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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반드시 알아야 할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아브도오루 교수 & 오토워버그 박사의
충고 라는 부제로 퍼지고 있는
가짜뉴스 찌라시가
마치 20세기 북한 삐라 같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번 가짜뉴스의 내용은
마스크를 쓰지말라는 내용인데요,
마스크를 쓰면 암 뇌졸중 치매
우울증에 걸리고 면역력이
떨어진다고 주장합니다.


"마스크를 지금처럼 상시로 쓰면 ..
오히려 11%의 산소부족으로 인해.. 암, 중풍,치매,우울증 등에 걸릴 위험이 아주 높고, 오히려 면역력이 낮아져서, 더 중한 병에 걸릴수 있다고 세계적인 면역학자이자 암전문의사인 아브 도오루 교수가 경고하고, 또 노벨상 수상자이며 암세포 대사이론의 창시자인 오토 워버그 박사도, 저산소증이 암의 본질적인 원인이라고 하더군요. 그 외에도 수잔 험프리스 박사 등 여러 저명한 의사들도 동일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데..
어쩌죠?
이 아브도오루 교수라는 사람은
도루 아보라는 일본인으로
코로나가 오기 한참전인
2016년에 사망한 사람인데
마스크를 쓰지 말라고 했다니...
예언으로 남기고 죽기라도 했을까요?

이어 가짜뉴스는 산소부족으로
중병이 온다고 하는데


"그러니 되도록 마스크 사용을 줄여주세요. 실내에서 1미터의 간격만 둬도 된다는데 왜 밖에서까지 굳이 쓰고 다니나요? 우린 벌써 15개월째 쓰고 있잖아요.야외나 사람왕래가 드문곳에서는 잠간씩 마스크를 벗는것도 줗을것 같네요.이러다가 코로나로 피해를 입는것 보다 산소 섭취저하로 인하여 전 국민이 중병에걸릴수도 있다고 전문가 그룹에서 염려하네요."



전문가들은 접종을 해도
제발 마스크는 쓰라고 하는데...
친일적이고 반사회적인 가짜뉴스가
배포되고 있어 답답합니다.
이런 말을 믿고 퍼뜨리는 사람의
머리 속과 지나온 과거가
대충 보이는 듯하네요.
(극우는 결국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이며
물질적이고 친일적이라는 결과가 다시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토워버그 교수는
이름이
오토 하인리히 바르부르크로
워버그는 독일어를 영어식으로
읽은 이름이네요.
이 분도 1970년에 사망한 독일교수로,
코로나 시기에 마스크를
쓰지말라고는 하지 않았고요.
산소가 생체 반응에
중요하다는 상식을 주장했네요.
그렇습니다.
산소는 생명유지에 중요하기 때문에
코로나 전염바이러스가 섞인
산소를 마시지 않기 위해
마스크 필터로
한번 걸러 마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수잔 험프리스 교수라는 사람은
마스크가 독감예방이 있다는
연구에 이름을 올렸었는데 지금은
마스크 반대론자들의 주 인용인물이
되었네요.
마스크 쓰기가 해롭다는
주장으로 트럼프처럼 페이스북에서
방출될 처지라
텔레그램으로 옮겨갔다고
올렸네요. 이 수잔 교수는
과거 홍역 예방주사 무용론을
주장했었는데 실제
미국에서 홍역 주사를 거부하다가
왕창 퍼진 시기가 있기도 했었고
이 억지 논리를 코로나에도
연결시키고 있는 것 같네요.


손정민 사건을
유튜버들이 음모론으로 활용한
방식 딱 그대로 앞뒤자르고
입맛에 맞는 내용만 쏙 골라서
가짜뉴스 근거로 써먹는
수법에 아직도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듣고싶고 보고싶은
말만 해주기 때문이겠죠.
도서관으로 가서 신간철학서를
골라 읽거나 오래된 논어라도 읽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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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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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존중의 선을 넘고 있다는 것을 당사자도 잘 알고 있다.
본인에게 주어진 권한이자 의무라는 변명으로 상대의 인격을 뭉개는 이들은, 전기충격 시험에서 보았듯이 자신의 악한 본성을 의무감으로 포장하여 드러내고 만다.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이라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넘기는 것 역시 악한 본성의 한종류 일뿐이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같이 절대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더 멀리보고 높이보기 때문에 땅에 반쯤 박힌 돌을 자세히 보아 무엇하겠냐고 넘기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지만, 내 마음은 곧 편해진다. 왜냐면 나는 누구보다도 날 사랑하는 내 자신을 믿고있고, 나는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타인도 존중하며 사는, 그들과는 다른 부류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아직 시간이 많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을 어디선가 마주칠 일이 생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럴때 누가 더 불편할까? 나는 그일을 기억하지만, 그들은 기억 못한다면, 그건 내가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정보가 더 많다는 것이고, 내가 곧 그들을 당황시킬 자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억하고 되새겨 무뎌져라. 상처는 결국 낫지만 흉터는 상처가 생긴 이유를 기억하게 해준다.
내가 건재하며 모든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은 잠 못 이루지 못할 것이다. 내가 잠못 이룬 수많은 날들에 비교도 되진 않겠지만, 적어도 나는 현재 그들처럼 살지 않으며,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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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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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라비 작가가 책을 하나 내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려는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뽑힌 꼭지들이 일부러 독자들의 자극적인 관심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 아님을 기사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었다.

