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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경찰의 수사 진정성에 대해 계속되는 의문
애끓는 성민이 아버지 진노갑의 호소, "어느 인간들이 내 아들 진성민을 죽였는가!!"



첫번째 민현주의 이야기


민현주가 사는 고시원 방 안, 침대가 주인으로 보이는 방에는 사람까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보인다. 민현주가 일어난 침대 위 천정에는 “반드시 성공”이라는 글자가 붙어있고, 방문에도 무시무시한 구호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이러고 그냥 죽을 래? 악 한번 써 보고 죽을 래?]

공동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슬리퍼를 끌며 방으로 돌아온 현주는 침대 위로 털썩 올라 앉는다. 앳된 얼굴 중심에 반짝이며 빛나야 할 눈이 지쳐 보이는 민현주는 작은 거울 안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화장품이 어지럽게 들어있는 가방 속에서 몇 가지를 꺼내 얼굴 이곳 저곳에 바르기 시작한다. 화장을 끝내고 옷장 문을 열어 하얀색 셔츠와 검정색 바지를 꺼내 입은 민현주는 비닐 봉지에 싸서 넣어 둔 검정 구두까지 꺼내 신고 나간다. 현주가 미처 닫지 않아 빼꼼 열린 옷장 안에는 하얀색 제복이 걸려 있고, 제복 옷깃에 꽂혀 있는 금속 마크가 반짝인다.

분양 사무소 면접
전화 통화 소리가 요란하게 나고 있는 분양 사무소 앞에 도착한 민현주. 사무실 안에는 한 쪽으로 책상 몇 개가 모여서 놓여 있고, 가운데에는 책상이 놓여있는 공간보다 더 크게 가죽 소파 세트가 놓여 있다. 분양 이라고 쓰인 사무실 유리 문을 밀고 들어간 민현주는 자신을 보고 손짓을 하는 사람을 보자마자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부터 한다.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면접자 민현주 입니다.

분양사무소 박응근 소장 : 아, 어서 오세요. 이렇게까지 인사를 안 하셔도 되는데. 각이 잡히신 게 막 제대한 군인 같으시네요. 하하. 진짜 군인이셨다고 했나? (박응근은 민현주의 이력서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뒤진다. 별로 어지럽지도 않은 책상 위에는 몇 장의 서류 밖에 없어 보이는데도 민현주의 이력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민현주 : 군인은 아니고 해동대 휴학 중입니다.

박응근 : (서류 찾기를 그만두고 머리 속에서 무언가 찾은 듯) 이제 생각나네. 대학생 면접이 하나 있었어요. 아, 맞아요. 그 흰색 제복 입고 다니는 학교 말씀이시죠?

민현주 : 네.

박응근 : 그렇군요. 길에 다니다가 간혹 제복입은 학생들을 보면 참 멋지더라고요. 하지만 저희는 자세한 개인사 같은 건 묻지 않고요. 능력과 의지만 봅니다. 하하. 그런데 어떻게 여성이 뱃사람이 되려고 했어요? 그리고 해동대생이 배타는 일 말고 또 분양사업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셨어요? (앞뒤가 안 맞는 말을 널어 놓는다)

민현주 : 올해 개인 사정으로 휴학한 상태이고요, 복학 준비하면서 경험을 쌓고 싶었는데, 가장 빠르게 성공하는 길이 이 길이라고 판단해서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아직 어리지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박응근 : 나이에 비해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시군요. 잘 생각하셨어요. 경력이 전혀 없으시니까 차차 가르쳐야 할 것이 많겠고. 허험. (슬쩍 반말을 시작하며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다.) 민현주님은 일단 기본급 없이 시작하는 걸로 하시고, 저희는 3개월 수습 기간 지나면 실적 참고해서 정규직으로 계약할 수도 있고요, 그때 기본급 협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인중개사 자격증 준비는 하고 계시죠?

민현주 :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1차 시험 접수를 해 놓은 상태입니다.

박응근 : 그러시구나. 저희 일이 자격증을 꼭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많이 됩니다. 일하시면서 자격 취득해두시면 앞으로 기회가 더 많아 지실 겁니다. 그런데 영업은 해보셨어요?

민현주 : 영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박응근 : 아, 그러시구나. 저희는 단순 판매 영업이라 기 보다는 투자자를 모시는 일입니다. 걔 중에 영업 일을 쉽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결코 쉽지 않아요. 더더군다나 민현주 님은 사회 경험이나 경력이 전무 하셔서 쉽지 않겠군요. 하지만 그래서 처음부터 제대로 배우면 남들보다 빨리 성공할 수 있고 말고요. 모두 다 그렇게 들 시작합니다. 저도 그랬고요. 지금 사시는 곳은 어디에요?

민현주 : 중앙동에서 자취하고 있습니다.

박응근 : (민현주의 자취 란 말에 눈빛이 반짝이며 관심을 보인다.) 아, 자취하시는구나. 혹시 가족관계는?

민현주 : 부모님은 고향에 계시고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 입니다.

박응근 : 내가 다시 말하지만, 이 일은 열심히 배울 자세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능력 외에도 운도 좀 따라야 하는 일이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고요.

민현주 : 조급해 하지 않고 성실히 일해보겠습니다.

박응근 : 네, 좋아요. 아주 좋아요. (박응근은 눈으로 민현주 아래 위를 훑는다.) 그런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점심 같이 하실래요?

민현주 : 네, 시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제가 합격한 건가요?

박응근 : 십 년 넘게 사람을 상대해 온 제 눈에는 일단 민현주 님이 열심히 하실 분으로는 보입니다. 일단 밥 한끼 같이 하시면서 말씀 더 나누실까요? 식사하러 가시죠.

분양 사무실 인근 매운탕 집
오늘 처음 본 분양사무소 소장 박응근과 직원 두 명을 따라서 민현주는 매운탕 식당으로 들어간다. 비릿한 고추가루 냄새가 식당 전체에 배여 있는 듯 냄새가 풍긴다. 아직 12시가 안 되어서 인지 식당 안은 여유롭다. 현주는 남자들을 따라 신발을 벗고 올라가 잠시 머뭇거리며 서 있는다. 한 직원이 민현주를 소장 옆 자리로 슬쩍 보낸다. 상을 앞에 두고 직원 두 명이 나란히 앉고 민현주와 박응근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민현주는 자리에 앉자 마자 재빨리 수저를 놓고 물컵에 물을 따른다.

직원 나종수 과장 : 새로 오신 우리 동료분께서 아주 예의가 바르십니다. 소장님께서 아주 잘 뽑으셨습니다.(민현주를 보며) 저는 나종수 과장입니다. 처음 인사 드리겠습니다.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민현주 입니다. (앉아서 인사를 하는 나종수를 보고 민현주는 벌떡 일어나 90도로 인사를 한다.)

직원 변기석 대리 : 저는 변기석 대리입니다. 저도 일어서야 하나요? 하하

민현주 : 안녕하십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변기석을 향해 90도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박응근 : 하하, 우리 회사가 운이 좋은 거지요. 저렇게 예의 바르고 빠릿 빠릿한 신참이 들어왔으니 올해 실적 제대로 올려봅시다. 민현주 주임, 직급을 주임으로 시작하고 내 아까 이야기 한 대로 수습 기간 후에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우리 민현주 주임은 해동대 다니다가 휴학 중이십니다.

민현주 : 개인 사정으로 휴학 중입니다.

변기석 : 해동대가 그 제복 입고 다니는 학교 죠?

민현주 : 네, 그렇습니다. 2학년 휴학 중입니다.

나종수 : 그래서 군기가 들어 보이네요, 하하, 제 친구들 중에서 거기 다닌 애들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는 순 꼴통 들이었는데 졸업하고 취직하더니 꽤 잘 나가더라고요. 그 학교에 한 번 갈 일이 있었는데 바로 아는 친구는 아니고, 건너 건너 학교 이야기를 건네 들은 적 있는 데 아무튼, 거기 2학년을 2년 차라고 부르던데, 거기도 여학생 수가 좀 되죠?

민현주 : 네.

나종수 : 소장님, 우리 나라 여군들이 참 멋지고 섹시하죠. 상큼한 아가씨들이 제복까지 입으면 끝난 거죠. (과장된 손짓을 보탠다)

박응근 : 멋지다 마다. 우리 민 주임은 특히 더 멋지고 섹시하네. 섹시하다는 말 칭찬인 거 알죠? 하하 (능글맞은 웃음소리)

민현주 : 네, 감사합니다.

변기석 : 그 학교 전원이 기숙사에 들어가 산다고 하던데, 기숙사에서 사셨겠네요?

민현주 : 네.

변기석 : 그런데 거기 소문이 자자 하더라고요. 젊은 남녀를 한 건물에 모아 놓다 보니 연애하느라 난리도 아니라고. 그 학교 근처 산부인과가 그렇게 잘 된대요.

박응근 : 산부인과가 왜?

변기석 : 아이고 소장님, 눈치가 없으시네.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가 연애하다가 보면 별도 따고임신도 하고 할 거 아닙니까? 그럼 산부인과 가서 해결해야 지요. 안 그렇습니까?

박응근 : 아이쿠, 내가 그 생각까지는 못했네. 우리 민 주임도 남자친구 있나요?

민현주 : 아니요. 없습니다.

박응근 : 이렇게 이쁘고 매력이 넘치는데 남자 친구가 없다니. 남자들이 보는 눈이 없어.

민현주 : (불편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하자 민현주의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계속 옷을 당겨내리며 불안함을 드러낸다.) 저는 돈부터 벌어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남자는 그 후에 만나도 될 것 같습니다.

나종수 : 민현주 씨 데이트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하시네. 하하. 아무튼 성공이 중요하죠. 이 일 아니면 인생 역전하기 힘들어요. 대박 나서 인생 폼 나게 살아 봐야지요. 현주씨, 우리가 선배로서 잘 코치 해 드릴게요.

민현주 : .. 아 네.. 감사합니다.

나종수 : 개 같이 벌어서 정승 같이 쓴다는 말 알죠? 열심히 하면 그만큼 보상이 오는 일이니까 열심히 해요.

박응근 : 나 과장이 잘 지도해줘요. 영업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VIP 명단도 공유하고. 우리 미스 민, 함께 잘해 봅시다. (박응근은 옆 자리에 앉아있는 민현주의 무릎에 슬쩍 손을 올린다.)

민현주 : (민현주는 몸을 뒤로 뺀다. 그럼에도 박응근은 실실 웃으며 민현주의 어깨에 손을 올려 자신 쪽으로 당긴다.)

박응근 :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여기 남들 다 보는 데서 내가 무슨 이상한 마음이라도 먹었을까봐? 미스 민, 나를 큰 오빠라고 생각해. 아니 학교 다니면서 남자들 하고 친하게 지냈을 것 같은데 거기서 뭐 이런 거 스킨쉽 같은 거 장난 치고 안 그랬어? 거기는 고자들만 있나? 하하

민현주 : (굳은 표정으로 어떻게든 버티는 듯 보이던 민현주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박응근의 팔을 손으로 들어 힘껏 잡아 던지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변기석 : 저렇게 가게 둘까요? 신고하는 거 아닐까요?

나종수 : 아니, 소장님이 뭘 어쨌다고? 모텔로 끌고 가길 했어, 춤을 추자고 했어? 그리고 여기 카메라 없는 집이야. 아무 증거도 없는데 어쩔 거야?

박응근 : 튕기긴. 나 과장 내일 전화해서 다시 불러.

변기석 : (나 과장에 질 세라) 뭘 좀 아는 것처럼 보이더니 어지간히 까칠하게 구네. 휴학했다 면서 요. 분명히 무슨 사고를 친 게 맞을 거에요. 남자 문제라고 99프로 확신합니다. 그런데 다시 부르시려고요?

박응근 : 기석이 너랑 종수가 알아서 잘했으면 실적 보고 스트레스도 받을 필요가 없었다. 거기다가 관리도 귀찮고 눈에 거슬리는 여자를 왜 뽑아? 내가 혹시 너희 대신 영업 실적이라도 올려 줄 수 있을까 하고 지푸라기라도 잡은 거다. 그래도 니들보다는 패기는 있어 보였어. 저런 애들이 영업 일은 또 잘할지도 모르니까. 요즘 애들 시간당 몇 천원 받는 일 못 해.

나종수 : 네, 소장님의 깊은 뜻을 제가 미처 파악을 못 했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해서 다시불러 다 앉혀 놓겠습니다. 한 잔 하시죠. 하하





두번째 김지훈의 이야기
컨테이너선 텃세호

해가 서서히 넘어가고 있는 때, 김지훈이 삼등 항해사로 일하는 선박 텃세호는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막 출항을 시작하고 있다. 김지훈은 하얀색 안전모를 쓰고 흰색 작업복을 입고 무전기를 들고 갑판에 서 있다. 배가 서서히 움직이며 부두에서 떨어지기 시작한다. 김지훈은 선미에서 갑판원들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지훈이 로프 감긴 상태를 확인하려고 발로 툭툭 차다가 손을 댄다. 선교에서 이 모습을 본 선장 위동선이 무전기로 소리를 지른다.

위동선 : 삼항사! 야 이 멍청이. 너 또 말 안 들었지! 줄 잡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스탠바이 끝나자 마자 올라와!

김지훈 : 네.

전 선원이 듣고 있는 무전기에서 자신을 비난하는 선장의 욕설이 들리자 주변에 있던 외국인 갑판원과 조리장이 김지훈의 눈치를 본다. 김지훈은 어두운 표정으로 무전기에 대고 대답을 하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출항을 돕던 배들이 항구로 돌아가고 파일럿도 하선한다. 그런데 김지훈은 계속 항구를 바라보고 갑판에 서 있다. 해가 거의 다 지고 있다. 배가 항구를 떠나고 육지에서 먼 바다에 이르자 비로소 김지훈은 사무실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하얗게 칠해진 철판 바닥은 김지훈의 신발 바닥을 쌀쌀맞게도 도로 퉁겨낸다. 김지훈이 선장 방 문 앞에 선다. 방문을 두드려도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다. 김지훈은 그대로 서서 기다리고 있다. 이 때 선박 내 방송이 울린다.

위동선의 선내 방송 : 삼항사 이 새끼 어디 숨었어! 당장 브리지로 올라와!

선장 방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던 김지훈은 방송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든다.
그리고는 한 층을 빠르게 뛰어 올라가 선장이 있는 선교에 도착한다. 선교에는 외국인 갑판원과 실습 항해사가 앞을 보고 서 있다. 김지훈이 급히 선교로 들어왔는데도 두 사람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앞만 보고 서 있다.

김지훈 : 선장님, 방에 계신 줄 알고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위동선 : 내가 방에 왜 있어? 올라오라면 바로 올라와야 지. 어디서 요령 피우다가 이제 올라와!

김지훈 : 죄송합니다.

위동선 : 삼항사, 내가 시키는 대로 안하고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김지훈 : 좀 전 출항 때 긴장하는 바람에 대답이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위동선 : 계속 이러면 우리 배 사고 날 수도 있어. 이번 항차도 제대로 못하면 회사에 보고해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할 거야. 그러면 자네는 3년 의무 승선 못 채우고 군대 끌려가는 수가 있어. 정신 차리고 똑바로 해, 알겠어?

김지훈 : 네, 똑바로 하겠습니다.

위동선 : 내가 자네를 잘 가르쳐서 같이 가려고 하는데 왜 노력을 안 하나? 뭐가 어려운데? 어디 한번 말해 봐.
김지훈 :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개인적으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위동선 : 아니, 지금 말해봐. 다른 사람 신경 쓸 필요 없어. 실항사, 조타수 데리고 윙에 잠시 나가 있어.

실항사 여현지, 조타수 지미 : (두 사람은 위동선의 말에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간다.)

김지훈 : 저도 열심히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선장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 다 듣고 있는 무전기나 방송 말고 다른 방식으로 호출하시거나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오피서 인 데 기관부나 갑판원들 앞에서 지적을 받으면 부끄럽고 괴롭습니다.

위동선 : 아니, 이 새끼! 정신을 못 차렸네. (위동선은 김지훈의 얼굴을 철썩 때린다.) 너 때문에 배가 박살 나게 생겼는데 나보고 지금 무전기에 대고 말하지 말고 너한테 편지 써서 부치고 전보 치라고? 이 멍청한 놈, 니가 내 선장 경력에 빵구를 내고 있는 거 알아 몰라! 너 홍콩에서 바로 하선 시킬 줄 알아. (쓰러져 있는 김지훈을 내려보며 마구 폭언하는 위동선)

김지훈 : (위동선의 손에 얼굴을 맞고 벽에 부딪혀서 바닥에 넘어진 김지훈은 마치 본인 실수로 넘어진 듯 벌떡 일어나 위동선에 오히려 다급한 얼굴로 매달린다.) 선장님, 죄송합니다. 잘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위동선 : 너 학교 다닐 때 사고 친 거 회사에서 다 알면서도 사람이 없어서 일단 뽑았을 거야. 그렇다고 내 배에서 너 사고치는 거는 내가 절대 두고 못 본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실수하지 마. 아! 시끄럽고 일단 실항사, 조타수 들어오라고 해. 나가.

김지훈 : (김지훈은 허리를 90도로 숙여 선장의 등을 향해 인사를 하고 조타수와 실항사가 서 있는 선교 옆 문을 연다.) 실항사, 선장님께서 들어오라고 하신다. 지미, 컴인..

다부진 눈매의 실항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김지훈에 아무런 대답 없이 선교로 복귀한다. 위동선 선장과 실항사 여현지, 조타수 지미가 각자 자리로 돌아가고도 김지훈은 선교 문 앞에서 잠시 서 있다가 자리를 조용히 떠난다. 여현지는 선장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커피 주전자 스위치를 올리고 믹스 커피 봉지 하나를 꺼내 든다. 찻숟가락으로 살살 저어 믹스커피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 위동선 앞으로 들고 간다.

위동선 : 저 새끼, 사고를 정신 놓고 살다가 사고를 치던 자살을 하던 뭔 짓이라도 벌릴 놈이야. (잔뜩 화난 얼굴로 혼잣말을 하던 위동선은 여현지가 들고 온 커피잔을 보고 얼굴에 살짝 긴장이 풀린다.) 오 그래. 현지야, 출항 하느라 고생했다.

여현지 : (동그란 눈을 옆으로 길게 빼 웃으며 위동선에 커피잔을 내민다. 앞을 바라보는 여현지의 눈에 차선 하나만 나 있는 길이 보이는 듯하다.)



텃세호 김지훈의 방
그날 밤, 김지훈은 자신의 방안 침대 위에 가만히 앉아 있다. 핼쑥한 얼굴과 새까맣게 탄 팔뚝으로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의 김지훈은 아무 것도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다.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카톡 메시지 창]
박범준(삼등기관사) : [ 지훈 선배, 아까 식사 못하신 거 같은데 저랑 라면 한 그릇 하실래예?]

김지훈 : [ 아니, 별로 생각이 없어. 아직 안 자니?]

박범준 : [ 오늘 힘드셨죠?]

김지훈 : [ 무전기로 다 들었지?]

박범준 : [ 네… 그래도 다들 형님이 잘 견뎌 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힘내세요.]

김지훈 : [ 다 들었겠지. 못 들었 리가 있나… 그래, 쉬어라.]

김지훈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잠시 뒤 조용히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충분히 오래 정적이 흐르고 김지훈은 화장실에서 아직 나오지 않는다.





세번째 주병성의 이야기

주병성의 해군 부대 회식 자리, 식당 별실에 차려진 긴 상을 앞에 두고 검정색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모여 앉아 있다.

최윤식 소위 : 중위님, 오늘 부대장님은 못 오십니까?

이도윤 대위 : 못 오신다고 했어. 올 사람들 다 왔나?

최윤식 : 네, 인원 체크 해보겠습니다. (최윤식은 자리에서 서서 앉아 있는 사람들 수를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며 센다. 단순하기 그지없다.) 총 인원 8명으로 확인 완료했습니다.

이도윤 : 그런데 우리 끼리 이렇게 마시고 끝나나? 예쁜 손님들은 없어?

최윤식 : 하하, 소대장들 애인 집합 시킬까요?

이도윤 : 소대장들 애인 부르면 뭐하나? 다 임자가 있는 데. 없는 아가씨들을 불러야 지.

최윤식 : 그럼 요. 애인들 올 때 친구들 데리고 오라고 자동 전달합니다. 자자, 전우 여러분, 중대장님이 특별 게스트분들 초대하자고 하십니다. 다들 연락 돌리시고요. 선착순 도착에 따라 상점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결혼 안 한 주병성 소대장, 지금 바로 애인 부르고 친구 2인 이상 같이 오라고 해.

주병성 : 아, 제 여자친구 지금 시험기간이라서 못 올 겁니다.

최윤식 : 어, 그래 시험기간? 오, 고시라도 준비하시나 보지?

주병성 : 아니요, 아직 대학생입니다.

최윤식 : 대학생? 오 풋풋 쩌는 데. 중대장님, 여대생 어떠십니까? 주병성이 애인이 대학생이랍니다.

이도윤 : 주병성, 관심사병 주제에, 제 일은 잘 못하면서 어린 여자 꼬시는 능력은 있구나. 대단한데.

최윤식 : 병성아, 어서 전화해서 불러.

주병성 : 죄송하지만, 오늘은 부르기가 어렵습니다. 다음에 부르겠습니다.

최윤식 : 어쭈? 명령 불복종이야? 너 잠깐 밖으로 나와 봐. 중대장님, 잠시 나가서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이도윤 : 최 소대장, 관심사병이야, 살살해. 하하.


식당 앞 도로변
최윤식을 따라 주병성이 식당 슬리퍼를 끌고 식당 밖 도로가로 나간다.

최윤식 : 주병성, 너 뭐가 그렇게 잘났냐?

주병성 : 아닙니다.

최윤식 : 부르라면 부르지 뭔 핑계를 대고 그래!

주병성 : 시험 때문에 못 온다는 데 제가 어떻게 합니까? 그리고 지난 번에 그 친구를 저희 부대 술자리에 한 번 불렀었는데 다시는 안 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날 술자리에서 간부들이 성희롱 해서 싫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참는데 만약에 또 부르면 경찰에 신고하고 그때는 저랑 헤어진다고도 했습니다.

최윤식 : 쯧쯧. 너는 출세하기 글렀다. 그렇게 눈치가 없고 요령이 없어서 어디 출세는 커녕 군 생활도 제대로 끝내겠니?

주병성 : 솔직히 회식 자리에 왜 여자친구를 불러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최윤식 : 뭐? 그럼 지금 온다는 다른 소대장들 애인들은 제 정신이 아니어서 택시 잡아타고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나?

주병성 : 그건 아닙니다.

