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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오늘은 학교를 혼자 가야 돼. 엄마가 어제 얘기 했지?"
-"근데 엄마 언제올거야?
"아들이 이따가 학교 마치고 학원 갔다가 집에 오기 전에 엄마 올게. 엄마가 동생이 먼저 집에 와 있을거야. 시계보고 있다가 꼭 8시10분에 집에서 나가야 돼. 학교 가는 길에 진호를 만날거야. 진호랑 같이 가면 재밌겠다. 그지? 아들이랑 엄마랑 동생이랑 이따 오후에 다시 만나자. 사랑해"
-"응"

엄마는 아들이 아직 등교하기도 전인 7시 반에 어린 딸을 업고 집을 나섰다.
초등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지 이제 한 달 지난 아들을 혼자 학교로 보내야 되는 상황이 너무 불안했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지난 달 한 식품회사에 모니터링 요원으로 응모한 것이 당첨이 되어 오늘 처음으로 모니터링 간담회에 참석하는 일 때문이었다.
어린 딸을 업은 채 지하철을 타고 시내까지 가야해서 넉넉히 1시간 반 전에 집을 나섰다.
아들이 혼자 잘 할 지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평소 늘 하던대로 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막연히 긍정하며 등에 업은 딸을 추켜 올렸다.
이른 아침부터 자는 딸을 깨워 옷을 입히고 머리를 단장해 주었더니 딸은 지하철 역으로 걸어가는 엄마 등에서 골아 떨어졌다.
엄마는 큰 가방에 딸 아이 아침거리와 갈아입을 옷, 양말, 작은 담요에다가 물병과 두유 두 개에 육포 간식까지 담아두었다.
등에 업은 아이만한 짐이 손에 들렸다.

집에서 십 분 정도 걸어가야 지하철역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기는 꺼려졌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자면, 택시기사의 성격에 따라 불편하거나 혹은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기억이 많아서 였다.
훨씬 불편하지만 웬만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버스나 지하철이 편했다.
이렇게 아이를 업고 가야할 때는 수색대 훈련하는 것 같은 체력이 소모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갓 4월 초입에 들어선 터라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했다.
등에 업은 아이를 다시 추켜 올리고 아주 느리게 올라오는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출근시간에 이렇게 아이를 업고 지하철을 탄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었다.
아침 출근객들로 붐비는 지하철 승강장 벤치에는 이미 앉을 자리가 없었다. 잠시 딸을 바닥에 내려 세우고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두리번 거리는 중 바로 지하철이 들어오는 신호가 울렸다.
순간 지하철을 못 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아이를 들어 안고 지하철 쪽으로 다가갔다.
지하철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내리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무사히 지하철에 올라 타고는 일단 지하철 문 주위 기둥에 딸아이 손을 잡아 붙였다.

"딸 이거 꽉 잡아"

지하철 역에 내려 와서 기다리는 동안 잠이 살짝 깬 딸은 엄마에게 업어달라며 두 손을 내밀어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짐가방을 짐칸에 올리고는 다시 딸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무래도 노약자석으로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손으로는 기둥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가방을 팔에 낀 채 딸을 안고 노약자 좌석 쪽으로 몇 걸음 옮겼다.
워낙 붐비는 지하철 칸이라 넘어질 공간도 없었다.

노약자 석이 있는 공간은 덜 붐볐다.
하지만 빈 좌석은 없었다. 빈 좌석이 있을 것이라 기대한 것은 순진하다 못해 멍청한 생각이었다.
노약자 석에 앉은 노인들은 등산복을 입은 채 베낭을 다리 사이에 끼고 앉아 있거나, 답답한 색의 점퍼를 입고 뭐가 들었을지 모를 서류 봉투를 무릎에 올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노약자 석에 앉은 노인들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엄마와 낯선 곳에서 눈을 동그랗게 뜬 딸아이를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순간 엄마는 노인들이 자신을 구경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지하철 정거장을 열 개가 넘게 지나치는 동안 노인들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종로역에 닿을 무렵 몇 몇 노인들이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내릴 준비를 했고, 한 할머니가

"애기엄마 여기 앉아. 애 데리고 힘든데"

