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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경찰의 수사 진정성에 대해 계속되는 의문
애끓는 성민이 아버지 진노갑의 호소, "어느 인간들이 내 아들 진성민을 죽였는가!!"



첫번째 민현주의 이야기


민현주가 사는 고시원 방 안, 침대가 주인으로 보이는 방에는 사람까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민현주가 일어난 침대 위 천정에는 “반드시 성공”이라는 글자가 붙어있고, 방문에도 무시무시한 구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이러고 그냥 죽을 래? 악 한번 써 보고 죽을 래?]

공동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슬리퍼를 끌며 방으로 돌아온 현주는 침대 위로 털썩 올라 앉는다. 앳된 얼굴 중심에 반짝이며 빛나야 할 눈이 지쳐 보이는 민현주는 작은 거울 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화장품이 어지럽게 들어있는 가방 속에서 몇 가지를 꺼내 얼굴 이곳 저곳에 바르기 시작한다. 화장을 끝내고 옷장 문을 열어 하얀색 셔츠와 검정색 바지를 꺼내 입은 민현주는 비닐 봉지에 싸서 넣어 둔 검정 구두까지 꺼내 신고 나간다. 현주가 미처 닫지 않아 빼꼼 열린 옷장 안에는 하얀색 제복이 걸려 있고, 제복 옷깃에 꽂혀 있는 금속 마크가 반짝인다.

분양 사무소 면접
전화 통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는 분양 사무소 앞에 도착한 민현주. 사무실 안에는 한 쪽으로 책상 몇 개가 모여서 놓여 있고, 가운데에는 책상이 놓여있는 공간보다 더 크게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다. 분양 이라고 쓰인 사무실 유리 문을 밀고 들어간 민현주는 자신을 보고 손짓을 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부터 한다.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면접자 민현주 입니다.

분양사무소 박응근 소장 : 아, 어서 오세요. 이렇게까지 인사를 안 하셔도 되는데. 각이 잡히신 게 막 제대한 군인 같으시네요. 하하. 진짜 군인이셨다고 했나? (박응근은 민현주의 이력서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뒤진다. 별로 어지럽지도 않은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 밖에 없어 보이는데도 민현주의 이력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현주 : 군인은 아니고 해동대 휴학 중입니다.

박응근 : (서류 찾기를 그만두고 머리 속에서 무언가 찾은 듯) 이제 생각나네. 대학생 면접이 하나 있었어요. 아, 맞아요. 그 흰색 제복 입고 다니는 학교 말씀이시죠?

민현주 : 네.

박응근 : 그렇군요. 길에 다니다가 간혹 제복입은 학생들을 보면 참 멋지더라고요. 하지만 저희는 자세한 개인사 같은 건 묻지 않고요. 능력과 의지만 봅니다. 하하. 그런데 어떻게 여성이 뱃사람이 되려고 했어요? 그리고 해동대생이 배타는 일 말고 또 분양사업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셨어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널어 놓는다)

민현주 : 올해 개인 사정으로 휴학한 상태이고요, 복학 준비하면서 경험을 쌓고 싶었는데, 가장 빠르게 성공하는 길이 이 길이라고 판단해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직 어리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박응근 : 나이에 비해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시군요. 잘 생각하셨어요. 경력이 전혀 없으시니까 차차 가르쳐야 할 것이 많겠고. 허험. (슬쩍 반말을 시작하며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민현주님은 일단 기본급 없이 시작하는 걸로 하시고, 저희는 3개월 수습 기간 지나면 실적 참고해서 정규직으로 계약할 수도 있고요, 그때 기본급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인중개사 자격증 준비는 하고 계시죠?

민현주 :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1차 시험 접수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박응근 : 그러시구나. 저희 일이 자격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일하시면서 자격 취득해두시면 앞으로 기회가 더 많아 지실 겁니다. 그런데 영업은 해보셨어요?

민현주 : 영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박응근 : 아, 그러시구나. 저희는 단순 판매 영업이라 기 보다는 투자자를 모시는 일입니다. 걔 중에 영업 일을 쉽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쉽지 않아요. 더더군다나 민현주 님은 사회 경험이나 경력이 전무 하셔서 쉽지 않겠군요. 하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면 남들보다 빨리 성공할 수 있고 말고요. 모두 다 그렇게 들 시작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지금 사시는 곳은 어디에요?

민현주 : 중앙동에서 자취하고 있습니다.

박응근 : (민현주의 자취 란 말에 눈빛이 반짝이며 관심을 보인다.) 아, 자취하시는구나. 혹시 가족관계는?

민현주 : 부모님은 고향에 계시고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 입니다.

박응근 : 내가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열심히 배울 자세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능력 외에도 운도 좀 따라야 하는 일이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요.

민현주 : 조급해 하지 않고 성실히 일해보겠습니다.

박응근 : 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박응근은 눈으로 민현주 아래 위를 훑는다.) 그런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점심 같이 하실래요?

민현주 : 네, 시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합격한 건가요?

박응근 : 십 년 넘게 사람을 상대해 온 제 눈에는 일단 민현주 님이 열심히 하실 분으로는 보입니다. 일단 밥 한끼 같이 하시면서 말씀 더 나누실까요? 식사하러 가시죠.

분양 사무실 인근 매운탕 집
오늘 처음 본 분양사무소 소장 박응근과 직원 두 명을 따라서 민현주는 매운탕 식당으로 들어간다. 비릿한 고추가루 냄새가 식당 전체에 배여 있는 듯 냄새가 풍긴다. 아직 12시가 안 되어서 인지 식당 안은 여유롭다. 현주는 남자들을 따라 신발을 벗고 올라가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는다. 한 직원이 민현주를 소장 옆 자리로 슬쩍 보낸다. 상을 앞에 두고 직원 두 명이 나란히 앉고 민현주와 박응근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민현주는 자리에 앉자 마자 재빨리 수저를 놓고 물컵에 물을 따른다.

직원 나종수 과장 : 새로 오신 우리 동료분께서 아주 예의가 바르십니다. 소장님께서 아주 잘 뽑으셨습니다.(민현주를 보며) 저는 나종수 과장입니다. 처음 인사 드리겠습니다.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민현주 입니다. (앉아서 인사를 하는 나종수를 보고 민현주는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한다.)

직원 변기석 대리 : 저는 변기석 대리입니다. 저도 일어서야 하나요? 하하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변기석을 향해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박응근 : 하하, 우리 회사가 운이 좋은 거지요. 저렇게 예의 바르고 빠릿 빠릿한 신참이 들어왔으니 올해 실적 제대로 올려봅시다. 민현주 주임, 직급을 주임으로 시작하고 내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수습 기간 후에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우리 민현주 주임은 해동대 다니다가 휴학 중이십니다.

민현주 : 개인 사정으로 휴학 중입니다.

변기석 : 해동대가 그 제복 입고 다니는 학교 죠?

민현주 : 네, 그렇습니다. 2학년 휴학 중입니다.

나종수 : 그래서 군기가 들어 보이네요, 하하, 제 친구들 중에서 거기 다닌 애들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순 꼴통 들이었는데 졸업하고 취직하더니 꽤 잘 나가더라고요. 그 학교에 한 번 갈 일이 있었는데 바로 아는 친구는 아니고, 건너 건너 학교 이야기를 건네 들은 적 있는 데 아무튼, 거기 2학년을 2년 차라고 부르던데, 거기도 여학생 수가 좀 되죠?

민현주 : 네.

나종수 : 소장님, 우리 나라 여군들이 참 멋지고 섹시하죠. 상큼한 아가씨들이 제복까지 입으면 끝난 거죠. (과장된 손짓을 보탠다)

박응근 : 멋지다 마다. 우리 민 주임은 특히 더 멋지고 섹시하네. 섹시하다는 말 칭찬인 거 알죠? 하하 (능글맞은 웃음소리)

민현주 : 네, 감사합니다.

변기석 : 그 학교 전원이 기숙사에 들어가 산다고 하던데, 기숙사에서 사셨겠네요?

민현주 : 네.

변기석 : 그런데 거기 소문이 자자 하더라고요. 젊은 남녀를 한 건물에 모아 놓다 보니 연애하느라 난리도 아니라고. 그 학교 근처 산부인과가 그렇게 잘 된대요.

박응근 : 산부인과가 왜?

변기석 : 아이고 소장님, 눈치가 없으시네.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가 연애하다가 보면 별도 따고임신도 하고 할 거 아닙니까? 그럼 산부인과 가서 해결해야 지요. 안 그렇습니까?

박응근 : 아이쿠, 내가 그 생각까지는 못했네. 우리 민 주임도 남자친구 있나요?

민현주 : 아니요. 없습니다.

박응근 : 이렇게 이쁘고 매력이 넘치는데 남자 친구가 없다니.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어.

민현주 :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자 민현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계속 옷을 당겨내리며 불안함을 드러낸다.) 저는 돈부터 벌어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그 후에 만나도 될 것 같습니다.

나종수 : 민현주 씨 데이트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시네. 하하. 아무튼 성공이 중요하죠. 이 일 아니면 인생 역전하기 힘들어요. 대박 나서 인생 폼 나게 살아 봐야지요. 현주씨, 우리가 선배로서 잘 코치 해 드릴게요.

민현주 : .. 아 네.. 감사합니다.

나종수 :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 알죠? 열심히 하면 그만큼 보상이 오는 일이니까 열심히 해요.

박응근 : 나 과장이 잘 지도해줘요. 영업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VIP 명단도 공유하고. 우리 미스 민, 함께 잘해 봅시다. (박응근은 옆 자리에 앉아있는 민현주의 무릎에 슬쩍 손을 올린다.)

민현주 : (민현주는 몸을 뒤로 뺀다. 그럼에도 박응근은 실실 웃으며 민현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자신 쪽으로 당긴다.)

박응근 :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여기 남들 다 보는 데서 내가 무슨 이상한 마음이라도 먹었을까봐? 미스 민, 나를 큰 오빠라고 생각해. 아니 학교 다니면서 남자들 하고 친하게 지냈을 것 같은데 거기서 뭐 이런 거 스킨쉽 같은 거 장난 치고 안 그랬어? 거기는 고자들만 있나? 하하

민현주 : (굳은 표정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듯 보이던 민현주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박응근의 팔을 손으로 들어 힘껏 잡아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변기석 : 저렇게 가게 둘까요? 신고하는 거 아닐까요?

나종수 : 아니, 소장님이 뭘 어쨌다고? 모텔로 끌고 가길 했어, 춤을 추자고 했어? 그리고 여기 카메라 없는 집이야. 아무 증거도 없는데 어쩔 거야?

박응근 : 튕기긴. 나 과장 내일 전화해서 다시 불러.

변기석 : (나 과장에 질 세라) 뭘 좀 아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지간히 까칠하게 구네. 휴학했다 면서 요. 분명히 무슨 사고를 친 게 맞을 거에요. 남자 문제라고 99프로 확신합니다. 그런데 다시 부르시려고요?

박응근 : 기석이 너랑 종수가 알아서 잘했으면 실적 보고 스트레스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가 관리도 귀찮고 눈에 거슬리는 여자를 왜 뽑아? 내가 혹시 너희 대신 영업 실적이라도 올려 줄 수 있을까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은 거다. 그래도 니들보다는 패기는 있어 보였어. 저런 애들이 영업 일은 또 잘할지도 모르니까. 요즘 애들 시간당 몇 천원 받는 일 못 해.

나종수 : 네, 소장님의 깊은 뜻을 제가 미처 파악을 못 했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해서 다시불러 다 앉혀 놓겠습니다. 한 잔 하시죠. 하하





두번째 김지훈의 이야기
컨테이너선 텃세호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는 때, 김지훈이 삼등 항해사로 일하는 선박 텃세호는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막 출항을 시작하고 있다. 김지훈은 하얀색 안전모를 쓰고 흰색 작업복을 입고 무전기를 들고 갑판에 서 있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며 부두에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김지훈은 선미에서 갑판원들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지훈이 로프 감긴 상태를 확인하려고 발로 툭툭 차다가 손을 댄다. 선교에서 이 모습을 본 선장 위동선이 무전기로 소리를 지른다.

위동선 : 삼항사! 야 이 멍청이. 너 또 말 안 들었지! 줄 잡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스탠바이 끝나자 마자 올라와!

김지훈 : 네.

전 선원이 듣고 있는 무전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선장의 욕설이 들리자 주변에 있던 외국인 갑판원과 조리장이 김지훈의 눈치를 본다. 김지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전기에 대고 대답을 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출항을 돕던 배들이 항구로 돌아가고 파일럿도 하선한다. 그런데 김지훈은 계속 항구를 바라보고 갑판에 서 있다. 해가 거의 다 지고 있다. 배가 항구를 떠나고 육지에서 먼 바다에 이르자 비로소 김지훈은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하얗게 칠해진 철판 바닥은 김지훈의 신발 바닥을 쌀쌀맞게도 도로 퉁겨낸다. 김지훈이 선장 방 문 앞에 선다.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김지훈은 그대로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때 선박 내 방송이 울린다.

위동선의 선내 방송 : 삼항사 이 새끼 어디 숨었어! 당장 브리지로 올라와!

선장 방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던 김지훈은 방송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한 층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 선장이 있는 선교에 도착한다. 선교에는 외국인 갑판원과 실습 항해사가 앞을 보고 서 있다. 김지훈이 급히 선교로 들어왔는데도 두 사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서 있다.

김지훈 : 선장님, 방에 계신 줄 알고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동선 : 내가 방에 왜 있어? 올라오라면 바로 올라와야 지. 어디서 요령 피우다가 이제 올라와!

김지훈 : 죄송합니다.

위동선 : 삼항사, 내가 시키는 대로 안하고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김지훈 : 좀 전 출항 때 긴장하는 바람에 대답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위동선 : 계속 이러면 우리 배 사고 날 수도 있어. 이번 항차도 제대로 못하면 회사에 보고해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할 거야. 그러면 자네는 3년 의무 승선 못 채우고 군대 끌려가는 수가 있어.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알겠어?

김지훈 : 네, 똑바로 하겠습니다.

위동선 : 내가 자네를 잘 가르쳐서 같이 가려고 하는데 왜 노력을 안 하나? 뭐가 어려운데? 어디 한번 말해 봐.
김지훈 :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위동선 : 아니, 지금 말해봐.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어. 실항사, 조타수 데리고 윙에 잠시 나가 있어.

실항사 여현지, 조타수 지미 : (두 사람은 위동선의 말에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다.)

김지훈 : 저도 열심히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선장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 다 듣고 있는 무전기나 방송 말고 다른 방식으로 호출하시거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오피서 인 데 기관부나 갑판원들 앞에서 지적을 받으면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위동선 : 아니, 이 새끼! 정신을 못 차렸네. (위동선은 김지훈의 얼굴을 철썩 때린다.) 너 때문에 배가 박살 나게 생겼는데 나보고 지금 무전기에 대고 말하지 말고 너한테 편지 써서 부치고 전보 치라고? 이 멍청한 놈, 니가 내 선장 경력에 빵구를 내고 있는 거 알아 몰라! 너 홍콩에서 바로 하선 시킬 줄 알아. (쓰러져 있는 김지훈을 내려보며 마구 폭언하는 위동선)

김지훈 : (위동선의 손에 얼굴을 맞고 벽에 부딪혀서 바닥에 넘어진 김지훈은 마치 본인 실수로 넘어진 듯 벌떡 일어나 위동선에 오히려 다급한 얼굴로 매달린다.) 선장님, 죄송합니다. 잘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위동선 : 너 학교 다닐 때 사고 친 거 회사에서 다 알면서도 사람이 없어서 일단 뽑았을 거야. 그렇다고 내 배에서 너 사고치는 거는 내가 절대 두고 못 본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실수하지 마. 아! 시끄럽고 일단 실항사, 조타수 들어오라고 해. 나가.