최윤식 : 알았어. 소문대로 아주 지능적이야. 방출된 부대에서 들리는 소리가 전부 팩트라더니 그런 것 같다. 그런데 학교 때부터 소문이 자자했다며? 그렇게 잘 나서 살인 하고도 저만 멀쩡하게 군복부 하나 보네. 넌 제대 날만 기다리고 있겠다. 우리는 여기서 뿌리 박을 사람들이라서 여자친구 마누라 누구라도 불러 다 바치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나 먼저 들어간다.

주병성 : (최윤식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주병성은 담배를 꺼내 피우려는 지 식당 옆 플라스틱 의자로 가서 슬며시 앉는다. 표정 없는 야윈 얼굴로 손등에 난 까진 상처를 쳐다본다.)


식당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
- 주병성 이 새끼, 지 애인 아까워서 못 부르겠답니다.

- 뭐, 수준 안 맞아서 같이 놀기 싫다고? 풋풋한 여대생들하고 같이 좀 놀자는데 우리가 그렇게이상해?

- 주병성 저 새끼, 어디서 잘난 척이야? 관심사관 딱지에 살인자 라는 소문도 있는 주제에.

- 그런데 그거 진짜입니까? 주병성 소위님이 살인 사건에 관련되어 있습니까?

- 해동대 다닐 때 여러 명이 짜서는 한 명 죽였다고 소문이 다 났어. 조심해. 까불다가 너도 죽을 수 있어. 하하

주병성 : (가게 벽 하나를 넘어 생생하게 들리는 뒷담화에 손을 파르르 떤다.)

주병성은 휴대폰을 열어 문자 메시지를 입력한다.

주병성 : [ 바쁘니? 잠깐 오빠 보러 올 수 있어? 지금 회식 중 인데 보고 싶어서. ]

자영의 답장 : [ 회식? 어이가 없네. 우리 이미 끝난 거 몰라? 여자 친구를 무슨 시간당 도우미 정도로 대하는 인간들 편을 드는 오빠를 더는 이해해 줄 수가 없어. 연락 차단하는 것 이해해 줘…]

주병성은 답장을 읽고 다리가 풀린 듯 플라스틱 술 상자 위에 털썩 앉는다. 손에 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담배를 입에 갖다 댄다. 잠수라도 하는 듯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 마신다. 들이 마신 연기를 다시 내뿜어야 할 텐데 주병성은 날숨을 잊었는지 정면만 응시한다. 얼굴이 붉어지고 일그러지기 시작하자 겨우 연기를 내뿜고 붉게 충혈된 병성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삶의 궁지에 몰린 세 사람. 이야기는 1년 전으로 돌아간다.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의 청와대 앞 시위장면

청와대 앞에 모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진성민을 살려내라, 진성민은 타살이다, 성민아 미안해, 국가가 죽인 대학생 진성민 등의 펫말을 들고 시위 중이다. 언론사 기자들보다 많은 유튜버들이 모여 각자 방송하느라 바쁘다.

시위 가담자 인터뷰 : 네, 저는 진성민 군이 타살 당한 것으로 확신합니다. 지금 언론사들이 모두 두 입을 닫고 있잖습니까? 경찰도 앞 뒤가 안 맞는 설명을 하고 있고요. 이걸 어떻게 믿나요? 경찰도 검찰도 언론도 이 정권에 모두 매수됐어요. 저희는 유튜브만 믿어요. 유튜브가 진실이고 정의입니다. 여러분!!!

시위대 : 성민이를 살려내라. 국민의 명령이다. 해동대를 해체하라! 국공립대통폐합 지금 당장 실시하라! 마피아 보다 더 악독한 해양계 카르텔을 당장 척결하라!
시위대 가담자 인터뷰 : 아니, 진성민 군의 죽음은 이상한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에요. 술먹다 객사했다 실연당해 자살했다 라고 막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고인지 살해인지 판가름을 하려면 일단 CCTV를 까야 될 거 아니에요? 왜 안 깐대요? 국립 해동대가 총장 사유지인가요? 전부 국민 세금으로 지어준 건물이고 세금으로 월급 주는 거 아니에요? 누가 은폐하려고 하고 감추려고 하는지 청와대가 당장 밝혀야 합니다! 청와대도 공범이다!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이 유튜브에 출연한다

진성민 부친 진노갑은 아들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주장하며 친 언론 행보를 한다.

유튜브 방송 [오른손으로비비고]의 진행자 남포동둘째가 해군 베레모를 쓰고 등장한다.

남포동 둘째 : 필승! 안녕하십니까? 첫째가 안 되어도 좋은 남포동 둘째가 돌아왔습니다. 먼저 구독자 여러분 후원에 감사! 감사! 대감사! 를 드립니다.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난번 방송에 이어 오늘도 전국민의 대중적 공분을 사고 있는 바로! 전도 유망한 해동대생 살인사건과 관련한 충격적인 진실을 공개합니다. 예고해 드린 대로 타 언론 방송국 어디서도 하지 못했던 고 진성민군 아버님과의 단독 인터뷰,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구독 좋아요 완료하신 분들께 감사 드리고 다시 이어 가겠습니다! 전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한 해동대생 사망사건이 이제 살인 사건으로 확실시되며 사건 정황이 사이버렉카 수사대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수사대이죠. 정의를 찾는 우리는 절대 이 사건을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존재하는 사건으로 그냥 묻히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 해동대생 살인 사건으로 한층 더 깊게 파고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고대로 아주 어렵고 특별하게 모신 게스트 분을 소개해드립니다. 바로 진성민 군의 아버지 진노갑 협회장님 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아버님.

진노갑 : 안녕하십니까, 진성민 아버지 진노갑입니다.

남포동 둘째 : 아, 먼저 호칭을 진 협회장님이라고 해야 할 지, 성민군 아버님으로 해야 할 지, 어떻게 하는 것이 편하실까요? 이 자리에 어렵게 모신 우리 성민군 아버님이 바로 국제해수발전협회 회장님이십니다.

진노갑 : 그냥 성민이 아빠로 불러주세요. 우리 성민이의 억울한 죽음을 반드시 밝히고자 저는 모든 지위를 내려놓고 백의종군 중인 사람입니다.

남포동 둘째 : 먼저 아버님께서 의문을 제기하시는 부분을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고 타당성이 상당하다고 많은 분들이 판단해주시고 계시거든요. 여기서 한 번 정리를 해주세요.

진노갑 : 네, 먼저 제 호소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들이 계신 것에 대해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렇게 호소하지만 아무 힘이 없어서인지 경찰이나 검찰은 수수방관만 하고 있습니다. 제발 제 피 끓는 호소를 들어 보시고 냉정하게 판단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의 합리적인 의심은 가장 먼저, 제 아들 성민이가 왜 의식불명인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게 되었나 에서 시작합니다. 해동대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제 아들 진성민은 규율이 엄격한 해동대에서도 학교 생활을 착실히 하고 성적도 좋은 우등생이었습니다. 평소 솔선수범하여 받은 상점도 상당한 학생이었습니다. 금요일부터 시작된 연휴 동안 동아리 모임을 했고 술을 조금 마셨나 봅니다. 그런데 동아리방에서 친구, 선후배들과 다 같이 술을 마셨는데 저희 아이만 건물 밖에서 다친 상태로 발견됩니다. 그것도 같은 동아리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말입니다. 함께 술을 먹었는데 왜 저희 아이만 다쳤고, 그것도 우연히 지나가던 같은 학교 학생이 발견을 했을까요? 싸움이 있었고 선배들이 우리 성민이를 집단 괴롭힘 한 것이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두번째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이영기라는 간부급 학생이 성민이가 다쳐서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를 합니다. 성민이 체육복에 적힌 이름을 보고는, 바로 옆 건물 동아리방으로 찾아가 김지훈을 깨웁니다. 김지훈은 이영기와 같은 과로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영기가 우리 아이를 발견하고 119에 신고한 시간은 새벽 6시 25분이고 제가 연락을 받은 시간은 아침 8시가 넘어 서입니다. 정확히 8시 44분인데요, 왜 부모에게 연락을 바로 하지 않았냐는 점입니다. 해동대생들이 정부로부터 지급받아 입는 체육복에는 상하의 모두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처음 발견한 이영기 학생도 바로 저희 아이 이름을 확인했고 학과 학년까지 다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 김지훈과 주병성은 성민이가 119 구급차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성민이가 이 둘의 친한 동아리 후배라면 과연 이것을 정상 행동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이들이 집단 가해자라고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세번째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저희 성민이과 같은 동아리에 소속된 후배인 민현주라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저희 아이가 이 여학생에게 사고가 일어난 그날 밤 여러 번 전화를 하는데요, 통화 연결이 된 것은 두 번으로 나머지 9번은 모두 통화가 되지 않았다고 휴대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민현주 여학생은 갓 들어온 1학년이었고 해동대에서는 바로 직속 선배의 전화나 호출은 바로 응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총 아홉 번의 통화가 거부되었던 것으로 보아 제 아이와 사귀는 관계가 아니었나 하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사귀지도 않았는데 왜 밤중에 전화를 열 번 넘게 하고 또 받지 않았을까요? 저희 아이는 누구를 스토킹 하거나 괴롭히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점잖고 누구보다 예의 발랐으며 아버지인 저의 업을 존경한다며 열심히 노력해 해양계로 진학한 속이 깊은 아이입니다. 민현주라는 후배 여학생이 저희 성민이의 사망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반드시 밝혀야 합니다. 저는 더 잃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성민이의 죽음 이후 학교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덮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학교 측에서 감시카메라 영상 열람에 협조를 해 주었으나 가장 중요한 증거가 담긴 녹화 영상은 없다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경찰도 단순 음주사망사고로 처리하고 넘어가려 합니다. 저는 여기서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김지훈, 주병성, 민현주를 고소하고자 함을 밝히며 법 앞에서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
전도유망한 한 젊은 이의 억울한 죽음을 이대로 묻히게 해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다른 모든 젊은 청춘들을 위해서 제발 여러분이 관심을 가져 주셔서 진실을 밝히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른 것인지 낱낱히 밝히도록 도와주십시오.

남포동 둘째 : 네, 성민군의 아버지의 절절한 호소 잘 들었습니다. 국제협회에서 장으로 계신 권위있는 분이신 데 이렇게 부정까지 넘치는 다정하신 분입니다. 반드시 이 성민군 사건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가해자를 찾아내야 할 것이고요, 이름이 민현주라는 여학생인가요? 우리가 백 번 양보해 성민군과 사귄 것이 아니라고 해도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던 진성민 군이 이렇게 된 것에 일말의 책임감은 느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충격적인 증언이 폭로됩니다. 두둥! 민현주 임신설! 아이 아빠는 누구라는 것일까요?
저희가 원하는 진실을 신속히 밝혀 주시기를 호소 드리고 후원 부탁드립니다. 모든 후원은 더 좋은 방송 제작을 위해 쓰입니다. 오늘 진성민 군의 아버지 진노갑 협회장님을 모시고 가장 진실에 근접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된 것도 바로 여러분의 후원입니다. 감사합니다.


유튜버 진사탐 (진실을 사랑하는 탐사대)의 영상

진사탐 영상 나레이션 : (조잡한 영상이 반복 재생되는 가운데, 가공된 목소리로 나레이션이 흘러 나온다.) 저희가 제기하는 의문점은 용의자 김지훈이 왜 진성민을 죽였냐는 바로 살해 동기입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진성민 군이 동아리 후배 민현주와 순정적인 무언가(스토킹의 미화표현)가 있었다는 사실은 휴대폰 포렌식과 주변 증언을 통해 확인이 되었는데요, 그러므로 김지훈이 선배라는 위치를 이용해 민현주를 뺏으려 하다가 진성민을 술김에 살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주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 있습니다. 친구 중 한 명이 가지고 있던 영상 증거에 김지훈이 성추행 즉, 민현주의 가슴을 만지는 장면과 이어 진성민이 분노하는 표정이 다 공개가 되었고요. 이로써 확인할 수 있는 점은 바로 김지훈에게 강력한 살해 동기가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이 비극적인 사건을 은폐하려는 의혹의 증거로 보이는 점은, 핵심적인 감시카메라 영상을 공개하지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정도 국민적인 관심을 끄는 사건이라면 무엇보다 유가족과 고 성민 군을 위해서 전부 공개하여 고인의 명예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심심하면 등장하는 해양계 카르텔이 다시 언급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학교와 업계가 뭉쳐서 진성민 군의 죽음을 은폐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공개하기 두려운 것일까요? 무엇을 진사탐과 국민들은 해동대 총장 사퇴, 해동대 해체 및 통폐합, 가해자 처벌을 원합니다. 무엇보다도 전도유망했던 진성민 군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수많은 국민들을 위해서 모든 진실은 하루빨리 밝혀져야 합니다.
그런데 구독자 여러분, 오늘 가장 의심스러운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었는데요, 김지훈과 절친이자 진성민 살해사건 공범 용의자인 주병성의 부모가 해동대 총장 부부과 같은 모임을 하는 유력인사라고 하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주병성은 학군단 후보생으로 정학 처분을 받게 되면 바로 군대에 사병으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총장과 친분이 있는 부모가 힘을 써서 주병성을 학교 차원에서 적극 방어하려고 성민군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요, 만약 사실이라면 이는 정학이 아닌 퇴학 처분을 내려야 하고도 남고요, 현 정권에서 발탁한 정제신 해수부 장관과 밀접한 사이라는 해동대 총장 정대해와의 관계를 낱낱이 밝혀야 함을 강력하게 촉구합니다.
구독자 여러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진사탐을 위한 화끈한 후원을 부탁드리고 어제의 최고금액 후원자 ksh0504님 감사합니다!!



다시 시간은 사건 당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른 아침 해동대 기숙사

진성민이 사망한 날 아침, 이영기가 기숙사 건물에서 걸어 나오고 진성민이 쓰러진 곳을 지나간다. 토요일 아침 6시, 이영기가 주말마다 가는 영어 학원으로 가기 위해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온다. 해동대학교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 4학년 이영기는 어제 금요일부터 시작된 연휴에도 집으로 돌아가거나 다른 학생들처럼 술판을 벌려 밤새 놀지 않았다. 졸업 후가 걱정되는 이영기는 토익책을 싸 들고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한 채 학원으로 가는 중이다. 축축한 아침 공기에 누가 소주를 타기라고 한 듯한 알코올 냄새는 캠퍼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술병 안에 남은 술에서 나오고 있었다. 이영기가 기숙사 서쪽 현관문을 열고 나와 걷는다. 해가 뜨긴 했으나 아직 퍼런 기운이 남아있다.
동아리 방들이 모인 건물 옆 길로 터벅터벅 걸어가던 이영기는 누군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경사면에 만들어진 길은 아무런 추락 방호장치나 방지펜스가 없는 상태로 2미터 아래로 떨어질 위험이 있는 길이다. 이영기는 아래에 떨어져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는 약간 떨어져 있는 계단으로 뛰어가 내려 간다. 내려가면서 낭떠러지처럼 보이는 윗 길을 쳐다 본다. 이영기는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흔들어 본다. 의식이 있는 듯 없는 듯 확실하지 않아 당황한다. 조심스럽게 쓰러진 사람이 입고 있는 체육복에서 이름을 찾는다. 곧바로 다친 이는 2학년 학생 진성민임을 확인한다. 이영기는 어떻게 할까 서서 잠시 생각을 하다가 119 구급차를 부른다. 구급차는 빠르게 도착했고 쓰러져 있는 진성민을 들 것으로 옮겨 싣고 병원으로 간다. 이영기는 학원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한다는 생각을 하며 학원 가방을 꽉 쥐고는 옆 건물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 간다.


김지훈이 밤새 술을 먹고 동아리방에서 자고 있다.

(계단을 뛰어 올라와 가쁜 숨을 내쉬는 이영기가 쾅 하고 문을 연다. 문은 열렸지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안을 쳐다보고 서 있는다. 내부에는 지난 밤 술자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흔적이 가득하다. 방 여기저기에서 널부러져 자고 있는 사람들이 대충 열 명은 되어 보인다.)

이영기 : 야, 김지훈, 일어나 봐.

김지훈 : 어, 왜?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자는 척 눈을 감고 자고 있던 김지훈이 눈을 뜬다. 이영기가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한다.)

이영기 : 빨리 일어나서 나와 봐. 큰일 났다.

김지훈 : 왜? 무슨 일인데? (큰 일이라는 말에 김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한다. 이영기와 함께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 온 김지훈은 어제 밤의 숙취로 인해 눈빛이 흐리다.)

이영기 : 진성민이 너희 동아리지?

김지훈 : 성민이가 왜?

이영기 : 좀 전에 119 불러서 병원 갔어. 심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김지훈 : 뭐라고? 심각하다니?

이영기 : 내가 좀 전에 학원 가려고 나오다가 길에 쓰러져 있는 김성민을 발견 했어. 주변에 피가 많이 흘러 있었고 의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어. 바로 119를 불렀고 대양병원으로 간다고 했어. 일단 김성민 부모님 연락처 아니?

김지훈 : 어, 내가 연락할 게. 어느 병원이라고?

이영기 : 대양병원.

김지훈 : 알았어.

이영기 : 그런데 나 지금 학원가야 해. (의심과 냉정을 담은 눈빛으로 김지훈을 쳐다본다.)


김지훈은 동아리 방으로 돌아와 주병성을 불러낸다. 주병성은 이미 이영기가 문을 열고 김지훈을 방에서 불러 냈을 때부터 깨어 일어나 앉아 있었다.

김지훈 : 성민이가 다쳤나 봐. 구급차에 실려 갔대.

주병성 : 뭐? 많이 다쳤대?

김지훈 : 그런데 성민이 혼자 새벽에 어딜 나갔던 거야?

주병성 : 현주, 사당 보낼 때 먼저 가 숨어 있다가 늦게 내려온 거 아니야?

김지훈 : 아.. (얼굴이 새하얗게 변하며 무언가 알아낸 듯한 표정)

주병성 : 다른 방에 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거야? 어떡하니? (지훈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따라 무거운 표정을 짓는다)

김지훈 : 일단 집에 연락 드리고 병원으로 가보자.

주병성 : 너 진성민 집 번호 알아?

김지훈 : 어

김지훈과 주병성은 아직도 여러 명이 널 부러져 자고 있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집어 입고 나온다.



택시를 잡는 김지훈, 주병성. 택시 안, 이어 대양병원에 도착 후 택시에서 내린다.

건물을 나와 잠시 걸어서 큰 도로로 나와 택시를 잡아탄다. 택시 안에서 김지훈은 성민의 집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다. 그러나 전화는 연결되지 않는다. 김지훈은 더 이상 전화를 걸지는 않는다. 주병성과 김지훈은 말이 없다. 택시는 곧 대양병원 앞에 멈춘다.


곧바로 응급실로 들어간 김지훈과 주병성은 누워있는 진성민을 바로 알아본다.

응급실 간호사 : 진성민 환자 보호자 이신가요?

김지훈 : 학교 선배 인데요, 부모님께는 연락 중입니다.

응급실 간호사 : 보호자 오시면 확인 후에 수술 들어가야 합니다.

김지훈 : 그런데 얼마나 많이 다쳤나요?

응급실 간호사 : 다발성 골절상을 입은 걸로 일단 보이는데 의사선생님 오실 거에요. 잠시 기다리세요.
(곧 의사가 이들 쪽으로 걸어온다)

의사 : 진성민 환자가 오른쪽 팔과 다리가 골절된 것으로 보이고요, 잠시 후에 MRI 촬영 하고나서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해동 대학 학생들이시라고요. 저희 병원과 업무협약이 되어 있어서 일단 개인정보를 저희 자료로 확인했고, 수술 동의 때문에 보호자께 연락 드렸다고 합니다.

김지훈 : 병원에서 보호자 연락처를 아시나요?

의사 : 네, 지금 내려오신다고 했어요. 여기 오신 두 분은 학교 친구들이신 가요?

김지훈 : 저희는 학교 선배들입니다. 그런데 괜찮을 까요?

의사 : 지금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영구 장애가 생길 수도 있어 신속하게 수술을 해야 합니다.

주병성 : 네?

김지훈 : 그렇게 많이 다쳤나요?

의사 : 과음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 같은데, 어떻게 다친 건지 자세히 알아 보셔야 할 것 같아요.

주사를 맞고 잠이 든 건지 의식이 없는지 확실히 알 수 없는 진성민과 얼굴이 하얗게 질린 김지훈과 주병성을 두고 의사가 떠난다. 김지훈과 주병성을 한동안 말없이 누워 있는 진성민을 쳐다본다. 진성민은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었고 옷도 입지 않은 채 였다. 팔과 다리 그리고 얼굴은 피가 새어 나온 붕대로 감겨 있다.



병원 밖 편의점의 김지훈과 주병성

음료수를 꺼내 계산을 하고 편의점 밖으로 나온다. 플라스틱 의자가 놓여져 있음에도 두 명은 서서 음료를 마신다.

주병성 : 진성민 부모님한테 연락했다고 하니 오고 계시겠지?

김지훈 : 했다고 하니 한 모양이지. 저 진성민 부모님 본 적 있어?

주병성 : 아니. 그런데 진성민 다친 걸로 우리한테 뭐라고 하는 거 아냐?

김지훈 : 우리도 상황을 모르는데 뭘, 저 혼자 다친 걸 가지고 뭘 어떻해?

주병성 : 그런데 아까 이영기가 뭐라고 했다고?

김지훈 : 새벽에 발견했을 때 피를 많이 흘렸고 의식이 있는 지 없는지 모른다고 말했어.

주병성 : 그런데 거기서 왜 쓰러져 있었대? 아니 길 가다가 왜 넘어 졌대?

김지훈 : 그러게. 어제 현주 사당 갔다가 내려올 때 같이 온 건 아니야?

주병성 : 그때 같이 안 온 것 같아. 현주하고 명식이, 유환이가 같이 방으로 돌아 왔어. 현주가 하나도 놀래지를 않았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뒤 따라 갔던 무용이 형은?

김지훈 : 무용이 형이 성민이랑 같이 내려온 것 아니었나? 무용이 형한테 전화해 봐.

주병성 : (휴대폰을 꺼내 들고 전화를 건다. ) 네, 무용이 형 저 에요. 저 지금 저희 대양병원에 와 있어요. 병원으로 좀 오세요. 큰일 난 거 같아요. 성민이 수술 들어 간대요.

김지훈 : 무용이 형 오신 대?

주병성 : 어, 바로 온대.



응급실 문 앞을 서성이던 두 사람을 간호사가 부른다.

간호사 : 진성민 보호자분, 이리로 잠깐 들어오세요.

김지훈, 주병성 : (간호사가 부르자 문 안으로 따라 들어간다.)

두 사람이 따라 들어간 문 안쪽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의사가 서 있고, 의사는 날카로운 눈으로 김지훈과 주병성의 숙취를 읽어낸다.