하며 선심을 쓰듯 소리쳤다.
엄마는 무표정하게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딸을 업고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엄마도 여기서 갈아타야 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3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종로역에서 내려 바삐 걸었다.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하루를 다 보낸 느낌이었다.
딸은 이제 좀 잠이 깼는지 등에 업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1호선 지하철은 아직 들어올 기미가 없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 하려는데 부재중 통화가 와 있는 것을 보았다.
1644로 시작 되는 번호라 아들이 학교에서 콜렉트콜 전화를 한 것 임을 알았다.
뭣 때문에 전화를 했는지 걱정되었지만 보통 별일 아니었기에 그냥 무사히 학교는 갔구나고 안심하였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15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도중에 큰 보행자 고가다리를 넘은 뒤, 신호등이 있는 횡단보도를 한 개 건너야 했다.
신호등도 문제지만 정작 걱정되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고가 다리는 차가 안 다니는 다리라 다행이긴 하였지만, 워낙 높은 고가다리라 아래를 쳐다보면 아찔하였다.
그 다리를 건너서 아랫 길로 내려가면 샛강을 따라 산책로가 쭉 나있었고 그 곳을 따라 걸어가면 학교 정문에 도달하게 되는 통학로 였다.
그 문제의 샛강에는 징검다리가 앙증맞게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풀이 심어져 심지어 물고기도 사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그냥 못 지나가게 하는 재미있는 장소였다.
그래서 엄마는 늘 아들이 한 눈을 팔다가 학교에 늦을까 걱정이 생기는 곳이기도 했다.

갈아 탄 1호선 지하철은 놀랍게도 텅 비어 있었다.
아침 출근 시간에 출근 인파에 섞여 같이 움직인 것도 오랜만이긴 하였지만, 그렇게 붐비던 3호선과는 다르게 텅빈 1호선이 어색하게 느껴진 것은, 중력이 센 공간에 빠져 아주 긴 시간 여행을 한 것과 같은 , 엄청나게 진이 빠진 상태여서 였을 것이다.
매일 이렇게 출 퇴근하는 남편의 수고로움이 고마와졌다.

드디어 목적지 남영역에 도착한 엄마는 다시 힘을 내어 딸을 업고 가방을 들춰맸다.
모니터링에 참여할 주부를 뽑는다는 광고를 신문에서 보고 오랜만에 설레였던 엄마였다.
아이들과 보내는 하루도 늘 좋았지만, 가끔 뭔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었다. 무엇보다 평범한 주부보다는 똑똑한 주부, 특별한 엄마가 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밤새 쓴 자기소개서를 이메일로 보낸 뒤, 무언가를 다시 도전하기엔 자신의 형편이 예전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첨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는 자위를 하며 큰 기대 안하기로 마음 먹었었다.
그러니 일주일 뒤 식품회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기분이 날아갈 듯 한 것은 당연하였다.

회사 건물 내부로 들어서서 두리번 거리다 안내 데스크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내 직원은 아주 친절하였다.
이 건물로 들어오기 전까지 길거리를 아이를 업고 다니며 주위의 양해를 구하던 자신이 마치 사회가 돌아가는데 폐를 끼치는 존재로 취급된다는 느낌을 받다가, 거대한 건물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인격이 주어진 듯 한 느낌이 들어 당황스러웠다.
데스크에 서 있던 그 안내자는 환하게 웃으며 직접 엘리베이터 앞까지 바래다 주는 성의를 보였다. 엄마는 이제야 살 것 같았다.

간담회 장소에 도착한 엄마는 고생한 딸의 손을 물티슈로 닦고 자신의 얼굴의 땀도 닦았다.
아침을 아직 먹지 못한 아이를 위해 먹을 거리를 주섬주섬 꺼내 놓을수 밖에 없었다.
먼저 도착한 주부들 중 아이를 데리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 깔끔한 옷차림에, 다니는 직장을 하루 빼고 온 듯 한 모습으로 회의실에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괜찮았다.
업은 아이까지 덮고 오느라 남편의 커다란 코트를 걸치고 오긴 했지만 누구보다도 좋은 아이디어로 조리있게 말할 수 있다 자신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아이를 데리고 등장한 또 다른 아기 엄마들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간담회가 시작 될 무렵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아까 못 받은 전화에 대한 불안도 있어 급하게 통화 버튼을 눌었다.

"어, 아들"
-"엄마, 뭐가 없어. 선생님이 그거 필요하대"
"뭐가 없는데? 응?"
-"종이에 뭐 적힌 거 그거 있어야 된대. 없으면 안된다고 박보래 선생님이 꼭 가져오랬다고 애들이 그랬어"
"그게 뭔지 말을 해야지, 아들.
엄마가 지금 집에 없어서 못 갖다주니까 선생님한테 없다고 말씀드리고 일단 엄마가 집에 가면 그때 해결해 줄게.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안된다고 하는데... 엄마 끊어"

아들과의 통화가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간담회가 시작되려고 하였다.

