_한강뷰 - 198
2위: 영차단_준수한사람 - 175
3위: 반짝단_마이나스 - 151

자정을 넘어가자 순위표가 출렁이기 시작했다. 3위 '마이나스'의 숫자가 멈춰 서자, 성아는 한손으로 마이크를 들고 부르던 노래를 계속 부르며 다른 손으로는 테이블의 핸드폰 화면을 터치했다. 익숙한 테크닉이었다. 풀단(후원단) 메신저방에 긴급 메시지를 남기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큰손'들에게 빠르게 톡을 보냈다.

[너의 성아♡: 오빠, 오늘 너무 아슬아슬해요ㅠㅠ 우리 식데(식사데이트) 일정 잡기 전에 양기 한번 더 쏴 주세요💪💪]

[ 반짝단 여러분, 성아 기 한번 살려주세요~ 아, 나 지금 너무 걱정돼. 제발 순위 안떨어지게 도와줘.💙 우리 지금부터 가열차게 영끌할래?]

잠시 후, 꽃가루가 펑 터지며 큰손(고액후원자)이 등장했다. 그 큰손은 성아의 후원그룹인 반짝단 태그를 달았고, 성아는 무대 중앙으로 나와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열심히 골반을 흔들었다.

성아는 큭 하며 헛웃음을 삼켰다. 이번 시즌을 끝으로 드디어 통장 잔고가 7억 원을 돌파한다. 24살. 청춘을 담보로, 타인의 도파민과 욕망을 자양분 삼아 긁어모은 돈이었다. 처음 엑셀판에 들어오며 2년 안에 20억은 벌어서 나가리라 결심 했었다. 목표 금액을 채우면 미련없이 이 바닥을 떠나 조용히 과거를 숨기고 살아갈 계획을 세웠었다. 엑셀을 시작하고 한동안 큰돈이 들어오지 않았으나 어느순간 큰손이 들어오며 터!졌!다! 1년만에 번 7억원은 성아의 처음 계획을 잠시 접게 만들었다. 29살까지 주사맞고 다라이(외모) 가꾸며 100억은 벌어야 겠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한창 라이브가 진행되는 도중, 정신없이 올라가던 채팅창에 눈에 띄는 문장 하나가 멈춰 섰다.

[나그네 : 성아님 혹시 중앙중학교 졸업한 양교성 아닌가요? 암만봐도 맞는데... 와 동창 중에 엑셀 하는 애가 있다니ㅋㅋㅋ]

쿵.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음악 비트 소리도, 번쩍이는 조명도 순간 아득해졌다. 채팅창의 속도가 워낙 빨라 메시지는 금방 위로 올라갔지만, '중앙중학교'와 '양교성'이라는 여섯 글자는 성아의 머리 속에 문신처럼 새겨졌다.

성아는 잠시 서있다 화면 밖으로 나왔다.

"성아, 왜 그래? 렉 걸림?"

"시그(시그니쳐 춤) 안 하냐? 큰손이 쏜 게 얼마인데 뭐해? 먹튀 또 나왔네 ㅋ"

모니터 너머 댓글러들의 야유가 터져 나왔지만, 성아는 한동안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가명을 쓰고 짙은 화장을 하고 두꺼운 가면 뒤에 숨으면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믿었던 세계관이 단 몇글자의. 채팅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린 기분이었다. 누군가 교성을 알아보았다. 나의 과거와, 내 진짜 이름과, 내가 한때 순수하게 웃었던 그 시절을 아는 누군가가 지금 이 미친 엑셀방송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가슴을 튕길 때 부끄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 부끄러움이 소멸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돈 뒤에 숨어있었을 뿐이었다.

성아는 화면 밖에서 레이블 진행자에게 카톡을 보내다.

[오늘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방송 여기까지만 할게요.]

[뭐! 방송 중간에 빠지면 후원 몰수인거 알지? 성아야... 너 왜 그래? 잠깐 쉬고와.]

[저 그냥 갈게요...]

성아가 진짜 스튜디오 밖으로 나가자 진행자는 성아가 몸이 안좋아 응급실 간다고 둘러댔다. 그러자 욕설 채팅이 쏟아졌다.

"야, 미쳤냐? 10억 판인데 지금 끔?"

"먹튀냐?"

"돌은뇬 또나왔네. 퇴출시키자!"


채팅창이 욕으로 도배되었고, 성아의 개인유튜브와 오픈 채팅방에도 불이 났다.
성아는 카톡 알림 소리를 껐다.
라이브 스튜디오 밖으로 동료 여캠(여성 카메라 방송인)들이 따라 나왔다.

"언니 진짜 가는 거야?"

"성아 너 이제 돌아오려면 한달은 욕받이 되야할걸?"

성아에게 조언인지 회유인지 말하는 엑셀여들을 쳐다보는데, 자신과 똑같아 보였다. 눈속 욕망마저 똑같았다.

성아는 조용히 뒤로 돌아 문을 열고 나갔다. 건물 밖은 어두웠다. 환한 조명과 카메라 필터 속에서 웃던 성아가, 두꺼운 화장을 한 벌건 눈의 양교성으로 어두운 길거리에 서 있었다.

성아는 핸드폰을 열어 통장 앱을 켰다. 찍혀 있는 숫자, 708,458,940원. 7억.