김지훈 : (김지훈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선장의 등을 향해 인사를 하고 조타수와 실항사가 서 있는 선교 옆 문을 연다.) 실항사, 선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지미, 컴인..

다부진 눈매의 실항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김지훈에 아무런 대답 없이 선교로 복귀한다. 위동선 선장과 실항사 여현지, 조타수 지미가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도 김지훈은 선교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자리를 조용히 떠난다. 여현지는 선장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커피 주전자 스위치를 올리고 믹스 커피 봉지 하나를 꺼내 든다. 찻숟가락으로 살살 저어 믹스커피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 위동선 앞으로 들고 간다.

위동선 : 저 새끼, 사고를 정신 놓고 살다가 사고를 치던 자살을 하던 뭔 짓이라도 벌릴 놈이야. (잔뜩 화난 얼굴로 혼잣말을 하던 위동선은 여현지가 들고 온 커피잔을 보고 얼굴에 살짝 긴장이 풀린다.) 오 그래. 현지야, 출항 하느라 고생했다.

여현지 : (동그란 눈을 옆으로 길게 빼 웃으며 위동선에 커피잔을 내민다. 앞을 바라보는 여현지의 눈에 차선 하나만 나 있는 길이 보이는 듯하다.)



텃세호 김지훈의 방
그날 밤, 김지훈은 자신의 방안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핼쑥한 얼굴과 새까맣게 탄 팔뚝으로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의 김지훈은 아무 것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톡 메시지 창]
박범준(삼등기관사) : [ 지훈 선배, 아까 식사 못하신 거 같은데 저랑 라면 한 그릇 하실래예?]

김지훈 : [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 아직 안 자니?]

박범준 : [ 오늘 힘드셨죠?]

김지훈 : [ 무전기로 다 들었지?]

박범준 : [ 네… 그래도 다들 형님이 잘 견뎌 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힘내세요.]

김지훈 : [ 다 들었겠지. 못 들었 리가 있나… 그래, 쉬어라.]

김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뒤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충분히 오래 정적이 흐르고 김지훈은 화장실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다.





세번째 주병성의 이야기

주병성의 해군 부대 회식 자리, 식당 별실에 차려진 긴 상을 앞에 두고 검정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모여 앉아 있다.

최윤식 소위 : 중위님, 오늘 부대장님은 못 오십니까?

이도윤 대위 : 못 오신다고 했어. 올 사람들 다 왔나?

최윤식 : 네, 인원 체크 해보겠습니다. (최윤식은 자리에서 서서 앉아 있는 사람들 수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센다. 단순하기 그지없다.) 총 인원 8명으로 확인 완료했습니다.

이도윤 : 그런데 우리 끼리 이렇게 마시고 끝나나? 예쁜 손님들은 없어?

최윤식 : 하하, 소대장들 애인 집합 시킬까요?

이도윤 : 소대장들 애인 부르면 뭐하나? 다 임자가 있는 데. 없는 아가씨들을 불러야 지.

최윤식 : 그럼 요. 애인들 올 때 친구들 데리고 오라고 자동 전달합니다. 자자, 전우 여러분, 중대장님이 특별 게스트분들 초대하자고 하십니다. 다들 연락 돌리시고요. 선착순 도착에 따라 상점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결혼 안 한 주병성 소대장, 지금 바로 애인 부르고 친구 2인 이상 같이 오라고 해.

주병성 : 아, 제 여자친구 지금 시험기간이라서 못 올 겁니다.

최윤식 : 어, 그래 시험기간? 오, 고시라도 준비하시나 보지?

주병성 : 아니요, 아직 대학생입니다.

최윤식 : 대학생? 오 풋풋 쩌는 데. 중대장님, 여대생 어떠십니까? 주병성이 애인이 대학생이랍니다.

이도윤 : 주병성, 관심사병 주제에, 제 일은 잘 못하면서 어린 여자 꼬시는 능력은 있구나. 대단한데.

최윤식 : 병성아, 어서 전화해서 불러.

주병성 : 죄송하지만, 오늘은 부르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에 부르겠습니다.

최윤식 : 어쭈? 명령 불복종이야? 너 잠깐 밖으로 나와 봐. 중대장님, 잠시 나가서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이도윤 : 최 소대장, 관심사병이야, 살살해. 하하.


식당 앞 도로변
최윤식을 따라 주병성이 식당 슬리퍼를 끌고 식당 밖 도로가로 나간다.

최윤식 : 주병성, 너 뭐가 그렇게 잘났냐?

주병성 : 아닙니다.

최윤식 : 부르라면 부르지 뭔 핑계를 대고 그래!

주병성 : 시험 때문에 못 온다는 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지난 번에 그 친구를 저희 부대 술자리에 한 번 불렀었는데 다시는 안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술자리에서 간부들이 성희롱 해서 싫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참는데 만약에 또 부르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때는 저랑 헤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최윤식 : 쯧쯧. 너는 출세하기 글렀다. 그렇게 눈치가 없고 요령이 없어서 어디 출세는 커녕 군 생활도 제대로 끝내겠니?

주병성 : 솔직히 회식 자리에 왜 여자친구를 불러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최윤식 : 뭐? 그럼 지금 온다는 다른 소대장들 애인들은 제 정신이 아니어서 택시 잡아타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주병성 : 그건 아닙니다.

최윤식 : 알았어. 소문대로 아주 지능적이야. 방출된 부대에서 들리는 소리가 전부 팩트라더니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학교 때부터 소문이 자자했다며? 그렇게 잘 나서 살인 하고도 저만 멀쩡하게 군복부 하나 보네. 넌 제대 날만 기다리고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뿌리 박을 사람들이라서 여자친구 마누라 누구라도 불러 다 바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 먼저 들어간다.

주병성 : (최윤식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주병성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는 지 식당 옆 플라스틱 의자로 가서 슬며시 앉는다. 표정 없는 야윈 얼굴로 손등에 난 까진 상처를 쳐다본다.)


식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
- 주병성 이 새끼, 지 애인 아까워서 못 부르겠답니다.

- 뭐, 수준 안 맞아서 같이 놀기 싫다고? 풋풋한 여대생들하고 같이 좀 놀자는데 우리가 그렇게이상해?

- 주병성 저 새끼, 어디서 잘난 척이야? 관심사관 딱지에 살인자 라는 소문도 있는 주제에.

- 그런데 그거 진짜입니까? 주병성 소위님이 살인 사건에 관련되어 있습니까?

- 해동대 다닐 때 여러 명이 짜서는 한 명 죽였다고 소문이 다 났어. 조심해. 까불다가 너도 죽을 수 있어. 하하

주병성 : (가게 벽 하나를 넘어 생생하게 들리는 뒷담화에 손을 파르르 떤다.)

주병성은 휴대폰을 열어 문자 메시지를 입력한다.

주병성 : [ 바쁘니? 잠깐 오빠 보러 올 수 있어? 지금 회식 중 인데 보고 싶어서. ]

자영의 답장 : [ 회식? 어이가 없네. 우리 이미 끝난 거 몰라? 여자 친구를 무슨 시간당 도우미 정도로 대하는 인간들 편을 드는 오빠를 더는 이해해 줄 수가 없어. 연락 차단하는 것 이해해 줘…]

주병성은 답장을 읽고 다리가 풀린 듯 플라스틱 술 상자 위에 털썩 앉는다.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갖다 댄다. 잠수라도 하는 듯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 마신다. 들이 마신 연기를 다시 내뿜어야 할 텐데 주병성은 날숨을 잊었는지 정면만 응시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겨우 연기를 내뿜고 붉게 충혈된 병성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삶의 궁지에 몰린 세 사람. 이야기는 1년 전으로 돌아간다.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청와대 앞 시위장면

청와대 앞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진성민을 살려내라, 진성민은 타살이다, 성민아 미안해, 국가가 죽인 대학생 진성민 등의 펫말을 들고 시위 중이다. 언론사 기자들보다 많은 유튜버들이 모여 각자 방송하느라 바쁘다.

시위 가담자 인터뷰 : 네, 저는 진성민 군이 타살 당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금 언론사들이 모두 두 입을 닫고 있잖습니까? 경찰도 앞 뒤가 안 맞는 설명을 하고 있고요. 이걸 어떻게 믿나요? 경찰도 검찰도 언론도 이 정권에 모두 매수됐어요. 저희는 유튜브만 믿어요. 유튜브가 진실이고 정의입니다. 여러분!!!

시위대 : 성민이를 살려내라. 국민의 명령이다. 해동대를 해체하라! 국공립대통폐합 지금 당장 실시하라! 마피아 보다 더 악독한 해양계 카르텔을 당장 척결하라!
시위대 가담자 인터뷰 : 아니, 진성민 군의 죽음은 이상한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술먹다 객사했다 실연당해 자살했다 라고 막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고인지 살해인지 판가름을 하려면 일단 CCTV를 까야 될 거 아니에요? 왜 안 깐대요? 국립 해동대가 총장 사유지인가요? 전부 국민 세금으로 지어준 건물이고 세금으로 월급 주는 거 아니에요? 누가 은폐하려고 하고 감추려고 하는지 청와대가 당장 밝혀야 합니다! 청와대도 공범이다!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이 유튜브에 출연한다

진성민 부친 진노갑은 아들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주장하며 친 언론 행보를 한다.

유튜브 방송 [오른손으로비비고]의 진행자 남포동둘째가 해군 베레모를 쓰고 등장한다.

남포동 둘째 : 필승! 안녕하십니까? 첫째가 안 되어도 좋은 남포동 둘째가 돌아왔습니다. 먼저 구독자 여러분 후원에 감사! 감사! 대감사! 를 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난번 방송에 이어 오늘도 전국민의 대중적 공분을 사고 있는 바로! 전도 유망한 해동대생 살인사건과 관련한 충격적인 진실을 공개합니다. 예고해 드린 대로 타 언론 방송국 어디서도 하지 못했던 고 진성민군 아버님과의 단독 인터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구독 좋아요 완료하신 분들께 감사 드리고 다시 이어 가겠습니다!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 해동대생 사망사건이 이제 살인 사건으로 확실시되며 사건 정황이 사이버렉카 수사대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수사대이죠. 정의를 찾는 우리는 절대 이 사건을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사건으로 그냥 묻히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 해동대생 살인 사건으로 한층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고대로 아주 어렵고 특별하게 모신 게스트 분을 소개해드립니다. 바로 진성민 군의 아버지 진노갑 협회장님 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진노갑 : 안녕하십니까, 진성민 아버지 진노갑입니다.

남포동 둘째 : 아, 먼저 호칭을 진 협회장님이라고 해야 할 지, 성민군 아버님으로 해야 할 지, 어떻게 하는 것이 편하실까요? 이 자리에 어렵게 모신 우리 성민군 아버님이 바로 국제해수발전협회 회장님이십니다.

진노갑 : 그냥 성민이 아빠로 불러주세요. 우리 성민이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밝히고자 저는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백의종군 중인 사람입니다.

남포동 둘째 : 먼저 아버님께서 의문을 제기하시는 부분을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고 타당성이 상당하다고 많은 분들이 판단해주시고 계시거든요.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해주세요.

진노갑 : 네, 먼저 제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들이 계신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호소하지만 아무 힘이 없어서인지 경찰이나 검찰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제발 제 피 끓는 호소를 들어 보시고 냉정하게 판단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의 합리적인 의심은 가장 먼저, 제 아들 성민이가 왜 의식불명인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게 되었나 에서 시작합니다. 해동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제 아들 진성민은 규율이 엄격한 해동대에서도 학교 생활을 착실히 하고 성적도 좋은 우등생이었습니다. 평소 솔선수범하여 받은 상점도 상당한 학생이었습니다. 금요일부터 시작된 연휴 동안 동아리 모임을 했고 술을 조금 마셨나 봅니다. 그런데 동아리방에서 친구, 선후배들과 다 같이 술을 마셨는데 저희 아이만 건물 밖에서 다친 상태로 발견됩니다. 그것도 같은 동아리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말입니다. 함께 술을 먹었는데 왜 저희 아이만 다쳤고, 그것도 우연히 지나가던 같은 학교 학생이 발견을 했을까요? 싸움이 있었고 선배들이 우리 성민이를 집단 괴롭힘 한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두번째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이영기라는 간부급 학생이 성민이가 다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를 합니다. 성민이 체육복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바로 옆 건물 동아리방으로 찾아가 김지훈을 깨웁니다. 김지훈은 이영기와 같은 과로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영기가 우리 아이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한 시간은 새벽 6시 25분이고 제가 연락을 받은 시간은 아침 8시가 넘어 서입니다. 정확히 8시 44분인데요, 왜 부모에게 연락을 바로 하지 않았냐는 점입니다. 해동대생들이 정부로부터 지급받아 입는 체육복에는 상하의 모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처음 발견한 이영기 학생도 바로 저희 아이 이름을 확인했고 학과 학년까지 다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 김지훈과 주병성은 성민이가 119 구급차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성민이가 이 둘의 친한 동아리 후배라면 과연 이것을 정상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들이 집단 가해자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세번째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저희 성민이과 같은 동아리에 소속된 후배인 민현주라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가 이 여학생에게 사고가 일어난 그날 밤 여러 번 전화를 하는데요, 통화 연결이 된 것은 두 번으로 나머지 9번은 모두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휴대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민현주 여학생은 갓 들어온 1학년이었고 해동대에서는 바로 직속 선배의 전화나 호출은 바로 응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총 아홉 번의 통화가 거부되었던 것으로 보아 제 아이와 사귀는 관계가 아니었나 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왜 밤중에 전화를 열 번 넘게 하고 또 받지 않았을까요? 저희 아이는 누구를 스토킹 하거나 괴롭히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점잖고 누구보다 예의 발랐으며 아버지인 저의 업을 존경한다며 열심히 노력해 해양계로 진학한 속이 깊은 아이입니다. 민현주라는 후배 여학생이 저희 성민이의 사망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저는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민이의 죽음 이후 학교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덮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측에서 감시카메라 영상 열람에 협조를 해 주었으나 가장 중요한 증거가 담긴 녹화 영상은 없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경찰도 단순 음주사망사고로 처리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저는 여기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김지훈, 주병성, 민현주를 고소하고자 함을 밝히며 법 앞에서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전도유망한 한 젊은 이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묻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다른 모든 젊은 청춘들을 위해서 제발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진실을 밝히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낱낱히 밝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남포동 둘째 : 네, 성민군의 아버지의 절절한 호소 잘 들었습니다. 국제협회에서 장으로 계신 권위있는 분이신 데 이렇게 부정까지 넘치는 다정하신 분입니다. 반드시 이 성민군 사건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가해자를 찾아내야 할 것이고요, 이름이 민현주라는 여학생인가요? 우리가 백 번 양보해 성민군과 사귄 것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던 진성민 군이 이렇게 된 것에 일말의 책임감은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충격적인 증언이 폭로됩니다. 두둥! 민현주 임신설! 아이 아빠는 누구라는 것일까요?
저희가 원하는 진실을 신속히 밝혀 주시기를 호소 드리고 후원 부탁드립니다. 모든 후원은 더 좋은 방송 제작을 위해 쓰입니다. 오늘 진성민 군의 아버지 진노갑 협회장님을 모시고 가장 진실에 근접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것도 바로 여러분의 후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유튜버 진사탐 (진실을 사랑하는 탐사대)의 영상