오전 간담회가 끝나고 지방 공장으로 이동하여 견학을 하는 일정까지 다 따라갔던 엄마는 피곤해 하는 딸에게 너무 미안하였다.
딸은 아침부터 이러저리 엄마를 따라 끌려 다니느라 아주 지쳐보였다.
오후 4시가 넘어 오늘의 일정은 끝이 났다. 사측에서 참가 수고비로 10만원이 든 봉투를 참가자들에게 내밀자 마자 봉투를 챙긴 그들은 연기같이 흩어졌다.
엄마도 봉투를 받아 들고는 안고 있는 딸에게, 집 가는 길에 슈퍼에서 짜요자요를 사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엄마와 딸은 힘들었지만 뭔가 해냈다는 느낌으로 다시 1호선과 3호선을 갈아타며 집으로 도착하였다.
기진맥진하였지만 뭔가 일을 하고 왔다는 뿌듯함은 분명하였다.
가방에 든 십만원 봉투도 금액보다 훨씬 크게 느껴졌다.
아까 낮에 단체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이동하던 중 전화가 왔었었다.
아들이 아니라 아들 친구인 진호의 엄마로부터 온 전화였다.

"자기, 오늘 내가 자기아들 봐주기로 했는데 갑자기 시모가 온다네, 어쩌지. 그래서 내가 7단지 시윤이 엄마한테 부탁을 좀 했어. 우리 진호도 같이 논대. 시윤엄마 원래 일하는 데 오늘 쉰다네, 자기 집에 오면 나한테 전화해. 우리 진호한테 전화해서 우리 단지로 오라고 하면 되니까"

엄마는 지하철 역에 내리니 벌써 저녁 6시가 다 되었다. 도저히 더이상 20킬로 가까이 나가는 딸을 업고 집까지 걸어가지 못할 것 같아서 계속 업어달라는 딸에게 걸어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진호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지금 지하철에 내렸어. 우리 아들 집에 좀 보내줘. 고마워, 내일 만나서 애기해"
-"어...그래 근데... 너도 고생했겠지만 자기아들도 고생이 많았더라. 일단 쉬고 내일 만나서 얘기해"

간신히 집에 도착해서 딸을 거실에 내려놓자 마자 아들이 현관문으로 들어왔다.
아들 역시 피곤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 앉아있는 엄마에게 달려와 안겼다.

"우리 아들 오늘 혼자서 참 잘했어. 엄마가 우리 아들 좋아하는 치킨 시켜줄게"
-"앙념치킨 사줘. 콜라도 시킬거지?"

아들은 치킨시켜 준다는 소리에 좋아하며 거실에 드러누었다.
드러 누운 아들의 양말을 벗기려 다가가 보니 양말 바닥이 더러웠다.
마치 진득거리는 것 같아 보였다.

"아들, 양말이 왜 이래?"
-"어... 오늘 빠졌어"
"뭐? 또 샛강에 빠졌어? 그래서 전화를 했구나... 그래서 계속 이렇게 있었던 거야?"
-"응"
"샛강 얼었지 않았어? 아직 아침에는 얼었을텐데... 발 시려웠었지? 어떻게 참았니?...."
-"괜찮았어"
"괜찮긴... 오늘 축구는 잘했고? 물을 안 가지고 가서 목 말랐지?"
-"그냥 괜찮았어"
"피아노도 갔다오고? 아까 시윤이에서 뭐 좀 먹었어?"
-"피아노 갔다왔고 시윤이집에서는 안 먹었어"
"시윤이 엄마가 고맙네. 근데 시윤이집에는 처음 간거지? 엄마도 시윤이 얼굴만 살짝 기억나는데. 하여튼 오늘 고마우니 우리집에도 놀러오라고 하자"
-"......"

배달 시킨 치킨을 맛있게 먹은 아들을 딸과 함께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넣어 씻겼다. 아직 엄마 자신은 외출복도 벗지 못한 채 소매를 걷어 붙이고는 아이들을 헹구어 내었다.
얼굴에 붙었던 꾀죄죄한 먼지들이 싹 닦이고 원래의 예쁜 얼굴로 반짝반짝 빛나자 엄마는 세상 모를 행복감을 또 다시 느꼈다.
피곤했던 딸도 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도 못해 웬일 별 투정없이 국에 말은 밥을 먹고는 어느새 이불에서 잠이 들었다. 그 이불은 하루종일 저 자리에 그대로 있었었지.
엄마는 짐가방을 미처 정리하지도 못한 채 겨우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나오니 10시가 다 되었고 마침 남편이 귀가하였다.
남편 역시 붐비는 지하철에 끼여 퇴근 하였을 것이다. 가스렌지에 물을 올리며 바빴던 하루를 변명같이 이야기 해주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치열한 하루를 보낸 남편에게 저녁으로 라면을 끓여주는 미안함에 점점 말이 줄어버렸다. 왜 사서 고생하냐는 남편의 퉁명스런 말에도 서운함은 크지 않았다. 별 소리 없이 라면을 먹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엄마는 오늘 또 한 겹의 정이 쌓였음을 느꼈다.
그렇게 온 식구가 골아 떨어지고 안전하고 깊은 밤을 맞이하였다.