의사 : 진성민 환자 안타깝게도 방금 사망하셨습니다.

김지훈, 주병성 : 네? 뭐라고 요? 왜요?

의사 : 가족분들이 오고 있으시다고 했죠? 연락 가능 하시면 지금 연락 드려 주시고요.

김지훈과 주병성은 의사의 사망 선고에 눈동자가 요동친다.

주병성 : 지훈아, 빨리 전화부터 드려. 전화 줘 봐. 어서! (주병성은 벌벌 떠는 듯한 김지훈의 휴대폰을 뺏어서 락을 풀어 달라고 다시 지훈에게 휴대폰을 들이 민다. 김지훈은 휴대폰 락을 풀어주고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는 진성민 선배입니다. 병원 연락 받으셨다고요? 그런데 일단 빨리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성민이가 지금… 의사 선생님이 사망이라고 방금 말씀을 하십니다.

김지훈 : (손을 떨며 전화하고 있는 주병성 옆에 서 있던 김지훈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다.)
(이무용이 응급실 앞으로 도착한다.)

이무용 : 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성민이는
주병성 : 형, 성민이 사망했대요.

이무용 : 뭐라고? 왜?

주병성 : 모르겠어요. 저희는 아는 게 없어요.

이무용 : 지훈아, 너 어제 술 얼마나 먹었어? 다 기억나?

김지훈 : (바닥에 붙어 정신이 나간 듯 보인다.)

이무용 : 이 새끼, 정신이 나갔어? 너 정신 차려! (이무용이 김지훈의 머리를 때린다)

주병성 : 형, 이러지 마세요. 성민이 부모님 오신다고 했어요. 저희 어떻게 하죠?

이무용 : 지훈이 저 새끼 일으켜 세워. 저리로 가자.

주병성은 김지훈을 겨우 일으켜 세워 응급실 밖으로 나간다.


세 사람은 병원 뒷편 주차장으로 향한다.

이무용 : 니들 정신 똑바로 챙겨! 사람이 죽은 사건이야. 생각나는 대로 말해봐.

김지훈 : 술 먹다가 사당 다녀오고 그러고 술을 더 먹고 잔 기억밖에 없어요.

주병성 : 저도 성민이가 어떻게 된 건지는 기억이 안 나요.

이무용 : 일단 학교로 가서 기숙사 서쪽 카메라부터 확인해야겠다. 그런데 현주는?

세 사람은 갑자기 말이 없어진다.

시간은 사건이 있었던 전날로 돌아간다.



해동대 목요일 단체 집합 전 기숙사 방 안

진성민은 복장 점검을 준비하고 있다. 검정색 모자에 묻은 작은 얼룩을 지우고, 검은 구두를 반질반질하게 닦고 있다. 친구 공명식이 성민에게 다가온다.

공명식 : 오늘 복장 점검 태평양이래. 성민아, 내 것도 좀 해주라.

진성민 : 농담해? 니가 해.

공명식 : 너 집에 가냐?

진성민 : 아니, 과제도 해야 하고 동방 모임도 있어서 기숙사에 남으려고.

공명식 : 그리고 가장 중요한 용건은 민현주? 흐흐

진성민 : 할 일이 많다고 했잖아. 넌? 가냐?

공명식 : 집 갔다가 일찍 올 거야. 엄마가 제발 얼굴 좀 보여 달라고 해서 갔다 오려고. 와서 같이 한잔 해. 민현주도 부를까? 흐흐

명식과 성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조유환이 돌돌이를 들고 다가온다.

조유환 : 니들 지금 1학년 여학생 민현주 말하니?

공명식 : 어, 너 알아? 성민이가 완전 좋아하잖아. 흐흐
진성민 : 진성민의 눈이 동그래져 유환을 쳐다본다.

조유환 : 우리 동문 선배랑 사귄다는데. 지훈이 형. 니 네 동아리 아니야?

진성민 : 김지훈 형? 아니야!

조유환 : 이나라고? 사귄다던데? 혹시 민현주 걔가 너한테도 흘리고 다닌 거야? 웃긴 애네.

공명식 : 나도 민현주 얼굴 아는데, 민현주 그렇게 안 생겼던데, 이놈 저놈 간 보고 다니는 스타일이야? 그러게 웃긴 애네.

진성민 : 아니야, 지훈이 형 얼마 전까지 여친 있었어…

조유환 : 너 모르는 구나? 그 누나랑 헤어지고 민현주 랑 사귄다고 우리 동문에는 다 퍼졌어.

공명식 : 거 봐, 그러게 해동대 여자를 왜 좋아해. 쥐뿔도 없는 것들이 눈만 높아서는 우리 성민이를 팽 시키고 말이야. 내가 일반인 하나 소개 시켜 줘? 흐흐

진성민 : 집합 시간 다 됐어. 가자.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동정복 매무새를 잡고 말한다.)

조유환 : 알았어. 솔직히 지훈이 형보다는 니가 백배는 나은데, 그 형 완전 구리 잖아. 알지?

진성민 : (유환의 말에 더욱 굳어진 얼굴로 방을 나선다)

복장점검 후 방으로 돌아온 진성민과 조유환.
진성민은 침대 모서리에 붙어 앉아 휴대폰으로 메세지를 보내려고 한다.
민현주에게 보낸 메시지의 1 자는 빨리 없어지지 않다가 민현주로부터 짧은 답장이 도착한다.

[카톡메세지]
진성민 : [현주야, 이따 동아리방에 올 거지?]

민현주 : [네, 저 시험이 있어서 그거 끝나고 동방 갈 거에요.]

진성민 : [이따보자. 시험 잘 쳐.]


조유환 : (진성민이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지켜보다가) 고백했냐? 그래서 좋대? 싫대?

진성민 : 그런 거 아니야.

조유환 : 걔 지훈 형이랑 사귄다니까. 포기해.

진성민 : 내가 김지훈 형보다 별로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으나 떨린다.)

조유환 : 니가 백배는 낫지. 집안 좋지, 얼굴 이겼지, 그런데 2학년이니까. 4학년의 권력이 없잖아.

진성민 : (휴대폰을 다시 열어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다.)

공명식 : 왜? 진성민 차였냐?

조유환 : 너까지 왜 그래? 야, 이따 술이나 먹자. 우리 동방으로 와.

공명식 : 야, 어디 여자가 없어서 해동대 여자를 사귀냐? 걔 술 먹고 뻗으면 그때 한번 건드려보고 말아. 흐흐 (바짝 마른 몸의 공명식은 성민을 보며 지저분하게 웃는다)

진성민 : (공명식의 말에 아무 대답없이 입 모양만으로 조용히 웃는다. )



비닐 장판이 깔린 동아리방 한 가운데에 큰 테이블이 놓여 있고, 테이블을 둘러싸고 여러 명이 모여 앉아 있다. 아래 위가 같은 색깔인 체육복을 입은 사람과 새 옷이라도 사서 입은 듯 산뜻해 보이는 사람도 끼어 있다. 진성민은 아래 위 색깔이 같은 체육복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앉아 있다.

염기성 : 지훈이 형, 오늘 무용이형 오시는 거에요?

김지훈 : 무용이 형 연가 받아서 오신 대. 7부두 입항하고 하선해서 바로 오신다고 했어. 오늘 실컷 마실 수 있겠다! 기성아, 이따 주문 시킬 거 정해 봐.

염기성 : 배달 되는 건 다 시켜 볼까 봐요. 하하, 성민아, 넌 어느 종목을 선호해?

진성민 : 오늘 제대로 달리겠구나. 나 저녁도 안 먹었더니 배고프다.

박준태 : 근데 병성이 형 집에 가셨어요? 왜 안 와요?

김지훈 : 병성이 올 거야. 그런데 민현주 왜 안 와?

염기성 : 민현주 아까 1층 회관에서 봤어요. 수민 형이랑 같이 있던데요. 동방 오라고 하니까 알고 있다고 하던데요.

김지훈 : 수민이? 걘 또 어떻게 아는 사이래?

염기성 : 모르죠. 민현주 여기저기 소문 많아요. 싸구려 냄새가 솔솔~ 하하

박준태 : 올해 우리 동아리 신입생이 걔 하나라 아주 재미가 없어요. 저희 기수는 들어오자마자 기수 밧따에 사당 올라가고 다 했는데.

진성민 : 기억난다. 무용이 형이 기수 밧따 치다가 손가락 꺾여서 밥 먹기 힘들다고 먹여 달라고 했었어. 하하.

염기성 : 민현주 여자라고 봐주는 게 한 두 개가 아니야. 여자가 여자 같지도 않으면서. 걔 솔직히 껌 아니냐? 뭔 몸에 굴곡이 없어.

박준태 : 굴곡만 없냐? 싸가지도 없어. 꼴에 비싼 척 하고 있어.

진성민 : 니가 보긴 했냐?

박준태 : 꼭 봐야 아니? 딱 보면 사이즈 나오지. 한번 슬쩍 만져보면 바로 알지. 흐흐 지훈 형, 민현주 오늘 사당 보내죠? 흐흐 동아리 전통인데 명맥이 끊기면 안 되죠.

김지훈 : 그런데 요즘 거기 올라가도 돼? 철조망 쳐 놓지 않았니?

염기성 : 막아는 놨는데 가도 돼요. 저희 동문에서 저번에 갔다 온 사람 있어요.

김지훈 : 그러면 누가 가서 숨어 있을 거야?

박준태 : 저희 기수가 갈게요. 성민이, 기성이 저 셋 가고 형은 뒤 따라 오세요. 중간에 잡아서 푸시업 시키고 노래 시키고 그러고 내려가면 되죠.

(이때 주병성이 동방 문을 열고 들어온다. )

주병성 : 다 모였어?

김지훈 : 너 왜 이제 와?

주병성 : 우리 과 시험 있었어. 민현주도 안 왔지? 걔도 시험 쳤을 걸.

김지훈 : 이따 무용이 형 오시면 술 먹다가 민현주 사당 보내자. 애들이 올라가 있는 대.

주병성 : 오, 재미있겠다. 민현주 신입생 환영회 하자! 자갈마당에도 빠뜨려야 되는데 그건 안되겠지? 수영복 입고 오라고 해? 흐흐

김지훈 : 애들이 민현주가 굴곡이 없다는데? 흐흐

주병성 : 니들이 뭘 보긴 봤냐? 하하

(민현주가 동방 두드리고 들어온다. 갑자기 조용해지다 다시 킥킥 거리는 소리가 난다.)

민현주 : 왜요?

주병성 : 아니야. 시험 쳤지?

민현주 : 네, 그래서 머리 아파요.

진성민 : (민현주에게) 저녁은 먹었어

민현주 : 안 먹었어요.

박성태 : 저녁도 안 먹고 공부했냐? 너 여자치고 공부 못한다고 소문났는데 머리가 좀 나쁜 거 아냐? 하하.

민현주 : 아마도 그런 가 봐요. 그래도 오빠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요, 하하.

김지훈 : 그만해라. 서로 돌대가리 자랑하니? 무용이 형 오고 계신다고 문자 왔어. 곧 도착하시겠다. 시킬 거 다 정했어? 중국집, 치킨집 싹 다 정해놔. 형이 카드 주면 바로 전화 돌려.

얼룩얼룩한 자국이 잔뜩 낀 동방 창문으로 들어오던 붉은 햇빛 다발이 사그라 들고 컴컴한 밤이 되었다.
김지훈이 휴대폰으로 전화를 받고, 벌떡 일어나 손짓을 하며 서두른다. 그러자 동방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나 문 양 옆으로 선다. 진성민은 구석에 놓여있던 말라 비틀어진 장미꽃을 들고 와 민현주에게 쥐어 주고 문 앞에 서게 한다. (진성민이 민현주를 대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호감이 가는 이성이자 장식품의 역할도 할 수 있다는 낡은 이성관이 보인다.) 잠시 뒤 이무용이 동방 문을 뻥 하고 차고 들어온다. 동방 사람들은 모두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박수를 친다. 민현주는 멋쩍은 듯 마른 장미꽃을 이무용에게 건네 주고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성대한 환영에 이무용은 얼굴이 네 방향으로 당겨져 찢어질 듯 웃는다. 이무용은 남자 후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시선은 여자 후배 민현주에게로 가서 꽂힌다.

이무용 : 오, 여자 네. 신입생이야? 지훈아, 이 분 언제 들어 오셨니? 왜 사진 안 보냈어?

김지훈 : 그때 보내 드린 단체 사진에 현주도 있었는데요.

이무용 : 그래? 전부 시커멓기만 해서 몰랐어.

진성민 : 형, 이 쪽으로 앉으세요.

이무용 : 오, 성민이. 아버님이 대단하시던데.

(더는 기분이 좋을 수 없을 듯 보이는 이무용은 지갑 속에서 신용카드를 빼들어 내민다.)

박준태 : 무용이 형, 카드 한도 많이 남으셨죠? 하하

이무용 : 어허, 적당히 써. 형 요즘 코인투자 때문에 힘들다.

박준태 : 네, 적당히 푸짐하게 시켜볼게요. 하하

박준태와 염기성은 머리를 맞대고 배달 주문을 시작한다. 진성민은 민현주를 쳐다보는 이무용의시선이 신경 쓰이는 듯 불편한 시선을 민현주 쪽으로 보낸다.
곧이어 배달시킨 음식과 술병들이 도착하고 텅 비었던 동아리방 테이블은 일회용 쓰레기속을 빠져나온 윤기나는 음식이 담긴 그릇들로 가득 찬다. 쩝쩝대며 먹는 소리와 술잔을 채우는 소리로 요란하다. 어느새 동아리방 테이블은 김지훈, 주병성, 이무용이 가까이 앉은 자리와 박준태, 진성민, 염기성이 앉은 자리와 나뉘어 졌다. 어느새 민현주는 이무용과 김지훈 사이에 앉아 있다.

김지훈 : 현주 밥 안 먹었다고 했지. 많이 먹어. (김지훈은 현주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민현주 : 네. 오빠.

이무용 : 오빠가 산 거다. 나도 오빠라고 한번 불러주라.

민현주 : 네, 무용 오빠. 흐흐

이무용 : 우하하. 현주 먹고 싶은 거 더 시켜!

김지훈 : 무용이 형이 배 타느라고 여자 구경을 못해서 눈이 돌아가셨네요. 흐흐 어, 현주야, 너 옷에 국물 묻었다.
(김지훈은 갑자기 현주의 가슴 쪽으로 물티슈를 갖다 대고 닦는다. 민현주의 체육복 점퍼에 묻은 것을 닦는 척하며 현주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갖다 댄다. )
김지훈이 민현주에게 손을 대고 있는 것을 본 다른 사람들의 표정이 애매하다. 그런데 진성민의 표정이 좋지 않다.

박준태 : 성민아, 지훈이 형, 챌린지 하냐? 하하

진성민 : 밥이나 먹어.

주병성 : 형, 오늘 민현주 신입생 환영회 하는 날입니다.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 챈 주병성은 화제를 돌리려고 한다.)

이무용 : 뭐? 입수한다고? 하하

주병성 : 아니요, 입수 대신 담력 테스트만 하려고요. 현주 너 사당 어딘지 알아?

민현주 : 네? 사당이요? 아니요. 몰라요.

주병성 : 학교 뒷 편 오르막길로 계속 올라가면 거기 무당들이 기도하는 사당이 있어. 거기 가서 정성을 기도하고 빌고 내려오면 학교 생활 동아리 생활 잘 할 수 있어.

김지훈 : 2학년들, 지금 다같이 한잔 하고, 나가서 길에 위험한 것 없나 확인해. 현주는 30분 뒤에 사당으로 출발한다.

동아리 방에 모인 사람들은 일제히 소주잔을 채워 비운다. 이무용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박준태와 염기성, 진성민이 밖으로 나간다. 주병성은 이무용의 술잔을 다시 채워주고 김지훈은 이미 상당히 취한 듯 하다.

이무용 : 현주야, 학교는 어떠니?

민현주 : 힘은 드는데 재미있어요.

이무용 : 이놈의 학교는 변하지를 않아. 나 1학년때나 너 1학년때나 똑 같은 것 같아.

주병성 : 형 벌크 타신다고 했죠?

이무용 : 이번 항차에 아프리카 갔다 왔어. 내리지도 못하고 배에만 있다가 도는 줄 알았어. 병성이 너는 입대하고 2년 복무 마치면 어떻게 하려고?

주병성 : 제대하고 바로 승선하고 싶은데 요즘 그러기 쉽지 않다고 해서 고민이에요.

이무용 : 계획 세운다고 계획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사고 안 당하고 무사히 사는 것도 중요한 목표야. 우리 기수는 벌써 두 명이나 갔다.

주병성 : 아, 벌써 두 명이나요?...

이무용 : (숙였던 고개를 치켜들며) 야, 걱정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너 안 죽어. 걱정 마. (고개는 든 채, 눈을 감고 있는 김지훈을 쳐다보며) 지훈아, 너 벌써 취했냐?

김지훈 : (눈을 번쩍 뜨며) 무슨 말씀! 야, 현주, 이제 출발해라. 먼저 간 애들 춥겠다.

민현주 : 저 길 잘 모르는데.

김지훈 : 나랑 같이 가자.

김지훈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민현주와 밖으로 나간다. 민현주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김지훈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팔을 잡아주려고 한다. 김지훈은 민현주가 붙잡아주는 팔을 말리지 않고 그냥 둔다.

학교 뒷편으로 난 산길로 사람이 걸어간다.
민현주가 김지훈의 팔을 잡고 산길로 걸어 들어간다. 김지훈은 자신보다 적은 덩치의 민현주에게 몸을 기울여 붙인 채 걸어가고 있다. 흙 길로 접어들자 근처 큰 나무 뒤에 진성민이 숨어 있는 것이 김지훈의 눈에 보인다. 민현주는 김지훈의 무게를 감당하느라 어두운 길가에까지 시선을 주지 못하고 있다. 김지훈은 진성민이 민현주에게 관심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진성민 보란 듯 민현주에게 몸을 갖다 댄다. 김지훈은 민현주가 부축해주는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듯하다가 갑자기 민현주를 안는다. 나무 옆에서 지켜보던 진성민은 나무 뒤로 들어가 숨는다.

민현주 : 앗, 지훈 오빠, 더는 못 가실 것 같은데 그냥 내려가야 될 것 같아요. ( 민현주는 자신을 껴안는 김지훈을 밀쳐내며 빠져 나오려 한다.)

김지훈 : 오빠가 현주 좋아해. 많이 좋아해. 현주는 오빠 안 좋아하니?

민현주 : 오빠 많이 취했어요. 정신 좀 차려봐요.

김지훈 : 너 지금 튕기는 거야? 야, 1학년! 개기지마!

민현주 : 오빠, 정신 좀 차려보세요.

술에 취한 김지훈을 두고 쩔쩔 매고 있는 민현주. 뒤따라오는 주병성과 이무용을 본 민현주는 손을 흔든다. 주병성과 이무용은 바닥에 털썩 앉아 있는 김지훈에게 다가가 일으켜 세운다. 잠시 후 네 사람은 다시 내려가지 않고 길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간다. 나무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성민은 갑자기 뒤따라 뛰어 올라 가 뒤에서 민현주의 옷을 당기려고 하다가 취기에 혼자 넘어진다. 넘어지면서 내는 소리에 앞서가던 네 명이 멈추어 뒤돌아 보려고 하자 진성민은 벌떡 일어나 숲 속으로 숨는다. 앞에서 걸어가던 네 명은 소리를 내고 웃으며 걷느라 진성민의 소리를 듣듣지 못 한 것 일 수도, 신경 쓰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어 보인다. 김지훈은 진성민이 나무 뒤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음에도 진성민을 불러 내지 않는다. 숲 속에 쪼그려 앉아 있던 진성민은 화난 듯 일어나 길을 걸어 내려간다. 진성민은 동아리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른 건물로 향한다. (또다른 술판이 벌어진 친구의 동아리방으로 찾아가 계속 술을 마신다.)



민현주를 차지했다는 도취감에 기분이 좋아진 김지훈은 오르막 길을 비틀거리며 걸으면서도 숨이 크게 가빠오지 않아 보인다. 드디어 올해 4학년이 되어 졸업이라는 부담감에 대면하게 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누구도 자신에게 명령하지 않는 이른바 백두가 되었다. 작은 권력의 맛에 취하기 시작한 김지훈은 어느새 학교생활이 즐거워졌고, 신입생 민현주에게 관심을 줄 여유가 생겼다. 민현주가 처음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진성민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가장 먼저 눈치 챈 김지훈은 후배 진성민 정도는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김지훈의 기억 속 장면
김지훈은 생활관 당직사관 근무를 서고 있다. 4학년이 돌아가며 서는 당직사관의 큰 역할은 아침 저녁 기숙사 인원 점검과 식사 인원을 체크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아침 인원점검에 들어간 김지훈은 수백 명의 학생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소리도 없이 반듯이 줄 맞춰 서 있는 곳으로 마치 최종권력자가 납신 듯한 기분으로 걸어 들어간다.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모자를 머리에 올린 김지훈은 금색 실을 어깨에 두르고 긴 칼까지 차고 마치 이 장소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까지 든다. 과별로 차례차례 인원점검 보고를 받고 경례를 하는 아침 점검을 시작한다. 점검이 끝나고 부사관 두 명을 거느린 채 사관실로 돌아오는 길, 김지훈은 더 강한 자극, 권력의 맛을 기대한다. 저녁 시간 각 동별 사관의 저녁 점검이 다가올 때, 당직 사관실로 누가 문을 두드린다.

부사관 : 오늘 항행과 동장님이 급하게 고향에 가셨다는 데요?

김지훈 : 알았다. 청소 점검은 내가 갈게.

9시가 되자 김지훈은 번쩍이는 칼을 다시 차고 청소점검을 하러 간다. 마침 그 반은 2학년 진성민이 소속된 반이었다. 코너를 돌아 도착한 김지훈은 문 양옆으로 나와 서서 청소 점검을 기다리는 학생들 앞에 선다. 별다르게 흠 잡을 것이 안 보이던 차에 김지훈은 화장실로 들어간다. 화장실 세면대 수도꼭지가 모두 같은 방향으로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한 김지훈은 반대표를 불러 소리를 지른다.

김지훈 : 여기 보여? 이거 뭐야!

반대표 : 아, 신경 쓰겠습니다.

김지훈 : 뭐? 신경을 써? 니가 뭔데 신경을 쓰고 말고야! 전원 집합! 엎드려!