진사탐 영상 나레이션 : (조잡한 영상이 반복 재생되는 가운데, 가공된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흘러 나온다.) 저희가 제기하는 의문점은 용의자 김지훈이 왜 진성민을 죽였냐는 바로 살해 동기입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진성민 군이 동아리 후배 민현주와 순정적인 무언가(스토킹의 미화표현)가 있었다는 사실은 휴대폰 포렌식과 주변 증언을 통해 확인이 되었는데요, 그러므로 김지훈이 선배라는 위치를 이용해 민현주를 뺏으려 하다가 진성민을 술김에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주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친구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영상 증거에 김지훈이 성추행 즉, 민현주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과 이어 진성민이 분노하는 표정이 다 공개가 되었고요. 이로써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김지훈에게 강력한 살해 동기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혹의 증거로 보이는 점은, 핵심적인 감시카메라 영상을 공개하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 국민적인 관심을 끄는 사건이라면 무엇보다 유가족과 고 성민 군을 위해서 전부 공개하여 고인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심하면 등장하는 해양계 카르텔이 다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학교와 업계가 뭉쳐서 진성민 군의 죽음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공개하기 두려운 것일까요? 무엇을 진사탐과 국민들은 해동대 총장 사퇴, 해동대 해체 및 통폐합, 가해자 처벌을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전도유망했던 진성민 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국민들을 위해서 모든 진실은 하루빨리 밝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구독자 여러분, 오늘 가장 의심스러운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는데요, 김지훈과 절친이자 진성민 살해사건 공범 용의자인 주병성의 부모가 해동대 총장 부부과 같은 모임을 하는 유력인사라고 하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주병성은 학군단 후보생으로 정학 처분을 받게 되면 바로 군대에 사병으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총장과 친분이 있는 부모가 힘을 써서 주병성을 학교 차원에서 적극 방어하려고 성민군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정학이 아닌 퇴학 처분을 내려야 하고도 남고요, 현 정권에서 발탁한 정제신 해수부 장관과 밀접한 사이라는 해동대 총장 정대해와의 관계를 낱낱이 밝혀야 함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구독자 여러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진사탐을 위한 화끈한 후원을 부탁드리고 어제의 최고금액 후원자 ksh0504님 감사합니다!!



다시 시간은 사건 당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 아침 해동대 기숙사

진성민이 사망한 날 아침, 이영기가 기숙사 건물에서 걸어 나오고 진성민이 쓰러진 곳을 지나간다. 토요일 아침 6시, 이영기가 주말마다 가는 영어 학원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온다. 해동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 4학년 이영기는 어제 금요일부터 시작된 연휴에도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학생들처럼 술판을 벌려 밤새 놀지 않았다. 졸업 후가 걱정되는 이영기는 토익책을 싸 들고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한 채 학원으로 가는 중이다. 축축한 아침 공기에 누가 소주를 타기라고 한 듯한 알코올 냄새는 캠퍼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술병 안에 남은 술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영기가 기숙사 서쪽 현관문을 열고 나와 걷는다. 해가 뜨긴 했으나 아직 퍼런 기운이 남아있다.
동아리 방들이 모인 건물 옆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이영기는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경사면에 만들어진 길은 아무런 추락 방호장치나 방지펜스가 없는 상태로 2미터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길이다. 이영기는 아래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약간 떨어져 있는 계단으로 뛰어가 내려 간다. 내려가면서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윗 길을 쳐다 본다. 이영기는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흔들어 본다.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확실하지 않아 당황한다.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이 입고 있는 체육복에서 이름을 찾는다. 곧바로 다친 이는 2학년 학생 진성민임을 확인한다. 이영기는 어떻게 할까 서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119 구급차를 부른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쓰러져 있는 진성민을 들 것으로 옮겨 싣고 병원으로 간다. 이영기는 학원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한다는 생각을 하며 학원 가방을 꽉 쥐고는 옆 건물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 간다.


김지훈이 밤새 술을 먹고 동아리방에서 자고 있다.

(계단을 뛰어 올라와 가쁜 숨을 내쉬는 이영기가 쾅 하고 문을 연다. 문은 열렸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안을 쳐다보고 서 있는다. 내부에는 지난 밤 술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가득하다. 방 여기저기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 사람들이 대충 열 명은 되어 보인다.)

이영기 : 야, 김지훈, 일어나 봐.

김지훈 : 어, 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는 척 눈을 감고 자고 있던 김지훈이 눈을 뜬다. 이영기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한다.)

이영기 : 빨리 일어나서 나와 봐. 큰일 났다.

김지훈 : 왜? 무슨 일인데? (큰 일이라는 말에 김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한다. 이영기와 함께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 온 김지훈은 어제 밤의 숙취로 인해 눈빛이 흐리다.)

이영기 : 진성민이 너희 동아리지?

김지훈 : 성민이가 왜?

이영기 : 좀 전에 119 불러서 병원 갔어.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김지훈 : 뭐라고? 심각하다니?

이영기 : 내가 좀 전에 학원 가려고 나오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김성민을 발견 했어. 주변에 피가 많이 흘러 있었고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바로 119를 불렀고 대양병원으로 간다고 했어. 일단 김성민 부모님 연락처 아니?

김지훈 : 어, 내가 연락할 게. 어느 병원이라고?

이영기 : 대양병원.

김지훈 : 알았어.

이영기 : 그런데 나 지금 학원가야 해. (의심과 냉정을 담은 눈빛으로 김지훈을 쳐다본다.)


김지훈은 동아리 방으로 돌아와 주병성을 불러낸다. 주병성은 이미 이영기가 문을 열고 김지훈을 방에서 불러 냈을 때부터 깨어 일어나 앉아 있었다.

김지훈 : 성민이가 다쳤나 봐. 구급차에 실려 갔대.

주병성 : 뭐? 많이 다쳤대?

김지훈 : 그런데 성민이 혼자 새벽에 어딜 나갔던 거야?

주병성 : 현주, 사당 보낼 때 먼저 가 숨어 있다가 늦게 내려온 거 아니야?

김지훈 : 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무언가 알아낸 듯한 표정)

주병성 : 다른 방에 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어떡하니? (지훈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따라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김지훈 : 일단 집에 연락 드리고 병원으로 가보자.

주병성 : 너 진성민 집 번호 알아?

김지훈 : 어

김지훈과 주병성은 아직도 여러 명이 널 부러져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집어 입고 나온다.



택시를 잡는 김지훈, 주병성. 택시 안, 이어 대양병원에 도착 후 택시에서 내린다.

건물을 나와 잠시 걸어서 큰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 안에서 김지훈은 성민의 집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김지훈은 더 이상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주병성과 김지훈은 말이 없다. 택시는 곧 대양병원 앞에 멈춘다.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간 김지훈과 주병성은 누워있는 진성민을 바로 알아본다.

응급실 간호사 : 진성민 환자 보호자 이신가요?

김지훈 : 학교 선배 인데요, 부모님께는 연락 중입니다.

응급실 간호사 : 보호자 오시면 확인 후에 수술 들어가야 합니다.

김지훈 : 그런데 얼마나 많이 다쳤나요?

응급실 간호사 : 다발성 골절상을 입은 걸로 일단 보이는데 의사선생님 오실 거에요. 잠시 기다리세요.
(곧 의사가 이들 쪽으로 걸어온다)

의사 : 진성민 환자가 오른쪽 팔과 다리가 골절된 것으로 보이고요, 잠시 후에 MRI 촬영 하고나서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해동 대학 학생들이시라고요. 저희 병원과 업무협약이 되어 있어서 일단 개인정보를 저희 자료로 확인했고, 수술 동의 때문에 보호자께 연락 드렸다고 합니다.

김지훈 : 병원에서 보호자 연락처를 아시나요?

의사 : 네, 지금 내려오신다고 했어요. 여기 오신 두 분은 학교 친구들이신 가요?

김지훈 : 저희는 학교 선배들입니다. 그런데 괜찮을 까요?

의사 :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영구 장애가 생길 수도 있어 신속하게 수술을 해야 합니다.

주병성 : 네?

김지훈 : 그렇게 많이 다쳤나요?

의사 : 과음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 같은데, 어떻게 다친 건지 자세히 알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주사를 맞고 잠이 든 건지 의식이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진성민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지훈과 주병성을 두고 의사가 떠난다. 김지훈과 주병성을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는 진성민을 쳐다본다. 진성민은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고 옷도 입지 않은 채 였다.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은 피가 새어 나온 붕대로 감겨 있다.



병원 밖 편의점의 김지훈과 주병성

음료수를 꺼내 계산을 하고 편의점 밖으로 나온다.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져 있음에도 두 명은 서서 음료를 마신다.

주병성 : 진성민 부모님한테 연락했다고 하니 오고 계시겠지?

김지훈 : 했다고 하니 한 모양이지. 저 진성민 부모님 본 적 있어?

주병성 : 아니. 그런데 진성민 다친 걸로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냐?

김지훈 : 우리도 상황을 모르는데 뭘, 저 혼자 다친 걸 가지고 뭘 어떻해?

주병성 : 그런데 아까 이영기가 뭐라고 했다고?

김지훈 : 새벽에 발견했을 때 피를 많이 흘렸고 의식이 있는 지 없는지 모른다고 말했어.

주병성 : 그런데 거기서 왜 쓰러져 있었대? 아니 길 가다가 왜 넘어 졌대?

김지훈 : 그러게. 어제 현주 사당 갔다가 내려올 때 같이 온 건 아니야?

주병성 : 그때 같이 안 온 것 같아. 현주하고 명식이, 유환이가 같이 방으로 돌아 왔어. 현주가 하나도 놀래지를 않았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뒤 따라 갔던 무용이 형은?

김지훈 : 무용이 형이 성민이랑 같이 내려온 것 아니었나? 무용이 형한테 전화해 봐.

주병성 :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건다. ) 네, 무용이 형 저 에요. 저 지금 저희 대양병원에 와 있어요. 병원으로 좀 오세요. 큰일 난 거 같아요. 성민이 수술 들어 간대요.

김지훈 : 무용이 형 오신 대?

주병성 : 어, 바로 온대.



응급실 문 앞을 서성이던 두 사람을 간호사가 부른다.

간호사 : 진성민 보호자분, 이리로 잠깐 들어오세요.

김지훈, 주병성 : (간호사가 부르자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두 사람이 따라 들어간 문 안쪽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의사가 서 있고, 의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김지훈과 주병성의 숙취를 읽어낸다.

의사 : 진성민 환자 안타깝게도 방금 사망하셨습니다.

김지훈, 주병성 : 네? 뭐라고 요? 왜요?

의사 : 가족분들이 오고 있으시다고 했죠? 연락 가능 하시면 지금 연락 드려 주시고요.

김지훈과 주병성은 의사의 사망 선고에 눈동자가 요동친다.

주병성 : 지훈아, 빨리 전화부터 드려. 전화 줘 봐. 어서! (주병성은 벌벌 떠는 듯한 김지훈의 휴대폰을 뺏어서 락을 풀어 달라고 다시 지훈에게 휴대폰을 들이 민다. 김지훈은 휴대폰 락을 풀어주고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진성민 선배입니다. 병원 연락 받으셨다고요? 그런데 일단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민이가 지금… 의사 선생님이 사망이라고 방금 말씀을 하십니다.

김지훈 : (손을 떨며 전화하고 있는 주병성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다.)
(이무용이 응급실 앞으로 도착한다.)

이무용 : 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성민이는
주병성 : 형, 성민이 사망했대요.

이무용 : 뭐라고? 왜?

주병성 : 모르겠어요. 저희는 아는 게 없어요.

이무용 : 지훈아, 너 어제 술 얼마나 먹었어? 다 기억나?

김지훈 : (바닥에 붙어 정신이 나간 듯 보인다.)

이무용 : 이 새끼, 정신이 나갔어? 너 정신 차려! (이무용이 김지훈의 머리를 때린다)

주병성 : 형, 이러지 마세요. 성민이 부모님 오신다고 했어요. 저희 어떻게 하죠?

이무용 : 지훈이 저 새끼 일으켜 세워. 저리로 가자.

주병성은 김지훈을 겨우 일으켜 세워 응급실 밖으로 나간다.


세 사람은 병원 뒷편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무용 : 니들 정신 똑바로 챙겨! 사람이 죽은 사건이야.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김지훈 : 술 먹다가 사당 다녀오고 그러고 술을 더 먹고 잔 기억밖에 없어요.

주병성 : 저도 성민이가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이 안 나요.

이무용 : 일단 학교로 가서 기숙사 서쪽 카메라부터 확인해야겠다. 그런데 현주는?

세 사람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시간은 사건이 있었던 전날로 돌아간다.



해동대 목요일 단체 집합 전 기숙사 방 안

진성민은 복장 점검을 준비하고 있다. 검정색 모자에 묻은 작은 얼룩을 지우고, 검은 구두를 반질반질하게 닦고 있다. 친구 공명식이 성민에게 다가온다.

공명식 : 오늘 복장 점검 태평양이래. 성민아, 내 것도 좀 해주라.

진성민 : 농담해? 니가 해.

공명식 : 너 집에 가냐?

진성민 : 아니, 과제도 해야 하고 동방 모임도 있어서 기숙사에 남으려고.

공명식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건은 민현주? 흐흐

진성민 : 할 일이 많다고 했잖아. 넌? 가냐?

공명식 : 집 갔다가 일찍 올 거야. 엄마가 제발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해서 갔다 오려고. 와서 같이 한잔 해. 민현주도 부를까? 흐흐

명식과 성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유환이 돌돌이를 들고 다가온다.

조유환 : 니들 지금 1학년 여학생 민현주 말하니?

공명식 : 어, 너 알아? 성민이가 완전 좋아하잖아. 흐흐
진성민 : 진성민의 눈이 동그래져 유환을 쳐다본다.

조유환 : 우리 동문 선배랑 사귄다는데. 지훈이 형. 니 네 동아리 아니야?

진성민 : 김지훈 형? 아니야!

조유환 : 이나라고? 사귄다던데? 혹시 민현주 걔가 너한테도 흘리고 다닌 거야? 웃긴 애네.

공명식 : 나도 민현주 얼굴 아는데, 민현주 그렇게 안 생겼던데, 이놈 저놈 간 보고 다니는 스타일이야? 그러게 웃긴 애네.

진성민 : 아니야, 지훈이 형 얼마 전까지 여친 있었어…

조유환 : 너 모르는 구나? 그 누나랑 헤어지고 민현주 랑 사귄다고 우리 동문에는 다 퍼졌어.

공명식 : 거 봐, 그러게 해동대 여자를 왜 좋아해. 쥐뿔도 없는 것들이 눈만 높아서는 우리 성민이를 팽 시키고 말이야. 내가 일반인 하나 소개 시켜 줘? 흐흐

진성민 : 집합 시간 다 됐어. 가자.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동정복 매무새를 잡고 말한다.)

조유환 : 알았어. 솔직히 지훈이 형보다는 니가 백배는 나은데, 그 형 완전 구리 잖아. 알지?

