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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은 참 나이브해. 하라는 대로 다 하더군. 마스크 쓰라면 바로 자기 돈 주고 사서 쓰고, 집에 있으라면 집에 쏙 들어 가 있고. 왜 그런지 알아? 그게 다 군대 때문이야. 군대에서 배운 거라고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 것 뿐이라고. 그런데 군대 안 갔다 온 여자들은 왜 그러냐 고? 그들 남편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미국에서 왔다는 외국인은 신나게 떠들었다. 상대 기분을 봐 가며 내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고 머뭇거리며 살았던 적이 별로 없었던 나 였지만, ‘헐, 뭘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곧바로 이어 붙여 대꾸하는 것을 평소와 다르게 나는 머뭇거렸다. 이 외국 국적자가 우여곡절 끝에 고양시에서 집도 사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며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는 것에 내가 꽤 감동을 받았었던 것 때문도 있었고, 또 그가 진짜 뭘 너무 몰라서 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식적인 대답보다는 솔직한 의견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발언 하나로 지금껏 내가 알던 사람이 갑자기 달리 보이는 것도 유감이었다. 가끔 한 사람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가 마치 해파리 몸 속 들여다 보이듯 뻔히 보이는 때가 있다. 조만 간 적당한 기회를 찾아서 찬찬히 설명을 해 주어야 지 생각했고, 다행히도 이후에 기회가 생겨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쉽게도 그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고, 어쩌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저 사람이 고양시에 너무 오래 살아서 일까? 아니면 한국에 너무 잘 적응해서 일까?  

미디어는 미국을 아주 풍요롭고 자유가 넘치는 곳으로 그리지만,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인종차별이나 불평등을 청소 안 된 화장실 정도로 축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의 거대한 저택 속 작은 화장실 하나 정도의 약점은 별 것 아니고, 한국의 약점은 치명적인 것이 된다. 대단한 숫자는 아니지만, 그간 내가 만나 온 미국 사람들의 태도나 말을 통해 그들이 차별을 더러운 화장실처럼 받아들이고 있고, 하지만 그래도 너희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만나온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너무 부럽다! 여기서 그저 개인적 경험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차곡차곡 주워 모은 사례들이 일반적인 통계적 평균치를 낼 정도로 충분한 수라고 하기에는 오차범위까지 압도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스웨덴 게이트가 이슈다. 초대를 받아서 온 것도 아니고, 며칠 전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집으로 놀러 온 아이 친구를 굶기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혹은 숟가락만 하나 더 얻는 것을 아이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 논쟁이다. 스웨덴 게이트는, 스웨덴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와 가족이 식사를 해야 한다며, 놀러 온 본인에게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었다는 경험담인데, 이 이야기는 빠르게 온라인에 퍼졌고 스웨덴 게이트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 워 낙에 비싼 물가 때문일 수도 있고, 초대를 받더라도 본인이 마실 술이나 음료를 따로 준비해 간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는 나라 답다. 한 스웨덴 사람이 해명한 글을 보면, 스웨덴인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란 다. 아무튼, 스웨덴 게이트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구설수, 어떤 문화에 대한 구설수는 언제든지 생겨나고, 이럴 때 마다 등장하는 해명 논리는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다. 모든 스웨덴 가족이 사전 예고 없이 놀러 온 아이친구는 굶기자는 사회적 약속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경우가 그렇다면 그 어떤 논쟁이 될 이유도 없다. 한국인은 대중 목욕탕을 좋아한다 던데 왜 목욕탕 가기 싫어하냐 고 묻는다. 한국 여자들은 일찍 일어나 밥도 짓고 나가서 돈도 번다던 데 너는 왜 안 그러냐 고 묻는다. (오 제발, 입 좀!) 문제는 다른 사람이 예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을 또는 어디서 ‘줏어’ 들은 것을, 그대로 별다른 비판 없이 따라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으니 원래 그렇다는 것은 없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떤 일관된 맥락을 찾았다면 그것은 세상을 읽은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실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어떤 뚜렷한 확신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 강력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를 선입견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생존요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차별적 대우를 받고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어떤 상황이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면, 그 상황의 특성이나 가해자의 공통된 특성을 특정해 먼저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너는 왜 그렇게 불평 불만이 많냐 고 지속적으로 묻는다면, 그 불평불만이 논점이 아니라 불평불만을 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나이브’ 하다고 말한 그의 의견에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는 반박을 열심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쌓아 온 공교한 판단기준을 뒤엎을 만한 반박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그간 만나 온 한국인들이 정말 그랬을 지 모르고, 한국 사회의 코로나 대처를 그가 이해하는 방법은 그런 이해방식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발언대로, 일본 열도가 온몸으로 쓰나미를 막아주어 한반도가 멀쩡한 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개인의 자유조차 쉽게 버리는 약해 빠지고 멍청한 즉, 나이브한 사람들이라는 그의 서사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나름의 용기의 단면일 지도 모르겠다. 암튼 여기서 좀 앉아서 숨돌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껏 거쳐온 수많은 사람들 중 나이브한 사람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나이브한 사람도 꽤 많았다. 곧 뒤돌아서 속상해 할 거면서 면전에서는 거절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애써 피해기억을 지우고 고상한 척하기도 한다. 자신의 차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타인의 차별에는 둔감하거나, 차별에 대한 불평을 덮어놓고 피곤해 하는 사람이 있으며, 차별이 이익을 준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결국 각 개인의 생각을 뒤엎을 수 있는 전 우주적인 진리를 찾아서, 또 선명한 사례와 논리를 꺼내 들 수 있어야 그 어려운 설득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한국이 아시아 대륙 꼬다리에 붙은 작은 나라로 있어왔지만,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집의 환상적인 거실을 지나 뭔가 숨긴 듯한 화장실까지 열어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냄새나는 화장실이 사실 진짜 화장실은 아니라며 꽁꽁 닫아버리고, 말끔하게 닦은 손님용 화장실만 언제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사용하는 화장실은 절대 더럽지 않다고 절절히 호소해봐야 결국 매일 내가 쓰는 화장실은 묵은 때 가득한 더러운 화장실이다. 케이-환상 뒤에 숨은 한국인의 민 낯, 성착취 영상공유를 성장의 한 과정처럼 받아들이는 문화와 어머니와 부인, 딸에게 차례차례 엄마 역할을 선사 받는 문화를 이미 눈치 빠른 외국인들은 알아채고 있다. 케이-컬쳐가 해외 소수자들의 시선을 먼저 당겼고 색다른 밈으로 퍼지고 있으나, 정작 한국 문화는 소수자를 독특한 양념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과 페미니스트는 조롱 당해도 싸다는 차별이 들키기까지는 안타깝게도 얼마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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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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