김지훈의 말에 서있던 학생들은 인상을 쓰며 엎드리기 시작한다. 수십명의 학생들이 자신의 말에 바로 바닥에 엎드리자 김지훈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목소리가 내리 깔린다. 팔굽혀 펴기 얼차례를 시키고 학생들을 지켜보는 김지훈은 진성민을 발견한다. 진성민도 김지훈이 자신의 구역에 도착했을 때 흘깃 쳐다보고 이미 확인을 했다. 진성민이 팔굽혀 펴기를 끝내고 별로 힘들지 않는 듯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본 김지훈은 무언가 거슬린 듯 얼차례를 반복시킨다. 다른 학생들은 나지막이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힘들어 하며 땀을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는데 진성민은 기어이 해내고 버티는 모습이 김지훈의 눈에 다시 들어온다. 김지훈은 진성민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한쪽 입가를 씩 끌어 올리며 학생들을 일으켜 세운다. 가쁜 숨을 몰아 쉬고 땀을 흘리는 학생들에게 예전에 들었던 공허한 이야기를 남기고 김지훈은 떠난다.

김지훈 : 여기는 그냥 먹고 자는 기숙사가 아니다. 위험한 일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긴장하고 준비하는 생활을 익히는 곳이다. 오늘 점검 시 지적 받은 사항은 즉시 시정하고 총대는 결과 보고서 제출한다. 금일 점검 끝.

수십 명의 후배들의 땀과 기를 빼놓고 당직사관실로 돌아오는 길, 김지훈은 자신이 마치 우월한 존재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주변을 눈으로 훑으며 걸어간다. 땀 범벅이 된 채로 책상에 앉았다가 펜을 들 힘도 없어졌다는 것을 느낀 진성민은 침대로 올라가 누워 천정을 바라보다 눈을감는다.



술기운에 무모한 호기가 겹쳐 야밤에 산 속 사당에 간다며 사람들이 나가고 그 후 몇 시간이 지났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데 동아리방에는 아직도 불빛이 환하다. 밖으로 새어 나오던 웃음 소리와 노래 소리를 그쳤고 몇 사람의 목소리만 드문드문 들린다. 진성민이 산에서 내려와 찾아갔던 친구의 동아리방 건물에서 나와 본인의 동아리방 건물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산에서 내려와 친구 동아리방으로 가 술을 마시던 진성민이 비틀거리며 길을 걸어간다. 진성민은 친구의 동아리방에서 김지훈을 변태 새끼라고 부르며 술에 잔뜩 취해 버렸다. 술에 터벅터벅 비틀거리며 주저앉고 다시 걷다가 서기를 반복한다. 동아리방 유리창에 붙여 놓은 글자와 불빛이 초점이 사라진 진성민의 눈에 들어온다. 잔뜩 취한 진성민은 길가에 쪼그려 앉다가 다시 일어나 걷는다. 동아리방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을 향하는 진성민의 발걸음이 위태롭다. 진성민 바지 엉덩이에는 흙자국이 있고 체육복 윗도리에는 지저분한 얼룩이 묻어 있다. 진성민은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용케 앞으로 걸어가고 있다.
친구의 동아리방 건물에서 진성민의 동아리 방 건물로 연결된 길은 산을 깎아 만든 차가 다닐 만한 길로 한 쪽 편은 언덕이지만 다른 한쪽 편은 보호레일이나 보호벽 없이 낭떠러지이다. 오른쪽으로 꺾여 난 길을 걸어가는 진성민, 김지훈과 선배들에게 빼앗긴 민현주를 아직 포기하지 못했다. 동아리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고 걷던 진성민이 갑자기 길 아래로 추락한다. 2미터 아래로 떨어진 진성민은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다쳤음을 알았고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술에 만취해 떨어져 다친 상황을 꿈처럼 여기는 진성민은 바닥에 누워 잠이 든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다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놓여있다.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진성민은 죽은 듯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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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혹시 내가 죽으면, 우리 가족은 어디까지 해보려고 할까?’

몰라서 기대하고 조금은 예상할 수 있어서 그래서 더 두려운 20대 청년들이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들이 나누어 짊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실수에 대한 기억은, 특별히 불행해 보일 수 있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주인공 세 사람이 각기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누렸던 권력은 비극적인 사고의 결과로 돌아오고, 이들이 재수가 없었던 것 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재수 겁나게 좋은 소수가 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나 되묻는다. 친구의 사망 그리고 몰아치는 세상의 비난은 특별히 재수 ‘없어서’ 가 아니라 특별히 재수가 ‘좋지 않아서’ 돌아온 것이다.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권위적 인간들은 단단한 조직을 이루고, 정글 같은 사회에 미처 닿기도 전에 학교에서부터 그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나이 든 꼰대보다 젊은 꼰대가 더 싫다는 말에서, 답답한 과거보다 희망 없는 미래가 더 싫다는 말로 들리는 이유이다. 이대남 인기를 등에 업고 태풍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타난 국힘 이준석의 낡은 능력주의가, 그것을 일종의 세련된 레트로토피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점수를 왕창 땄으나, 30대 당 대표는 수술실 카메라 설치 반대, 차별 금지법 반대편에 서며 기득권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해동대학교는 국내에 실제 존재하는 한 특수 대학교를 배경으로 한다. 최근 기사에도 등장한 대로, 수도꼭지 줄을 안 맞추었다는 황당한 이유로 후배 학생들에게 1천여 회의 푸쉬업 얼차려를 시켰다는 4학년 간부 학생의 행태를 보인 이 사건은, 공군 이 중사 사망 사고로 재 촉발된 군 내부의 비합리적 권위 문화가 극렬히 투영되어 드러나는 군 미투와 더불어, 권위적인 집단 내부에 깊숙이 자리한 초라한 성평등 의식과 성폭력 개념의 무지가 과거에서 반 걸음도 개선되지 않음 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사건으로 드러난다. 4년간 군대식 집단생활 그리고 대학 졸업 후 3년간 의무 승선을 해야 하는 이 대학에는 남자 대학생, 해군사관 후보생 그리고 병역의 의무가 없는 여학생, 이 세 가지 신분이 존재한다. 이를 수직적인 신분제로 해석하고, 또한 결코 같은 길로 합류하게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차별이 이미 20대부터 나뉘어져 있다고 해석한다. 수 백 명의 후배들이 선배 김지훈 한 명의 구령에 복종하며 엎드리는 장면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 권력 놀이에 빨리 취하고, 그 쾌감에 빠져 희미하게 나마 지니고 있던 문제 의식을 쉽게 접어 넣어 버리는 모습을 통해, 여기에서 경직된 권위주의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는 이유를 찾는다. 특히 여성이 진정한 동료,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것에 반대편에 있는 성적 대상으로 보는 시각은 결국 주류 남성의 인식 변화에 달려 있음을 지적한다.

21살 민현주, 24살 김지훈, 24살 주병성.
20대 청년 세 사람이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일터에 소속되어 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의무 승선 기간을 채워야 하는 청년 김지훈의 약점을 잡은 선장, 관심 사관이 되어 버린 주병성을 계속 괴롭히는 부대 간부들, 진성민을 꼬셨으나 사귀지 않은 나쁜 년으로 낙인이 찍혀 더는 학교에 남을 수 없었던 민현주는 맨 몸으로 세상에 뛰어 든다. 그리고 세 사람의 약점을 잡은 주변 사람들은 그들을 폭력적으로 공격한다. 이들이 당하는 이러한 부조리한 갑질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같은 대학교 같은 동아리에서 어울리던 민현주, 김지훈, 주병성 세 사람은 사회 초년생의 삶을 시작하는데, 취업 자체가 어려운 현실에서도 각자 나름대로 애쓴다. 하지만 세 사람이 용케 잡은 기회가 도리어 사람을 잡고 있다. 직장 내 텃세와 갑질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새롭게 집단 속으로 들어온 사람의 약점을 잡아 괴롭힘을 시작하는데, 이 이유는 단지 상관의 말을 듣지 않아서 라는 이유이다. 김지훈은 대체복무 선상에서, 주병성은 군복무 중, 민현주는 알바 자리를 찾는 중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고 절망에 빠진다. 사회 초년생으로서 기존 사회에 끼어 들어야 하는 불청객이 된 세 청년들은,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평범한 약점이 부각되며 유독 이들에게만 무겁고 엄격한 잣대에 의해 평가를 당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히려 부당한 폭력에 적극적인 방어를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따라가는 듯 행동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진 지우고 싶은 약점, 기억은 바로 진성민이다. 1년 전 사망한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보복을 하려고 한다. 진성민이 사망한 날 함께 있었고, 또 같은 동아리 일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김지훈, 주병성, 민현주는 진성민의 아버지 진노갑의 강력한 분노와 원망이 향하는 대상이 된다. 역시 이들과 같은 대학 출신 선배인 진노갑은 본인이 가진 관련업계에서의 영향력을 활용하여 세 청년을 더욱 집요하게 다그친다. 이 과정에서 폐쇄적인 그들 만의 교내 문화가 드러나게 되고 이는 사건의 본질을 흐리게 되면서 늘 그렇듯 여론은 엉뚱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한다. 한강 사망 대학생 사건에서 기본 설정을 차용한 이야기로, 3일 간의 연휴 동안 대학교 캠퍼스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지며 비극적으로 발생한 사망 사건이 극의 주요 사건이 된다. 아들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믿는 아버지는 모든 인맥과 권력을 이용해서라도 자신이 듣고 싶은 자백을 받아내려 한다. 폐쇄적이고 좁은 업계의 뻔한 학연 지연 속에서 다시 이리저리 얽힌 인맥과 이해관계, 손익 계산은 가장 약한 고리를 노린다. 여기에 유튜버들이 가세하며 음모론을 키우고 여론을 비이성적으로 선동하는데 앞장선다. 아들을 잃은 진노갑은 더는 잃을 것이 없다며 세상의 공멸과 자기 파괴적 주장을 한다.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추가 설명>

사망한 대학생 진성민 사건 당시 2학년 : 아버지 진노갑과 같은 대학을 선택해 입학한 진성민은 착한 아들로 착실하게 학교 생활을 하는 듯 보이지만 폭음을 하고 민현주에 대해 폭력적인 구애를 하며, 아버지를 통해 이미 경험한 자신의 미래가 전혀 기대되지 않는다.

진성민의 동아리 선배 김지훈 사건 당시 4학년 : 사건 이후 졸업을 하지만 이미 업계에서는 매장을 당했다. 후배 민현주에 관심을 보이는 진성민을 조롱하고 4학년이 가진 권력을 휘두른다.

동아리 선배 주병성 해군 학군단 4년차 : 김지훈의 동기. 김지훈의 권력 휘두르기를 방조하고 옆에서 대리 만족한다.

동아리 후배 민현주 사건 당시 1학년 : 남자 무리에 끼어들어 결코 그들의 동료나 친구가 될 수 없었던 민현주는 도리어 진성민의 죽음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있다는 비난을 받으며 학교를 떠나야만 했다.

진성민 부친 진노갑 : 지역 관련업계 협회장을 맡고 있는 진노갑은 자신의 뒤를 이으려 하는 아들 진성민을 자랑스러워 하나 폭음으로 사고사한 아들의 철없는 행동들이 드러나려 하자 아들 사망과 관련된 선후배들을 공개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를 통해 오히려 폐쇄적인 학교 문화가 외부에 알려지며 학교 존립까지 위협을 하는데 이에 대학 통폐합 여론이 생기고, 여전히 화가 안 풀린 진노갑은 공멸의 길을 택한다.




<사망 사건의 진실>
3일 간의 연휴가 시작된 해동대학교 학생들, 집으로 가는 학생들도 있지만 캠퍼스에 남아 술 먹고 놀 생각에 빠진 학생들도 있다. 각 동아리와 각 출신 지역 동문회, 이른바 사조직까지 재탕 신입생 환영회를 벌리고, 거기에 학군단 훈련까지 취소되며 학교는 광란의 파티장이 된다. 진성민이 들어간 시사 영어 동아리는 이름과 무관하게, 동아리 학생들은 동아리방에 모여 불법 동영상을 함께 보고 술이나 마시는 것이 일상이다. 연휴를 맞이하여 동아리 회장인 4학년 김지훈의 호출로 동아리 방에 모인 학생들. 유일한 신입생 민현주를 데리고 장난을 치려 일을 꾸민다. 신입생 환영회라는 명분과 담력테스트가 동아리의 전통이라는 핑계로 뒷산 사당에 민현주를 보내 구애를 가장한 성추행을 해보려 한다. 진성민은 이 날 오후 민현주에게 사귀자고 고백을 하려다 거절당 할 것이라는 걱정에 고백을 포기하고 모멸감과 보복심에 휩싸여 혼자 민현주 성추행을 상상한다. 사당 가는 길에 숨어 있던 진성민을 본 김지훈과 선배들은 진성민을 무시하고, 진성민은 화가 나 다른 친구의 동아리방으로 가 폭음을 한다. 진성민은 몇 시간 뒤 만취하여 동아리방으로 돌아오면서 발을 헛 딛어 2m 높이에서 추락하게 되고 과다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김지훈은 그간 진성민과 민현주를 두고 신경전을 벌인 일로, 밤중에 사라진 진성민을 찾지 않았고 다쳐서 발견된 진성민을 발견한 후에도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데, 이 점이 진성민의 부친 진노갑이 김지훈을 살인자로 생각하게 만든다. 진성민을 처음 발견한 이영기는 평소 대학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반감을 가진 학생이다. 진성민의 처참한 모습을 목격한 유일한 사람으로 이후 기득권 진노갑의 주장에 동조를 하며 학교 문화를 개혁할 것을 주장하나 여학생 입학 제한, 단체규칙을 강화 하자며 과거로 회귀한 듯한 젊은 꼰대 모습을 보인다. 아들의 사망 이후에 진노갑은 학교 인맥을 통해 학생 생활 관리에 연관된 교수들의 교체를 요구하고 동아리방 일제 점검과 교내 음주 허가제를 주장한다. 민현주에 대한 고백 문자가 인터넷에 공개되면서, 진성민이 차였고 그래서 자살한 것이라는 헛소문이 돈다. 진노갑은 유튜버를 앞 세운 외부 여론과 달리 교내 여론이 김지훈 측에 선 것에 분노하여 학교를 거점 대학 통폐합 제도에 포함시키자고 주장하며 학교의 존립 자체를 흔들려고 한다. 일 년 후 김지훈과 주병성은 조용히 졸업을 하고, 민현주에 관한 거짓으로 부풀려진 소문은 퍼질 데로 퍼져 민현주가 진성민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만들어지며 민현주는 휴학을 한다. 그러나 자극에 무뎌 진 사람들은 어느새 진노갑의 유튜브 영상을 잊기 시작하고, 대학 캠퍼스에는 신입생들이 입학을 하며 또 다시 연휴가 시작된다. 다시 여기저기서 술판이 벌어진다.
사망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죄책감과 주변 괴롭힘으로 삶의 의혹을 잃어가던 세 사람은 각자 차가운 바다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 힘을 주어 버텼던 신입생 시절을 떠올리며 하루를 또 버티어 낸다. 학교에서는 나간 자리를 다시 새로운 이들로 채워지고 똑 같은 술판이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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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로 돌아온 트럭은 택배 상자 내리듯 사람을 하나씩 내려 놓았다. 진화는 김미영팀장 뒤를 따라가려다 거기 있으라는 김미영의 말을 듣고 대신 이한송이 서 있는 곳으로 다가 갔다. 최선미가 진화에게 말을 걸었다.

"할 만 하시죠? 이게 크게 힘들다기 보다는 지겨워요. 지겨워."

"네, 아직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힘들긴 하네요."

창고안으로 들어갔던 김미영팀장이 다시 창고 뒷문에 모여 있는 무리 쪽으로 걸어왔다.

" (김미영) 경인아, 오늘 내 보낼 것 다 쌌어?"

" (추경인) 네, 얼추 다 했어요. 반품 CS부터 하고 마무리 하려고요."

" (김미영) 진화씨랑 같이 해도 되고."

" (추경인) 오전조 검수 정리해야되는데 그거 하라고 하세요. 진송언니는 오후조 관리하셔야 하고."

" (김미영) 진화씨, 지금 좀 쉬고 이따 오전에 마무리한 박스 정리해주셔야 해요. 검수 마친 박스들은 봉해서 송장 붙여서 내보낼 거에요."

" (진화) 네, 알겠습니다."

" (김미영) 진화씨 커피는 마셨어요?"

" (진화) 아까 오전에 자판기에서 빼서 먹었어요."

" (김미영) 왜 자판기를 먹어? 여기 옆에 커피 있어요. 종이컵이 없을 때는 있는데 우리는 각자 다 자기 컵을 들고 다녀요. 내일 올 때는 개인 텀블러 가져오세요. 그게 편리할 거에요."

" (진화) 아, 네. 들고 오겠습니다."

" (김미영) 이제 가서 오전조 박스 좀 옮겨주세요. 1층으로 빼야 하거든. 오후조 들어오기 전에 끝내야 해요. 옮기고 있으면 내가 가서 송장 붙이는 법 알려줄게요."

진화는 김미영팀장의 말에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진화처럼 오전 내내 실밥을 뜯고 옷 앞 뒤를 살펴보던 다른 노동자들은 다 사라지고 없었다. 진화는 검수가 마무리되어 각 박스들을 가득 채운 옷들을 꾹꾹 눌러 모았다. 김미영이 박스를 봉하라고 한 말을 기억했지만 테이프도 없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박스를 밀어 입구 쪽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사람 허리까지 오는 크기의 박스는 무게도 상당했다. 복잡한 창고에서 요리조리 길을 찾아 끌며 플라스틱 박스를 옮겼다. 김미영팀장이 박스를 끌고 있는 진화에게 다가왔다.

"박스 못 들겠으면 끌어도 되요. 종이가 아니라 괜찮아요. 그리고 이리 와 봐요. 여기 송장이 나왔는데 종류랑 갯수를 맞추어야 하거든요. 검수는 다 끝난 거니까 따로 볼 필요는 없고, 박스마다 수량 체크 좀 해 주세요."

"갯수 세라고요? 어... 바닥에 부어서 해도 되나요?"

"네, 편하데로 하세요. 제품에 물기만 안 닿게 해주세요."

"네"

진화는 허리만한 박스에서 포장된 옷들을 꺼내 일일이 세어 갯수를 리스트에 적고 다시 박스 안에 집어 넣었다. 한꺼번에 바닥에 부으면 편할 것도 같았으나 혼자 들기에 박스가 너무 무거웠다. 허리를 숙여 꺼내고 다시 허리를 구부려 넣는 동작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허리가 뻐근해져 오기 시작했다. 이제 한 박스 했는데 벌써 몸이 아프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었지만 못한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김미영팀장은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며 창고 한쪽에 놓인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이한송과 추경인, 최선미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 (추경인) 한송언니, 저기 새로온 사람, 손은 좀 빨라?"

" (이한송) 느려터지지는 않았더라. 뭐하던 사람이래?"

" (최선미) 팀장님, 저 분 뭐하다 오신 분이래요?"

" (김미영) 나도 잘 몰라요. 사장님이 이런 일 한 적 없다고만 하던데요."

" (최선미) 하던 일 아니면 못 해. 나이가 젊은 것도 아니고. 아까도 힘들다고 하더라고. 어디 며칠이나 가나 보자고."

" (이한송) 아까 나한테 자기 배고프다고 언제 밥먹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배 엄청 고팠나 봐, 흐흐"

" (최선미) 밥도 엄청 먹더만. 그러고는 라면은 안 먹는 댔지? 여기 밥 먹으러 왔나벼, 흐흐"

" (이한송) 원래 오전조만 하기로 한 거 아니에요? 밥주는 줄 몰랐을걸요? 아까 커피 찾길래 제가 자판기 알려줬거든요."

" (김미영) 여기 커피 마시라고 하지. 왜 그랬어?"

" (이한송) 돈없다고 하면 알려줄려고 했죠."

" (김미영) 아, 사장님이 진화씨 어린이집 다니던 사람이었다고 하시네. 카톡으로 말씀하시네."

" (최선미) 그럼 어린이집이나 나갈 일이지 여긴 뭐 해보겠다고 왔대? 참 이 일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봐."

" (추경인) 아무나 하죠. 여기 자격증 있어야 들어오는 데도 아니잖아요.하하"

" (최선미) 그게 아니라, 힘쓰는 일인데 저래 요령이 없어서 어디 오래 하겠어?"

" (추경인) 하다 보면 늘겠죠. 저도 그랬는데요 뭐."

" (김미영) 경인씨는 우리 회사 에이스고, 나이도 젊고 말야. 비교가 안 되지. 성진씨가 엉망으로 해놓고 나간 그 패딩 박스를 오전에 다 하긴 했던데 다시 안봐도 되겠지? "

" (이한송) 근데 저 분 다리가 약간 휘었죠? 맞죠? 자세가 이상해."

" (최선미) 좀 이상하긴 하다. 힘을 어떻게 쓰는지를 모르는 것 같아. 어린이집에서 일했으면 애들을 많이 들어봤을텐데, 박스랑 애랑은 다른가? 흐흐"

진화는 멀리서 모여 떠드는 소리를 다 듣고 있었다. 모여서 떠드는 사람들이 자신이 듣고 있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듣던 말던 신경 쓰지 않거나. 점심은 다같이 먹었는데 진화 자신만 일을 먼저 시작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신입이니 그렇겠지 하며 계속 일을 했으나 떠드는 소리를 더욱 생생하게 들렸다.

"진화씨, 내가 송장 보는법 알려줄게요. 여기 보면 송장이 다 인쇄 되어 나왔죠? 종류 확인하고 갯수 확인 하고 그리고 박스 안에 이 종이 꼭 넣어야 해요. 그리고 박스 잘 막아서 송장은 여기 붙이고 옆에 이 작은 종이 투명 테이프로 붙여주세요.아시겠죠? 나는 오후 작업 준비해야 해서 진화씨 하고 있으면 제가 다시 와서 확인 할게요."

"저 근데 팀장님, 다른 분들은 일 안하세요?"

"할거에요. 아직 물량이 안 내려와서 그래요."

"네."

진화는 모여 떠드는 사람들을 흘깃 보고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 (김미영) 자자 일들 시작해요. 신입이 왜 자기만 일하냐고 항의했어요."

" (최선미) 아이고, 잘못했네요. 일합시다, 일!"

모여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리로 돌아가 일을 시작했다. 물량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김미영팀장의 말과 달리 오후 일거리는 이미 나 나와 있었다. 두시가 되자 오후조 알바 사람들이 창고로 들어왔다. 도착한 사람들은 간단하게 작은 소리로 인사만 하고는 자기 자리로 가서 바로 일을 시작했다. 김미영팀장은 사람들의 인원수를 확인하고 검수품목을 확인 기록했다. 진화가 일하는 쪽으로 와서 진화가 해놓은 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깐, 진화씨 이 종이 넣으라고 했잖아. 이거 뭐야?"

"넣었는데요."

"그럼 이건 뭐야?"