진성민 : (유환의 말에 더욱 굳어진 얼굴로 방을 나선다)

복장점검 후 방으로 돌아온 진성민과 조유환.
진성민은 침대 모서리에 붙어 앉아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내려고 한다.
민현주에게 보낸 메시지의 1 자는 빨리 없어지지 않다가 민현주로부터 짧은 답장이 도착한다.

[카톡메세지]
진성민 : [현주야, 이따 동아리방에 올 거지?]

민현주 : [네, 저 시험이 있어서 그거 끝나고 동방 갈 거에요.]

진성민 : [이따보자. 시험 잘 쳐.]


조유환 : (진성민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백했냐? 그래서 좋대? 싫대?

진성민 : 그런 거 아니야.

조유환 : 걔 지훈 형이랑 사귄다니까. 포기해.

진성민 : 내가 김지훈 형보다 별로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으나 떨린다.)

조유환 : 니가 백배는 낫지. 집안 좋지, 얼굴 이겼지, 그런데 2학년이니까. 4학년의 권력이 없잖아.

진성민 : (휴대폰을 다시 열어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공명식 : 왜? 진성민 차였냐?

조유환 : 너까지 왜 그래? 야, 이따 술이나 먹자. 우리 동방으로 와.

공명식 : 야, 어디 여자가 없어서 해동대 여자를 사귀냐? 걔 술 먹고 뻗으면 그때 한번 건드려보고 말아. 흐흐 (바짝 마른 몸의 공명식은 성민을 보며 지저분하게 웃는다)

진성민 : (공명식의 말에 아무 대답없이 입 모양만으로 조용히 웃는다. )



비닐 장판이 깔린 동아리방 한 가운데에 큰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러 명이 모여 앉아 있다. 아래 위가 같은 색깔인 체육복을 입은 사람과 새 옷이라도 사서 입은 듯 산뜻해 보이는 사람도 끼어 있다. 진성민은 아래 위 색깔이 같은 체육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있다.

염기성 : 지훈이 형, 오늘 무용이형 오시는 거에요?

김지훈 : 무용이 형 연가 받아서 오신 대. 7부두 입항하고 하선해서 바로 오신다고 했어. 오늘 실컷 마실 수 있겠다! 기성아, 이따 주문 시킬 거 정해 봐.

염기성 : 배달 되는 건 다 시켜 볼까 봐요. 하하, 성민아, 넌 어느 종목을 선호해?

진성민 : 오늘 제대로 달리겠구나. 나 저녁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다.

박준태 : 근데 병성이 형 집에 가셨어요? 왜 안 와요?

김지훈 : 병성이 올 거야. 그런데 민현주 왜 안 와?

염기성 : 민현주 아까 1층 회관에서 봤어요. 수민 형이랑 같이 있던데요. 동방 오라고 하니까 알고 있다고 하던데요.

김지훈 : 수민이? 걘 또 어떻게 아는 사이래?

염기성 : 모르죠. 민현주 여기저기 소문 많아요. 싸구려 냄새가 솔솔~ 하하

박준태 : 올해 우리 동아리 신입생이 걔 하나라 아주 재미가 없어요. 저희 기수는 들어오자마자 기수 밧따에 사당 올라가고 다 했는데.

진성민 : 기억난다. 무용이 형이 기수 밧따 치다가 손가락 꺾여서 밥 먹기 힘들다고 먹여 달라고 했었어. 하하.

염기성 : 민현주 여자라고 봐주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야. 여자가 여자 같지도 않으면서. 걔 솔직히 껌 아니냐? 뭔 몸에 굴곡이 없어.

박준태 : 굴곡만 없냐? 싸가지도 없어. 꼴에 비싼 척 하고 있어.

진성민 : 니가 보긴 했냐?

박준태 : 꼭 봐야 아니? 딱 보면 사이즈 나오지. 한번 슬쩍 만져보면 바로 알지. 흐흐 지훈 형, 민현주 오늘 사당 보내죠? 흐흐 동아리 전통인데 명맥이 끊기면 안 되죠.

김지훈 : 그런데 요즘 거기 올라가도 돼? 철조망 쳐 놓지 않았니?

염기성 : 막아는 놨는데 가도 돼요. 저희 동문에서 저번에 갔다 온 사람 있어요.

김지훈 : 그러면 누가 가서 숨어 있을 거야?

박준태 : 저희 기수가 갈게요. 성민이, 기성이 저 셋 가고 형은 뒤 따라 오세요. 중간에 잡아서 푸시업 시키고 노래 시키고 그러고 내려가면 되죠.

(이때 주병성이 동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

주병성 : 다 모였어?

김지훈 : 너 왜 이제 와?

주병성 : 우리 과 시험 있었어. 민현주도 안 왔지? 걔도 시험 쳤을 걸.

김지훈 : 이따 무용이 형 오시면 술 먹다가 민현주 사당 보내자. 애들이 올라가 있는 대.

주병성 : 오, 재미있겠다. 민현주 신입생 환영회 하자! 자갈마당에도 빠뜨려야 되는데 그건 안되겠지? 수영복 입고 오라고 해? 흐흐

김지훈 : 애들이 민현주가 굴곡이 없다는데? 흐흐

주병성 : 니들이 뭘 보긴 봤냐? 하하

(민현주가 동방 두드리고 들어온다. 갑자기 조용해지다 다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난다.)

민현주 : 왜요?

주병성 : 아니야. 시험 쳤지?

민현주 : 네, 그래서 머리 아파요.

진성민 : (민현주에게) 저녁은 먹었어

민현주 : 안 먹었어요.

박성태 : 저녁도 안 먹고 공부했냐? 너 여자치고 공부 못한다고 소문났는데 머리가 좀 나쁜 거 아냐? 하하.

민현주 : 아마도 그런 가 봐요. 그래도 오빠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하하.

김지훈 : 그만해라. 서로 돌대가리 자랑하니? 무용이 형 오고 계신다고 문자 왔어. 곧 도착하시겠다. 시킬 거 다 정했어? 중국집, 치킨집 싹 다 정해놔. 형이 카드 주면 바로 전화 돌려.

얼룩얼룩한 자국이 잔뜩 낀 동방 창문으로 들어오던 붉은 햇빛 다발이 사그라 들고 컴컴한 밤이 되었다.
김지훈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고, 벌떡 일어나 손짓을 하며 서두른다. 그러자 동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문 양 옆으로 선다. 진성민은 구석에 놓여있던 말라 비틀어진 장미꽃을 들고 와 민현주에게 쥐어 주고 문 앞에 서게 한다. (진성민이 민현주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호감이 가는 이성이자 장식품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낡은 이성관이 보인다.) 잠시 뒤 이무용이 동방 문을 뻥 하고 차고 들어온다. 동방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민현주는 멋쩍은 듯 마른 장미꽃을 이무용에게 건네 주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성대한 환영에 이무용은 얼굴이 네 방향으로 당겨져 찢어질 듯 웃는다. 이무용은 남자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시선은 여자 후배 민현주에게로 가서 꽂힌다.

이무용 : 오, 여자 네. 신입생이야? 지훈아, 이 분 언제 들어 오셨니? 왜 사진 안 보냈어?

김지훈 : 그때 보내 드린 단체 사진에 현주도 있었는데요.

이무용 : 그래? 전부 시커멓기만 해서 몰랐어.

진성민 : 형, 이 쪽으로 앉으세요.

이무용 : 오, 성민이. 아버님이 대단하시던데.

(더는 기분이 좋을 수 없을 듯 보이는 이무용은 지갑 속에서 신용카드를 빼들어 내민다.)

박준태 : 무용이 형, 카드 한도 많이 남으셨죠? 하하

이무용 : 어허, 적당히 써. 형 요즘 코인투자 때문에 힘들다.

박준태 : 네, 적당히 푸짐하게 시켜볼게요. 하하

박준태와 염기성은 머리를 맞대고 배달 주문을 시작한다. 진성민은 민현주를 쳐다보는 이무용의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불편한 시선을 민현주 쪽으로 보낸다.
곧이어 배달시킨 음식과 술병들이 도착하고 텅 비었던 동아리방 테이블은 일회용 쓰레기속을 빠져나온 윤기나는 음식이 담긴 그릇들로 가득 찬다. 쩝쩝대며 먹는 소리와 술잔을 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어느새 동아리방 테이블은 김지훈, 주병성, 이무용이 가까이 앉은 자리와 박준태, 진성민, 염기성이 앉은 자리와 나뉘어 졌다. 어느새 민현주는 이무용과 김지훈 사이에 앉아 있다.

김지훈 : 현주 밥 안 먹었다고 했지. 많이 먹어. (김지훈은 현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민현주 : 네. 오빠.

이무용 : 오빠가 산 거다. 나도 오빠라고 한번 불러주라.

민현주 : 네, 무용 오빠. 흐흐

이무용 : 우하하. 현주 먹고 싶은 거 더 시켜!

김지훈 : 무용이 형이 배 타느라고 여자 구경을 못해서 눈이 돌아가셨네요. 흐흐 어, 현주야, 너 옷에 국물 묻었다.
(김지훈은 갑자기 현주의 가슴 쪽으로 물티슈를 갖다 대고 닦는다. 민현주의 체육복 점퍼에 묻은 것을 닦는 척하며 현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갖다 댄다. )
김지훈이 민현주에게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애매하다. 그런데 진성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

박준태 : 성민아, 지훈이 형, 챌린지 하냐? 하하

진성민 : 밥이나 먹어.

주병성 : 형, 오늘 민현주 신입생 환영회 하는 날입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주병성은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

이무용 : 뭐? 입수한다고? 하하

주병성 : 아니요, 입수 대신 담력 테스트만 하려고요. 현주 너 사당 어딘지 알아?

민현주 : 네? 사당이요? 아니요. 몰라요.

주병성 : 학교 뒷 편 오르막길로 계속 올라가면 거기 무당들이 기도하는 사당이 있어. 거기 가서 정성을 기도하고 빌고 내려오면 학교 생활 동아리 생활 잘 할 수 있어.

김지훈 : 2학년들, 지금 다같이 한잔 하고, 나가서 길에 위험한 것 없나 확인해. 현주는 30분 뒤에 사당으로 출발한다.

동아리 방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소주잔을 채워 비운다. 이무용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박준태와 염기성, 진성민이 밖으로 나간다. 주병성은 이무용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고 김지훈은 이미 상당히 취한 듯 하다.

이무용 : 현주야, 학교는 어떠니?

민현주 : 힘은 드는데 재미있어요.

이무용 : 이놈의 학교는 변하지를 않아. 나 1학년때나 너 1학년때나 똑 같은 것 같아.

주병성 : 형 벌크 타신다고 했죠?

이무용 : 이번 항차에 아프리카 갔다 왔어. 내리지도 못하고 배에만 있다가 도는 줄 알았어. 병성이 너는 입대하고 2년 복무 마치면 어떻게 하려고?

주병성 : 제대하고 바로 승선하고 싶은데 요즘 그러기 쉽지 않다고 해서 고민이에요.

이무용 : 계획 세운다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고 안 당하고 무사히 사는 것도 중요한 목표야. 우리 기수는 벌써 두 명이나 갔다.

주병성 : 아, 벌써 두 명이나요?...

이무용 :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며) 야, 걱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너 안 죽어. 걱정 마. (고개는 든 채, 눈을 감고 있는 김지훈을 쳐다보며) 지훈아, 너 벌써 취했냐?

김지훈 : (눈을 번쩍 뜨며) 무슨 말씀! 야, 현주, 이제 출발해라. 먼저 간 애들 춥겠다.

민현주 : 저 길 잘 모르는데.

김지훈 : 나랑 같이 가자.

김지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민현주와 밖으로 나간다. 민현주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김지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팔을 잡아주려고 한다. 김지훈은 민현주가 붙잡아주는 팔을 말리지 않고 그냥 둔다.

학교 뒷편으로 난 산길로 사람이 걸어간다.
민현주가 김지훈의 팔을 잡고 산길로 걸어 들어간다. 김지훈은 자신보다 적은 덩치의 민현주에게 몸을 기울여 붙인 채 걸어가고 있다. 흙 길로 접어들자 근처 큰 나무 뒤에 진성민이 숨어 있는 것이 김지훈의 눈에 보인다. 민현주는 김지훈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어두운 길가에까지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김지훈은 진성민이 민현주에게 관심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진성민 보란 듯 민현주에게 몸을 갖다 댄다. 김지훈은 민현주가 부축해주는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듯하다가 갑자기 민현주를 안는다. 나무 옆에서 지켜보던 진성민은 나무 뒤로 들어가 숨는다.

민현주 : 앗, 지훈 오빠, 더는 못 가실 것 같은데 그냥 내려가야 될 것 같아요. ( 민현주는 자신을 껴안는 김지훈을 밀쳐내며 빠져 나오려 한다.)

김지훈 : 오빠가 현주 좋아해. 많이 좋아해. 현주는 오빠 안 좋아하니?

민현주 : 오빠 많이 취했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김지훈 : 너 지금 튕기는 거야? 야, 1학년! 개기지마!

민현주 : 오빠, 정신 좀 차려보세요.

술에 취한 김지훈을 두고 쩔쩔 매고 있는 민현주. 뒤따라오는 주병성과 이무용을 본 민현주는 손을 흔든다. 주병성과 이무용은 바닥에 털썩 앉아 있는 김지훈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다. 잠시 후 네 사람은 다시 내려가지 않고 길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간다. 나무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성민은 갑자기 뒤따라 뛰어 올라 가 뒤에서 민현주의 옷을 당기려고 하다가 취기에 혼자 넘어진다. 넘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앞서가던 네 명이 멈추어 뒤돌아 보려고 하자 진성민은 벌떡 일어나 숲 속으로 숨는다. 앞에서 걸어가던 네 명은 소리를 내고 웃으며 걷느라 진성민의 소리를 듣듣지 못 한 것 일 수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김지훈은 진성민이 나무 뒤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진성민을 불러 내지 않는다. 숲 속에 쪼그려 앉아 있던 진성민은 화난 듯 일어나 길을 걸어 내려간다. 진성민은 동아리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건물로 향한다. (또다른 술판이 벌어진 친구의 동아리방으로 찾아가 계속 술을 마신다.)



민현주를 차지했다는 도취감에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은 오르막 길을 비틀거리며 걸으면서도 숨이 크게 가빠오지 않아 보인다. 드디어 올해 4학년이 되어 졸업이라는 부담감에 대면하게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명령하지 않는 이른바 백두가 되었다. 작은 권력의 맛에 취하기 시작한 김지훈은 어느새 학교생활이 즐거워졌고, 신입생 민현주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생겼다. 민현주가 처음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진성민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김지훈은 후배 진성민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김지훈의 기억 속 장면
김지훈은 생활관 당직사관 근무를 서고 있다. 4학년이 돌아가며 서는 당직사관의 큰 역할은 아침 저녁 기숙사 인원 점검과 식사 인원을 체크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아침 인원점검에 들어간 김지훈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소리도 없이 반듯이 줄 맞춰 서 있는 곳으로 마치 최종권력자가 납신 듯한 기분으로 걸어 들어간다.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모자를 머리에 올린 김지훈은 금색 실을 어깨에 두르고 긴 칼까지 차고 마치 이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까지 든다. 과별로 차례차례 인원점검 보고를 받고 경례를 하는 아침 점검을 시작한다. 점검이 끝나고 부사관 두 명을 거느린 채 사관실로 돌아오는 길, 김지훈은 더 강한 자극, 권력의 맛을 기대한다. 저녁 시간 각 동별 사관의 저녁 점검이 다가올 때, 당직 사관실로 누가 문을 두드린다.