사진보니 60대인듯...
책은 보지못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터뷰 내용을 보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사회운동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회운동가가 있다. 약자를 돕는 사람이었을까?

이 기사는 당일 80퍼센트의 20대 남성이 그의 의견을 환영한다는 댓글을 달았고, 이는 20대 여성의 불편함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쓸만한 부분을 찾아내려 보았더니, 혐오보다는 연대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을 건질 수는 있었다.
혐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혐오는 문제가 세상에 터져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감정이고,  그 혐오의 의미와 이유를 이해해보려는 시도 불러오는 과정이며,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혐오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세라비 작가는 워마드 사이를 3년정도 들락날락 거렸던 것 같다. 어느 카페나 어느 게시판이건 따뜻하고 건전하고 지향점이 바른 곳은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냥 감정을 쏟아내고 떠나거나, 꾸며낸 이미지를 자랑하고 가는 곳이 현재 인터넷상 커뮤니티의 모습이다. 배출의 공간이라는 것만으로 족한 공간이며 문제를 공론화하고 타인의 어려움을 돕는 긍정적 역할은 일시적, 극소적이다.

워마드 게시물의 포르노적 행태에 대해 누구나 비난한다. 그럼 수천배나 수만배 비교도 안될 정도 많은 남성회원 사이트의 프로노 게시물에 대해서는 왜 언급을 하지않나? 남성의 폭력성과 성적 집착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까? 다 그렇지않다고? 그러면 미투를 말하는 여성들은 다 워마드 가입자인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도덕적이어야하나?
여성에게 더 높은 요구와 희생을 강요하는 남성중심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오작가의 태도가 딱 보이며, 이미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포기하고 사는 여성들을 다그치는 시모같아 보일 뿐이다.
그의 인터뷰중 우리가 이미 충분히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과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자는 말은 부딪힌다. 이미 충분히 평등한데 점진적이건 급진적이건 변화는 왜 하나?
이미 충분히 좋은 세상이라는 말은 항상 누군가 해오던 말이고 이는, 기득권층의 권력유지, 그리고 권력에 기대어 아주 작은 권력이나마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레퍼토리일뿐이다.
타인의 희생을 깔고앉아 누리는 작고 작은 권리가 바로 편견이고 차별이며 꼰대짓이다. 가정의 실제 수입을 담당하든 안하든 남성은 가정에서 군림하며 만족을 느껴왔고, 평생 남성들에 억눌려살다 며느리를 맞은 여성은 막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며느리를 부리며 만족해했다. 모두 옛날 이야기라고? 글쎄... 아닌데? ㅋ

오 작가의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꼰대스러움은, 지금보다 훨씬 답답하고 무서웠을 시절을 살아왔을 그의 과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으로 읽혀진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는 소리를,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바라보며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책임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다. 강력 성범죄가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성범죄를 사회 성차별구조와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문제 또한 절대 아니다.
범죄자는 늘 죄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리다 시도한다. 특히 성범죄자는 생계형 절도같이 감안해 줄 절박한 이유조차 없다. 오로지 그들의 낮은 도덕성과 이기심으로만 처벌해야한다.

오 작가가 질려하는 여성들의 나약한 태도나 연대하기 힘든 성향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의 말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주류에서 배제할 때 쓰는 전형적 수법이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할 때 등장하는 야비한 수법이다. 그것이 바로 오 작가가 지양하자는 혐오이다.