"아, 두 장이었어요? 실수했네요."

"아니, 내가 분명히 넣으라고 했잖아. 들었죠? 그쵸? 그런데 왜 실수를 할까요? 일단 다시 열어서 종이 두장 들어갔는지 확인해주세요. 그리고 다른 박스 할 때 혼자 하지 말고 한송씨랑 같이 하세요. 종이 누락되면 다 반품이야. 알겠어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 무슨 큰 잘못 한건 아니에요. 처음이니까 잘하면 되지. 이제 틀리지 마세요."

"네, 감사해요. 제가 아마 서툴러서 계속 실수를 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집중에서 해야하는데 정신은 멍하고 긴장되고..."

"진화씨 이제 일하세요."


김미영팀장은 진화의 주절거림을 끊고 돌아서 갔다. 담배를 피러 나간 추경을 찾아 뒷문으로 나갔다.

"경인아, 너 일은 안하고 또 여기서 놀아?"

" 아니 팀장님, 전화가 와서 받으러 나왔다고 한 대 피고 들어가려고 했어요."

"괜찮아, 천천히 피고 들어와. 근데 저 성진화, 벌써 골 때린다, 골 때려. 말이 너무 많아."

"인상이 말이 좀 많은 것 같아 보이긴 했어요."

"박스 전부 1층으로 옮기라고 했거든. 어떻게 옮기나 보고 계속 할 지 못할 지 두고 봐야겠어."

"오늘 처음 왔으면 힘이 남아 돌아서 잘 할텐데, 저렇게 일일이 하나씩 들고 꺼내는 걸 보면, 며칠 출근해서 지치면 아예 들고 옮기는 건 불가능 할 것 같아 보이네요."

"그니까, 남자를 뽑으라니까 맨날 아줌마만 뽑아다 준단 말야. 힘도 못쓰고 말만 많고 말야. 갑자기 굴러들어오면 뭐 아무나 일 할 수 있는 줄 알아? 여기도 다 이미 들어와서 고생하며 경력 쌓고 있고 자리잡는다고 고생하는데 어디 지 할말 따박따박 하면서 무임승차를 하려고 말야."

"제가 아는 동생이 요즘 일 쉰다고 알바 찾고 있다는데 여기 와서 일하라고 말해볼까요? 남자에요."

"그래, 오라고 해. 면접은 사장님이 보지만 아마 일 하라고 하겠지. 저 성진화는 오전조만 하게 하던가, 그만두던가, 흐흐 "

진화는 지하창고에서 부터 1층 까지 무려 열일곱개 계단을 걸어 올라가 무거운 박스까지 옮겨야 하는 일이 막막했다. 하지만 힘들것이라는 각오하고 온 이상 어떻게든 해내려고 애썼다. 박스를 두손으로도 들기 어려운데 계단으로 어떻게 들고 올라갈 지 고민을 하고 있으니, 이한송이 다가왔다.

"힘드시죠? 원래 둘이나 셋이서 드는 거에요. 못 드시는 거 같아 보여서 제가 도와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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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같이 일하실 분이에요. 인사 드리세요."

첫 출근을 한 진화를 피킹해서 창고로 데리고 간 김미영 팀장은 열 댓명이 모여 서 있는 곳으로 갔다. 사람들은 진화를 쳐다 보았고 어색하게 서 있는 진화에게 김미영 팀장은 갑자기 자기 소개를 하라고 시켰다. 오늘 처음 온 진화가 어색하게 입을 떼게 두는 것 보다는 김미영 팀장이 대신해서 사람들에게 소개해 줄 만도 했지만 김미영 팀장은 싸늘한 웃음기를 띄며 진화의 등을 떠밀었다. 진화는 누가 누군지 몰랐음에도 일단 팀장이 시키는 대로 인사를 했다. 알고 보니 이것은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안녕하세요! 성진화 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진화로 몰린 시선들이 수다스러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뭐? 성진? / 성진씨 흐흐 / 성진이래? / 또 성진이야?"

"아니, 성진 아니고 성이 성이고 이름이 진화, 진화 씨에요."

김미영 팀장이 싸늘한 표정에서 약간 부드럽게 바뀌며 진화의 말을 이어받았다.

진화의 인사를 듣고 계속 흘깃거리며 쳐다보던 사람들은, 작업복을 입은 뚱뚱한 남자의 몇 가지 작업 지시 사항 전달이 끝나자 진화를 향하는 시선을 거둔다. 성진 성진 거리던 사람들은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미영 팀장은 진화에게 장갑 한 켤레를 건넸다. 진화는 장갑을 받아들고 김미영이 걸어 다니는 뒤를 쫒아 다녔다. 창고 한 쪽에 놓여있는 지저분한 책상에 몸을 숙여 휴대폰을 들여다 보던 김미영은 뒤에서 쭈뻣거리며 서 있는 진화를 흘깃 허리를 세운다. 그리고 진화를 데리고 가 일 할 자리를 알려주었다.

"진화씨, 이런 일 안 해보셨다고 하던데? 그런데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처음이니까 천천히 집중해서 실수 없이 하다보면 나중에 익숙해지실 거에요. 여기 앉아서 이 의류 포장 열어서 불량 체크하고 라벨 뜯고 실밥 처리하세요. 옆 사람 하는 거 잘 보시고 참고하시고요. 오늘은 처음이니까 물량 체크는 안 할거지만 내일부터는 90프로 이상 완료하셔야 해요. 한송씨 이 분 새로 오셨는데 가위 드리고 업무 좀 알려 주세요."

이한송은 김미영의 말에 즉각 반응을 했다. 그리고 김미영에게 다가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네, 팀장님. 아 그리고 팀장님 잠시만요. 아니 어제 그 불량을 전부 우리가 다 책임지라는게 말이 돼요? 성진 씨가 그러고 나간 걸 왜 우리가 다 덮어써요?"

"뭐 어쩌겠어, 한송씨 그래도 오늘 새로왔잖아. 어제 그 불량 다 꺼내서 정리부터 하고, 알아서 시켜. 이따 점심 때 다시 확인 할게요."


김미영과 이한송은 둘의 대화가 주변 사람에게 다 들리는 것을 알면서도 둘만 속삭이며 조용히 말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한송은 김미영이 돌아가자 진화를 흘깃보고 곁으로 다가갔다.


"진화씨라고요? 몇 살이세요? ( 진화 : 네, 저는 47살이에요. 열심히 해볼게요.) 아, 그러시구나. 저는 37살이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이 일 안 해보셨다고요? 일은 쉬워요. 그래도 실수하면 서로 힘들어지니 꼼꼼하게 하셔야 해요. 이 회사에서는 중국 공장에서 옷을 가져와서 여기서 작업을 해서 온라인 쇼핑몰 통해서 파는 거에요. 온라인 쇼핑 많이 하시죠? (진화 : 네.) 저희가 하는 작업은 라벨 제거하고 실밥 정리하고 불량 체크하는 건데, 지퍼 불량, 단추 불량, 박음질 불량 이런것 전부 체크하시는 거에요. 어려운 일 아니에요. 여기 50대 언니들도 많이 일하고 계세요. 거기 앉아서 시작하세요. 시간당 100벌 확인을 끝내야 하는데 오늘은 처음이시니까 체크하지 말라고 하니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실수하시면 안되요. 아, 오늘 하실 물량은 제가 따로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한송은 한 쪽에서 옷이 가득 든 커다란 파란색 플라스틱 박스를 들고 와서 진화 옆에 털썩 내려 두었다. 진화는 그 박스 속에서 봉투 하나를 집어 올려 안에 든 옷을 꺼내었다. 옷은 여성용 검정색 패딩이었는데 퀼팅이 들어간 디자인으로 퀼팅 실이 여기저기 남아 지저분했다. 진화는 눈에 보이는 실밥부터 잘라 내었다. 실수하지 말라는 김병신 사장과 김미영 팀장, 이한송의 말이 머리 속을 맴돌아 옷을 앞 뒤로 계속 돌려보며 실밥을 찾고 또 찾았다. 실밥이 거의 다 제거 되었다고 생각이 들자, 진화는 지퍼와 단추, 박음질 불량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지퍼 슬라이드는 뻑뻑했지만 다물어는 졌다. 장식 단추는 싸구려스럽고 옷과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일단 잘 달려 있었고, 단추에서 삐져나온 실밥을 잘 떼내었다. 이어 박음질 불량을 찾으니 불량으로 보이는 곳이 여러 군데 였다. 진화는 옆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이한송에게 물었다.


"이거 불량인 것 같은데 불량은 어떻게 해야해요?"

"어디가 불량인데요?"

"박음질이 마무리가 안되고 삐뚫어진 곳을 세 군데 발견했어요."

"다른 데는 괜찮아요? 실밥은 다 뗐어요?"

"네, 지퍼 단추는 괜찮고 실밥은 깨끗하게 제거했어요."

"그럼 그냥 다시 담으세요. 박음질 이런 거는 찢어진 정도만 아니면 그냥 나가도 돼요. 중국산 저가 옷이 다 그렇지, 사람들도 그거 다 감안하고 사는 거에요. ( 진화 : 네.) 정확히 하되, 빨리 하셔야 해요. 시간 당 백 개 가까이는 해야 하는데 한 벌에 5분 씩 걸리면 언제 다 하실 거에요? 오늘은 아마 오후에도 일 해야 하실 거에요. 오늘 보내야 하는 출고 해야 하는 물건이라서 아마 좀 있다가 말씀 하실 거에요."

"4시간 근무로 알고 왔는데 더 해야 해요?"

"물어볼 지 안 물어볼 지 모르죠. 있어 보세요. 못 하겠으면 못 한다고 하시면 돼요."

"네,"


진화는 시간당 백 개라는 말에 정신을 집중해 빠르게 손을 놀렸다. 쪽가위를 든 손가락 근육이 마비가 오려는 듯 뻐근 했지만 손가락 스트레칭을 할 시간도 없다고 생각했다. 박음질 불량은 불량도 아니라는 이한송의 말을 되새기며, 그러니 그 온라인 쇼핑몰의 저렴한 옷들이 세탁 한번 하면 올이 줄줄 풀리고 너덜거리는 이유가 다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침 9시부터 창고로 일하러 온 진화는 10시를 넘어서자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마침 그 때 옆에서 일하던 이한송이 일어나 진화에게 잠깐 쉬자고 말했다. 진화는 창고 어딘가에 커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하며 이한송을 따라나갔다. 이한송은 지하 창고고 뒷문으로 나가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는 무리에 끼었다. 그리고 크롬이 장식된 반짝이는 전자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저기, 커피는 없나요? 믹스도 괜찮은데,"

"커피요? 일 층 문 옆에 자판기 있어요. 동전 넣으셔야 돼요."






진화는 담배연기 자욱한 골목에서 다시 창고로 내려와 반대편 문으로 나갔다. 거기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었다. 삼백 원 짜리 믹스 커피 버튼이 진화를 향해 이미 오래 전에 지친 듯 빨간불을 반짝 이고 있었다. 진화는 아침에 비상용으로 주머니에 넣고 나온 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자판기로 밀어 넣었다. 밀크 커피 버튼을 누르자 달캉 하고 종이컵이 내려 왔다. 웽웽 거리며 커피가 내려왔고 작은 컵에서 김이 솔솔 나왔다. 종이컵을 꺼내 들고 차가 지나 다니는 도로를 바라보며 진화는 뜨겁고 달달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컵 속 커피는 어찌나 조금이었던지 매일 아메리카노를 세 잔도 마시는 진화에게는 모자랐지만 달디단 자판기 커피의 충격은 작지 않았다. 빈 종이컵을 버리고 창고로 내려 가 자리로 돌아갔다. 이미 내려와서 일을 하고 있던 이한송은 조금 늦게 돌아온 진화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김미영이 진화에게 다가왔다.


"진화씨, 일 할 만해요? 안하던 일이라 쉽지 않죠. 그래도 하다 보면 익숙해져요. 다들 그렇게 시작하지 뭐. 뭐 잘 모르겠으면 한송씨한테 물어보고 아니면 나한테 와서 물어봐도 돼요. 그리고 가위 생각보다 날카로우니까 다치지 않게 조심하고. 돈 벌러 왔다가 몸 다치고 가면, 그런 낭패가 어딨어? 안 그래요? 오래오래 일해야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송님이 잘 알려 주셔서 실수 안하려고 집중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조금 늦게까지 일할 수 있어요? 오늘 사람이 부족해서 물량 소화가 쉽지 않네. 오버타임도 시간 당으로 다 정산해줄거에요. 할 수 있어요? 여섯시 전에 끝날 거에요."

"여섯 시 전에 끝나면 할 수 있어요."

"그래요, 진화씨 이따가 같이 점심 먹으러 가요."

진화는 김미영의 세심한 배려가 고마웠다. 열심히 손을 놀리지만 박스 안에 옷은 좀처럼 줄어 들지 않았고 다른 사람의 박스도 슬쩍 쳐다 보았지만, 각자 작업라는 옷 종류가 다 달라 보였다. 자신이 얼마나 느린지 아니면 잘 따라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려는 무렵, 창고 한 켠에 켜 놓은 라디오에서 12시를 알리는 음악 소리가 흘러 나왔다. 진화는 김미영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고 한 말을 기억하며 작업대에 놓인 옷만 마저 끝내놓고 밥을 먹으러 나갈 준비를 했다. 그래도 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꼼꼼리 실밥을 잘라 내고 앞 뒤를 돌려보며 불량을 찾아내려고 했다. 여전히 진화의 눈에 포착되는 삐뚤삐뚤 박음질 불량이 거슬렸지만 이것은 큰 불량이 아니라는 이한송의 말을 되새기며, 적은 돈을 결재한 데에 합의된 구매자들의 관대함을 기대했다. 그런데 12시가 넘었지만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진화에게 점심을 먹자고 말하는 사람도 없었다. 진화는 이한송에게 슬쩍 물었다.

"점심은 언제 먹는 거에요?"

"오늘 잔업 하시게요?"

"네, 팀장님이 말씀하셔서 한다고 했어요. 여섯시 전에 끝난다고 하시던데요."

"여섯시 전 일 수도 있고, 넘을 수도 있어요. 저는 아기때매 오늘 일찍 가야 하는데 잔업하라고 해서 지금 생각 중이에요. 그리고 여기 점심 시간은 12시 30분이에요. 요 앞 식당에 가서 먹는데 일하는 사람들 전부 다 가는 건 아니고요, 오전 근무만 하는 사람은 1시까지 하고 퇴근하고; 오후 잔업 하는 사람은 점심 먹고 다시 하는 거에요."

"아, 네. 배가 벌써 고프다고 난리네요. 호호 그런데 제가 지금 느린지 빠른 지 모르겠어요."

"느리고 빠르고 보다는 실수하지 않으셔야 해요. 지난 주에 그만두신 분은 손이 느려서가 아니라 실수를 너무 많이 해서 잘리신 거에요."

"잘리셨다 고요? 실수를 얼마나 하셨길래요... 저도 처음이라 실수 많이 할 것 같아 불안하네요."

"누가 실수를 일부러 하나요? 딴 데 정신 팔지 않고 신경 써서 하시면 실수 할 일 별로 없어요."

"네, 감사해요. 실수 하면 회사에도 저한테도 안좋으니까 실수 안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두어야 겠네요."

"진화씨, 이제 어서 일 하세요."


진화는 이한송과 대화를 너무 길게 한 것은 아닌가 아차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아침부터 검수하던 박스 안 옷들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작은 쪽가위를 들고 컴컴한 지하창고에서 먼지를 마시며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흡사 70년대 재봉공장 여공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현재는 최저임금 제도 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쉬운 일도 한 시간을 일 시키면 9천원은 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어렵고 더러운 일도 똑같이 시간당 9천원이라는 함정도 존재하긴 하다.

진화의 플라스틱 박스 안 옷들이 전부 검사를 마치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던 이한송이 진화를 불렀다. 식사 하러 가자는 말이었다. 진화는 쪽가위를 내려놓고 일어나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이한송이 부르는 뒷 문으로 갔다. 뒷 문 밖 구석에 큰 깡통 안에는 담배 꽁초들이 쌓여 있었고 여기저기 가래 침을 뱉어 더러운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한송 옆에 서 있던 한 여성이 진화를 보고 이한송을 향해 말을 했다.

"아, 담배 그만 펴, 새로 오신 분은 담배도 안 피시는 구만. 밥 맛 떨어져. 근데 오늘 반찬 뭐래?"

그때 골목으로 트럭 한 대가 들어 와 섰다. 운전석에서 젊은 남자가 내려 탑차 뒷 문을 열었고 화물 칸으로 사람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진화도 얼떨결에 화물칸으로 올라탔고, 모두 열 댓 명의 사람이 탑차 내부 벽에 기대어 옹기종기 쪼그려 앉았다. 문이 쾅 닫히고 트럭은 출발을 했다. 화물칸에는 다행히 불이 두 개 켜졌다.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을 들여다 보며 별 말이 없었다.
진화는 예전에 읽었던 기사 하나가 생각이 났다. 멕시코에서 미국 국경을 넘어 온 대형 냉동트럭 내부에서 아시아 불법 이민자들 여러 명이 질식사한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 말이다. 진화는 자신이 밀입국한 불법노동자가 된 듯 한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트럭 화물칸에 쪼그려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진화의 생각에는 그다지 진화의 기분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모두가 자신 앞에 앉은 동료를 바라보기 보다는 마치 현실을 잊으려는 듯, 휴대폰을 열어 게임을 하거나 카톡 메세지를 보고 온라인 쇼핑몰에 주문한 물건을 확인하고 있었다.

트럭은 금새 어딘가에 도착했다. 화물칸 문이 열렸고 아까 탈 때 처럼 젊은 남성 운전자가 내리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반복해 뛰어 내리다간 금새 무릎이 나갈 만한 화물칸 높이였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골목 안 작은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영업을 하는 곳 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골목에 숨은 식당 바깥에 걸린 간판에는 '고향집 함바' 라고 써 있었다. 식당 안 각 테이블 위에는 이미 가스버너가 놓여져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고 사람들은 손을 씻을 생각도않은 채 자리를 하나 둘 채우고 앉았다.

진화는 눈치를 보다가 김미영팀장이 앉는 자리로 가까이 갔다. 오전에 지하 창고에서 본 김미영팀장의 얼굴과 그나마 햇빛이 들어오는 식당에서 본 얼굴은 같은 얼굴이었지만 마치 처음 입은 새 옷과 몇 번 빨아 자신감을 잃은 옷 처럼 달라보였다. 눈가에는 자글거리는 주름이 가득하지만 머리는 환하게 염색이 되어 있고, 입은 삐쭉거리며 웃으려는 듯 말을 하려는 듯 움직거리는 모습은, 이 식당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지만 웃음거리는 되지 않고 싶다는 의지가 담긴 듯 보였다. 김미영팀장 옆 테이블에 앉은 이들은 의미없는 수다를 떨다가 진화 쪽을 쳐다 보았다.

" (최선미) 진화 씨라고? 밥 많이 먹어요."

"(진화) 네 감사합니다. 팀장님 (저 분) 누구세요?"

" (김미영) 지금은 말 해줘도 모를 거에요. 차차 알면 되고, 저 분은 최선미 대리님이고, 옆에는 경선씨, 도은씨 그리고 말해줘도 모르겠죠? 차차 알아가세요. 진화씨 라면 드실래요? 라면 먹고 싶으면 가져다 드시면 되요. 돈은 따로 안내도 되고요."

"(진화) 네, 감사합니다. 라면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 (김미영) 그래요? 마음대로 하세요."

진화는 마치 누가 던지기라도 한 듯이 자신의 앞에 놓인 공기밥을 보고 뚜껑을 열었다. 6시부터 일어나 남편과 아이들 아침을 차려놓고, 먹고 싶지 않아도 힘쓰는 일을 해야하기에 억지로나마 대충 먹고 왔지만, 진화는 삼백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실 때부터 이미 허기를 느꼈었다.
진화가 과거 어린이집에서 일을 할 때는 밥을 최대한 빨리 먹어야 했었다. 아이들을 식사 시간에도 돌봐 주어야 했기에, 허겁지겁 밥을 욱여 넣고 국을 마시는 것이 익숙했다. 진화는 가족이나 친구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늘 비슷한 말을 들어왔다. 왜 그렇게 급하게 먹느냐는 농담반 불평반이었는데, 일일히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래야만 하는 처지에 대해 구구절절 말하기 싫어, 그냥 배가 많이 고파서 라는 말로 에둘러 왔다. 진화는 천천히 밥을 먹으려 노력했지만 식당 공기밥 양은 너무 작았다. 진화는 여섯 시까지 아무 것도 먹지 못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첫 날부터 지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며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밥 좀 더 주세요..."

"진화씨 밥 더 먹게? 이거 먹어. 나 라면 먹어서 밥이 남아."

"네 감사합니다."

김미영팀장은 자신이 덜어놓은 밥을 진화에게 건넸고 진화는 얼른 받아 먹기 시작했다. 테이블 가운데 놀인 김치찌개 냄비 안 두부 조각들은 김치 양념과 조미료를 흡수해 짭짤해져 있었고 밥을 입 안으로 더 퍼 넣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다. 작은 딸이 먹고 싶다고 사달라던 오징어 젓갈이 식당 반찬으로 나와 있었다, 진화는 오징어 젓갈을 푹 집어 먹으며 작은 딸 생각이 났다. 오징어 젓갈은 몸에 좋지 않다고 조미료 범벅에 나트륨 과다라 먹어서 좋을 것이 없다는 논리를 늘 작은 딸에게 주장해왔던 터 였으나 진화는 달달한 믹스커피에 이어 짭짤하고 맵삭하게 감칠 맛이 도는 오징어 젓갈을 자연스럽게 입 안으로 안내했다. 식사는 10분도 되기 전에 끝이 났고, 오히려 진화가 젓가락을 가장 늦게 내려 놓았다. 식사를 자친 사람들은 하나둘씩 식당 문 밖으로 나가 서 있다가 다시 트럭 화물칸에 올라타 쪼그려 앉았다. 화물칸 문이 쾅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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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안녕하세요. 면접보러왔는데요..."

싸해보이는 화색 문을 슬며시 열고 들어간 진화는 얼굴에 주름 하나 안 남기려는 듯 팽팽하게 얼굴 근육을 양 옆으로 잡아당겼다. 문 안으로 쏙 들어간 진화는 문에서 가장 가까운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을 향해 말을 내밀었다.

"여기 아니고요.... 따라 오세요."

컴퓨터를 들여다 보고 있던 직원은 진화를 흘깃 보고는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진화를 다시 문 밖으로 데리고 간다.

"아, 여기가 아닌가요?"

진화는 어색하게 웃으며 슬리퍼를 달달 끄는 직원 뒤를 쫒아 나갔다.