부사관 : 오늘 항행과 동장님이 급하게 고향에 가셨다는 데요?

김지훈 : 알았다. 청소 점검은 내가 갈게.

9시가 되자 김지훈은 번쩍이는 칼을 다시 차고 청소점검을 하러 간다. 마침 그 반은 2학년 진성민이 소속된 반이었다. 코너를 돌아 도착한 김지훈은 문 양옆으로 나와 서서 청소 점검을 기다리는 학생들 앞에 선다. 별다르게 흠 잡을 것이 안 보이던 차에 김지훈은 화장실로 들어간다. 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김지훈은 반대표를 불러 소리를 지른다.

김지훈 : 여기 보여? 이거 뭐야!

반대표 : 아, 신경 쓰겠습니다.

김지훈 : 뭐? 신경을 써? 니가 뭔데 신경을 쓰고 말고야! 전원 집합! 엎드려!

김지훈의 말에 서있던 학생들은 인상을 쓰며 엎드리기 시작한다. 수십명의 학생들이 자신의 말에 바로 바닥에 엎드리자 김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목소리가 내리 깔린다. 팔굽혀 펴기 얼차례를 시키고 학생들을 지켜보는 김지훈은 진성민을 발견한다. 진성민도 김지훈이 자신의 구역에 도착했을 때 흘깃 쳐다보고 이미 확인을 했다. 진성민이 팔굽혀 펴기를 끝내고 별로 힘들지 않는 듯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본 김지훈은 무언가 거슬린 듯 얼차례를 반복시킨다. 다른 학생들은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힘들어 하며 땀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는데 진성민은 기어이 해내고 버티는 모습이 김지훈의 눈에 다시 들어온다. 김지훈은 진성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입가를 씩 끌어 올리며 학생들을 일으켜 세운다.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땀을 흘리는 학생들에게 예전에 들었던 공허한 이야기를 남기고 김지훈은 떠난다.

김지훈 : 여기는 그냥 먹고 자는 기숙사가 아니다. 위험한 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긴장하고 준비하는 생활을 익히는 곳이다. 오늘 점검 시 지적 받은 사항은 즉시 시정하고 총대는 결과 보고서 제출한다. 금일 점검 끝.

수십 명의 후배들의 땀과 기를 빼놓고 당직사관실로 돌아오는 길, 김지훈은 자신이 마치 우월한 존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걸어간다. 땀 범벅이 된 채로 책상에 앉았다가 펜을 들 힘도 없어졌다는 것을 느낀 진성민은 침대로 올라가 누워 천정을 바라보다 눈을감는다.



술기운에 무모한 호기가 겹쳐 야밤에 산 속 사당에 간다며 사람들이 나가고 그 후 몇 시간이 지났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데 동아리방에는 아직도 불빛이 환하다. 밖으로 새어 나오던 웃음 소리와 노래 소리를 그쳤고 몇 사람의 목소리만 드문드문 들린다. 진성민이 산에서 내려와 찾아갔던 친구의 동아리방 건물에서 나와 본인의 동아리방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산에서 내려와 친구 동아리방으로 가 술을 마시던 진성민이 비틀거리며 길을 걸어간다. 진성민은 친구의 동아리방에서 김지훈을 변태 새끼라고 부르며 술에 잔뜩 취해 버렸다. 술에 터벅터벅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다시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동아리방 유리창에 붙여 놓은 글자와 불빛이 초점이 사라진 진성민의 눈에 들어온다. 잔뜩 취한 진성민은 길가에 쪼그려 앉다가 다시 일어나 걷는다. 동아리방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향하는 진성민의 발걸음이 위태롭다. 진성민 바지 엉덩이에는 흙자국이 있고 체육복 윗도리에는 지저분한 얼룩이 묻어 있다. 진성민은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용케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친구의 동아리방 건물에서 진성민의 동아리 방 건물로 연결된 길은 산을 깎아 만든 차가 다닐 만한 길로 한 쪽 편은 언덕이지만 다른 한쪽 편은 보호레일이나 보호벽 없이 낭떠러지이다. 오른쪽으로 꺾여 난 길을 걸어가는 진성민, 김지훈과 선배들에게 빼앗긴 민현주를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 동아리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걷던 진성민이 갑자기 길 아래로 추락한다. 2미터 아래로 떨어진 진성민은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다쳤음을 알았고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술에 만취해 떨어져 다친 상황을 꿈처럼 여기는 진성민은 바닥에 누워 잠이 든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다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놓여있다.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진성민은 죽은 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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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혹시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디까지 해보려고 할까?’

몰라서 기대하고 조금은 예상할 수 있어서 그래서 더 두려운 20대 청년들이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실수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불행해 보일 수 있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주인공 세 사람이 각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누렸던 권력은 비극적인 사고의 결과로 돌아오고, 이들이 재수가 없었던 것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재수 겁나게 좋은 소수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나 되묻는다. 친구의 사망 그리고 몰아치는 세상의 비난은 특별히 재수 ‘없어서’ 가 아니라 특별히 재수가 ‘좋지 않아서’ 돌아온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권위적 인간들은 단단한 조직을 이루고, 정글 같은 사회에 미처 닿기도 전에 학교에서부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이 든 꼰대보다 젊은 꼰대가 더 싫다는 말에서, 답답한 과거보다 희망 없는 미래가 더 싫다는 말로 들리는 이유이다. 이대남 인기를 등에 업고 태풍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국힘 이준석의 낡은 능력주의가, 그것을 일종의 세련된 레트로토피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점수를 왕창 땄으나, 30대 당 대표는 수술실 카메라 설치 반대, 차별 금지법 반대편에 서며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해동대학교는 국내에 실제 존재하는 한 특수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최근 기사에도 등장한 대로, 수도꼭지 줄을 안 맞추었다는 황당한 이유로 후배 학생들에게 1천여 회의 푸쉬업 얼차려를 시켰다는 4학년 간부 학생의 행태를 보인 이 사건은, 공군 이 중사 사망 사고로 재 촉발된 군 내부의 비합리적 권위 문화가 극렬히 투영되어 드러나는 군 미투와 더불어, 권위적인 집단 내부에 깊숙이 자리한 초라한 성평등 의식과 성폭력 개념의 무지가 과거에서 반 걸음도 개선되지 않음 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건으로 드러난다. 4년간 군대식 집단생활 그리고 대학 졸업 후 3년간 의무 승선을 해야 하는 이 대학에는 남자 대학생, 해군사관 후보생 그리고 병역의 의무가 없는 여학생, 이 세 가지 신분이 존재한다. 이를 수직적인 신분제로 해석하고, 또한 결코 같은 길로 합류하게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이 이미 20대부터 나뉘어져 있다고 해석한다. 수 백 명의 후배들이 선배 김지훈 한 명의 구령에 복종하며 엎드리는 장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권력 놀이에 빨리 취하고, 그 쾌감에 빠져 희미하게 나마 지니고 있던 문제 의식을 쉽게 접어 넣어 버리는 모습을 통해, 여기에서 경직된 권위주의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를 찾는다. 특히 여성이 진정한 동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편에 있는 성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결국 주류 남성의 인식 변화에 달려 있음을 지적한다.

21살 민현주, 24살 김지훈, 24살 주병성.
20대 청년 세 사람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일터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의무 승선 기간을 채워야 하는 청년 김지훈의 약점을 잡은 선장, 관심 사관이 되어 버린 주병성을 계속 괴롭히는 부대 간부들, 진성민을 꼬셨으나 사귀지 않은 나쁜 년으로 낙인이 찍혀 더는 학교에 남을 수 없었던 민현주는 맨 몸으로 세상에 뛰어 든다. 그리고 세 사람의 약점을 잡은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한다. 이들이 당하는 이러한 부조리한 갑질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같은 대학교 같은 동아리에서 어울리던 민현주, 김지훈, 주병성 세 사람은 사회 초년생의 삶을 시작하는데, 취업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서도 각자 나름대로 애쓴다. 하지만 세 사람이 용케 잡은 기회가 도리어 사람을 잡고 있다. 직장 내 텃세와 갑질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새롭게 집단 속으로 들어온 사람의 약점을 잡아 괴롭힘을 시작하는데, 이 이유는 단지 상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라는 이유이다. 김지훈은 대체복무 선상에서, 주병성은 군복무 중, 민현주는 알바 자리를 찾는 중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기존 사회에 끼어 들어야 하는 불청객이 된 세 청년들은,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평범한 약점이 부각되며 유독 이들에게만 무겁고 엄격한 잣대에 의해 평가를 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부당한 폭력에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지우고 싶은 약점, 기억은 바로 진성민이다. 1년 전 사망한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하려고 한다. 진성민이 사망한 날 함께 있었고, 또 같은 동아리 일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김지훈, 주병성, 민현주는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의 강력한 분노와 원망이 향하는 대상이 된다. 역시 이들과 같은 대학 출신 선배인 진노갑은 본인이 가진 관련업계에서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세 청년을 더욱 집요하게 다그친다. 이 과정에서 폐쇄적인 그들 만의 교내 문화가 드러나게 되고 이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되면서 늘 그렇듯 여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한강 사망 대학생 사건에서 기본 설정을 차용한 이야기로, 3일 간의 연휴 동안 대학교 캠퍼스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지며 비극적으로 발생한 사망 사건이 극의 주요 사건이 된다. 아들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믿는 아버지는 모든 인맥과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폐쇄적이고 좁은 업계의 뻔한 학연 지연 속에서 다시 이리저리 얽힌 인맥과 이해관계, 손익 계산은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린다. 여기에 유튜버들이 가세하며 음모론을 키우고 여론을 비이성적으로 선동하는데 앞장선다. 아들을 잃은 진노갑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며 세상의 공멸과 자기 파괴적 주장을 한다.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추가 설명>

사망한 대학생 진성민 사건 당시 2학년 : 아버지 진노갑과 같은 대학을 선택해 입학한 진성민은 착한 아들로 착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폭음을 하고 민현주에 대해 폭력적인 구애를 하며, 아버지를 통해 이미 경험한 자신의 미래가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진성민의 동아리 선배 김지훈 사건 당시 4학년 : 사건 이후 졸업을 하지만 이미 업계에서는 매장을 당했다. 후배 민현주에 관심을 보이는 진성민을 조롱하고 4학년이 가진 권력을 휘두른다.

동아리 선배 주병성 해군 학군단 4년차 : 김지훈의 동기. 김지훈의 권력 휘두르기를 방조하고 옆에서 대리 만족한다.

동아리 후배 민현주 사건 당시 1학년 : 남자 무리에 끼어들어 결코 그들의 동료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민현주는 도리어 진성민의 죽음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진성민 부친 진노갑 : 지역 관련업계 협회장을 맡고 있는 진노갑은 자신의 뒤를 이으려 하는 아들 진성민을 자랑스러워 하나 폭음으로 사고사한 아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드러나려 하자 아들 사망과 관련된 선후배들을 공개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오히려 폐쇄적인 학교 문화가 외부에 알려지며 학교 존립까지 위협을 하는데 이에 대학 통폐합 여론이 생기고, 여전히 화가 안 풀린 진노갑은 공멸의 길을 택한다.




<사망 사건의 진실>
3일 간의 연휴가 시작된 해동대학교 학생들, 집으로 가는 학생들도 있지만 캠퍼스에 남아 술 먹고 놀 생각에 빠진 학생들도 있다. 각 동아리와 각 출신 지역 동문회, 이른바 사조직까지 재탕 신입생 환영회를 벌리고, 거기에 학군단 훈련까지 취소되며 학교는 광란의 파티장이 된다. 진성민이 들어간 시사 영어 동아리는 이름과 무관하게, 동아리 학생들은 동아리방에 모여 불법 동영상을 함께 보고 술이나 마시는 것이 일상이다. 연휴를 맞이하여 동아리 회장인 4학년 김지훈의 호출로 동아리 방에 모인 학생들. 유일한 신입생 민현주를 데리고 장난을 치려 일을 꾸민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명분과 담력테스트가 동아리의 전통이라는 핑계로 뒷산 사당에 민현주를 보내 구애를 가장한 성추행을 해보려 한다. 진성민은 이 날 오후 민현주에게 사귀자고 고백을 하려다 거절당 할 것이라는 걱정에 고백을 포기하고 모멸감과 보복심에 휩싸여 혼자 민현주 성추행을 상상한다. 사당 가는 길에 숨어 있던 진성민을 본 김지훈과 선배들은 진성민을 무시하고, 진성민은 화가 나 다른 친구의 동아리방으로 가 폭음을 한다. 진성민은 몇 시간 뒤 만취하여 동아리방으로 돌아오면서 발을 헛 딛어 2m 높이에서 추락하게 되고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김지훈은 그간 진성민과 민현주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일로, 밤중에 사라진 진성민을 찾지 않았고 다쳐서 발견된 진성민을 발견한 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데, 이 점이 진성민의 부친 진노갑이 김지훈을 살인자로 생각하게 만든다. 진성민을 처음 발견한 이영기는 평소 대학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반감을 가진 학생이다. 진성민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으로 이후 기득권 진노갑의 주장에 동조를 하며 학교 문화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나 여학생 입학 제한, 단체규칙을 강화 하자며 과거로 회귀한 듯한 젊은 꼰대 모습을 보인다. 아들의 사망 이후에 진노갑은 학교 인맥을 통해 학생 생활 관리에 연관된 교수들의 교체를 요구하고 동아리방 일제 점검과 교내 음주 허가제를 주장한다. 민현주에 대한 고백 문자가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진성민이 차였고 그래서 자살한 것이라는 헛소문이 돈다. 진노갑은 유튜버를 앞 세운 외부 여론과 달리 교내 여론이 김지훈 측에 선 것에 분노하여 학교를 거점 대학 통폐합 제도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며 학교의 존립 자체를 흔들려고 한다. 일 년 후 김지훈과 주병성은 조용히 졸업을 하고, 민현주에 관한 거짓으로 부풀려진 소문은 퍼질 데로 퍼져 민현주가 진성민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지며 민현주는 휴학을 한다. 그러나 자극에 무뎌 진 사람들은 어느새 진노갑의 유튜브 영상을 잊기 시작하고, 대학 캠퍼스에는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며 또 다시 연휴가 시작된다. 다시 여기저기서 술판이 벌어진다.
사망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과 주변 괴롭힘으로 삶의 의혹을 잃어가던 세 사람은 각자 차가운 바다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 힘을 주어 버텼던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며 하루를 또 버티어 낸다. 학교에서는 나간 자리를 다시 새로운 이들로 채워지고 똑 같은 술판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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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같이 일하실 분이에요. 인사 드리세요."

첫 출근을 한 진화를 피킹해서 창고로 데리고 간 김미영 팀장은 열 댓명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진화를 쳐다 보았고 어색하게 서 있는 진화에게 김미영 팀장은 갑자기 자기 소개를 하라고 시켰다. 오늘 처음 온 진화가 어색하게 입을 떼게 두는 것 보다는 김미영 팀장이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만도 했지만 김미영 팀장은 싸늘한 웃음기를 띄며 진화의 등을 떠밀었다. 진화는 누가 누군지 몰랐음에도 일단 팀장이 시키는 대로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안녕하세요! 성진화 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화로 몰린 시선들이 수다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뭐? 성진? / 성진씨 흐흐 / 성진이래? / 또 성진이야?"

"아니, 성진 아니고 성이 성이고 이름이 진화, 진화 씨에요."

