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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라비 작가가 책을 하나 내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려는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했다. 뽑힌 꼭지들이 일부러 독자들의 자극적인 관심을 유도하려 했다는 것이 아님을 기사전체를 읽어보면 알 수 있었다.
책은 보지못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터뷰 내용을 보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사회운동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회운동가가 있다. 약자를 돕는 사람이었을까?
이 기사는 당일 80퍼센트의 20대 남성이 그의 의견을 환영한다는 댓글을 달았고, 이는 20대 여성의 불편함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쓸만한 부분을 찾아내려 보았더니, 혐오보다는 연대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을 건질 수는 있었다.
혐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혐오는 문제가 세상에 터져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감정이고, 그 혐오의 의미와 이유를 이해해보려는 시도 불러오는 과정이며,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혐오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세라비 작가는 워마드 사이를 3년정도 들락날락 거렸던 것 같다. 어느 카페나 어느 게시판이건 따뜻하고 건전하고 지향점이 바른 곳은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냥 감정을 쏟아내고 떠나거나, 꾸며낸 이미지를 자랑하고 가는 곳이 현재 인터넷상 커뮤니티의 모습이다. 배출의 공간이라는 것만으로 족한 공간이며 문제를 공론화하고 타인의 어려움을 돕는 긍정적 역할은 일시적, 극소적이다.
워마드 게시물의 포르노적 행태에 대해 누구나 비난한다. 그럼 수천배나 수만배 비교도 안될 정도 많은 남성회원 사이트의 프로노 게시물에 대해서는 왜 언급을 하지않나? 남성의 폭력성과 성적 집착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까? 다 그렇지않다고? 그러면 미투를 말하는 여성들은 다 워마드 가입자인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도덕적이어야하나?
여성에게 더 높은 요구와 희생을 강요하는 남성중심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오작가의 태도가 딱 보이며, 이미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포기하고 사는 여성들을 다그치는 시모같아 보일 뿐이다.
그의 인터뷰중 우리가 이미 충분히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과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자는 말은 부딪힌다. 이미 충분히 평등한데 점진적이건 급진적이건 변화는 왜 하나?
이미 충분히 좋은 세상이라는 말은 항상 누군가 해오던 말이고 이는, 기득권층의 권력유지, 그리고 권력에 기대어 아주 작은 권력이나마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레퍼토리일뿐이다.
타인의 희생을 깔고앉아 누리는 작고 작은 권리가 바로 편견이고 차별이며 꼰대짓이다. 가정의 실제 수입을 담당하든 안하든 남성은 가정에서 군림하며 만족을 느껴왔고, 평생 남성들에 억눌려살다 며느리를 맞은 여성은 막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며느리를 부리며 만족해했다. 모두 옛날 이야기라고? 글쎄... 아닌데? ㅋ
오 작가의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꼰대스러움은, 지금보다 훨씬 답답하고 무서웠을 시절을 살아왔을 그의 과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으로 읽혀진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는 소리를,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바라보며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책임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다. 강력 성범죄가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성범죄를 사회 성차별구조와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문제 또한 절대 아니다.
범죄자는 늘 죄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리다 시도한다. 특히 성범죄자는 생계형 절도같이 감안해 줄 절박한 이유조차 없다. 오로지 그들의 낮은 도덕성과 이기심으로만 처벌해야한다.
오 작가가 질려하는 여성들의 나약한 태도나 연대하기 힘든 성향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의 말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주류에서 배제할 때 쓰는 전형적 수법이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할 때 등장하는 야비한 수법이다. 그것이 바로 오 작가가 지양하자는 혐오이다.
완전한 평등에 닿을 미래의 어느 순간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 여기 한국은 아직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가정에서부터 성차별을 당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편견에 순종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늘 분노하기란 불가능하며 어느순간 길들여지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물론 때로 분노했겠지만 평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온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에 적응했고, 분노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않으며 예전에 당했던 불평등과 불합리를 언젠가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은 소수다. 그 소수가 바로 사회운동과 같은 약자를 위한 일해야하며, 월급이 필요한 평범한 이들은 자기 인생만 바라보고 살기를 바란다. 시대를 넘어 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꼰대같은 당신은 괜찮아도 아직 분노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사진보니 60대인듯...
책은 보지못해 어떤지는 모르지만 인터뷰 내용을 보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졌다. 사회운동가?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회운동가가 있다. 약자를 돕는 사람이었을까?
이 기사는 당일 80퍼센트의 20대 남성이 그의 의견을 환영한다는 댓글을 달았고, 이는 20대 여성의 불편함으로 해석된다.