"여기로 들어가세요."

직원은 진화의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않고 뒤돌아 걸어가 문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진아는 알려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면접 보러왔습니다."

진화는 한번 연습을 해서인지 아까보다 더 자연스러운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아이고, 네! 어째 오시는데 괜찮으셨어요? 시간은 얼마나 걸리셨어요? 오늘 면접자 분 성함이... 잠시만요. 아, 먼저 그쪽에 앉으세요. 편하게, 네"

김병신 사장은 휑한 책상 위에서 잠시 뒤지다가 종이 한 장을 찾아들고 진화가 앉은 자리로 다가온다.

"자, 성진화씨, 어디, 이쪽 일은 해보셨고?"

-"아니요, 처음입니다. 하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처음이면 쉽지 않을 텐데. 혹시 하셨던 일은 뭐?..."

-"어린이 집에서 일했었습니다."

"왜 그 일 계속 안하시고 다른 일 하시려고 하시나?"

-"아 그게, 제가 작년에 일을 그만두고 쉬다가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쪽 분야에 관심도 있고 해서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

약간 상기된 채 순진한 표정으로 주절주절 말하는 진화를 흘깃 보고 종이를 들여다보기를 열 번은 반복하던 김 사장은 진화의 휑한 지원서 한 곳에 시선을 멈춘다.

"사시는 곳이 황금동이시네?"

-"네 맞습니다."

"황금동 아파트 값이 요즘에 엄청 올랐죠?"

-"그렇다고 누가 그러던데,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아, 황금동 사시는 구나. 혹시 가족관계는? 말씀하시기 힘드시면 말 안하셔도 됩니다. (진화는 얼른 딸 둘이라고 말한다. ) 아, 딸 둘이시고. 다 키워놓으셨네요. 그런데 저희 회사에 지원을 하셨고... 일단은, 공고대로 포장 피킹 하시는 일을 하셔야 하고, 임금은 최저로 나갑니다. 뭐 궁금하신거 있으세요?"

-"그런데 제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나요?"

"저희 회사가 의류 납품을 해요. 그래서 송장대로 물건을 찾아와서 잘 포장해서 보내는 일을 하실 거에요. 어려운 일은 아니고, 빠르고 정확하게 하셔야 해요. 이 쪽일 안 해보셔서 할 수 있으시겠어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순진한 표정으로 열심히 하겠다 의욕을 보이는 진화를 쳐다보는 김사장의 표정에는 풋 하고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참고 있는 듯 보였다. 진화의 지원서에 적힌 글씨라고는 이름 주소 어린이집 보조교사 경력이 전부 였지만 김사장은 열심히도 종이를 보고 또 보았다.

"진화씨, 우리 그럼 이렇게 해보죠. 일단 일주일 간 시간을 두고 서로 겪어보는 것으로 하고, 진화씨도 일을 해봐야 어떤 일인지 알 수 있잖아요. 저도 좀 지켜보고 말이죠. 괜찮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진화는 연신 감사하다 열심히 하겠다는 말을 하고 내일 출근하라는 말을 덥석 받았다.
진화는 내년이면 50에 바싹 다가가는 중년 여성이다. 딸 둘을 둔 엄마로 큰딸이 고1, 작은 딸이 중1이다. 진화의 동갑 남편은 약품 회사에 다니고 있다.

몇 년 전에 어린이집 보육교사 자격증을 따고 어린이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어느날 한 학부모의 항의를 받게 되었는데 어린이집 원장은 진화의 해명은 들어보지도 않고 진화에게 학부모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라고 강요 했다. 진화는 무릎을 꿇고 빌며 울 수 밖에 없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 어린이집 4살 아이가 진화에게 다가와 선생님은 왜 혼났냐고 왜 울었냐고 물었다.
진화는 도저히 어떻게 대답을 할 지 몰라 실없이 웃기만 했고, 그날로 어린이집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렇게 한동안을 쉬던 진화는 온라인 쇼핑몰을 하나 열어 볼까 하는 마음에 경험을 쌓아보고자 알바 자리를 찾았다가 오늘 김가장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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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에 맞서기

 

 

경제학자 우석훈은 [민주주의는 직장 문 앞에서 멈춘 다] 라는 책 (2019.1. 한겨레출판사)으로 이른바 갑질 이라는 우리 사회 직장 내 민주주의의 수준을 고발했다. 저자 우석훈은 책 발간 인터뷰에서 직장 민주주의를 이렇게 설명했다.

직장 민주주의란 말이 국내에서는 용어 자체부터 낯설 수 있다. 요즘 등장한 직장 갑질이란 말과 비슷 하기도 하다. 직장 갑질이란 말이 직관적으로 더 와 닿 고 어감이 주는 통쾌함도 있지만 직장 갑질은 그 문제 를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어 사실 이는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 나아가 사회 구조 적인 문제로 보아야 한다. 거기에 초점을 두고자직장 민주 주의라는 용어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그는 직장 내 비민주적 문화의 원인으로 군대식 병영 문화의 잔재를 꼬집었다.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군대식 문화가 한국에 뿌리내려 일본보다 더 한 병영 사회가 되었고 그 문화 가 직장을 비민주적인 집단으로 만든 것이라고 분석 했다.

일상이나 직장에서 단 한 명이라도 꼰대가 있다면 생활이 불편해진다. 보통 겸손한 사람들을 꼰대의 꼰대 짓을 참아낸다. 꼰대가 늘 꼰대 짓을 하는 이유가 여기 에 있다. 이기적인 꼰대는 오로지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 하고,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겸손한 사람은 꼰대와 같이 행동하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어 참고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다. 꼰대의 잔소리가 자주 들리고 길어질 수록 주변 사람들은 지칠 수 밖에 없다.

일부 언론이 코로나19사태를 통해 적나라하게 보였던 꼰태적 행태는 같은 국민이 맞나 싶은 생각마저 들게 했다. 자신들만이 오로지 선이고, 정부가 하는 일 은 무엇이든 틀렸으며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 가 망해간다는 논리였다. 겸손한 약자라도 이런 독선 적인 꼰대들을 입 닫게 하려면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서 는 안 된다. 꼰대 짓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고 불편해 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당신들 때문에 미치겠다 고 말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다. 꼰대가 있는 직장에서 도망 칠 준비를 해야 하고 가족 내 꼰대에게서는 최대 한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

사람이 늙는다고 전부 꼰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의 삶 안에서 머무는 것을 편안 해한다. 가난한 시절을 겪은 노인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가난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버리지 못하고 그저 돈과 물건을 모으기만 한다. 가족보다 자신을 위해 살았던 노인은 늙어서도 주변 사람들이 병든 자신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기만을 바란다. 젊어서 이기적이었던 사람 은 나이 들어도 여전히 이기적이며 젊어서 꼰대가 늙어서 도 꼰대가 되는 것이다. 늙은 꼰대라 외면 받기 싫다면, 당장 지금부터 꼰대에서 탈출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꼰대로 사는 이로움은 별로 없다. 꼰대가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수칙은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내가 안 하면 되는 것이고, 내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남을 보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는 것 이다.

 

 

하지만 멘토는 필요하다

 

 열정적으로 노력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 넘으며 끊임 없이 자기 개발을 하라는 조언을 담은 책들이 여전히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고 있다. 왜 이런 잔소리 같은 책들이 아직도 팔리고 있을까?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중요한 삶의 포인트에서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값진 조언을 해 줄 멘토를 필요 로 한다. 세상이 변했지만 사람의 삶은 과거나 현재나 유사한 점이 있다. 먼저 경험하고 살아온 세대의 실수 담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를 기록하고 재열람한다. 그리고 먼저 경험한 멘토도 본인 의 경험과 거기서 얻은 지혜를 공짜로 알려주려고 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나은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젊은 세대가 무조건 잔소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겠 지만, 젊은 세대 중 똑똑한 일부는 가끔 일부러 찾아서 라도 잔소리를 듣고자 한다. 비록 맞을 때 따끔하고 때론 아나필락시스 같은 부작용도 겪을 수 있는 백신 같은 잔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꼰대는 싫지만, 이들 에게도 여전히 실수를 줄여줄 멘토는 필요한 것이다. 의도는 그렇지 않은데 불쑥 꼰대 짓부터 나오는 사람이라면 꼰대가 아닌 멘토 역할을 위해 다음에 설명 할 중요한 차이를 기억해야 한다.  

엄연히 멘토는 꼰대와 다르기 때문이다.

  

꼰대는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이 맞고 자기 외에 모든 사람은 틀리다 주장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에게 조언을 구할 일은 사실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썩은 동아줄이라도 붙잡게 마련이다. 적어도 최신상 등산 로프는 아니라도 썩은 동아줄은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나. 멘토는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 하고 다른 의견에 대해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이다. 그 자리에서 솔직하게 틀림을 인정할 수 있다면 당신은 겸손한 사람이자 훌륭한 멘토가 될 수 있다.

 

꼰대는 아무리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라도 상대방을 윽박지르며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 애기만 한다. 때로는 자신이 꼰대 임을 인정하기도 하며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따라 오기를 강요한다. 누구도 웬만치 급한 사정이 아니면 꼰대를 믿고 따르려 하지 않는다. 멘토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을 먼저 이해하려고 하고,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태도로 배려한다. 아무리 백 번 천 번 맞는 이야기라도, 윽박 지르며 가르치려 한다면 계속 참고 들을 사람은 없다. , 차분히 이야기를 하더라도 아는 것 하나 없고 경험치 하나 없으며, 세상사 아는 바 하나 없다는 완전히 무시하는 수준으로 상대를 설정하고 대한다면, 정말 중요한 지혜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지혜의 가치를 꼰대 스스로 저 밑바닥으로 던져버린 셈이 된다. 단지 뼈를 치는 옳은 소리를 듣기 싫은 것이 아니라 상대를 무시하는 예의 없는 태도가 싫은 것이다.

 꼰대는 늘 같은 말만 반복하고 별 뾰족한 수도 없지만, 멘토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 꼰대는 오로지 좁은 경험에만 비추어 강압적으로 이야기한다. 꼰대는 어느 상황에서나 문제를 다 해결하는 신통방통 한 방법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멘토는 경우에 따라 유연한 자세를 취하며 가능한 조언을 한다. 자칭 지혜의 샘인 꼰대가 그저 못난 꼰대로 만 남는 이유는 지나치게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 정작 남의 말은 듣지 않아 발전이 없어서 다. 멘토는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다른 시각을 통해 검증하고 비판하고 확신에 대해 의심을 가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자가 발전하며 감정을 공유하는 법도 쌓아간다. 꼰대는 금새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꼰대는 잔소리에 의미를 더 할 행동은 없이 말만 쏟아내나, 멘토는 말에 따른 행동으로 말의 가치를 높인다. 여러 이유를 들어 주식 투자를 하라고 권유하지만 정작 꼰대 본인은 주식 투자로 진 빚을 아직도 갚고 있는 상황이라면 누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겠는가. 꼰대는 주장 뒤에 감추고 숨기는 것이 있다. 그래서 더욱 말보다 행동에 집중해야 한다.      

부모는 자식에게 항상 공부하라는 말을 한다. 자녀 들은 부모가 하는 공부하라는 말이 잔소리로 들린다. 이 잔소리를 듣고 공부를 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대개 는 잔소리로 흘려 듣고 만다. 왜냐하면 부모는 항상 공부 좀 하라는 말을 하지만 자신들은 공부는커녕 책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하루 종일 힘들게 일 하고 돌아와 저녁에 쉬고 싶은 마음에 티비도 보고 게임이라도 잠시 하고 싶어한다. 자녀도 마찬가지다.

 공부를 했던 하지 않았던 학교에서 또는 학원에서 하루 종일 나름 한다고 하고 집에 돌아온 아이에게 또 공부하라는 말은 퇴근한 직장인에게 집에서 일 더 하라는 말과 같다.

  밖에서는 대단한 직업을 가졌더라도 정작 집에서는 누워 있기만 한다면 자녀들에게 부모는 늘 피곤한 사람일 뿐이다. 아이들은 의외로 영리하다. 부모가 매일 쏟아 내는 말보다 부모가 일상적으로 보여주고 또 결정적인 순간에 행하는 행동을 기억하고 따라 한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고 말하는 아이를 걱정 한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대부분 성인 중에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정확히 알고 꾸준히 해 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벌기 위해서, 먹고 살아야 해서 우연히 하게 된 일을 계속 하고 있을 뿐이다. 운 좋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성인 중에서도 정작 소중한 가족과 관계 쌓기는 뒷전인 사람도 많다. 사람 마다 각자 할 일을 찾는데 필요한 시간이 다를 수 있고 목표나 욕망으로 나타나는 개인 성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다 컸다고 큰소리 치는 자식이 저 필요할 때 도와 달라 다가와 손 내밀 때, 눈을 맞추며 손을 내밀어 줄 준비면 되지 않을까.       

비록 부모가 자식을 위해 애쓰고 산다는 것을 당장 철없는 자녀가 잘 모르더라도 언젠가는 자라서 부모가 진심으로 열심히 살았음을 알아주는 순간이 올 것이라 믿는다. 그 순간까지는 꼰대 부모보다는 멘토 부모가 되도록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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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들의 육하원칙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꼰대들의 육하원칙을 보면 사람 들이 진저리를 치는 젊고 늙은 꼰대들의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Who 내가 누군지 알아

What 네가 뭘 안다고 그래?

Where 어딜 감히?

When 나 때는 말이야,

How 어떻게 나한테!

Why 내가 그걸 왜?

원조 꼰대라는 말과는 또 다른 성격의 젊은 꼰대는 꼰대가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권위의 불합리성을 거부하면서, 비슷한 젊은 세대에게 자신들의 권위를 주장하고 다른 의견은 무시하는 일방 통행적 형태로 나타난다. 늙은 꼰대들이 하는 꼰대 짓을 따라 일방적 인 주장하기를 복사, 갖다 붙이기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꼰대라는 말을 모든 나이든 사람이나 기존 권위, 지혜를 전부 부정하는 말로 사용하면서 기본적 으로 평등한 인간 관계에서의 기본 예의나 배려에 대해 서조차 거부하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젊은 꼰대란 결국 편협하고 이기적인 가치관이 드러난 현상 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열이 뜨거운 우리 사회에서 중간에 낙오하지 않고 고등 교육을 이수해내고 나면, 아무리 시험을 위한 배움이었다고 하더라고 그 지식의 양은 결코 적지 않다. 가치관 체계 형성이 마무리되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학생들은 기성 세대가 가진 지식이 우습게 보일 만큼 지식적으로 가득 충전이 되어 자신감에 차 오른다. 그러나 책으로 배운 것과 달리 옆에 곁에서 눈으로 본 현실, 그리고 직접 몸으로 느끼는 현실 간의 괴리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자신들이 짊어진 현실적인 약점과 어려움을 파악한 약삭빠른 젊은 세대들은 기성 세대, 늙은 꼰대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신도 꼰대가 되는 길이 무시 당하지 않고 존재감을 드러내는 빠른 길이 라 잘못 배운다. 여기에는 자라면서 길러온 도덕적 가치관이나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다. 사람들은 어떤 과도한 자기확신적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비록 그것이 허황 되어 보이고 그 허황된 확신에 의문이 들면서도, 뭐가 있으니까 저러는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의해 그들 에 동조 편승의 기회를 가지려고도 한다. 남다른 확신 을 가지고 행동하는 이들의 이유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에서 온 것일 뿐인데 말이다. 자기 확신이 초래한 결과가 범죄라고 하더라고 사람들은 그런 놀라 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신봉하기도 하는데 독재자나 연쇄 살인자를 추종하고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치는 사기꾼들을 대단한 사람이라 경외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알지 못하는 너무도 많은 일을 받아 들여야 하는 삶의 과정에서 누군가 남들이 하는 대로, 앞 세대가 했던 대로 따라가는 경향이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는 꼰대 짓을 익숙하게 따라 하고 또 누구는 꼰대 짓을 익숙하게 받아들인다.

 

 

 

 

 젊은 꼰대의 특징

 

1. 온라인에서 날개를 펴는 젊은 꼰대

 

컴퓨터와 인터넷에 익숙한 이들은 현실에서의 미성숙한 모습을 감추고 특정 집단 사이에서 특별한 존재감,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자신 만의 경험을 가진 듯 기성 세대를 흉내 낸다. 일단 온라인 세상은 오프라인 현실과 달리 나이가 드러나지 않아 서로 간의 나이차에 따라 불공평한 예의 범절을 차리지 않아도 되는 편리성 이 존재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말의 무게가 가벼워지지 않는 신기한 경험과 또 반대로 나이가 많다고 무조건 무시당하지도 않는 새로운 경험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신선한 여론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또한 악용 되기 쉽다. 관심과 인기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 들의 범죄와 유사한 행동도 하거나 여론 조작 알바의 유혹에 빠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와는 좀 다르 지만 클릭수가 돈이 되는 현재, 젊은 꼰대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머지않아 금전적 대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를 하는 자기 확신화 과정에 있다고 보인다.

 나쁜 것부터 따라 한다고, 나쁜 것이 나쁘지만 빠르 게 문제를 해결하는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기기도 한다. 매일 주목 받는 온라인 뉴스 기사 아래에 그럴 듯한 분석과 한 마디를 달며 자신의 댓글이 상위 순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희열을 느끼는 젊은 꼰대들은, 해당 이슈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거나 심지어 기사를 제대로 다 읽지도 않은 채 베댓(베스트 댓글) 놀이에 빠져 아무 말 잔치를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편집된 근거나 거짓 주장을 그대로 증거로 끌어와 덮어 놓고 정치권을 비판하거나 사회적 약자인 외국인과 여성에 대해 혐오를 드러내는 형태가 가장 흔하다.  조금 더 지능적으로 전문가, 유명인, 시사 평론가들의 말을 일부만 따와 근거로 제시하거나 자신만의 생각 인 양 써 먹기도 한다. 인터넷 정치 뉴스 기사 소비가 가장 많은 40대 이상 남성이 댓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보면 그들은 젊은 꼰대 이자 기성 꼰대 라고 볼 수 있다. 언론사 성격마다 댓 글의 성격도 다른데, 기존 신문 등 전통적인 언론을 뜻하는 레거시 미디어의 댓글에 차별과 혐오 표현이 많이 있는 것은 쉽게 확인 이 된다. 

20대 30대가 많이 보는 시사 이슈 아래에 달린 댓 글에도 역시 편견과 혐오 표현으로 가득한 데, 언론사 특성에 따라 그 성격이 따라 간다고도 볼 수 있다. 젊은 꼰대가 차별과 혐오 표현을 자주 쓰는 댓글러들 이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정치적 선호도가 바탕에 깔린 대부분의 시사 이슈에 대해 굳이 정치적 성향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의견인지 다른 사람 들의 의견을 가져온 것인지 조차 구분이 안 되는 내용 을 남 가르치듯 단정적으로 적는 댓글러들을 바로 꼰대라 규정하고자 한다.

그들의 마치 나는 다 아는 데 니들은 아직도 모르냐 는 태도는, 무슨 근거로 자신이 그런 확신을 가지는 지 에 대해서 설명 없이 그냥 자신이 맞는 것이라고 알겠 냐며 문제에 대해 단정을 짓는다. 마치 일등으로 정답 을 맞춘 것처럼 퀴즈에서 순발력 자랑하듯 냉큼 조언을 던지고 가는데 아마도 다시 돌아봐 여러 번 자신의 댓 글 순위를 확인할 것이라 생각한다.

늙은 꼰대가 대부분의 인생을 소비하며 단단하게 쌓은 가치관이자 편견을 젊은 꼰대는 어디서 눈치로 보고 배워 마치 자신의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마냥 꼰대 짓을 흉내 낸다. 마치 자신이 대단한 내공과 경험 치를 가진 마냥 정치와 사회 이슈에 관해 기막힌 해법 을 아는 척SNS에 글을 올리고 댓글을 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와 개인정보 유출 방지를 주장하며 혐오 댓글에 조차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과거의 역사나 사건을 선택적으로 수용해 온 사람은 골치 아픈 통찰의 과정 없이 일부 만을 부각해 주장 하거나 아예 가짜 뉴스를 만들기도 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정치 환경의 이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은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려고 한다.

 

  

< 포털 댓글 통계를 통해 본 젊은 꼰대 경향 >

 

네이버에는 언론사의 선택에 의해 어떤 기사를 클릭했고 댓 글을 쓴 독자들의 연령과 성별 정보를 볼 수 있게 한다. 정확히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만약 내가 어떤 글이나 기사에 댓글을 쓰면 40대 여성의 그래 프가 조금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좋아요 화나요 추이와 댓 글 작성자 비율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 지만 얼추 비슷하다는 가정에서 추측해 보면, 젊은 꼰대 들의 활약 상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전세계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 사태로 혼란스러웠던 2020 3, 세계보건기구 WHO가 한국의 상황을 두고 고무적인 조짐이라고 밝힌 기사(연합뉴스)에서 좋아요 보다 화나요 가 100배 이상 많은 클릭수를 얻었다. 30대 남성이 가장 많이 작성했다는 댓글 중 에는 WHO가 중국 정부 지원을 받는다며 신뢰성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우리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과 다음 선거까지 예상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보이는 댓글에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기존 시스템을 전부 부정하고 그래 봐야 소용 없다는 회의적 시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면서 기존의 특정 정당을 찍어야 한다는 의견은 앞뒤가 안 맞는 내용 이었다. 캐쥬얼한 댓글 창에 논리적인 의견을 게시 하기가 어렵다고 볼 수도 있으나, 본격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장을 열어 준다면 과연 얼마만큼 앞 뒤가 충분한 주장을 펼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 점이 생긴다.

또한 이탈리아의 코로나 확진자 수가 한국의 확진자 수를 넘어섰다는 기사가 (연합뉴스 2020 3) 20 30대가 많이 클릭한 뉴스로 순위에 올랐는데 거기에는 관계없는 중국을 비난하는 의견이 많았으며, 확산의 원인이 중국과 중국인에 있다는 논리를 주장 하였다.    

젊은 꼰대는 온라인 댓글을 통해 과시적 모습을 드러 내며 사람들의 관심을 기대한다. 누구라도 느꼈을 법한 혐오 표현이나 차별적 발언을 얼마 가지 못해 관심이 사라지는 댓글 창에다가 매달아 관심을 받으려는 시도 역시 딱 그 정도의 일시적 과시와 관심의 소비만 바라는 행동으로 읽힌다.