김미영 팀장이 싸늘한 표정에서 약간 부드럽게 바뀌며 진화의 말을 이어받았다.

진화의 인사를 듣고 계속 흘깃거리며 쳐다보던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은 뚱뚱한 남자의 몇 가지 작업 지시 사항 전달이 끝나자 진화를 향하는 시선을 거둔다. 성진 성진 거리던 사람들은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미영 팀장은 진화에게 장갑 한 켤레를 건넸다. 진화는 장갑을 받아들고 김미영이 걸어 다니는 뒤를 쫒아 다녔다. 창고 한 쪽에 놓여있는 지저분한 책상에 몸을 숙여 휴대폰을 들여다 보던 김미영은 뒤에서 쭈뻣거리며 서 있는 진화를 흘깃 허리를 세운다. 그리고 진화를 데리고 가 일 할 자리를 알려주었다.

"진화씨, 이런 일 안 해보셨다고 하던데?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처음이니까 천천히 집중해서 실수 없이 하다보면 나중에 익숙해지실 거에요. 여기 앉아서 이 의류 포장 열어서 불량 체크하고 라벨 뜯고 실밥 처리하세요. 옆 사람 하는 거 잘 보시고 참고하시고요. 오늘은 처음이니까 물량 체크는 안 할거지만 내일부터는 90프로 이상 완료하셔야 해요. 한송씨 이 분 새로 오셨는데 가위 드리고 업무 좀 알려 주세요."

이한송은 김미영의 말에 즉각 반응을 했다. 그리고 김미영에게 다가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네, 팀장님. 아 그리고 팀장님 잠시만요. 아니 어제 그 불량을 전부 우리가 다 책임지라는게 말이 돼요? 성진 씨가 그러고 나간 걸 왜 우리가 다 덮어써요?"

"뭐 어쩌겠어, 한송씨 그래도 오늘 새로왔잖아. 어제 그 불량 다 꺼내서 정리부터 하고, 알아서 시켜. 이따 점심 때 다시 확인 할게요."


김미영과 이한송은 둘의 대화가 주변 사람에게 다 들리는 것을 알면서도 둘만 속삭이며 조용히 말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한송은 김미영이 돌아가자 진화를 흘깃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진화씨라고요? 몇 살이세요? ( 진화 : 네, 저는 47살이에요. 열심히 해볼게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37살이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 일 안 해보셨다고요? 일은 쉬워요. 그래도 실수하면 서로 힘들어지니 꼼꼼하게 하셔야 해요. 이 회사에서는 중국 공장에서 옷을 가져와서 여기서 작업을 해서 온라인 쇼핑몰 통해서 파는 거에요. 온라인 쇼핑 많이 하시죠? (진화 : 네.) 저희가 하는 작업은 라벨 제거하고 실밥 정리하고 불량 체크하는 건데, 지퍼 불량, 단추 불량, 박음질 불량 이런것 전부 체크하시는 거에요. 어려운 일 아니에요. 여기 50대 언니들도 많이 일하고 계세요. 거기 앉아서 시작하세요. 시간당 100벌 확인을 끝내야 하는데 오늘은 처음이시니까 체크하지 말라고 하니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실수하시면 안되요. 아, 오늘 하실 물량은 제가 따로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한송은 한 쪽에서 옷이 가득 든 커다란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와서 진화 옆에 털썩 내려 두었다. 진화는 그 박스 속에서 봉투 하나를 집어 올려 안에 든 옷을 꺼내었다. 옷은 여성용 검정색 패딩이었는데 퀼팅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퀼팅 실이 여기저기 남아 지저분했다. 진화는 눈에 보이는 실밥부터 잘라 내었다. 실수하지 말라는 김병신 사장과 김미영 팀장, 이한송의 말이 머리 속을 맴돌아 옷을 앞 뒤로 계속 돌려보며 실밥을 찾고 또 찾았다. 실밥이 거의 다 제거 되었다고 생각이 들자, 진화는 지퍼와 단추, 박음질 불량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지퍼 슬라이드는 뻑뻑했지만 다물어는 졌다. 장식 단추는 싸구려스럽고 옷과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일단 잘 달려 있었고, 단추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잘 떼내었다. 이어 박음질 불량을 찾으니 불량으로 보이는 곳이 여러 군데 였다. 진화는 옆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이한송에게 물었다.


"이거 불량인 것 같은데 불량은 어떻게 해야해요?"

"어디가 불량인데요?"

"박음질이 마무리가 안되고 삐뚫어진 곳을 세 군데 발견했어요."

"다른 데는 괜찮아요? 실밥은 다 뗐어요?"

"네, 지퍼 단추는 괜찮고 실밥은 깨끗하게 제거했어요."

"그럼 그냥 다시 담으세요. 박음질 이런 거는 찢어진 정도만 아니면 그냥 나가도 돼요. 중국산 저가 옷이 다 그렇지, 사람들도 그거 다 감안하고 사는 거에요. ( 진화 : 네.) 정확히 하되, 빨리 하셔야 해요. 시간 당 백 개 가까이는 해야 하는데 한 벌에 5분 씩 걸리면 언제 다 하실 거에요? 오늘은 아마 오후에도 일 해야 하실 거에요. 오늘 보내야 하는 출고 해야 하는 물건이라서 아마 좀 있다가 말씀 하실 거에요."

"4시간 근무로 알고 왔는데 더 해야 해요?"

"물어볼 지 안 물어볼 지 모르죠. 있어 보세요. 못 하겠으면 못 한다고 하시면 돼요."

"네,"


진화는 시간당 백 개라는 말에 정신을 집중해 빠르게 손을 놀렸다. 쪽가위를 든 손가락 근육이 마비가 오려는 듯 뻐근 했지만 손가락 스트레칭을 할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박음질 불량은 불량도 아니라는 이한송의 말을 되새기며, 그러니 그 온라인 쇼핑몰의 저렴한 옷들이 세탁 한번 하면 올이 줄줄 풀리고 너덜거리는 이유가 다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9시부터 창고로 일하러 온 진화는 10시를 넘어서자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마침 그 때 옆에서 일하던 이한송이 일어나 진화에게 잠깐 쉬자고 말했다. 진화는 창고 어딘가에 커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한송을 따라나갔다. 이한송은 지하 창고고 뒷문으로 나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는 무리에 끼었다. 그리고 크롬이 장식된 반짝이는 전자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저기, 커피는 없나요? 믹스도 괜찮은데,"

"커피요? 일 층 문 옆에 자판기 있어요. 동전 넣으셔야 돼요."






진화는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에서 다시 창고로 내려와 반대편 문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삼백 원 짜리 믹스 커피 버튼이 진화를 향해 이미 오래 전에 지친 듯 빨간불을 반짝 이고 있었다. 진화는 아침에 비상용으로 주머니에 넣고 나온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자판기로 밀어 넣었다. 밀크 커피 버튼을 누르자 달캉 하고 종이컵이 내려 왔다. 웽웽 거리며 커피가 내려왔고 작은 컵에서 김이 솔솔 나왔다. 종이컵을 꺼내 들고 차가 지나 다니는 도로를 바라보며 진화는 뜨겁고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컵 속 커피는 어찌나 조금이었던지 매일 아메리카노를 세 잔도 마시는 진화에게는 모자랐지만 달디단 자판기 커피의 충격은 작지 않았다. 빈 종이컵을 버리고 창고로 내려 가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내려와서 일을 하고 있던 이한송은 조금 늦게 돌아온 진화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김미영이 진화에게 다가왔다.


"진화씨, 일 할 만해요? 안하던 일이라 쉽지 않죠.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뭐. 뭐 잘 모르겠으면 한송씨한테 물어보고 아니면 나한테 와서 물어봐도 돼요. 그리고 가위 생각보다 날카로우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돈 벌러 왔다가 몸 다치고 가면, 그런 낭패가 어딨어? 안 그래요? 오래오래 일해야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송님이 잘 알려 주셔서 실수 안하려고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조금 늦게까지 일할 수 있어요? 오늘 사람이 부족해서 물량 소화가 쉽지 않네. 오버타임도 시간 당으로 다 정산해줄거에요. 할 수 있어요? 여섯시 전에 끝날 거에요."

"여섯 시 전에 끝나면 할 수 있어요."

"그래요, 진화씨 이따가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진화는 김미영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열심히 손을 놀리지만 박스 안에 옷은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박스도 슬쩍 쳐다 보았지만, 각자 작업라는 옷 종류가 다 달라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느린지 아니면 잘 따라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려는 무렵, 창고 한 켠에 켜 놓은 라디오에서 12시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다. 진화는 김미영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한 말을 기억하며 작업대에 놓인 옷만 마저 끝내놓고 밥을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꼼꼼리 실밥을 잘라 내고 앞 뒤를 돌려보며 불량을 찾아내려고 했다. 여전히 진화의 눈에 포착되는 삐뚤삐뚤 박음질 불량이 거슬렸지만 이것은 큰 불량이 아니라는 이한송의 말을 되새기며, 적은 돈을 결재한 데에 합의된 구매자들의 관대함을 기대했다. 그런데 12시가 넘었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진화에게 점심을 먹자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진화는 이한송에게 슬쩍 물었다.

"점심은 언제 먹는 거에요?"

"오늘 잔업 하시게요?"

"네, 팀장님이 말씀하셔서 한다고 했어요. 여섯시 전에 끝난다고 하시던데요."

"여섯시 전 일 수도 있고, 넘을 수도 있어요. 저는 아기때매 오늘 일찍 가야 하는데 잔업하라고 해서 지금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여기 점심 시간은 12시 30분이에요. 요 앞 식당에 가서 먹는데 일하는 사람들 전부 다 가는 건 아니고요, 오전 근무만 하는 사람은 1시까지 하고 퇴근하고; 오후 잔업 하는 사람은 점심 먹고 다시 하는 거에요."

"아, 네. 배가 벌써 고프다고 난리네요. 호호 그런데 제가 지금 느린지 빠른 지 모르겠어요."

"느리고 빠르고 보다는 실수하지 않으셔야 해요. 지난 주에 그만두신 분은 손이 느려서가 아니라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잘리신 거에요."

"잘리셨다 고요? 실수를 얼마나 하셨길래요... 저도 처음이라 실수 많이 할 것 같아 불안하네요."

"누가 실수를 일부러 하나요? 딴 데 정신 팔지 않고 신경 써서 하시면 실수 할 일 별로 없어요."

"네, 감사해요. 실수 하면 회사에도 저한테도 안좋으니까 실수 안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어야 겠네요."

"진화씨, 이제 어서 일 하세요."


진화는 이한송과 대화를 너무 길게 한 것은 아닌가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부터 검수하던 박스 안 옷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쪽가위를 들고 컴컴한 지하창고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흡사 70년대 재봉공장 여공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현재는 최저임금 제도 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쉬운 일도 한 시간을 일 시키면 9천원은 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어렵고 더러운 일도 똑같이 시간당 9천원이라는 함정도 존재하긴 하다.

진화의 플라스틱 박스 안 옷들이 전부 검사를 마치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던 이한송이 진화를 불렀다. 식사 하러 가자는 말이었다. 진화는 쪽가위를 내려놓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이한송이 부르는 뒷 문으로 갔다. 뒷 문 밖 구석에 큰 깡통 안에는 담배 꽁초들이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가래 침을 뱉어 더러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한송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진화를 보고 이한송을 향해 말을 했다.

"아, 담배 그만 펴, 새로 오신 분은 담배도 안 피시는 구만. 밥 맛 떨어져. 근데 오늘 반찬 뭐래?"

그때 골목으로 트럭 한 대가 들어 와 섰다. 운전석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 탑차 뒷 문을 열었고 화물 칸으로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진화도 얼떨결에 화물칸으로 올라탔고, 모두 열 댓 명의 사람이 탑차 내부 벽에 기대어 옹기종기 쪼그려 앉았다. 문이 쾅 닫히고 트럭은 출발을 했다. 화물칸에는 다행히 불이 두 개 켜졌다.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별 말이 없었다.
진화는 예전에 읽었던 기사 하나가 생각이 났다.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을 넘어 온 대형 냉동트럭 내부에서 아시아 불법 이민자들 여러 명이 질식사한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 말이다. 진화는 자신이 밀입국한 불법노동자가 된 듯 한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트럭 화물칸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진화의 생각에는 그다지 진화의 기분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모두가 자신 앞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기 보다는 마치 현실을 잊으려는 듯, 휴대폰을 열어 게임을 하거나 카톡 메세지를 보고 온라인 쇼핑몰에 주문한 물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트럭은 금새 어딘가에 도착했다. 화물칸 문이 열렸고 아까 탈 때 처럼 젊은 남성 운전자가 내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반복해 뛰어 내리다간 금새 무릎이 나갈 만한 화물칸 높이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골목 안 작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업을 하는 곳 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골목에 숨은 식당 바깥에 걸린 간판에는 '고향집 함바' 라고 써 있었다. 식당 안 각 테이블 위에는 이미 가스버너가 놓여져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손을 씻을 생각도않은 채 자리를 하나 둘 채우고 앉았다.

진화는 눈치를 보다가 김미영팀장이 앉는 자리로 가까이 갔다. 오전에 지하 창고에서 본 김미영팀장의 얼굴과 그나마 햇빛이 들어오는 식당에서 본 얼굴은 같은 얼굴이었지만 마치 처음 입은 새 옷과 몇 번 빨아 자신감을 잃은 옷 처럼 달라보였다. 눈가에는 자글거리는 주름이 가득하지만 머리는 환하게 염색이 되어 있고, 입은 삐쭉거리며 웃으려는 듯 말을 하려는 듯 움직거리는 모습은, 이 식당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웃음거리는 되지 않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듯 보였다. 김미영팀장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의미없는 수다를 떨다가 진화 쪽을 쳐다 보았다.

" (최선미) 진화 씨라고? 밥 많이 먹어요."

"(진화)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저 분) 누구세요?"

" (김미영) 지금은 말 해줘도 모를 거에요. 차차 알면 되고, 저 분은 최선미 대리님이고, 옆에는 경선씨, 도은씨 그리고 말해줘도 모르겠죠? 차차 알아가세요. 진화씨 라면 드실래요? 라면 먹고 싶으면 가져다 드시면 되요. 돈은 따로 안내도 되고요."

"(진화) 네, 감사합니다. 라면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 (김미영)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진화는 마치 누가 던지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앞에 놓인 공기밥을 보고 뚜껑을 열었다. 6시부터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 아침을 차려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힘쓰는 일을 해야하기에 억지로나마 대충 먹고 왔지만, 진화는 삼백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부터 이미 허기를 느꼈었다.
진화가 과거 어린이집에서 일을 할 때는 밥을 최대한 빨리 먹어야 했었다. 아이들을 식사 시간에도 돌봐 주어야 했기에, 허겁지겁 밥을 욱여 넣고 국을 마시는 것이 익숙했다. 진화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늘 비슷한 말을 들어왔다. 왜 그렇게 급하게 먹느냐는 농담반 불평반이었는데, 일일히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래야만 하는 처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기 싫어, 그냥 배가 많이 고파서 라는 말로 에둘러 왔다. 진화는 천천히 밥을 먹으려 노력했지만 식당 공기밥 양은 너무 작았다. 진화는 여섯 시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첫 날부터 지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며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밥 좀 더 주세요..."

"진화씨 밥 더 먹게? 이거 먹어. 나 라면 먹어서 밥이 남아."

"네 감사합니다."

