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도 수능이 80여일 남았다.
8살의 초등생이 입학하여 12년의 세월을 이 수능을 보기 위해 달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나고 보면 대입이라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어지러운 터닝을 어떻게 해내느냐는 결국 수능이 측정하지 못한 나의 잠재력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신 상위 4%에 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수행평가 하나도 놓쳐서는 안되며, 고등학교 3년간 12번의 시험을 완벽히 치루어야 한다. 좀 더 놀고 싶은 것을 참고, 좀 더 자고 싶은 것도 참으며 완벽한 이해와 암기를 위해 보고 또 보고 외우고 또 외운다. 이것은 대단한 성실성이자 지구력이고, 끈기이다.
고가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성적이 우수하다는 비판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는 하지만, 결국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학원에서 알려준 답안을 외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공부하도록 판을 깔아준 부모의 투자 규모는 다를지라도 머리 속에 정답을 인위적으로 업데이트 시킬 수는 없기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으며 암기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다.
그래서 수능 성적을 대입에 반영하는 정시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수시의 불공정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사회에서는 성적우수자 - 명문대 출신 엘리트의 성공에 박수를 치며 인정해준다. 엄청난 경쟁율의 공시도 불합격자들의 시험에 대한 불만은 없다. 게다가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비교적 어려운 환경이었다면 더욱 박수를 보낸다. 이들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성공을 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인정이다.
그러나 사회는 지난 날의 성실성에 더해 또 다른 것을 요구한다.
이제까지의 성적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자료이지만, 이후 필요한 조직에 충성과 복종하는 능력은 객관화 하기 어렵다. 많은 조직이 평가자의 주관적 평가를 믿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객관적 학습 성적이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면, 이제 불공정한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대물림 된 부, 행운,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의 틈새에서 승자가 되기엔 억울함이 너무 많다.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사회라면 좋은 성적을 가진 이들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시험 평가기준이 창의적 사고를 막는 암기력 측정이라고 해도, 사회적 발전의 득실에 관계없이 일단 공정은 하다면 사람들은 수긍한다. 우리들은 그만큼 불공정한 게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로스쿨과 의학전문대학원 논쟁도 이유있다는 것이다.
성적순은 일단 공평하다.
그러나 12년의 수능준비 기간에 대한 결과가 남은 88년의 인생을 좌우하는 단 한번의 기회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또 다른 1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온 이들에 대해 기회를 주어야 하고, 언제든 노력의 결과를 보이는 이들을 성공의 대열에 끼워 주어야 한다. 동시에 게으른 무임승차자를 골라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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