완전한 평등에 닿을 미래의 어느 순간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 여기 한국은 아직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가정에서부터 성차별을 당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편견에 순종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늘 분노하기란 불가능하며 어느순간 길들여지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물론 때로 분노했겠지만 평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온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에 적응했고, 분노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않으며 예전에 당했던 불평등과 불합리를 언젠가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은 소수다. 그 소수가 바로 사회운동과 같은 약자를 위한 일해야하며, 월급이 필요한 평범한 이들은 자기 인생만 바라보고 살기를 바란다. 시대를 넘어 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꼰대같은 당신은 괜찮아도 아직 분노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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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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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부페 식당에서 식사 중 옆 자리의 노인들 대화를 들었다. 들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여섯 명의 노인들이 모여 모임 같은 것을 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까지로 보이는 그들은 건강해 보였고, 식사량도 꽤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거의 개개인의 자랑이었던 것 같다.
모임을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뉴스나 이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거기에 대화의 내용이 자랑일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자랑이 자랑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대화를 나누는 이들 간에 공감대가 있어야 하고,
상황적 동질감 보다는 감정적 동질감이 있다면 유쾌한 대화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자랑 배틀과 같이, 누군가 쏟아내는 자랑에 아무런 공감없이 또다른 자랑으로 맞받아치는 상황은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될까?

20대나 30대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닥쳐올 두려움이라기 보다는
선택할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친구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지만, 예상치 못했기에 자신에게도 죽음은 갑작스런 사고로 다가옴이 두려운 것 일뿐
죽음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준비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급작스런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죽음 이후에 대해 준비할 것도 없고, 또 준비할 수도 없다.
다만 자신의 역할을 다르게 대체시킬 의무감이 있다면 아쉽겠지만 말이다.

노인은 죽음을 느끼고 있다.
바로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노인의 일상에 대해 단순하게 얘기할 때 보면 대부분 병원과 약이 주인공이다.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해 혹은 장수를 추구하기 위해 노인들은 병원을 방문한다.
병원이 가깝지 않은 곳에 사는 노인이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약과 치료 외에 포괄적이고 구체적인 준비를 할 때가 온 것이다. 

자신의 건강수명을 노인자신이 연장하고자 하는 의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비난할 자격이 없다.
다만, 스스로의 노력을 넘어 주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면 자기애적 치료가 이기적 연명으로 바뀌는 것이다.

도시의 병원을 순례하며 연명하는 노인이 스스로에게 공들인 약과 치료만큼, 깊은 성찰과 사라짐에 대한 준비를 한다면

단편적이고 말초적인 자랑을 할 시간이 있기는 할까?

살아온 시절과 살아온 방식이 고스라니 투영되는 노인의 모습은 참 솔직하다.
지난 인생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만, 분명 있는 후회와 아쉬움을 지나간 일로 덮어 버리고 또다시 후회와 아쉬움을 만들어내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삶은 단하루라도 후회와 부끄러움을 낳는다.
자신이 상처를 받았다면 더이상 상처 받지 않도록 하고, 다른 이가 나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 더 이상은 상처를 주지 않도록 해야한다.

간단한 삶의 정리기법이다.

살아온다고 지혜가 그냥 생기지는 않는 것 같다.
건강하지 않음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남들과 무의미한 잡담에 시간을 계속 낭비하고 있는 노인들은 그저 지구양분으로 돌아갈 흙이 될 뿐일 것이다.
깊이있는 시선과 따뜻한 몸짓 하나라도 주위사람에게 남길 수 있다면 그저 흙은 아니다.
인류가 왜 지금은 옷으로 몸을 가리고 손엔 칼을 들지 않고 다닐 수 있을까? 
나말고 다른 사람을 점점 생각하면서 살아온 앞 세대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 때문이다.
원초적인 자신의 우월함을 자랑하고 - 너보다 내가 건강하고, 내가 돈이 더 많고, 내가 덜 늙어보이고 하는 자랑 따위를 하는 자리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소외되지 않았다는 가짜 소속감 정도일까? 가짜는 금방 사라진다.
    
일상에서 추상적인 대화나 긴시간의 인생에 관한 담론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면,
포털 뉴스 메인화면처럼 매일매일이 소모되고 채워지는 과정에서 그나마 뭐라도 남길 수 있다면 다행이다.
철학적 개념을 들먹일 필요는 없다.
다만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현상으로서만 구경할 것인지, 아니면 의미를 찾아 지혜로 삼을 것인지는 순간의 선택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떠넘기거나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의 가장 큰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사진출처 : http://www.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6051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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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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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노인이 왜 계속 가난하게 살라는 정치가들을 지지할까?
매달 준다는 돈도 주지 않는 정부에 믿도 끝도 없이 계속 표를 주는 그들의 생각은 무엇일까?
경제적인 문제를 초월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만 판단한 것이라고 봐야하나.