"끝이야."

성아는 읊조렸다. 7억을 모았다. 아마 실제 번 것은 30억 가까이 될 것이다. 레이블에서 수수료로 떼가고, 화장하고 다이어트 하고 주사맞고도 7억이나 남았다.

원래 계획이 조금 당겨진 것 뿐이었다.
이제 엑셀녀 성아를 지구상에서 완벽히 지워버려야 했다. 온라인에 돌아다니는 나의 엑셀방송 짤과 캡쳐사진, 쇼츠 영상들, 그리고 성아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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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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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를 비롯한 클래식 명작들이 남성 중심의 서사 구조를 가졌음에도 문화적 완성작으로 추대되는 현상은 대중문화 예술계의 오랜 관행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흔히 '인간 보편의 서사'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나, 그 기저에는 남성 중심의 시각이 절대적 기준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성이 이야기 주변의 조연, 혹은 남성 주인공의 동기 부여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소품-도구로 소비되는 구조는 단순한 연출의 선택을 넘어, 남성 중심 사회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편으로 학습시켜 온 역사 그 자체다.


1. 남성 서사의 보편화와 여성의 부재

예술 매체에서 남성 중심적 시각이 보편성으로 둔갑하는 방식은 정교하다. 온갖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누아르나 서사극 장르에서 남성들의 권력 투쟁, 배신, 그리고 가부장적 유대는 곧 인간의 본성이나 시대의 비극으로 격상된다.

반면, 여성 캐릭터가 서사의 주체로서 서는 순간 작품은 종종 여성 영화라는 하위 범주로 격리되거나 예외적 장르로 취급받는다.

BTS를 케이팝이라는 장르에 가두려는 그래미상이 바로 예외적 장르로 나누는 것이다. BTS라는 대중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미국 백인 주류와 세상의 반 이상인 여성을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남성의 본질은 같다.

여성이 주체적으로 서사를 이끌지 않거나 철저히 배제됨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오랜 세월 동안 남성의 경험만이 인류의 표준 경험으로 주입되어 왔기 때문이다.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를 해체하거나 고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작품조차도, 결국 그 권력의 주체와 객체 모두를 남성으로 설정함으로써 가부장적 문법을 재생산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2. 한국 남성은 백인 남성인가 한국 여성인가?

인종과 성별의 교차점에서 발생하는 모순은 한국 남성의 위치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백인 중심의 서사 구조 안에서 아무리 잘난 한국 남성이라도 종종 타자화되거나 비주류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들이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헤게모니에 비판적일지라도, 가부장제라는 더 넓은 틀 안에서는 백인 남성의 서사나 그들이 누리는 남성 성역에 무비판적으로 공감하는 경향을 보인다.

인종차별에 분노하는 아시아 남성이 동시에 가부장적 남성 연대 속에서는 여성에 대한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모순을 보인다.

백인 남성 중심의 권력 구조가 구축한 남성성의 가치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인종적 차별을 겪으면서도 성별 차별의 수혜자는 되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가 발생한다. 이는 인종차별보다 성차별이 훨씬 뿌리 깊고 광범위하게 내면화되어 있음을 방증한다.


3. 구조적 성차별

사회 기득권에 대한 비판이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남성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구조적 특권을 명시적으로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누리는 이점을 개인의 능력이나 자연스러운 질서로 환원한다.

기득권을 비판하는 목소리 역시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며, 일상과 제도로 이어진 실질적인 특권을 내려놓는 데는 극도로 저항한다. 유색 남성들이 인종차별은 역사적 단절이나 법적 철폐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가부장제와 성차별은 사적 영역과 문화 깊숙이 침전되어 있어 훨씬 더 구조적이고 끈질김을 지닌다.


4. AI의 가부장성

인간 사회의 데이터로 학습된 인공지능 AI가 남성 기득권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AI는 인터넷에 축적된 방대한 역사적, 문화적 기록을 바탕으로 작동하며, 이 기록의 상당 부분은 남성 중심의 시각과 언어로 채워져 있다.

AI는 객관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 사회의 편향을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그 거울을 보며 학습한 AI가 내놓는 답변은 내 주변 남성이 내놓을 것 같은 답변이다.

따라서 기술의 산물인 AI마저도 남성 중심적 서사를 표준값으로 설정하고, 여성을 소외시키는 결과물을 도출하는 것은 현재의 사회적 불평등이 기술이라는 외피를 쓰고 재생산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

완전한 성평등이 결국 인간에 의한 재생산의 중단과 맞물려 있다는 비관적 의견은, 인류의 생물학적•사회적 재생산 시스템 자체가 철저하게 여성의 착취와 통제를 기반으로 설계되어 왔음을 통해 이해할 수 있다.

가부장적 자본주의와 사회 구조는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을 무임금 혹은 저임금으로 착취함으로써 유지되어 왔다.
이러한 구조적 착취가 근본적으로 해체되지 않는 한, 서사와 문화, 그리고 기술의 영역에서 성평등은 언제나 미완의 과제로 남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평등은 단순히 남성 서사에 여성을 예외적으로 끼워 넣는 방식이 아니라, 서사의 기준과 권력의 구조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만 가능할 것이며, 그 시작은 남성 기득권의 철저한 박탈에서부터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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