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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09 결국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부정해도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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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는
평생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다.

삶의 어느 순간 자신이
특별한 존재라고 믿게 되었다.

한 발은 과거 가족 속에 걸쳐놓고
다른 한발은 세상이라고 믿는 종교에
걸쳐놓고 살아왔다.
이 이중적인 삶은
사실 과거의 돈과 현재의 명예를
모두 가지고 싶었던 욕망 때문이었다.
지성인인 척 했지만 무지성인일 뿐이었다.
주말에는 신을 찾다가
주중에는 수맥을 찾는다 설쳐댔다.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매일 외쳐댔으나
죽으면 지옥에 갈 것이라는 악몽이
진짜 이루어질까 하는 두려움에,
내면의 깊은 밑바닥의 불안, 불신,
거울속 이기심이 들켜버릴까
오히려 남을, 배우자를, 자식들을
공격하고 비난해 왔다.

" 불신 지옥 "

집을 재판장 같이 만든 것이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집과 식구의 무거움이 힘겨웠다.
그래서 병원이 좋았다.
매주 대학병원 대기실 앉아 기다리며
스스로에게 특별한 치료를 해주고
돌보아주는 그 시간이 좋았다.

버릇처럼 병원을 찾을 때 마다
의사가 권하는 비싼 비급여 치료는
무조건 다 받고 싶었고,
약국에서 권하는 건강식품은
다 사들이고 싶었다.
자식 가르치는 돈보다 자기 몸에 쓰는
돈이 그 돈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다.

이렇게 판단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백만원 짜리 노란색 알약이 효과가
있던 없던
이백만원짜리 허덥한 운동기구를
모셔두다가 부서지던 말던
그런 것들은 상관없었다.
모든 시간이 자신을 위해 쓰이고
모든 사회 체계가 자신을 위해
사용되는 그 순간이 중요했다.

바닥난 자존감
안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이미 말랐고,
그래서 밖에서 넣어주는 에너지라도
있어야 했다.
돈으로 마음의 빈 곳을 채워넣는 것은
금방 한계에 닿았고, 부작용도 컸다.
가난한 배우자와 자식의 비명을
뒤로하고
자신의 작은 통증을 없애기 위해
병원 세 곳을 방문하며 돈을 쓰는
그 순간이 더 중요했다.

사람은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찾으며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마음 먹을때,
어른이 될 수 있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자기자신을 직시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초라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는
없으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고
불안을 돈으로 대체하고
맹목적 믿음을 추종하면
낮은 자존감에서 오는 존재적 수모가
희석되는 듯 느낀다.

선거날 누구나 1표씩 투표를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갑자기 10년에 1번만 투표를
하라 강요되면
황당하고 억울해진다.

받은 월급을 건강식품 할부와 병원비로
대부분 소진하다가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월급의 상당 부분을 할당해야 할때
이것과 비슷한 억울함이 든다.
  월급을 더 받아라,
돈을 더 벌어라 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므로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이 정답이다.
정답을 모른 척하면
영원히 오답속에 살게된다.

그의 친모는 심장문제로 사망했다.
무려 100세를 몇년 앞두고.
100세를 넘기는 것은 헛된 야망이
아니라 인생의 목표였으므로
자신도 심장으로 백세전에 사망할까
심장검사를 꾸준히 받아왔다.  
그 병원비는 자식들에게 부담시켰다.
자식들을 잘 키우지 못한 것은 인정하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자원을 동원하는 것 만이
존재감을 확인받는 방법이므로
도덕과 도리는 중요치 않았다.
만약 그것이 죄라면 회개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신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회개를
먼저 들어줄 것이라는
근거없는 확신을 가졌고,
여기와 저기에 걸친 두 발은
마치 두개의 보험에 든 것과 같아
어쨌거나 자신은 누구보다
오래 살것이라 믿었다.
열어서는 안되는 서랍을 절대
열지않고 살 수 있어도
그것은 아주 쉽게 누군가로부터
열어 제껴진다.
서랍은 당기라고 있는 것이니까.
창문 밖만 바라보며 살아오면
창문 안을 볼 줄 모르며,
남들도 창문 안쪽을 보지 못하는 줄 안다.

착각은 주위도 불행하게 만든다.
자식들에게 전화해 돈을 받아
보청기를 맞추었으나 세 번도 쓰지 않고
서랍에 넣어버렸다.
점점 기운이 없어지고 기분이 서글퍼져
누군가의 지극 정성 돌봄받기 원했으나
두 번 이혼하고 돌아온 딸은
여전히 철이 없었고,
배우자가 고통속에 수년전 사망했던
순간의 기억은
자신을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때 자신이 한 일이라고는
병원을 따라 오가며
병원간 김에 자신도 진료받고
수액이라도 맞으려고
기회를 엿본 것 뿐이었다.

이제는 눈치 보지 않고
수시로 입원해 수액을 맞았고,
할 수 있는 수술은 다 받으나
그런데 이건 몰랐다.
코로나 독감


평생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고,
장수의 기록을 세우고 싶었는데,
세상 사람 다 걸려도
자신은 안 걸릴 것 같았던 독감은
잡초가 비에 스러져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듯
반항도 하지 못하고
심장을 세워 버렸다.


혼자 비련의 주인공 삶을 사는 늙은 딸은
늙은 부모를 모시는 딱한 청이 역할을
계속 이어가야 하기에,
이미 죽은 사람의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전기충격을 감행하고
기저귀를 채우고
연명치료를 시작했다.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던
이런 비참한 최후를
가장 무시하던 이들에게
각인시켜버렸다.
비참한 최후는
침상 위의 비참함보다
비참한 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로
인한 비참함 때문이다.

평생을 자신을 위해 살아왔고
평생을 자기 자신만를 생각하며
살아왔기에
죽음조차 자신만의 것이 되었다.
그 죽음을
누구도 간직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은 정말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힘든 자식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억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는
일생동안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다
그렇게 사라진다.

죽지 않을 것이라 믿다가
영정사진도 준비 안한 늙은이는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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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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