한달 생활비가 빈곤층 노인이 50% 이상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중위소득 이하의 비율이 50% 미만 이라는 것이지 재산도 없고 소득도 없이 마냥 가난한 노인이 전체 노인의 50%라고 생각하는 데에는 오류가 있다.
물론 정부에서 기초생활비를 지원받아 사는 노인도 있을 것이고, 기초생활비 지원대상에서 빠져 정말 빈곤한 삶을 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정부의 도움없이 스스로 살 수 있는 노인,
그들이 빈곤하다고 말하는 데에는 당장 쓸 돈이 부족하다는 의미가 크고, 가진 재산의 규모는 고려하지 않은 것임을 생각해야한다.
   
매달 백여만원의 연금이 나오는 노인도 기본 의료보험 이외에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이 되어있지 않으면 한달 백여만원의 생활비로는 병원비까지 감당하기는 쉽지않다.
아껴서 쓰거나 자식에게 손을 벌릴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불편을 본인이 감내하거나 결국 다음 세대에 부담을 주는 이들을 뭐라고 생각해야하나?

자식을 키우느라 노후 준비를 못했다는 토로는 자식이 배은망덕함을 하소연 하는 것이 되거나, 스스로 현명하지 못했음을 자백하는 결과일 뿐이다.
사회 여러 구성원들이 모두 '자식'이다. 그 '자식'에는 범죄자도 있고, 학자도 있고, 자원봉사자도 있다.
그 자식들은 갑자기 주어진 삶을, 룰렛 게임처럼 주어진 환경에서 살아왔고, 그 영향 속에서 벗어나거나 벗어나지 못하거나 하는 인생을 살아오고있다.
노인의 노후를 불행하게 만드는 '자식'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누가 져야 할까?
자식들이 효도할 줄 알았다는 노인들의 한탄을 가만히 생각해보자.
서 넛의 자식들을 자연의 순리대로 낳아 처한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서 키웠다고 친다면,
그 자식들의 유년기는 그 노인의 노년기처럼 불행하고 부족하고 혼란스러웠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부모는 선택한 삶이다. 전쟁처럼 몇몇의 주장에 끌려 들어가 벌어진 사태가 아니라 개인 스스로가 선택한 삶인 것이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느끼는 무한한 애정이라는 감정을 선사받았다면, 그 이후 남은 것은 사회구성원으로 키워내는 과제 밖에는 없다.
'자식'에게 갑자기 삶을 주어지게 한 이유 - 사랑이든 사고든 - 를 설명해주고,
존재에 역행하는 질문에 빠져 하는 고뇌는 길지 않도록 삶의 기쁨을 먼저 몸소 보여준다면 그걸로 되지 않았나

보수단체가 국정원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아 정부옹호 집회를 열었다는 주장을 접하면서 보수단체 노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했다.
그들을 낡은 이데올로기에 갇혀 맹목적인 주장을 펴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낡았지만 그들의 신념이고,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이니, 하나의 사회가 다양해지는 긍정적 효과로 보려고 했다.
하지만 뒷거래가 있었다면 과연 그들 주장에 확고한 근거가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워졌다.
노인들은 가족부양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물론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본인 외의 다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노인이 이러한 집회를 통해 생활비를 벌었다는 추측은 가능성이 낮은 것 같다.
피라미드식 조직이라면 조직 수뇌부는 생활비를 건져 갔을 수도 있었겠다.
그럼 뭘까? 단지 돈을 벌려고 용역업체 알바를 하는 청년과 같은 경우도 아니고, 신념에 불타는 투사들도 아니면 뭐라고 생각해야할까?

결국 이도저도 아닌 이들이다.
중세적 가치관에 근대적 욕구가 섞이어, 나서서 행동하는 데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그 뿐인 노인들이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위해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정부를 위해 또다시 지지를 보내는 이들은, 친근하게 습득된 근대적 집단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면 막연히 이득이 되겠지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우리 전세대이다. 
젊어서 배운 인문적 소양만으로 평생을 살아왔고, 독재정부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맞춰 살면서 경제적 혜택을 받음을 기뻐했을 것이다.
평생을 비교적 근면하고 충성스럽게 살았지만, 충실했던 자신들을 더이상 보살펴주고 이끌어주고 지배해 줄 이가 보이지 않자 화가 났고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예전에 힘들게 살던 시절을 생각하면 오늘 먹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순간이 감사할 것이고, 불행하게 먼저 죽은 부모나 친구들이 떠오르면 미안함마저 들어 이렇게 뱅뱅돌며 과거에 갇히는 것이다.
과거에 매몰된 채, 갇힌 도넛 같은 차원을 과감하게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
갇힌 도넛을 탈출하면 큰일이 나는 것이고, 나눠먹을 도넛이 없더라도 함께 다독거리며 살면 된다는 이들을 설득하기에는 그 과정의 출발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보인다.   