다음 날 만난 진호엄마의 얼굴은 웃고 있지 않았다.

"자기, 뭐 간담회인가 뭔가 잘 다녀왔어? 딸래미 데리고 다녀오느라 고생했겠다. 진작 어린이집엘 보냈으면 서로 안 힘들었을텐데..."
-"어쩌다 한번 갔다온 건데 뭐... 어린이집 원비가 원채 비싸서..."
"그래, 그래도... 그건 그렇고. 어제 아들이 이야기 안해?"
-"어? 무슨 이야기? 샛강에 빠진 거? 엄청 추웠을 텐데 참고 있었더라. 내가 정말 화가 나려고 하더라. 우리 아들 그렇게 참고 있을 때 마다 내가 정말 속상해. "
"아니 그거 말고... 다른 얘기... 안했나 보구나. 어제 자기 아들 벌 섰대.
우리 진호가 그러더라. 우리 진호가 어디 학교에서 있었던 일 미주알 고주알 말하는 애야? 근데 어제는 나한테 그러는 거야. 자기 아들이 학교에서 울었다고. 속 없어 보이는 우리 아들이 자기 아들은 친구라고 꼭 챙기잖아. 들어봐. 어제 뭐 수학 시험을 쳤는데 시험 치고 나서 자기 아들이 손바닥을 맞았대."
-"네? 몰랐어요... 언니"
"하여튼 뭐 학교 보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선생이 좀 별로야. 왜 애를 때리고 난리야. 박복례 선생이 이 학교 오기 전 다니던 학교에서 봉투받는다는 애기는 있었다고 들었는데 때린다는 것 까지는 몰랐네. 우리 진호도 곧 맞고 오겠어. 순한 자기 아들이 맞았는데 우리 장난꾸러기 진호야 시간 문제지..."

엄마는 심장이 마구 뛰었고, 아들이 맞고 울었다는 말에 울컥하려고 까지 하였다. 진호 엄마는 말을 이었다.

"우리 시엄니는 왜 하필 어제 갑자기 와서는 병원가자는지 참... 하여튼... 그리고 급식시간에 자기아들 토했댄다. 선생이 가서 같이 치우라고 해서 우리 진호가 애들이랑 가서 치웠대. 뭔 선생이 일학년 짜리보고 그런 걸 치우라고 하는지..."
-"토했다는 말 안 했는데..."
"애들이야 토할 수도 있지. 먼 이유가 있을거야. 1학년 담임을 맡았으면 애들 어린거 다 알고 맡은 건데 정내미가 뚝 떨어져...
근데, 자기야, 어제 시윤이네 보냈었잖아. 이시윤 알아? 걔 장난 아냐. 완전 병이야 병. ADHD . 우리 진호가 집에 와서 뭐라고 했냐면,
시윤엄마가 진호랑 자기 아들을 식탁에 앉혀서는 시윤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계속 그랬나 봐. 그리고 또 시윤엄마가 김치전을 해줬대. 우리 아들은 그런 거 잘 먹는데, 자기아들 그거 안 먹잖아. 내 알지. 거기다가 대고 가려먹으면 안된다고 한참을 또 뭐라고 했다네. 그것 뿐만 아 아니야. 시윤이가 자기방에서 장난감을 막 던져서 진호하고 자기 아들이 피하면서 놀았댄다.
참... 시윤엄마는 지 아들이나 똑바로 키우지.
시윤이 걔 수업시간에도 막 돌아다니고 여자애들 때리고...
그런 애를 태권도 도장에를 보내놨으니 기술까지 배워서 애들을 더 때리고 있잖아.
나도 우리 진호 태권도 보내지만 시윤이 같은 애는 어디 조용히 앉아있는 거 배우는 학원을 보내야지. 아니 학원이 문제가 아니야.
시윤이는 큰일 났어. 저런 애는 엄마가 집에서 딱 붙잡고 있어야 되는데 저 집 부모는 매일 일한다고 애를 학원만 돌리니 원..."