그래도 쓸만한 부분을 찾아내려 보았더니, 혐오보다는 연대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것을 건질 수는 있었다.
혐오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혐오는 문제가 세상에 터져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수반되는 감정이고, 그 혐오의 의미와 이유를 이해해보려는 시도 불러오는 과정이며,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혐오가 목적이 아니라는 얘기다.
오세라비 작가는 워마드 사이를 3년정도 들락날락 거렸던 것 같다. 어느 카페나 어느 게시판이건 따뜻하고 건전하고 지향점이 바른 곳은 한번도 본 적 없다. 그냥 감정을 쏟아내고 떠나거나, 꾸며낸 이미지를 자랑하고 가는 곳이 현재 인터넷상 커뮤니티의 모습이다. 배출의 공간이라는 것만으로 족한 공간이며 문제를 공론화하고 타인의 어려움을 돕는 긍정적 역할은 일시적, 극소적이다.
워마드 게시물의 포르노적 행태에 대해 누구나 비난한다. 그럼 수천배나 수만배 비교도 안될 정도 많은 남성회원 사이트의 프로노 게시물에 대해서는 왜 언급을 하지않나? 남성의 폭력성과 성적 집착에 대해서는 왜 입을 다물까? 다 그렇지않다고? 그러면 미투를 말하는 여성들은 다 워마드 가입자인가? 여성이 남성보다 더 도덕적이어야하나?
여성에게 더 높은 요구와 희생을 강요하는 남성중심문화를 그대로 수용하는 오작가의 태도가 딱 보이며, 이미 많은 부분을 양보하고 포기하고 사는 여성들을 다그치는 시모같아 보일 뿐이다.
그의 인터뷰중 우리가 이미 충분히 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과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자는 말은 부딪힌다. 이미 충분히 평등한데 점진적이건 급진적이건 변화는 왜 하나?
이미 충분히 좋은 세상이라는 말은 항상 누군가 해오던 말이고 이는, 기득권층의 권력유지, 그리고 권력에 기대어 아주 작은 권력이나마 유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레퍼토리일뿐이다.
타인의 희생을 깔고앉아 누리는 작고 작은 권리가 바로 편견이고 차별이며 꼰대짓이다. 가정의 실제 수입을 담당하든 안하든 남성은 가정에서 군림하며 만족을 느껴왔고, 평생 남성들에 억눌려살다 며느리를 맞은 여성은 막 대할 수 있는 유일한 며느리를 부리며 만족해했다. 모두 옛날 이야기라고? 글쎄... 아닌데? ㅋ
오 작가의 인터뷰에서 느껴지는 꼰대스러움은, 지금보다 훨씬 답답하고 무서웠을 시절을 살아왔을 그의 과거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으로 읽혀진다.
이미 충분히 평등하다는 소리를, 이제 노년기에 접어들거나 바라보며 이 사회를 이렇게 만들어놓은 책임있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니다. 강력 성범죄가 이렇게 많이 일어나는 사회에서 성범죄를 사회 성차별구조와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문제 또한 절대 아니다.
범죄자는 늘 죄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리다 시도한다. 특히 성범죄자는 생계형 절도같이 감안해 줄 절박한 이유조차 없다. 오로지 그들의 낮은 도덕성과 이기심으로만 처벌해야한다.
오 작가가 질려하는 여성들의 나약한 태도나 연대하기 힘든 성향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그의 말은 남성들이 여성들을 주류에서 배제할 때 쓰는 전형적 수법이고,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할 때 등장하는 야비한 수법이다. 그것이 바로 오 작가가 지양하자는 혐오이다.
완전한 평등에 닿을 미래의 어느 순간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이곳 여기 한국은 아직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오 작가는 어린시절부터 가정에서부터 성차별을 당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생존을 위해 자연스럽게 편견에 순종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늘 분노하기란 불가능하며 어느순간 길들여지는 것이 보통의 사람들이다. 물론 때로 분노했겠지만 평생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살아온 남성중심적 사회구조에 적응했고, 분노는 잊어버렸을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잊지않으며 예전에 당했던 불평등과 불합리를 언젠가 바로잡으려는 시도를 하는 이들은 소수다. 그 소수가 바로 사회운동과 같은 약자를 위한 일해야하며, 월급이 필요한 평범한 이들은 자기 인생만 바라보고 살기를 바란다. 시대를 넘어 사는 일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꼰대같은 당신은 괜찮아도 아직 분노할 수 있는 열정을 가진 내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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