네이버는 2020 3월 부터 댓글러들이 그들이 기존에 썼던 댓글 내용 목록을 일괄 공개 전환했고 댓글을 쓴 사람이 과거 어떤 식의 댓글을 쓰고 혐오나 차별 표현 을 지속적으로 써오고 있는 지가 드러났다. 네이버의 변화가 결코 빠르지는 않지만 느리더라도 진행되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네이버에서 댓글러들의 이력을 공개 하면서 댓글의 성격이 드러나고 있다. 모든 이슈에 대해 화풀이를 하거나 빈정거리 고 차별이나 혐오를 드러내는 해당 댓글러의 반사회적 성향과 그 성향의 일관성이 드러나고 있다. 그 전까지는 여론 이라고 여겨졌던 댓 글의 일부를 이제는 이상한 사람이 쓴 이상한 글로 무시해도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댓글 숨기기 기능이 유용하다.  

네이버에 댓 글을 쓴 사람의 신상 정보가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렇게 매일 많은 댓글을 달 정도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을 주로 은퇴하거나 직업이 없는 장년 노년층으로 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사회적 관계 맺음에 실패 했거나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젊은 층의 글이라는 가능성도 적지 않다.

 

 

 

 

2. 젊은 꼰대가 처한 어려움

 

저성장

때로는 굶기도 하며 살았다는 베이비 붐 세대 이후, 굶지는 않고 자란 세대와 2000년대 이후 경제적 혜택과 더불어 민주적 사회 분위기에서 태어나고 자란 세대 중에서도 젊은 꼰대가 나타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일명 밀레니얼 세대만을 특정 지어 젊은 꼰대 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으나 2000 년대 초반에 태어나 2020년 현재 20대 초반 세대 만을 지칭하기 보다는80년대와 90년대 후반에 태어 나 저성장 경제와 정부의 노동 시장 유연화 방침에 따라 비정규직과 계약직으로 처음 일을 시작하는 세대 에게서 젊은 꼰대의 특징이 나타난다고 본다.

이들은 이전 그 어느 세대보다도 경제 혜택을 누리고 자랐으며, 태어나면서부터 휴대폰이나 인터넷 등 디지 털 환경이 자연스러우며 가난과 차별을 덜 겪은 축복 받은 세대 같지만, 저성장 구조에서 취업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N포 세대라는 말에서 보 듯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삶의 과정들이 이 세대 에게는 선택과 포기로 생략되고 있다. 출산을 포기 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연애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세대로부터 부여 받은 경제적 혜택을 미래의 가족 을 위해 나누거나 포기하는 대신 자신만을 위한 혜택의 최저선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개인 의 선택을 누가 뭐라고 할 수는 없다. 고도의 경제 성장에 필연적으로 뒤 따를 저성장, 아날로그와 디지털 로의 전환이라는 변혁을 거친 이들의 성장 배경은 이들 세대만이 보이는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 내었다.

이들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이다. 이들은 자기 중심적인 성향을 강하게 보이며 전형적인 나르시 시스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뿌리 깊게 이어져 왔던 남아 선호 사상이나 장남 독식 가족 구조에서 차별을 받아온 지난 세대와는 또 다르게 딸도 가족 내에서 차별적 대우를 거의 받지 않고 자랐 고 또 그 어느 세대보다 많이 배우고 창의적이라 평가 받는다. 그래서 오히려 일부 젊은 남성들은 역차별이라 는 피해 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양극화된 취업 시장에서 극심한 경쟁을 겪고 있는 세대인 이들은 애매하게 끼인 세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그들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부모 세대 보다 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리고 이기적 인 기성 세대는 이런 젊은 층의 어려움을 최대한 이용 한다.

 

 

 

 

 

늙은 꼰대와 젊은 꼰대의 차이

 

늙어서 심심해서 한다는 꼰대 짓을 젊은 세대가 하고 있다. 강한 자기 확신으로 타인에게 일방적 주장을 펴는 점은 양 세대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세대 중 젊은 꼰대 역시 무엇보다 자신을 우선시 하며, 그 누구보다 자기 주장 이 강한 세대이다. 비록 모두가 앞으로 밝지만은 않은 경제 상황에서 살아 가고 있지만 나이든 꼰대들에게는 찬란한 전성기 시절 이라는 과거가 있다. 마치 젊은 꼰대들에게 작은 성취나 존재감만으로 주변의 박수를 받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던 것처럼. 앞에서 말했듯이 늙은 꼰대가 젊어서부터 꼰대 였던 가능성이 크듯이 유독 2000년대 이후 태어난 젊은 세대에게꼰대 문화가 나타나는 것이 그리 특별한 현상이 아닐 수도 있다. 한편, 같은 꼰대 일지라도 늙은 꼰대와 젊은 꼰대의 꼰대 짓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차이가 있다.

 

 • 늙은 꼰대는 자신보다 아래이거나 모자라다 고 생각하는, 특히 철없는 젊은 이들을 가르치려고 하지만, 젊은 꼰대는 위-아래 모두에게 자신이 우월하다 강조한다.

• 늙은 꼰대는 현실 어디에서나 흔하게 존재하지만, 젊은 꼰대는 가상 세계에서 더 자주 존재감을 보인다.

• 늙은 꼰대에게 꼰대 짓은 생활이지만, 젊은 꼰대에게 꼰대 짓은 놀이이다.

• 늙은 꼰대와 젊은 꼰대의 공통점은 돈 혹은 성공이 전부라는 속물적 근성이 강하다.

 

 

 

 

 과거 문화에 빠진 젊은 꼰대들

 

 

젊은 꼰대는 개인 정보 즉 연령과 성별이 드러나지 않는 온라인 공간에서 꼰대 짓을 한다. 기사를 읽다 쭉 내려 댓 글을 보게 되면 거기에는 자신은 이미 답을 다 알고 있다며 깔 보듯 훈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오프라인 세상에서 흔하게 보는 늙은 꼰대 짓이 온라 인 세상에서 벌어진 것 같다. 그리고 젊은 꼰대들은 자신들보다 더 어린 세대 혹은 같은 세대 위에 군림 하기 위해 지난 세대의 문화를 굳이 즐기기도 하는데, 바로 정치와 음악이다.

무료한 노인들이 지하철 1호선 종로3가역 1번 출구를 통해 탑골 공원으로 모일 때, 젊은이들은 이른 바 온라인 탑골 공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SBS는 동영상 플랫폼을 통해 과거 프로그램인 인기가요에서 방송되었던 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 영상을 올렸고, 이어 그 가수들의 노래를 기억하는 세대와 처음 접하는 세대 모두에게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해당 채널은 개설 후 구독자 수 18만 명을 넘어섰다. 해당 채널에서는 실시간 채팅이 가능하여 영상에 출연 한 가수들이나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지는데 그 채팅 창에 쏟아지는 이야기를 통해 젊은 꼰대들은 논리를 뒷받칠 자료를 보충하기도 한다. 최근 레트로 열풍이 불면서, 온라인 탑골 공원 가요의 인기가 레트로 문화 소비의 한 형태로 읽히기도 하나, 젊은 꼰대들은 예전 세대의 가요를 보고 들으며 이 가요를 모르는 더 어린 세대, 혹은 이런 가요에 대해 잘 모르 는 사람들과의 선 긋기를 시도한다.

젊은 꼰대들은 사회가 양분되는 이념의 대립에 흥미를 느끼며 과거의 정치 문화에 대해도 관심을 가지고 지식 주워 담기를 하는데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 방향에 대해 주목하기보다는 과거 정치권에서 인기를 끌었거나 자극적인 선동을 했던 정치인과 정치 사건에 관심을 보인다. 나이 먹은 정치인들이 과거의 정치 사례를 마치 역사 속의 교훈인 양 인용하고자 하는 데 과거 정치인의 이름을 인용하거나 주요 사건을 들먹이며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민주 정치사를 제대로 관통해서 이해 한다면 앞으로의 흐름 역시 다양성의 확대와 약자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 생각하는 것이 당연 하나, 꼰대들은 자신의 논리 보충을 위해 부분 지식 조차 선택적으로 차용 한다. 어떤 정치 사건의 전후 맥락과 배경에 대한 충분 한 이해 없이 단편적인 이해는 또다시 그러한 사건이 반복되는 실수를 예고한다. 이는 기성 세대의 잘못으로, 기성세대에게서 배울 것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데서 왔다. 거저 얻은 권리가 없듯 희생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하지만, 농부가 어리석어 보이면 맛있는 열매 조차 햇빛 만 쬐면 저절로 열리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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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언인가 꼰대 짓인가

 

교과서에 기술된 지식이 아닌 실제 현장에서 쓰이는 노하우를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선생 혹은 선배 노릇 이라고 긍정적으로도 볼 수 있는 꼰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꼰대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와 상대방에 대해 존중이 결핍되어서 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 먼저 겪어서 좀 더 잘 아는 사람이 잘 모르고 처음 겪는 이에게 무언가 알려 주려고 할 때, 도움을 달라는 요청이 없었음에도 기다리거나 참지 못하고 먼저 알려 주려는 것을 꼭 선의로만 볼 수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첨부되는 너 잘 되라고 하는 소리 가 진심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스트레스 풀 듯, 묵은 말을 배설할 기회를 찾는 경우라면 먼저 상대방에게 양해와 동의를 구해야 함이 마땅하다.

누군가 먼저 조언을 구하는 경우에 있어서, 조언이 필요한 사람이 알고자 했던 부분에 대해서 도움을 받는다는 느낌 보다는 묻지도 않았던 불필요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조언을 하려고 하거나 사적인 영역까지 침범 하려 한다 라는 느낌을 주는 것은 꼰대가 독단적 이고 독선적인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 같아도 결국 세상 원리는 똑같다고 우긴다.

정작 질문자가 알고 싶어하는 답을 꼰대는 잘 모르 는 경우가 많다. 교사가 학생을 가르칠 때에도 어린 학생의 가치관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존중하고 본인이 전지 전능하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교사라고 전지 전능하지도 않을 뿐 더러 교사의 조언으로 인해 학생 에게 생기는 결과에 교사가 모든 책임을 지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깨우친다 는 것은 누군가의 가르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깊은 사고와 성찰에서 오는 것이다.

성인 간에 어떤 조언을 할 때 누가 누구를 가르치려 는 태도, 특히 타인의 삶의 전반에 대해 지적을 하려는 태도는 아주 조심해야 한다. 지난 경험에서 단지 운이 좋아서, 혹은 우연하게 작은 성공이라도 맛 본 사람은 과도한 자기 확신에 차기 쉽다. 경제가 급성장했던 베이비 부머 세대가 어쩌다 취업하고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온 것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 때문이라 과대평가를 하기 시작하며 꼰대가 된다. 물론 부머 세대의 노력은 지금 세대에게도 큰 밑거름이 된다. 그러나 경제 발전 에 따른 전체의 성공에 기댄 결과를 자신이 남달라 특별하게 이룬 것이라 해석을 하면 지나친 자기 확신을 가지게 되고 상대방 특히 다음 세대가 나태하다는 비난으로 이어가기 쉽다. 그래서 자신들의 투기는 투자 가 되고, 기득권은 보수 성향으로 포장된다.

꼰대의 나 때가 말하는 자신의 의욕 넘치는 초보 였던 시절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왕년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꼰대의 설교는 정확히 일방통행 한다. 꼰대 짓에는 언제나 자기 중심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발현 된다. 예전의 나는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고, 간혹 실수를 했더라도 금새 다시 배우고 바로 해내는 능력 자였다고 근거 없이 주장한다. 동등한 지위를 가진 상대방과의 대화 라기보다는 질문을 허용하지 않는 목사의 설교 같은 일방 통행적 주장이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벌어진다. 아마 이 꼰대라는 단어가 생기기 이전에는 노년뿐만 아니라 모든 중장년층이 꼰대였기 때문에 따로 지칭할 필요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세상 이 조금씩 바뀌며 젊은 세대의 말을 경청하는 꼰대 같지 않는 기성 세대가 나타나고 꼰대가 적은 조직이 잘 굴러가는 모습을 보며 그 특징을 세분화하고 조롱 하는 표현이 등장한 것이다. 한국 사회 어디서나 흔 하게 보이는 꼰대는 어쩌면 누구나 내면에 가지고 있는 이기심 혹은 자기 중심적인 성향의 필연적 발현일 수도 있다.

어느 정도 개인적, 사회적 성취를 이룬 나이든 사람 이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경험이 부족하다고 보이는 젊은 사람들에게 대방출하는 것을, 초보가 반드시 저지르고 지나오는 실수를 줄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언하거나 불필요한 실수를 피하는 법을 알려주는 꽤 고마운 도움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 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러한 것이다. 그런데 꼰대는 누구의 요청이 없어도 꼰대 짓을 시작한다. 눈치도 없는 것이다. 대가성이 없다고 주장하나 이미 꼰대 짓 을 허용한 순간이 바로 대가를 지불하고 있는 것이 된다. 아까운 시간과 관심을 꼰대에게 지불했으니 말 이다.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인 회의가 고위직의 잔소리 혹은 지시 사항 전달 시간으로 허용되는 순간 을 꼰대는 바로 포착하고 꼰대 짓을 시작한다. 일방 통행적 대화를 하는 꼰대와 의 관계는 진실할 수 없다. 꼰대의 설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게 될 뿐이며, 그 수직적 관계를 유지할 이유 나 가치가 사라지면 더 이상 꼰대를 위한 무대는 존재 하지 않는다. 외로움을 호소하는 노인은 신세 한탄을 하기 전에 자신이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타인과 건강 한 관계를 맺어 왔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엉뚱한 자기 확신에 찬 사람들은 자제력을 잃고 상대의 모든 부분에 대해 자신의 기준으로 지적 하고 호통치고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바로 잡으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젊은+꼰대

 

우리가 사회에서, 특히 직장에서 만나는 꼰대는 아주 전형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흔히 말이 안 통한다는 기성 세대를 칭하는 꼰대는 이런 식으로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하라면 하는 것이었어.”, “어디 말대꾸를 해?”, “나 때는 말이야, 이거라도 주면 감사 하다고 냉큼 받았어.”, “어디 의견을 갖다 붙여?”

나이 먹은 꼰대를 한 성숙한 존재이자 열린 마음의 사회 구성원으로 만드는 것을 이제는 포기하자는 여론 은 어느 정도 굳어진 것도 같다. 저렇게 평생을 살아 왔는데 지금 와서 바뀌겠냐며 무의미한 기대는 그만 하자고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이 드는 한 가지는 그들은 이미 젊어서도 꼰대였거나 꼰대를 선망했다는 점이다.

세대를 뭉뚱그려서 요즘 것들은 못 써라고 단순 하게 젊은 세대를 비난 하거나, ‘늙으면 집에 있어라는 늙은 세대를 향한 단순한 비난도 여전히 존재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제 충분히 다양해졌으며 구성원 제 각각이 다른 속도로 발전해 나가고 있어 단순하게 태어난 연도 만으로 세대간 문화를 구분 하기는 어려워졌다. 다시 말하면 단순 시간적 구분에서 복잡한 시간 공간적 구분으로 입체화 되었다.

세대적 특성으로 분류되었던 부류가 세대 간에 걸쳐 존재하거나 다른 요인으로 새롭게 분류되기도 한다. 과거 세대라 구분되는 특징이 공교육과 같은 사회적 환경에서 온 것이라 본다면, 과거에 비해 삶에 있어서 다양한 선택지가 생겨나고 출발선 상에서부터 좁히기 힘든 격차가 벌어지며, 또 선택적 편향성에 빠지거나 그들만의 문화에 몰입하는 등 젊은 세대도 같은 세대 안에서도 다른 양상을 보일 수 있다.

미디어와 기술 발전, 세계화 등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제한되었던 것이 걸림돌이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많은 정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공개되고 있고 개인이 얼마만큼의 정보를 이해하고 받아 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 즉 정보의 양과 질을 개인이 선택해야 하는 새로운 걸림돌이 생겼다. 미디어는 인공 지능을 핑계로 편향성을 부추기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30살이 되기 전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살던 시대에서 40대 혹은 50대에도 초혼을 하기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대학 졸업 이후 더는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사람과 직업과 상관 없이 계속해서 책을 읽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사람이 한 시대 안에 존재한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도 각자 주어 진 환경과 개인적 여건과 의지에 의해 각자 다른 시대 를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젊어서 나름 개혁적이었으나 나이 들면서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고, 젊어서는 별 생각 없이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외로움이 싫어 소속감을 찾고 또 사회적 관심을 받고자 극우 집단에 빠지기도 한다. 이념을 떠나서 당장 눈 앞에 주어지는 아무 기회라도 붙잡아 사회적 경력의 뿌리를 내리고 싶은 젊은이들도 이런 가치보다 이익을 따르는 행동을 따라 한다. 꼰대 건 무어 건 간에 말이다. 꼰대는 세대간 가치의 문제 라기 보다는 타인에 대한 공감력의 문제이다.  

이렇게 한 세대를 하나의 정의만 묶는 것이 불가능한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젊음과 꼰대가 결합한 젊은 꼰대가 출연하였다. 

젊은 꼰대는 이러한 늙은 꼰대가 가진 특성을 답습 하여 늙은 세대와 같은 세대이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 들, 그리고 더 어린 세대를 향해 전 방위적 꼰대 짓을 한다. 온라인 댓 글을 통해 개인적으로 꼰대 짓을 하거 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베스트 글 혹은 베스트 댓글에 선정되기를 원한다. 유튜브를 통해 더욱 자극적인 주장을 펼치고 때로 가짜 뉴스를 마구 퍼뜨린다. 대부분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보이 지만 이들은 집단 따돌림 성격을 보이기도 하는데 자신 들과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거나 그들만 의 서클에 발을 들이는 약한 사람을 집단 공격하며 그들 의 권력을 뽐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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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온 젊은 꼰대인가?

 

 

꼰대 라는 말이 젊다는 말과 결합하기 전에도 사람들은 꼰대 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는데, 꼰대는 주로 권위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나이든 남성, 아버지나 선생 등을 조롱하는 표현이었다. 그들은 상대방을 함께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훈계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상대방이 동조 외에 다른 의견을 제시 하는 상황을 용납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그래서 꼰대는 조용히 자신의 훈계를 수첩에 받아 적는 사람 을 아주 좋아한다.

함께 직면한 문제에 대해 각자 생각한 최선의 해결 책을 제시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오로지 자신의 경험만을 내 세우고 권위를 사용해 우기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조롱하는 단어가 꼰대이다. 꼰대는 라떼 라는 단어와 함께 등장하기도 하는데, 라떼는 말이야 (Latte is horse). 라는 말은 꼰대들이 훈계를 시작할 때 등장하는 나 때는 말이야를 비꼬는 말이다. 그리고 꼰대와 비슷한 의미로 틀딱·; 틀니한 노인을 비하하는 단어가 쓰이기도 한다. 

유교에서 온 가부장제 문화와 군대 문화가 결합하여 뿌리깊은 성차별과 나이 위계 질서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자신 만의 경험을 축적하며 고지식한 꼰대가 되는 문화가 있었다. 나름의 사회적 경험을 충분히 쌓기도 전에 이미 충분한 경험치를 가지고 있다는 듯 행동하는 젊은 꼰대가 늘어나는 것도 유래가 없던 일은 아니다. 나이 들어 꼰대가 되기 쉬운 성향,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성격 은 젊어서부터 내재되어 왔었던 것이다. 사회적 관계 속 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과, 성인이 되고 난 이후 타인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는 과정을 지나쳐 버린 사람들은 작게 나마 움켜쥔 권력을 이용해 꼰대 짓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작년에 낯선 장소에서 분위기를 주도하는 법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집단주의 문화가 주도하는 우리 나라에서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 없이 두런두런 잘 지내고 적을 두지 않는 무색무취 공기 같은 사람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다 빠르게 인맥을 쌓아 여러 개 카톡 대화창을 가진 사람을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라 칭송한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수직적 인 조직 문화가 존재하는 직장에서 그 사회 생활이란 결국 피라미드 꼭대기 정점을 향해 집중될 수 밖에 없다. 사회 생활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면 잘하는 것 인데, 자신보다 위에 있는 사람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것으로 비틀려 해석 되고 있다. 역시 사람은 사람인지라 일방 통행적 관계는 필연적으로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그 스트레스를 다시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풀기 쉽다. 수직적 군대 문화가 그대로 답습되고 가부장적 사고 방식마저 그 자리 그대로 잔존하는 직장 문화는 변하지 않고 조직의 비효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것을 갑질 이자 꼰대 질이라 말한다. 권위주의적 꼰대 문화가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직장에서 이 풍자적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꼰대 KKONDAE

 

영국 방송사 BBC2 2019 7월 오늘의 단어로 소개한 꼰대 KKONDAE는 한국어 발음 그대로 영문 으로 표기되어 소개되었다. 영어에 꼰대를 번역할 적당한 단어가 없어 한국어를 그대로 사용한 단어인 꼰대  재벌 갑질에 이어 부정적 의미를 지닌 노-번역 한국어 단어로 인터넷 사전에 등재되는 불명예 를 얻었다.

주위에 이런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단어 소개를 시작한 BBC2 꼰대 자신을 항상 옳다고 믿는 나이 많은 사람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잘못 되었다고 확신함)”이라고 단어에 대해 설명했다. 전 세계 독자들은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고 공감하며 자신의 경험 속 꼰대에 대해 반응했다.

이들은 결혼한 후부터 내 남편이 바로 꼰대”, “바로 시모를 위한 글자”, “영어로는 나이 많은 남자”, “내 기억 속 꼰대는 바로 엄마”, “휴대전화 속 아빠의 이름 을 그걸로 바꿔야겠어”, “?” 등의 재미 있지만 뼈 있는 반응을 보였다. 추가적으로 틀딱이나 라떼 같은 한국 사회의 기성세대 비하 표현도 언급하며, 더 이상 꼰대가 한국 사회에만 국한된 단어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감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BBC2 꼰대를 소개하기 전에 한 해외 경제지에서 한국어 꼰대를 거들먹거리는 노인 (KKONDAE : The word for “condescending old person” in Korean) 이라는 뜻의 단어로 소개한 적이 있다. 해당 기사 에서는 꼰대를 젊은 사람들로부터 당연하게 복종을 기대하는 사람 혹은 타인은 즉각적으로 비판하면서 자신의 실수는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권위 에 불복종하는 사람에게 보복을 하는 사람 이라고 설명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나이와 성별, 직장 근무 년수에 따라 위계 질서가 악명 높다며 호칭이나 높임말 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비판했다. 이런 행태에 부당함을 느낀 젊은 세대들이 꼰대 라는 조롱하는 단어를 만들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고 설명했다.