그런데, 과거에 갇힌 채 현재를 보고 현재를 제대로 보지 못해 미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들을 불행한 근대화의 포로들이라고만 여기기에는 후련하지 못하다.              그들은 노예가 아니다.

사진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825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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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로운 거래야말로 그 궁극의 선이라는 염원에 보다 잘 도달할 수 있는 길임을, 진실을 시험하는 최선의 기준은 시장경쟁속에서 스스로를 수용시키는 생각의 힘임을...'
앤서니 루이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 

탈북자들 중 자본주의에 빨리 눈 뜬 사람은 자본주의에 의해 지배되고, 기독교교리에 빠진 사람은 맹목적 교리와 선교에 쉽게 지배되어지며, 또 반북주의에 빠져 자신을 부정한다.
본인이 전부라 믿으며 살아온 사회에서 빠져나오게 되면 정신적 아노미 현상 - 급격한 사회 변동으로 인하여 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하여 사회적,개인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 은 필연적이며 그래서 스스로를 합리화하거나 안정화하려 또 다른 이론에 쉽게 압도되어 휘둘리게 된다.
반북주의와 같은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적을 만들어 거기 매달리기도 한다.

토크쇼에 나온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여러 경험담이나 ...카더라 같은 이야기를 쏟아내며 북한을 희화하 하는 것을 보자면 그들이 출연료나 인기를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비록 지금 그들이 탈출을 한 사회이지만 거기에는 통제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함께 살았던 가족과 친구, 친척, 동네 사람들.
그들도 아는 누가 죽으면 인간적인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설레는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고, 힘든 노동 뒤에 저무는 해를 같이 바라보며 동료애를 느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탈출을 하여 떠난 고향이지만 그곳에는 북한의 선전과 통제가 스며들지 않은 언덕과 개울이 남아있을 것이고 부모님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탈북자들에게 그런 추억이 남아있길 바래본다.

대구의 시부도 마찬가지라 여겨진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부모에게서 일방적 지시를 받아왔을 시부는 자라며 근대식 교육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그 수준을 지금처럼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책도 부실했을 것이고 가르치는 사람도 부실했을 것이다. 단순한 지식 습득과 근대 여러 이론의 겉핥기를 경험했다고 본다.
시부의 시대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을 다스려 주기를 바라고, 통치당하길 바란다.
하늘이 내려준, 대대로 뿌리 깊은 가문의 인재가 왕이 되어 백성들을 이끌어야 모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뿌리깊은 가문"이란 것은 기득권 세력의 또다른 말이기도 하다.
기득권 세력에 큰 반발없이, 가진자 그대로 가지라 하고 못 가진자에게 조금은 나눠줄 수 있는 착한? 아량을 가진 인재가 왕 - 대통령이 된다면 복종할 준비가 된 사람이 바로 시부이다.

자신은 아버지 세대와의 단절을 종교적으로 이루어내었지만, 자신의 자식들과는 단절을 두려워하여 끊임없이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자식에게 주입한다. 결국 본인도 본인의 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반공하지 않으면 매장당하는 사회를 살아오다가 반공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세대를 보며,
세상이 난리날 듯한 걱정으로 - 이게 바로 종말인가?
한 귀퉁이에서만 산 자신을 옮겨 다른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귀퉁이 밖을 벗어난 자식을 귀퉁이로 끌어들이며 자신이 습득한 공포를 그대로 전해 주려는 것이다.

나와 다른점은 무얼까?


        
사진출처 : http://static5.techinsider.io/image/56f31919910584155c8b84d5-1200/xiaolu-chu-life-in-north-korea-train-ride-photograph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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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들이 내 미래의 모습일까?


언제부턴가 노인혐오증이 생겼다. 그들과는 인사말 이상 나누기 싫고, 가까이 있고 싶지도 않다.
병이 옮겨나 하는 그런 걱정보다는 노인의 예의없음이 싫고 일방적 의사소통이 싫다.
그렇지 않은 노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내 일상 생활 구역에서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불현듯 저들이 내 미래의 모습일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당신은 나이 안 먹을 줄 아나? 라는 비아냥이 근거가 있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내 노인혐오증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고칠 수 있을지, 계속 이렇게 살다가 노인이 되기 전 자살이라도 해야 되는 건지
구석에 처박아 둔 뜨다만 스웨터 실밥을 조심스레 풀어 포텐셜 넘치는 실뭉치를 만들어 볼 대단한 꿈을 안고 결말없이 쓰는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사진출처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104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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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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