진호엄마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은 엄마는 속이 너무 상하였다.
엄마는 하교한 아들을 앉히고는 조용히 물었다.

"아들, 어제 토했어?"
-"응"
"엄마한테 말을 해야지. 그런데 왜 토했어?"
-"깍두기 먹다가 그랬어"
"너 김치 싫어하는데... 선생님이 다 먹으랬어? 그럼 매일 어떻게 먹고 있었어?"
-"진호가 대신 먹어 줬는데"
"아.. 그랬어. 그랬구나. 어제 근데 왜 손바닥 맞았어? 손 아팠겠네. 봐봐"

아들이 내민 손바닥엔 아무 흔적도 없었지만 손가락에 빨갛게 피멍이 든 것이 보였다.

"이거는 왜 이런거야?"
-"어제 내가 전화 한다고 교실에 좀 늦게 왔는데 그때 박보래 선생님이 내가 문 뒤에 있는 걸 모르고 문을 닫았어. 그때 다쳤어. 그래서 수학 문제를 다 못 풀었어"
"아들, 아팠겠다. 어제 많이 힘들었겠네. 엄마가 전화도 안 받고... 간식도 못 먹고... 엄마가 미안해..."
-"나 어제는 좀 안 좋았는데 오늘은 괜찮아. 근데 나 방과후 축구 안하면 안돼?"
"축구는 왜? 축구 선생님이 무섭게 했어?"
-"축구 하기 싫어..."
"알았어. 이번달까지만 하고 다음달엔 다른 거 하자"

엄마는 다음 주 축구 수업이 있는 날 축구강사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보려고 했으나 그 전에 축구 교실이 휴강한다는 문자를 학교로부터 받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는 이러했다.
축구교실 고학년 반 아이가 축구교실 저학년반 수업 마치기를 기다리며 근처에서 놀고 있었는데, 그때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축구강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6학년 남자아이는 강당에서 놀고 있던 1학년 여자아이를 구석 창고로 데려가 바지를 벗게 했고, 속옷만 입은 그 아이를 다른 남자아이로 하여금 만지게 했다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당시 축구강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리를 한참 비운 상태였고, 학교측은 학생들을 잘 인솔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 급하게 수업을 폐강 시킨 것이었다.
피해자 1학년 여자아이 부모는 학교 측의 애매한 태도에 상처를 받아 결국 전학을 간다며 집까지 내놓았다.
가해자인 6학년 남자아이는 오히려 전담 상담 선생님과 1 대 1 상담을 받았고, 선생님들과 학교 측의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소문에 학부모들은 흥분했다.

엄마는 아들이 학교 입학한 한 달 새 부쩍 컸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이건 올바른 성장이 아니라 강요된 인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의 아들은 어제 하루 동안 참고, 그냥 참고, 무기력하게 어른들에게 순종해야 했다.
아침에 차가운 젖은 발로 교실에 있었어도 담임선생은 알지 못했고,
문 틈에 끼어 피멍이 든 아이 손가락에 대해서도 몰랐다 치더라도,
수학 문제를 풀지 못한 반 아이의 입장은 한발 앞서 헤아려, 자신의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체벌, 손바닥을 때린 것이었다.
아들은 축구교실 수업을 하면서 두꺼운 옷을 벗지 못해 그냥 더위를 참았을 것이고,
6학년 형의 이상한 행동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고,
여전히 엄마는 아들의 전화를 받지 못했었다.
시윤이 집에서 시윤이의 폭력을 놀이로 받아주어야 했고, 시윤엄마 앞에서 또 참아야 했을 것이다.
거의 종일 굶은 아들은 피아노 학원 아래 편의점에서 엄마가 준 천원으로 삼각김밥을 사먹으려 했지만 친구 진호와 나눠먹기 위해 삼각김밥 대신 마이쮸를 두개 사서 나눠먹었었다.

추위와 고통, 두려움, 무기력, 배고픔...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은 맛있는 양분이 아닌 부정적 감정이었다.
살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아들은 순간순간 긴장하고 마음 졸이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선생도 이웃도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었으며, 보호자 없이 방치된 아이는 그들에게 노출된 도구일 뿐이었다.
아이는 그렇게 세상을 향해 커 가고 있었다.

다시 한번 엄마는 아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성취를 접었고, 딸을 위해 스스로를 집에 가두었다.
언젠가 느낄 후회와 미련은 나중 일로 미루고,
내 아이를 위해, 남편의 아이가 아닌 바로 내 새끼를 위해 정성을 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가 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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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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