 

 

 

OK, boomer’ 오케이 부머

 

해외에도 꼰대라는 말과 유사하게 기성 세대를 비꼬 고자 사용하는 단어로 부머boomer 라는 단어를 들 수 있는데, 이 부머란 2차 세계대전 이후 출생한 베이비붐 세대를 뜻한다. 해외에서도 부머 즉, 기성 세대를 꼬집어 조롱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2019 11월 뉴질랜드 의회에서 녹색당 소속 클로이 스와브릭 의원이 기후 변화를 외면해 온 기성 정치인을 비판하는 연설 도중 나이 든 의원들이 야유를 보내자 됐어요, 부머(OK, boomer)’ 라고 받아 친 뉴스 영상이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오케이 부머 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이후에 태어나 사회 경제 주류를 형성한 베이비붐 세대 가 젊은 세대를 향해 오지랖을 펼칠 때마다 젊은 밀레니얼 세대가 말 대꾸로 받아 치는 표현이다. ‘알았 으니 이제 그만해 라는 의미로 개인 SNS를 중심으로 퍼지던 이 유행어가 한 의원의 공개 석상에서의 발언 으로 정치 무대에 공식 등장했던 것이었다.

베이비 부머 세대가 과거 고속 성장을 통해 현재까지 움켜쥐고 있는 부를 더는 이어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회의감을 밀레니얼 세대가 느끼고 부머 세대를 향해 불만을 표현한다. 세계 경제가 성장적 한계에 다다랐 다고 느끼는 세대인 90년대 후반 이후에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는 이전 부머 세대가 가진 부와 그들의 기득권을 자신들은 차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거기에 반발하는 심리를 담아 더 이상 존경이 아닌 조롱의 부머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2020년 초반부터 전 세계 사회 경제 문화까지 일시 정지 시킨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 일부 층들은 이를 부머 리무버 라는 단어로 비유하며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년층을 향해 극단적인 조롱을 했다.

Boomer remover는 부머 세대를 없앤다는 뜻으로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주로 사망한 노년층을 부머로 표현하며, 부나 여론을 움켜쥐고 놓지 않던 부머 세대 를 향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공격하는 단어로 쓰였다. 부머 리무버라는 단어가 뉴스에 소개되자 우리 나라에도 으레 등장하는 패륜이나 너는 안 늙을 것 같냐는 빈정거림과 더불어 부머 세대가 스스로를 돌아 보아야 한다는 반성이 있었다. 노년층과 어울리지 않고 안 놀아 준다고 투정하기 보다는 이렇게라도 언급하고 놀아줘서 고맙다고 해야 한다고 하며,

, 알겠다. 밀레니얼 세대. 그런데 실제로 돈은 우리가 갖고 있지.” 라고 밀레니얼 세대를 되려 조롱 하는 발언도 있었다.        

이런 세대 간의 대결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부머 세대를 부모로 둔 밀레니얼 세대 혹은 그 앞뒤 세대는 부머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거나 부모의 재산을 충분히 활용하여 어떤 식으로든 삶에 이점을 보탤 수 있었다. 하지만 부머 세대 중 충분한 재산을 보유하지 못하여 상대적으로 자녀 세대에 도움을 제공하지 못하 는 부모에 대한 다음 세대의 불만이 삐딱하게 드러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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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연습

 

 

 내가 대학 시절을 보낸 90년대 말에 일부러 기성 세대를 흉내 내는 친구들이 있었다. 전에 없던 새로운 개성인 마냥 예전 세대의 말투나 단어를 따라 하고 스스로 올드해 보이려는 주변 친구들이 꽤 있었다.

당시는 연도 앞 두 자리가 19 에서 20으로 바뀌는 때로, 어느 종교 종말론자들의 휴거 소동이 생중계 되기도 했던 때였다. 새천년 무슨 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등장했고, 밀레니엄이라는 말이 등장하였으며 이제까지 세상에 없던 온갖 개성들이 등장했다. 문화가 전례 없이 다양해지기 시작했던 때였다. 남자 친구들이 연상의 누나와 사귀는 것이 더 이상 특이하지 않은 일 이었고, 마치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하지만 사귀는 사람을 오빠 라고 흔히 부르는 만큼 누나 라는 호칭을 쓰는 친구들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오빠는 오빠로 불렸지만 누나는 누나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마치 할아버지가 어린 손자 나무라 듯 어허라는 말을 버릇처럼 하며 또래 친구들의 행동을 제지 하는 이들도 있었고, “, 어디서!” 라는 말로 있지도 않는 권위를 장난스럽게 내세우려고도 했었다. 당시 급격하고 약간은 혼란스럽게도 열리고 있었던 새로운 문화 작용에 대해 반작용을 하는 듯 과거로 회귀하려 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불리어왔을 숨은 유행가를 발굴해내 자신의 대표 곡처럼 부르는 것이 유행하였다. 예전 세대들이 쓰는 비속어나 방언, 특히 일본어를 굳이 찾아내어 자기들만의 은어처럼 사용했고, 그들의 아버지 시절을 마치 자신들이 살아가는 듯, 과거 세대 의 특징을 따라 하고 흉내 내려고 했다. 자신이 특별 하고 남다르다는 어떤 존재감을 주변에 드러내고 싶었 지만 자신의 생각 속에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20대 초반의 내 친구들은, 따라 하면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면서 실제로 무언가 있을 것 같기도 해 보이는 과거의 가치를 비판 없이 차용 했다. 역사가 흘러 갈수록 그 중심의 차별성이 드러나 거센 비판에 직면해 위태롭게 흔들리는 남성주의 가부장제, 남성들만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특권처럼 누려 왔던 사회적 역사적 이른바 남성 리즈 시절에 대한 어떤 향수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시절 내 친구들 중 일부는 남성으로 태어나기만 하면 저절로 누리는 특권, 즉 질기게도 남아 있는 남아 선호 사상으로 특별 대접 속에서 키워지고, 성인이 되면서 집안의 지원과 자원을 독차지하며 비교 우위 에서 쌓아 가는, 어떤 막강한 특권과 권위를 몹시도 그리워하는 것 같아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정확히 무엇을 원해서 그런 행동을 따라 했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잘 몰랐었을 것 같다. 다만 본능적으로 아버지 세대가 누려온 혜택의 겉모습이 곧 아버지 세대가 될 자신들에도 결코 손해가 아니라 일종 의 상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나도 가끔 그들의 독특하고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따라 하기도 했고, 그들의 촌스런 노래에 박수를 쳐주기도 했었다.

너는 여자치고 공부를 못하잖아.”

졸업이 다가오면서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모여 앉게 되면 모두가 자연스럽게 취업 고민을 꺼내던 때 였었 는데, 그때 나에게 불쑥 들이 닥친 말이었다.

(오호 용감 한데!)

남자 치고는 성적이 바닥이었던 J는 취업이 다가오며 초조하고 걱정되었던지 눈 앞의 만만한 경쟁자 하나 라도 재쳐 보려는 시도였을까, 혹은 단순한 스트레스 해소였을까, 대담하고 무례한 발언을 나에게 내뱉었다. 지방 소도시 출신 이었던 J는 앞에 나서서 리더가 되려거나 주목을 받으려는 성격은 아니었다. 나름 배려 도 할 줄 알았고 프로젝트도 함께 충실히 수행하던 친구였다. 집안 장손인 자신을 아끼는 할머니 얘기를 종종 했었던 J는 고향 집에서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귀한 아들이었던 것 같았다. 나와 함께 어떤 프로젝트 를 준비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지만, 필요한 부분이 있을 때 서로 조언을 하거나 도움을 주고 받았 던 친구였었다고 나는 그를 기억한다. J의 무례한 발언을 옆에서 같이 듣고 있었던 친구들은 놀라는 표정 을 숨기지 못했고, 내 눈치를 보는 것을 나는 정확히 기억한다. 훅 들어온 펀치에 나는 잠시 정신을 잃을 뻔 했지만 앞에서와 뒤에서의 말이 다른 남자들을 하도 많이 보아온 탓에 J도 별 수 없는 못난 놈이구나 하고 여기며 이렇게 대꾸했다.

 

"그래서 뭐?”   

 

취업이나 시험 같은 절박한 문제에 닥치면 누구나 자신의 손익을 계산할 수 밖에 없고 당연히 스트레스 라는 것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당장 내 눈 앞의 경쟁자 가 지치기를 바라고 포기하기를 바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전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당장은 마음이 편해질지 몰라도 사실 아주 멍청한 저주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당시 각 학과에서 1등을 찍으며 남학생들 사이에서 용케 살아 남은 여학생들은 그나마 순조롭게 취업을 할 수 있었지만, 이도 저도 아닌 평범 한 이들의 취업은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시키는 믹스 커피라도 고분고분 타오지 못할 것처럼 눈빛 강약 조절이 안 되었던 (그들에게는 사나웠다) 나 같은 여성 에게는 취업의 문턱도 높았었지만, 취업 후에 찾아 올 험난한 가시밭길은 쉽게 예고된 것이었다.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나름 순수한 마음은 가졌던 J 가 우여 곡절 끝에 취업을 했고 지금도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 하고 있단다. 그 당시에 말을 꼰대 같이 했어도 자기 안의 꼰대와 끊임없이 싸우며 잘 살고 있기를 바란다.

종종 먼저 겪은 사람, 그 이름도 거창한 선배로서 후배 신입생에게 알려주고 고쳐 주어야 한다고 주장 하는 이들을 만난다. 그냥 실수하게 둘 수는 없다고 대단한 의무감을 가진 듯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관심 을 가지는 그 신입들의 실수는 정작 길러야 하는 실력 에 관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태도에 관한 것이었다. 이 태도란 결국 예의 보다는 서열을 말하는 것이었다.

말하기도 민망하지만, 선배라는 자신들을 향한 예의의 문제였다. 셀프 우쭈쭈를 받으려는 것이었다. 자신들만 의 울타리 안에서 이상한 논리에 의해 굳어 내려온 습관들을 후배에게 반드시 가르치고 계승해야 한다는 도저히 이해 못 할 이유를 대며 후배들을 긴장 시키는 선배들은 그다지 본 받을 만한 인격이나 성격, 능력을 가지지 못했었다고 기억한다.

또 장난스럽게 혹은 공격적으로 주변을 향해 있지도 않은 권위를 내세우려고 스스로 애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그 대상은 주로 후배나 만만한 동기였고 절대 힘 있는 상대를 향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정말 고립된 시골이나 과거 문화가 많이 남아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시대를 거스르는 듯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겠으나, 친구들은 그 당시를 그런 곳에서 살아 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옛날 옛적 시절의 남성 권위주의적 향수를 그리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나는 그것이 참 많이 아쉬웠다.

그들에게 과거에 대한 향수, 권위는 저 멀리 우뚝 선 침해 불가한 권력을 의미하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또래 안에서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한 이유 역시 자존감이 낮았던 데 있었을 것이다. ‘어허라고 외치면 서열 앞 쪽에 설 수 있을 것이라는, 어쩌면 거저 얹을 수 있는 기대감에 차 올랐고, 결국 다수의 누군가는 다시 서열 아래를 채워야 한다는 불평등한 사실에 대해서는 외면 했다. 자기만 살아 남으면 그만인 것이었다.

일부의 특성으로 존재하던 것이라 생각하던 그 때 이 후 그런 특성을 보이는 사람들이 사회에 점점 많아지고 그들의 존재감이 선명해지며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등장 했는데, 이른바젊은 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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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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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 봐가며 꼰대 짓 하는 젊은 꼰대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알게 된 사람들 중에 아주 특이한 사람이 한 명 있다. (결혼 후 알게 된 사람들이 거의 다 특이하기는 하다.) R과 내가 비슷한 처지 였음에도 서로 불편한 관계였던 이유가, 지나고 보니 R이 온갖 꼰대 질을 유독 나를 향해서만 해댔던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R은 주위 사람들에게 비위를 맞추는 것이 습관이었던 사람으로 내가 지금까지 만났 던 모든 이들 중 최고의 아첨꾼이다. R은 상대방에게 밑도 끝도 없이 듣기 민망할 정도의 칭찬을 해대기가 입에 배었던 사람 이었다. R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도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하기까지 한 칭찬 세례를 했었다. R은 처음 만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자주보는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갑작스런 외모 칭찬부터 성격 칭찬까지 듣기 민망할 정도로 아부를 해대었는데, 그 아부는 과장을 넘어서 거짓말에 이를 정도가 많았다. 가게에서 점원이 고객에게 당장 무언가를 팔기 위해 하는 칭찬도 과장이 지나치거나 과도하면 거북하고 불쾌하다. 칭찬 이면에 숨은 다른 속셈이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R의 가식적인 칭찬이 정말 본심인지 궁금했고 그렇게까지 상대가 거북할 정도로 칭찬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했다. 그러다가 점차 시간이 지나면 서 칭찬 세례가 자신에 대한 자랑질과 나를 향한 꼰대질로 점차 바뀌었는데, 내가 찾아낸 이유는 이랬다.

꼰대 R이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나에게까지 그렇게 칭찬을 해 주었는데도 나로부터 되돌아오는 반응이 시원치 않다 느꼈던 것, 그리고 R의 관점에서 서열의 끝인 나한테까지 더 이상은 위선적인 아부를 해대기가 싫었던 두 가지 이유였다고 나는 짐작한다. R이 주변 사람들에게 아부를 해대는 것만큼 자신도 그 만큼의 아부 서비스를 나로부터 누려 보고자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얼마 못 가 완전히 상반된 행동을 시작했는데, 결국 R은 내 앞에서만큼은 아부를 완전히 중단하고 숨겼던 본심을 드러냈다. 그의 본심은 아부 대상이었던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었고 짜증이었으며 뒷담화였다.

R의 목적이 본인을 통해 정확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간신히 찾아낸 이유는 바로 이 것이었다. R은 결혼으로 맺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들에게 맹목적으로 잘 보이고 싶었고, 또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서 오는 여러 상황적 억울함과 뒤따를 비난 등을 피하고 싶었던 목적이었다고 추측한다. 거기에 내가 모르는 어떤 거래가 오래 전부터 그들의 관계 속에서 있었음이 확실했다. 가식적인 아부가 몸에 배었던 R은 그렇게 아부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듣기 싫은 잔소리와 비난을 피하고 나름 영리한 방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기어이 해오면서 살아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분을 맞추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주도할 줄 아는 자신의 사회성이 대단하고, 자신이 아주 사교 적인 능력자 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했다. 아쉽게도 아무도 R의 그런 애씀을 인정하거나 추켜 세워 주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겸손한 척도 하려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부 세례를 일상적으로 받아 온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R의 립 서비스를 즐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R에게 그다지 특별 배려를 해주는 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R을 덜 비난하고 조금은 친절하게 대하려고는 할 때도 있었 지만, 의미 없는 칭찬에 익숙해져서 인지 사람 봐가며 함부로 타인을 대하는 그 집단 전체의 원래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R은 애써서 헛수고를 한 것이다.

그런 R이 내가 아부에 낚이지 않자 언제부턴가 내 앞에서 일장 연설로 꼰대 짓을 시작했다. 내가 R 의 마음에 들게 행동하지 않고 소위 싸가지가 없다며 비난했다. 나는 R에게 아무 것도 묻지도 않았고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 의견을 구하지 않았는데도 언제나 혼자 시작하던 R의 일장 연설의 배경에는 너는 나 보다 한참 모자라다는 설정이 깔려 있었다. 나와 고작 몇 살 차이 밖에 나지 않았던 R은 그의 말 만 놓고 보면 R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겪었고, 누구보다 도 다양한 인맥을 보유하였으며, 세상의 모든 기막힌 묘수와 노하우는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참 어이없게도 R이 가장 강력하게 나와 비교 우위에 있음 을 강조하는 근거는 바로 돈이었다. 자신이 나보다 돈을 많이 벌고 재산이 많기 때문에 R에게 있어서 나는, R의 조언을 넘어선 생명수 같은 설교를 새겨 들어야만 하는 사람이었다.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에 두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겉으로는 돈이 전부가 아니 라고 부정하는 척 하며 돈과 물질을 추구하고 집착 하는 모습을 숨기려고 하지만 금새 들통이 난다. 이런 속물 허풍쟁이는 나 같이 말보다 행동에 주목하는 사람을 만나면 바로 발각되기 쉽다.

어디서 상을 치렀는데 집안 싸움이 나서 누가 얼마를 챙겼네 하며 돈 때문에 벌어진 흔한 이야기를 어디서 듣고 와서 나에게 구구절절 이야기하는 ‘R보다 서열 높은 사람 S’를 향해 직접 비난을 하지 못했던 R, 대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만만한 나를 향해 너 돈 밝히면 안 된다. 남의 돈이 다 네 건 줄 아냐, 그렇게 살면 안 된다!’ 며 갑자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 순간 세상 황당했던 나는 그 날에서야 R의 밑바닥 꼰대 모습을 낱낱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던 그 나이만 많던 높은 서열 S’화난 꼰대 R’S 자신이 아닌 나에게 버럭 화를 내자 내 눈치만 살피며 더 이상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모두 나이만 많고 못난 사람들이 모인 곳이 된 이유와 어디서부터의 책임인 지를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내가 반복된 경험으로 안 것은, R은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아부와 거짓말을 했고 오로지 나 에게만 솔직했다는 것이다. 꼰대R이 하는 이상한 행동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는 계속 R을 마주 쳐야만 하는 관계에 지쳐 갔었고, 그래서 한 번 R을 이해해보고자 심리 관련 책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자신 보다 서열이 높은 사람, 즉 잘 보여두면 여러모 로 유용한 권력을 쥔 자에게 기회만 있으면 비위를 맞추고 가식적인 칭찬을 남발하고 마치 보험처럼 관계 를 설정해두려 하지만,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사람이나 이용 가치가 없어 보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솔직함 을 넘어 예의 없이 행동하는 R의 심리가 무엇 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멀리도 아닌 내 근처에 있었던 그 꼰대R은 칭찬이나 비난 모두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 으로 사용하는, 눈치가 빠르고 아주 계산적인 사람이었 고, 사람들을 잘 다루는 방법인 칭찬과 비난, 둘 다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었다. 타인의 가치관이나 성격, 기호 등을 눈치 빠르게 파악하여 이를 서로간 관계 발전을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오로지 자신에게 유리 하게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었다. 타인에 대한 아무런 공감 없이 오로지 어떻게 이용하면 자신에 유리할 지만 계산하는 사람이라고 밖에, 나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가 없었다.

R이 함부로 대해도 별 문제가 없어 보이고 실제로 아무 권력도 없었던 나에게 마구 스트레스를 풀어 대었던 이유 역시 결국 R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였다. 마음에도 없는 칭찬을 하는 것이 입에 착 붙어 습관이 되었어도 타인 눈치 보기, 비위 맞추기 같은 감정 소모 는 R에게도 역시 스트레스는 스트레스였던 것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눈치를 보며 살아야만 했던 R이 처한 상황이나 성장 환경이 짐작 가기도 했다. 나름 절박 했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성찰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많다고 으스대는 R이 제공하는 아부와 혜택을 당연 하다는 듯 즐기는 S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R 보다 더 사악해 보이기도 했다. R은 이미 다 자란 성인으로 서 스스로 깨닫고 성장해야 하는 부분은 외면하고 오로지 눈 앞의 이익 만을 계산하고 순간적 불편함을 모면하며 살기에 급급한 안타까운 사람이었다. R에게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란 진심을 공유하며 멀리 보고 계속 함께 가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처리해야만 하는 고객센터 전화 항의 내용 같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의 권력자에게 아부와 가식적인 칭찬을 탁월하게 잘 하는 이 꼰대R’을 칭찬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제 있었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이 떨어지는 이기적인 사람들은 입 안의 혀처럼 구는 자를 앞에 두고 싫다는 내색을 하기 힘들다. 또 공감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왜 그들이 아부를 하는 지에 대해서조차 깊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물론 아부에 대해 충분한 대가를 쳐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은 끊임없이 주변에 칭찬 을 남발하고 그렇게 하는 자신을 자화자찬했다. 수 십 개의 미끼를 던져서 단 몇 마리라도 잡아 보려는 마음 이었을까.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던 이해 못 할 점 은, R은 사람들의 면전에 대고는 그렇게 아부를 하고 듣기 민망할 정도의 칭찬을 쏟아 내지만 뒤돌아 서서는 바로 방금했던 말과는 완전히 다른 소리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뒷담화를 하지만 R은 앞 뒤 말 전환이 아주 빠르고 대담하고 익숙했으며 내가 만났던 세계 최강으로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유독 만만한 나에게만 속마음을 보이고 아무렇지 않게 양면성을 드러내었던 R을 나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었다. 어떤 것이 진심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얼굴을 가졌던 R의 그 어떤 말도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었다. 눈치 빠른 R도 자신을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 보고, 자신이 영혼까지 털어 애써 칭찬 아부 잔치를 벌이는 동안 맞장구를 쳐 주기는커녕 모른 척 하고 있는 나를 싫어했다. 그래서 만만한 나 에게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했던 것 같았다. R이 진심을 담아 주변 사람들을 칭찬한다 라고 내가 느꼈 더라면 나는 그를 한결 같은 사람, 인상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바로 다른 소리를 하는 R 을 보며, 언젠가 내 앞에서 굳이 안 해도 되는 칭찬을 던지고는 뒤돌아서 전혀 다른 본심을 드러냈을 R을 상상하니 아주 불쾌했다. 그래서 아부 잘 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 앞에서는 웃지만 언제 등에 칼을 꽂을지 모르기 때문 이다.

처음에는 뭐지? 하며 당황했지만 지나고 보니 젊은 꼰대는 이렇게 내 근처에 아주 가깝게 존재하고 있었 다. 상대를 잘못 골랐던 R에게 나는 더 이상 대화할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다. R의 말대로 ~참 윗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고 굳이 생각해서 해주는 말씀을 감사하게 잘 들었더라면”, 다시 말해 내가 생각을 고쳐 먹고 R의 꼰대 짓을 적당히 받아 주었더라면, “약간의 금전적 물질적 혜택이라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며 R은 나를 향해 답답하다 혀를 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답답한 사람은 내가 아닌 R이었다. 자신의 있는 그대로 모습이 아닌 가면까지 써 가며 애써 타인에게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어야 비로소 자신 의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고 살아온 R의 삶 은 안타깝기도 했지만,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이기적인 처세의 부끄러운 민낯을 R을 통해 적나라하게 느꼈다. 끊임없이 주변 사람으로부터 얻을 이익과 혜택에만 관심을 두었던 R, 아부가 통하는 사람들과 여전히 어디선가 돈 잘 벌고 살고 있을 지는 모르지만, 돈 외에는 중요한 가치가 없어 보였던 R 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았을까 궁금하다.   

나이 든 꼰대는 아무에게나 꼰대 짓을 벌이고 세상 전부를 우습게 여기는 듯 보이나 젊은 꼰대는 아무 에게나 꼰대 짓을 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의 위와 아래로 분류하고 구분하여 막 대해도 손해가 없을, 만만하고 적당한 대상을 찾아 꼰대 짓을 저지른 다. 서열 속에 스스로를 가둔 꼰대에게는 꼰대 짓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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