김미영팀장은 자신이 덜어놓은 밥을 진화에게 건넸고 진화는 얼른 받아 먹기 시작했다. 테이블 가운데 놀인 김치찌개 냄비 안 두부 조각들은 김치 양념과 조미료를 흡수해 짭짤해져 있었고 밥을 입 안으로 더 퍼 넣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작은 딸이 먹고 싶다고 사달라던 오징어 젓갈이 식당 반찬으로 나와 있었다, 진화는 오징어 젓갈을 푹 집어 먹으며 작은 딸 생각이 났다. 오징어 젓갈은 몸에 좋지 않다고 조미료 범벅에 나트륨 과다라 먹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논리를 늘 작은 딸에게 주장해왔던 터 였으나 진화는 달달한 믹스커피에 이어 짭짤하고 맵삭하게 감칠 맛이 도는 오징어 젓갈을 자연스럽게 입 안으로 안내했다. 식사는 10분도 되기 전에 끝이 났고, 오히려 진화가 젓가락을 가장 늦게 내려 놓았다. 식사를 자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식당 문 밖으로 나가 서 있다가 다시 트럭 화물칸에 올라타 쪼그려 앉았다. 화물칸 문이 쾅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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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안녕하세요. 면접보러왔는데요..."

싸해보이는 화색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간 진화는 얼굴에 주름 하나 안 남기려는 듯 팽팽하게 얼굴 근육을 양 옆으로 잡아당겼다. 문 안으로 쏙 들어간 진화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을 향해 말을 내밀었다.

"여기 아니고요.... 따라 오세요."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던 직원은 진화를 흘깃 보고는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진화를 다시 문 밖으로 데리고 간다.

"아, 여기가 아닌가요?"

진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리퍼를 달달 끄는 직원 뒤를 쫒아 나갔다.

"여기로 들어가세요."

직원은 진화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않고 뒤돌아 걸어가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진아는 알려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왔습니다."

진화는 한번 연습을 해서인지 아까보다 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아이고, 네! 어째 오시는데 괜찮으셨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셨어요? 오늘 면접자 분 성함이... 잠시만요. 아, 먼저 그쪽에 앉으세요. 편하게, 네"

김병신 사장은 휑한 책상 위에서 잠시 뒤지다가 종이 한 장을 찾아들고 진화가 앉은 자리로 다가온다.

"자, 성진화씨, 어디, 이쪽 일은 해보셨고?"

-"아니요, 처음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처음이면 쉽지 않을 텐데. 혹시 하셨던 일은 뭐?..."

-"어린이 집에서 일했었습니다."

"왜 그 일 계속 안하시고 다른 일 하시려고 하시나?"

-"아 그게, 제가 작년에 일을 그만두고 쉬다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쪽 분야에 관심도 있고 해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

약간 상기된 채 순진한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하는 진화를 흘깃 보고 종이를 들여다보기를 열 번은 반복하던 김 사장은 진화의 휑한 지원서 한 곳에 시선을 멈춘다.

"사시는 곳이 황금동이시네?"

-"네 맞습니다."

"황금동 아파트 값이 요즘에 엄청 올랐죠?"

-"그렇다고 누가 그러던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 황금동 사시는 구나. 혹시 가족관계는?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말 안하셔도 됩니다. (진화는 얼른 딸 둘이라고 말한다. ) 아, 딸 둘이시고. 다 키워놓으셨네요. 그런데 저희 회사에 지원을 하셨고... 일단은, 공고대로 포장 피킹 하시는 일을 하셔야 하고, 임금은 최저로 나갑니다. 뭐 궁금하신거 있으세요?"

-"그런데 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나요?"

"저희 회사가 의류 납품을 해요. 그래서 송장대로 물건을 찾아와서 잘 포장해서 보내는 일을 하실 거에요. 어려운 일은 아니고, 빠르고 정확하게 하셔야 해요. 이 쪽일 안 해보셔서 할 수 있으시겠어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순진한 표정으로 열심히 하겠다 의욕을 보이는 진화를 쳐다보는 김사장의 표정에는 풋 하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진화의 지원서에 적힌 글씨라고는 이름 주소 어린이집 보조교사 경력이 전부 였지만 김사장은 열심히도 종이를 보고 또 보았다.

"진화씨, 우리 그럼 이렇게 해보죠. 일단 일주일 간 시간을 두고 서로 겪어보는 것으로 하고, 진화씨도 일을 해봐야 어떤 일인지 알 수 있잖아요. 저도 좀 지켜보고 말이죠. 괜찮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진화는 연신 감사하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하고 내일 출근하라는 말을 덥석 받았다.
진화는 내년이면 50에 바싹 다가가는 중년 여성이다. 딸 둘을 둔 엄마로 큰딸이 고1, 작은 딸이 중1이다. 진화의 동갑 남편은 약품 회사에 다니고 있다.

몇 년 전에 어린이집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고 어린이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한 학부모의 항의를 받게 되었는데 어린이집 원장은 진화의 해명은 들어보지도 않고 진화에게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라고 강요 했다. 진화는 무릎을 꿇고 빌며 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어린이집 4살 아이가 진화에게 다가와 선생님은 왜 혼났냐고 왜 울었냐고 물었다.
진화는 도저히 어떻게 대답을 할 지 몰라 실없이 웃기만 했고, 그날로 어린이집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쉬던 진화는 온라인 쇼핑몰을 하나 열어 볼까 하는 마음에 경험을 쌓아보고자 알바 자리를 찾았다가 오늘 김가장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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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오늘은 못참겠다.
빨리 일어나서 가라, 인간적으로."

거실바닥에 자고 있는 송혁언을 향해 소리를 지르는
이는 송혁언의 전 부인이다. 이혼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감에도 송씨는 전부인 집을 친정인양  찾아 온다.
송씨는 이혼한 부인이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해버릴까 봐 계속 감시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매달 약간의 생활비를 갖다주며 전 부인이 엄한 놈을 만나고 다니지 않도록 하려고, 이혼을 하고 나서야 남편 노릇을 그나마 하는 중이다.

송씨의 전부인은 송씨가 내미는 돈이 이상하지 않았다. 이혼 위자료도 한 푼 받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전 남편 송씨의 돈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마음대로 집에 들어와 자기 집 인양 차지하고 있는 송혁언을 보면 화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송씨의 전부인은 자신의 잔소리에 아랑 곳 않고 자는
송씨를 쏘아보고 출근을 해버린다. 현관문이 쾅 닫히고 현관잠금장치가 삐리리 소리가 나자 송혁언은 그제야 슬며시 일어난다.
냉장고를 열고 속을 두리번거리다 아래칸의 큰 김치통을 보고 뚜껑을 열어 김치부터 꺼낸다. 밥솥을 열어보았지만 안은 텅 비어 있다.

'젠장, 밥도 안했구만.'

부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라면 한 봉지를 찾아낸다.
라면을 끓여 냄비채로 가져와서는 아까 꺼내 둔 김치와 함께 먹기 시작한다. 송씨의 전부인의 친언니가 담아 보내주는 김치는 언제 먹어도 맛이 끝내준다.


송혁언은 중학교 때 부모를 따라 이민을 갔었다. 이민 간 미국은 상처의 깊이만 다를 뿐 매일 상처를 주는 곳이었고 온 몸으로 그 상처들을 견뎌 내야 했다. 어린 동생들은 미국 친구들을 사귀고 말도 빨리 배웠지만 송혁언은 수줍은 성격에 경계심까지 생겨 저절로 입이 무거운 성격이 되었다.

이민을 떠나면서 부모가 일가친척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도망친 것을 알게 되었고, 쉽게 생긴 돈이라서 였을까 송씨의 부모는 그 돈을 빨리도 모두 날려버렸다.

송씨는 조용히 그리고 어렵게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한인타운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한국에서 유치원이나 초등상대  영어강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에 조금이나마 모은 돈을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송씨의 부모는 송씨가 고향 한국에 자리를 잡으면 따라가 살겠다고 맏아들에게 미련을 보였지만 사실, 송씨의 동생들이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동생들이 송씨보다 먼저 미국에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더 컸다.


송씨는 운좋게도 한국에 와서 서울 마포의 한 영어학원에 강사로 채용이 되었다. 송씨가 미국에서 온 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혀를 굴리자 별다른 확인 없이  채용이 된 것이었다.
송씨는 학원에서 젊은 학생들, 특히 여학생들을
상대로 수업을 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송씨의 전부인이 바로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었다.

송씨를 미국시민권자로 알아 혹시나 미국으로 가서 살수 있을거라 기대했던 송씨의 부인은 송씨가 조건부 영주권자였던 것을 뒤늦게 알았고 그때부터 다툼이 시작되었다.

30대 초반에 한국으로 돌아왔던 송혁언은 40이 조금 넘어 직접 학원을 차려 사업을 시작했고 운좋게도 학원은 운영이 잘 되었다. 송씨는 열 명의 강사를 채용해 원장님 소리를 들었는데, 통장에 돈이 쌓여가자 나스닥 주식에 큰 투자를 했다가 쫄딱 망하고 말았다.
부인과는 외도문제로 이혼을 했고 학원을 말아먹은 덕에 부인과 나누거나 위자료라도 줄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전 부인의 허황된 기대대로 미국으로 돌아가 뭐라도 하려로 시도해보았으나 미국에서 자리잡은 동생들은 빈혼인 형의 리턴을 반기지 않았다. 부모님이 힘들게 지내고 동생들이 스스로 학비를 벌어 공부할 때, 혼자 한국으로 도망간 형을 결단코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송씨는 쌀쌀 맞게도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 미국의 가족들에게로 돌아갔다가 다시 상처를 입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송혁언은 50이 다 된 나이에 학원강사로 일하려고 알바천국 앱을 깔았다. 연락이 온 곳이라고는 여학생들이 있는 성인대상 회화학원은 일절 없었고 그나마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강사 자리 밖에 없었다. 운좋게 면접을 보러간 서울 외곽의 한 초등 영어학원 주변에는 잠시 둘러보아도 영어학원이 여러개 더 보였다.  이 학원을 운영하는 원장은 자신이 아는 영어강사를 면접관으로 불렀고 둘은 송혁언의 이력서를 훑어 보았다. 그러고 질문을 흘렸다.

"송 선생님, 미국시민권자에요?"

-- "네"

"혹시 비자 확인 할수 있을까요?"

--"네? 그건 당장은 어렵고요.."

"시민권자는 맞으세요? 그런데 최종학력이 무슨 스쿨인데 고졸이신가요? 컬리지 나오신건가요?"

--"한국과 제도가 조금 달라서 설명하기는 힘든데 고졸과 대졸 중간쯤 보시면 되겠습니다."

"먼 소리야, 참. 아닙니다. 그럼 수업시연 지금 해보시죠."

--"네? 지금 바로요?"

"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송혁언은  칠판 앞에 서서 어정쩡 수업을 시작했다. 학원이 망하고 폐인처럼 지내다 과외를 시작했는데 시험대비를 해주기에는 실력이 한참 떨어졌고, 회화반은 원어민들에 밀려 자리가 없었다.

간신히 찾은 초등영어학원에서 자신을 구경보고 있는
원장과 원장 친구 앞에서 뭐라도 해야하는 송씨는 칠판을 긁적였다.

"송혁언 선생님, 그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은 문법이 많이 모자라신 것 같고 교포라고 하시지만 국내 대졸자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간판은 그럴듯하게 꾸미면 되니까 일단 기초 파닉스반에 맞으실 것 같고 주로 7세에서 8세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부드럽게 대해야 하는데 잘하실 수 있으실까요?"

--"아, 네. 파닉스반도 가능합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고 혹시 직접 학원을 차리셨던 적은
있으신가요?"

--"아니요.."

"네, 누가 어디서 봤다고 해서요. 으흠. 아무튼 다음주부터 출근해주시고 첫 수업 하시는 것 보고 수업 횟수
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아, 페이는 일단 시간당 만원으로 가고 봐가면서 올려드릴게요. 괜찮으실까요?"

--"네, 알겠습니다..."

송씨는 겨우 연락 온 학원의 조건을 생각해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1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받는 대가는 150만원 정도였다. 그 외에 아무런 제공은 없었다. 송씨는 50이 다 된  할아저씨 자신이 갈 곳이 없다는 것 쯤은 이미 느끼고 있었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단 한 사람,  전 부인에게 생활비를 갖다주고 관계를 이어가려면 단돈 1백만원 아니 1십만원이라도 필요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아무리 해도 송씨의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었고 영어든 뭐든 가르치는 일 역시 송씨에게 맞는 일은 아니었다. 여학생들과 시시덕거리며
영어로 대화하는 그런 것이나 재미있었지 학문적으로 누굴 가르칠 능력도 마음 가짐도 없었으나, 송씨가 한국에서 할 일은 그것 뿐이었다. 송씨는  미국 영주권 박탈 위기에 처해있었고 그렇다고 완전한 한국인이 되는 것도 싫었다.  조만간 이중국적을 정리해야 하지만,  한국에서 영어강사를 하려면 미국인이어야 하고 한국에 더 머물려면 한국인이어야 하는 박쥐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하던  학원이 다른 업자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원장은 권리금을 받고 판 뒤, 한 일년 여행을 다니다가 다른 곳에 다시 학원을 차린다고 했다.
송씨는 이 기회를 잘 잡아보고 싶었다. 학원을 인수하려는 사람이 수학 학원으로 운영하려는 것을 알고 영어학원까지 합쳐서 종합학원으로 운영하자고
설득을 시작했다.


" 사장님, 아니 원장님, 두 과목 모두 하시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아이들이 보통 학원 두 개 씩 다니는데 그게 영 수입니다. 제가 사교육계에서 일한지도 이십년이 넘었습니다. 초등 영어 쪽은 제가 눈감고도 다 압니다. 저만 믿어주시면 제가 확실히 살려보겠습니다. 제가 미국에서도 오래 살았고 학원 경력이 이만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저는 월 300만원 정도 받으면 되고 학원이 더 커지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하고 싶어요. 네, 사장님? 아니 사모님? 그런데 사모님 참 엘레강스 하십니다. 허허"


송씨는 평생 살며 지금까지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절절하게 말을 널어놓았다. 송씨의 말에 넘어가 준 학원 인수자는 학원을 반 나누어 송씨와 나누어 경영을 하기 시작했고 50대에 갑자기 부원장 직함을 달게 된 송혁언은 아주 오랜만에  의욕이 넘쳤다. 그 덕분인지 송씨 말대로 수강생들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송혁언은 자신이 사장에게 벌어다주는 매출이 1억에 가까워 지고 있는 것을 알고 지분을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송씨는 자신은 주3일 총 12시간만 수업을 하고  강사를 두 명 더 뽑아 다른 시간을 채우자고 주장했고학원 원장은 송씨의 말을 따랐다. 알바천국에 강사신규채용 공고를 내자마자 이력서가 쇄도했다.


"송 부원장, 오늘 면접 보러 오신 분이에요. 이력서
확인해보세요"

--"음... 일단 교실로 가시죠."

송씨는 갓 대학을 졸업한 듯한 강사 지원자를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 자 그럼 수업 시연 해보세요"

이름도 묻지 않고 송씨의 해보라는 말에 어색하게 수업을 시작하던 강사 지원자를 보다가 갑자기 송씨는 수업을 멈추게 했다.

