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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노인이 왜 계속 가난하게 살라는 정치가들을 지지할까?
매달 준다는 돈도 주지 않는 정부에 믿도 끝도 없이 계속 표를 주는 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경제적인 문제를 초월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만 판단한 것이라고 봐야하나.

한달 생활비가 빈곤층 노인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중위소득 이하의 비율이 50% 미만 이라는 것이지 재산도 없고 소득도 없이 마냥 가난한 노인이 전체 노인의 50%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오류가 있다.
물론 정부에서 기초생활비를 지원받아 사는 노인도 있을 것이고, 기초생활비 지원대상에서 빠져 정말 빈곤한 삶을 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정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살 수 있는 노인,
그들이 빈곤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당장 쓸 돈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크고, 가진 재산의 규모는 고려하지 않은 것임을 생각해야한다.
   
매달 백여만원의 연금이 나오는 노인도 기본 의료보험 이외에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있지 않으면 한달 백여만원의 생활비로는 병원비까지 감당하기는 쉽지않다.
아껴서 쓰거나 자식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편을 본인이 감내하거나 결국 다음 세대에 부담을 주는 이들을 뭐라고 생각해야하나?

자식을 키우느라 노후 준비를 못했다는 토로는 자식이 배은망덕함을 하소연 하는 것이 되거나, 스스로 현명하지 못했음을 자백하는 결과일 뿐이다.
사회 여러 구성원들이 모두 '자식'이다. 그 '자식'에는 범죄자도 있고, 학자도 있고, 자원봉사자도 있다.
그 자식들은 갑자기 주어진 삶을, 룰렛 게임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왔고, 그 영향 속에서 벗어나거나 벗어나지 못하거나 하는 인생을 살아오고있다.
노인의 노후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식'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자식들이 효도할 줄 알았다는 노인들의 한탄을 가만히 생각해보자.
서 넛의 자식들을 자연의 순리대로 낳아 처한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고 친다면,
그 자식들의 유년기는 그 노인의 노년기처럼 불행하고 부족하고 혼란스러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부모는 선택한 삶이다. 전쟁처럼 몇몇의 주장에 끌려 들어가 벌어진 사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선택한 삶인 것이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느끼는 무한한 애정이라는 감정을 선사받았다면, 그 이후 남은 것은 사회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과제 밖에는 없다.
'자식'에게 갑자기 삶을 주어지게 한 이유 - 사랑이든 사고든 - 를 설명해주고,
존재에 역행하는 질문에 빠져 하는 고뇌는 길지 않도록 삶의 기쁨을 먼저 몸소 보여준다면 그걸로 되지 않았나

보수단체가 국정원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정부옹호 집회를 열었다는 주장을 접하면서 보수단체 노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들을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맹목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낡았지만 그들의 신념이고,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니, 하나의 사회가 다양해지는 긍정적 효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뒷거래가 있었다면 과연 그들 주장에 확고한 근거가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워졌다.
노인들은 가족부양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물론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본인 외의 다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인이 이러한 집회를 통해 생활비를 벌었다는 추측은 가능성이 낮은 것 같다.
피라미드식 조직이라면 조직 수뇌부는 생활비를 건져 갔을 수도 있었겠다.
그럼 뭘까? 단지 돈을 벌려고 용역업체 알바를 하는 청년과 같은 경우도 아니고, 신념에 불타는 투사들도 아니면 뭐라고 생각해야할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이들이다.
중세적 가치관에 근대적 욕구가 섞이어, 나서서 행동하는 데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그 뿐인 노인들이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또다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은, 친근하게 습득된 근대적 집단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면 막연히 이득이 되겠지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 전세대이다. 
젊어서 배운 인문적 소양만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독재정부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 살면서 경제적 혜택을 받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평생을 비교적 근면하고 충성스럽게 살았지만, 충실했던 자신들을 더이상 보살펴주고 이끌어주고 지배해 줄 이가 보이지 않자 화가 났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예전에 힘들게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순간이 감사할 것이고, 불행하게 먼저 죽은 부모나 친구들이 떠오르면 미안함마저 들어 이렇게 뱅뱅돌며 과거에 갇히는 것이다.
과거에 매몰된 채, 갇힌 도넛 같은 차원을 과감하게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
갇힌 도넛을 탈출하면 큰일이 나는 것이고, 나눠먹을 도넛이 없더라도 함께 다독거리며 살면 된다는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그 과정의 출발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그런데, 과거에 갇힌 채 현재를 보고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 미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들을 불행한 근대화의 포로들이라고만 여기기에는 후련하지 못하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다.

사진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825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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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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