" 자, 잠깐만요. 선생님, 그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선생님은 티칭스킬이 많이 모자라신 것 같고 교육학 전공이 라고 하시지만 고졸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십니다. 그래도 간판은 그럴 듯하게 꾸미면 되니까 일단 기초파닉스반에 맞으실 것 같고 주로 7세에서 8세 정도입니다. 아이들이 어려서 카리스마 있게 대해야 하는데  잘하실 수 있으실까요?"

-- "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 제가 영어 교육 20년 경력에 국내 파닉스 전문가입니다. 저한테 도제식으로 배우셔야 합니다. 제 수업 모두 들으시고 숙지하시고 그대로 시연할 수 있을 때 그때부터 정식 페이 지급되고요 계약 들어갑니다. 아시겠어요?"

--"수습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요?"

"선생님 하기에 달렸어요. 똑똑하시면 빨리 하실거고,
느리시면 늦을거고. 그런데 혼자 사시나 보네요.  혹시 애인은 있고? 없으시다고요. 생각 있으시면 오늘부터
배워 보실래요? 제 수행비서처럼 따라 다니시면 됩니다. 일단 겉옷 벗어서 저기 두시고  여기로 앉아보세요. 식사는 하셨나?  뭐 좋아해?"


송씨는 신규 강사로 들어온 여성에게 과거 자신이 숱하게 들어온 인터뷰 갑질을 몽땅 재현했고, 그런데도
별 거부 반응이 없는 여성을 보고 점점 간이 커지고 있었다.


송씨는 큰 두갈래 길에 서 있다. 전 부인을 달래가며
하던 학원강사 일을 할 데까지 하는 것과 지금 앞에서 잡혀온 초식동물 마냥 가만히 있는 이 여성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며  앞 일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송씨의 담배로 쩌든 시커먼 얼굴에 박힌 누런 두 눈알이 데굴거리며 앞에 서 있는 이의 아래 위를 훑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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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대구라길래
그냥 대구인가 보다했다.
그런데 대구로 가는 길은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을 타고가야
하는 길이었다.




.
36년생 김종규는
경북 성주 시골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걸핏하면 술을 먹고 버럭해
폭력을 쓰던 아버지를
극도로 무서워하며 자랐지만
대구시내 중학교로 진학하며
간신히 집을 떠날 수 있었다.

"너는 공부해서 집안에 자랑이
되어야한다. 동생들이 본받도록
오로지 공부만해라 "


기독교계 고등학교로 진학 후
처음 기독교를 접하는데
시골집에서 거창하게 지내 온
제사를 부정하는 종교에
김종규는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시골에서 평생 살아온
무식한 부모들은 모르는
서양 종교를 믿는 자신이
가난한 시골 출신이라 무시받던
존재에서
특별한 존재로 변하는 듯 느껴졌다.
종교수업교사는 남다른 눈빛으로
기도를 하는 김종규를 유심히
보다가 따로 불러
안수기도를 해주고
지옥에 가지않으려면
교회에 꼭 다니라 이른다.

"김종규, 하나님 믿어야
지옥에 가지 않는다.
안믿는 니 부모나 니 조상 전부
지옥불에 떨어져 고통받는다. 너는
교회 나와서 느그 집안에서
최초로 구원을 받는 자가 되어라. "

배움이 짧은 시골 부모님은
장남인 김종규를 논밭을 팔아서라도
대학에 보내려고 했고
결국 장남이 진학한 대구신학교가
뭐하는 학교인지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


신학대학을 다니며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 김종규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부모님께 목사가 되겠다는
선언을 했지만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다.
부모는 옆 동네 처녀를 소개받아
장남의 결혼을 결정했다.
동네에서 고리대을 치던 집의 딸로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했던 처녀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그리고
김종규는 공무원 시험을 친다.
50년대 공무원 시험은
시험점수에 의해 합격을 하고마는 것이
아니라 대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붙는 시험이었다.
대학은 학비감당이 되는
집안 자녀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일종의 계급상승을 하는 과정이었다.


고향 면사무소 직원으로 발령을 받아
고향 시골 집에서 부인과
온가족과 함께 살며 출퇴근을 했다.
돈이 귀한 시골에서 월급을 받는 것은
집안전체가 여유로워지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공무원들은
업무상 이권을 이용해 뒷돈도 충분히
받고 그리고 일단 잘 보이려 쇄도하는
선물을 챙길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김종규가 첫 아이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공무원 중 군미필자를
색출해 해고한다는 정부 명령이 떨어졌다.
슬며시 군대를 가지 않으려 했던
김동규는 부인과 아들을 두고
군대에 징집되었다.

그나마 면서기 였던 경력으로
장교 업무보조를 맡았는데
고약했던 장교와 선임들은
군대에 조금 늦게 온 김종규를
가혹하게 괴롭혔다.
함께 괴롭힘을 당하던 동기가
이상한 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을 목격하고 자신도
아무도 모르는 새 죽을 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매주 열리는 교회예배에
참석하여 살려달라 빌고 또 빌었다.

"김종규 이병, 지금 죽고 싶지?
니가 지금 고통받는 이유는 너의
원죄 때문이야. 매일부터 금식기도를
시작하면 너의 죄를 내가
용서해줄 지도 모르지.
싫으면 좀 더 맞고. 흐흐"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해방감과 의욕, 자신감이 생애 최고로
고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규는
무서운 아버지에 대들며
앞으로 제사상 앞에
절하는 짓은 하지않을 것 임을
선언했다.
시골 촌부 아버지는
눈빛이 달라져 돌아 온
장남을 낫으로 쳐죽인다며
소동을 벌였고
그 길로 김종규는 부인과 아들과 함께
고향 집에서 내쫓기게 되었다.


간신히 월세방을 구해
가족을 들어앉히고
공무원으로 복귀했다.
그런데 김종규의 부인 정영란은
월급을 가져다 주지 않는
남편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했으나
김종규는 고향 시골집에서
쌀과 김치를 다 가져오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보소. 집에 살림도 사야하고
아들 과자도 사주고 병원가는 차비도
있어야 하는데..."
- "시끄러! 집구석에 있으면서
무슨 돈이 필요해! 무식해서는...
어디가서 바가지나 쓰지 말고
주는대로 아껴 살아!"


정영란은 남편에게 간신히 얻어 낸
생활비를 악착같이 모아
동네에 일수를 놓기 시작했다.
친정 오빠가 고리대를 치던 것을
기억해 따라한 것이었다.
정영란의 친정 큰 언니와 오빠들은
아랫 여동생 둘을 시집 보내고
곗돈을 모아 깨뜨리고는
미국으로 도망을 쳤다.
정영란의 남편이 면사무소 직원이다 보니
동네사람들은 완전히 믿었고
돈도 잘 떼지도 않았다.
국민학교만 간신히 나온
정정란은 대학을 나온 남편의
무시와 폭언을 일상적으로 당하며
살아야했다.







군대에서 기도에 매달리며
폭력을 당하다 간신히 제대한 이후
종교에 깊이 심취하게
된 김종규는 대구 시내 여러 교회를
다니며 자신의 경험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신학대학을 나온
동창들과 연락이 되면서
더욱 종교에 심취하며
성경을 외우고
하루에도 여러번 기도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는 정영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일삼았다.
얇은 월급봉투에서 돈을 빼내
교회에 십일조 헌금을 갖다 바치고
시내 식당에서 혼자 밥을 잘 먹고 다니는
김종규과 달리 빈곤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정영란은
막 태어난 둘째가 고열이 나도
돈이 없어 병원을 가지못해
아이를 잃는 일을 겪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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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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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나 숨이 안 쉬어져. 숨이 안 쉬어 진다고! 이봐!”

김기동씨는 가슴을 움켜쥐고 간호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환자복을 잡아 뜯으며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김기동씨는 입원실 유리 창문 쪽을 계속 쳐다 보았다.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이 없자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악! 숨이 안 쉬어 진다고! 환자가 부르는데 왜 아무도 안 쳐다보는 거야!”
소리치던 김기동씨는 의외로 간호사 호출 벨을 누를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때 방호복을 입은 간호사가 급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김기동 할아버님, 어디가 불편하세요? 필요할 때 여기 벨 누르시라고 말씀 드렸죠. 소리 지르시면 목 아프시니까 여기 벨을 누르세요.”
라고 간호사가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숨이 안 쉬어진다고 내가! 가슴 통증이 또 심해졌다. 빨리빨리 부르면 와야지 말이야! 아참, 간호원부터 좀 바꿔 줘!”

김기동 씨는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며 간호사를 향해 소리 질렀다.  

“할아버님, 지금 말씀 크게 하시는 것 보니까 호흡 곤란은 아닌 것 같아요. 가슴 통증이 있다고 하시니까 담당의사 선생님께 말씀 드리고 진통제 투약 해드릴게요.”

“아니, 내가 숨이 안 쉬어진다는데 니가 뭘 안다고 그래? 간호원 주제에 환자를 잘 돌보려고 하지는 않고 밖에 모여서 잡담이나 하고 있재?” 

김기동 씨는 아직 화가 치미는 듯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김기동 할아버지, 이제 점심 드실 때 되셨어요. 챙겨서 갖다 드릴게요. 그리고 필요하시면 이 벨을 누르세요.”

이 간호사는 김 노인의 항의에 익숙한 듯 태연하게 환자 상태를 둘러보고 병실을 나왔다. 
방호복을 입은 이 간호사가 얼굴에 쓴 고글에는 김이 서려 있었고, 흐릿한 김 뒤편으로 지쳐 보이는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김기동 씨 병실을 나온 이 간호사가 기록을 남기고 담당의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이 간호사에게 아래층 병실에 다녀온 다른 간호사가 다가왔다.  

“저희 12층 환자 중 세 명 정도는 이번 주에 퇴원할 것 같아요.  그런데 10호실 김 할아버지 안 좋아지셨어요?”

“아니요,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좀 심적으로 불편하신가 봐요. 그러게, 재검사 결과가 언제 나온대요? 환자들 모두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면 좋으실 텐데요.” 라고 이 간호사가 말했다.

“네, 다들 힘드시겠죠. 김 할아버지도 갈수록 심해지시네요.”

“선생님도 힘내세요. 환자분들 식사 나눠드리고 우리도 조금 쉬어요.”

“그래요. 전부 천재지변 전염병 탓이지 누구 탓이겠어요.”


방금 전까지 숨이 안 쉬어진다고 호소하던 김기동 씨는 간호사가 나가자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흐트러진 환자복을 고쳐 입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벽에 걸린 시계를 계속 지켜 보았다. 

11시 58분 15초, 16초, 16초......
12시 10분 30초, 31초, 32초……
12시 11분 02초, 03초, 04초……

김기동 씨는 침대 식탁을 세워 펼쳤다. 
12시 15분 45초, 46초, 47초……
12시 17분 9초, 10초, 11초……

그 때 병실 문이 열리며 점심 식사가 도착했다. 
이 간호사가 식판을 들고 들어왔다. 

“할아버님, 식사 왔습니다. 맛있게 드시고 문 앞에 내려놔 주세요.”

김기동 씨는 이 간호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식판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풍겨오는 냄새를 맡았다.

“왜 이리 늦게 왔어! 다른 방에 먼저 주고 왔나?”

“아, 네 조금 늦었어요. 배고프셨죠? 맛있게 드시고 약 챙겨드세요.”

이 간호사는 식판을 탁자에 내려두고 서둘러 옆 병실로 갔다.
김기동 씨는 시선을 차지한 식판에 놓인 반찬 그릇 뚜껑들을 조심히 열었다. 오늘 점심 반찬은 생선구이와 오이생채, 고사리무침이었다. 국그릇 뚜껑을 여니 소고기 무국이 나왔다. 김기동 씨는 고사리 무침 뚜껑은 도로 덮어버리고 식사를 시작했다. 생선 살을 발라먹다가 뼈에 붙은 살까지 다 먹으려고 뼈를 통째로 입에 넣고 씹다가 퉤 뱉어냈다. 국물까지 얼추 다 마시고 식사를 끝낸 김기동 씨는 발라낸 생선 뼈 조각과 씹다 뱉어낸 음식 찌꺼기가 그대로 보이는 식판을 대충 들어다가 병실 문 앞에 내려두었다. 지저분한 식판 위에 고사리 반찬 그릇의 뚜껑은 그대로 덮여 있었다.

김기동 씨는 점심 약 봉지를 챙겼다. 당뇨약과 혈압약 병에서 먹을 알 수까지 헤아렸다. 그리고는 침대 옆에 서서 다시 벽 시계를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식판을 회수하는 봉사자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김기동 씨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고사리를 왜 먹으라고 주나? 그게 얼마나 몸에 안 좋은데? 남자 전립선을 다 죽인다는데. 병원 밥에다가 그런 거를 넣어서 환자 먹으라고 주나? 거기, 아줌마. 가서 애기 좀 해. 지난번에도 내가 한 번 말했는데 말귀를 못 알아먹나.”

봉사자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할부지, 건강하게 오래 사시라고 고소하게 고사리 볶아서 드린 건데, 좋은 대학 나온 똑똑한 영양사가 다 연구해서 드시라고 하는 거에요. 고사리가 몸에 안 좋다는 거 가짜뉴스에요. 믿지 마세요. 근데 할부지 전립선 어디다 쓰시게? 흐흐”

중년 여성 봉사자의 농담에 기분이 상한 김기동 씨는 화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문이 닫히고 조용해진 병실에 서서 다시 시계를 보던 김기동 씨는 12시 55분이 되자 약봉지를 뜯어 입에 넣고 물을 마셨다. 그리고는 기침 증상을 완화한다는 가글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이 간호사가 진통제를 처방 받아 병실로 왔다.

“김 할아버지, 이거 진통제에요. 아까 가슴이 아프다고 하셔서 일단 이거 드시고 오후에 선생님 회진 하실 때 다시 봐 드릴 거에요. 약 지금 드시면 돼요.”

김기동 씨는 이 간호사의 말에 아무 대꾸 없이 입만 계속 작게 우물거렸다.  

“할아버지 아시겠죠? 이거 지금 드시면 되요. 지난번처럼 반만 드시거나 하지 말고 두 알 다 드셔야 해요. 네?”

김기동 씨는 이 간호사가 하는 말에 아무 반응 없이 무표정하게 계속 입만 우물거렸다.

“아까 제가 말씀 드렸죠?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 벨 누르시고, 이 약은 지금 드셔야 한다고요. 알아 들으셨죠?”
이 간호사는 김기동 씨에게 당부를 하고 잠시 쳐다보다가 병실을 나갔다. 
김기동 씨는 이 간호사가 들어와서 하는 말에 아무 반응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시계만 쳐다보다가 60초 기침약 가글이 끝나고서야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간호사가 두고 간 진통제를 손에 들고 가만히 보던 김기동 씨는 두 알 중 한 알만 먹고 다른 한 알을 서랍 속 봉지 안에 넣어버렸다. 그러고 화장실에 들어가 양치질을 하고는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침대에 누워서 다시 시계 바늘만 주시하던 김기동 씨는 한 시간이 딱 지나자 다시 일어나 침대 아래 가방을 열었다. 침대 밑에 둔 가방에는 약병과 약이 든 상자가 가득했다. 그 안에서 몇 개 병들을 꺼내더니 먼저 녹색 가루를 한 스푼 입에 털어 넣었고, 검은색 환을 한 주먹 삼켰다. 그리고 액상 스틱 하나를 짜 마시고 나서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다시 아래에 내려두었다.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김 기동 씨는 손으로 한동안 자신의 배를 천천히 쓸어 내리더니 어느새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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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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