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매주 촛불이 켜지는 이유는 참 무겁고 심각하다. 하지만 촛불을 켜든 많은 이들은 애써 심각함을 누르고 광장에서의 시간을 즐기려한다. 카페에 잠깐 앉아 거리의 시민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외식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당장 해결되지 않는 다고 조급해하거나 노골적인 감정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봐야 오히려 민주주의 아마추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제되면서도 목적이 분명한 촛불광장문화는 우리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뿌듯하게 생각한다.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태극기집회도 점점 커지는 듯하다.  그들도 나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해서 모인다고 믿고싶지만, 나라가 곧 박근혜라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집회장소에 나부끼는 수많은 태극기와 함께 펼쳐진 대형 성조기와 십자가의 연관성도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번 탄핵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
대다수가 내용을 잘 모른채 그저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그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추억의 컨서트장에 나온 듯 지난날 익숙했던 문화를 꺼내어 즐기는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받았던 반공교육,  이웃 동료들과 함께 불려나갔던 관제데모, 정부에서 미는 후보를 그저 찍어주었던 거수기 투표, 주한미군을 통해 엿보았던 미제에 대한 선망, 교회다니면 세련된 계층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등 지난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았던 그들의 현역 시절 문화를 다 꺼내어 서로 나누는 장이 바로 태극기 집회가 된 것이다. 그들은 집단에 소속되어야 안심이 되고 집단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안심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제 그런 바보짓은 그만 해도 된다고 말해도 거역할 의지를 잃었고 대신 새롭게 채워갈 이야기를 찾을 의지도 없다. 늙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젊음을 그리워하고있다. 과거 시절 이데올로기가 옳고 그르건 간에 그들의 리즈 시절을 바쳤던 당시의 문화는 다시 못 올 소중한 젊은 시절의 추억이자 더이상 업데이트할 이유도 없는 종결편인 것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자식들이 살아갈 미래라 하지만 당장 자신에게 닥친 노화와 죽음이 더 큰 문제다. 다만  잊혀지기 두려워 제사에 무덤에 집착한다.
우리는 그들의 소멸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문득 북한사람들이 궁금해졌다. 근대 왕조국가을 살고있는 현 북한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우리가 겪은 의식의 도약을 그들에게 그것도 압축적으로 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타임머신체험이 될 것 같다.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oid=421&aid=0002568222&cid=1054181&sid1=100&iid=1985385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728x90
반응형

"아버님한테서 전화왔었어요, 그런데 나가지 말라고"

같은 동네사는 이웃과 촛불집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은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라는 내 뒤이은 물음에

"뭐..."

라며 그는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내가 3차 촛불집회에 다녀왔노라 꺼리낌없이 공개하는 데에 대해 그는 놀라면서도 웃음을 곁들였다.

무슨 의미였을까? 무슨 생각을 한걸까?

 

과거에 본인에게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였던가, 앞으로 무언가라도 제공할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을 대놓고 하기엔 금전적 손해 확률을 키울 수 있다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내 앞의 모래를 끌어 모으기 위해 넓은 백사장의 모래 유실은 눈감는다는 것과 똑같아 보인다.

부모 혹은 시부모로부터 받는 경제적 도움은, 부모세대가 공유하는 과거 가치관을 경제적 수익자 자녀가 공유해야 하는 의무를 포함한다. 단 하나 진리, 공짜는 없다.

   

또 하나, 양도세와 상속세에 대해 불만을 말하고 월급에 붙은 소득세에 대해 부당하다는 푸념을 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가만히 그 내용을 들어보면 집을 매매하면서 얻은 이익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을 내기 싫다는 말이고,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을 내기 싫다는 말이다. 이미 무노동, 행운 같은 이득을 얻었음에도 수수료를 내기는 싫단다. 왜냐면 공평하지 않아서 라고 덧붙인다. 정확하게 내는 사람이 손해라는 생각이 확고한 것이다. 

정확히 부과하지 못하는 정부에도 문제가 있지만 법을 피해보려는 이기심 역시 문제다.

이런 개인적 이해득실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사람은 촛불집회에 나가기가 망설여질것이다.

개인의 시간과 노력, 돈을 투자해야 하는 데 당연히 아까우니까.

 

무슬림들은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느정도 합리적인 왕정을 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캐런 엘리엇 하우스의 <중동을 들려여다 보는 창, 사우디아라비아> 2016년 발행   

저자는 그 이유를 문화라고 하였다. 복종과 억압의 문화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사람들을 무기력 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대학교육 까지 받은 무슬림 여성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고 둘째 처로 자청하여 남편의 폭력, 강간, 억압이 허용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자신이 강요받았듯이 딸들에게도 똑같은 삶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어도 좋다는 의지라고 하면 심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인류 역사 속에서 이슬람 문화의 발전이나 전파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촛불집회에 나가 촛불 하나 더 밝히는 것이 뭔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방송에  얼굴이라도 나오고 주위에서 알아보면 불이익 당할 가능성만 커지는데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착하면서도 길들여진 태도를 가질 수는 있다.

북한을 보라. 4.19, 5.18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까? 

북한이나 우리나 뭐가 다를까?

백년전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지금 우리가 되새기긴 무리가 있다. 정서는 공감이 되지만 하도 옛날 일이라 그냥 역사책 같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80년대 시민 운동의 증인을 볼 수 있고, 그 증언을 듣을 수 있다. 기억할 수도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운 아닌가? 민주화 역사를 함께 써 가고 있다는 사실.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728x90
반응형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된 뒤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뒤이어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나 의열단의 노력이나 국내 항일투쟁 덕분이라는 내용을 국사문제에서 봤던 기억이 있지만,

해방을 맞은 나라에 또 다른 나라 - 미군정이 시작된 것이 우리 스스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에서 결국 해방에 우리가 기여한 부분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 역시 있다.

거기서 부터 문제 였을까?

 

우리 역사에는 혁명이 없었다고 한다.

가만히 국사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배세력 교체말고 혁명적으로 제도가 뒤바뀌는 일은 식민지 때 와서나 있었던 것 같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선물 꾸러미처럼 신분과 성차별제도는 갑자기 폐지되어 버렸다. 그래서 노비, 성불평등, 지역차별 역시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 같다. 내가 필요해야 쓰니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 무기력하거나 멍청하거나 답답한 사람들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화가 난다. 그 수많은 전쟁과 전쟁보다 악랄한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않고 서로 도닥거리며 살아온 사람들인데 착한 멍청이들로만 정리되야 할까?

 

내가 3.1 운동을 별 의미없게 생각한 이유도 중학교 시절 사회선생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3.1운동을 유래없는 비폭력운동이라고 설명하면서, 준비없이 진행되어 오히려 비폭력적인 운동이라 사람들만 죽고 얻은 것은 없었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것이 참 시크하면서 예리한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근대를 살아간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의 멍청함이 문제라 생각했다.

멍청함은 배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이 들고 그래서 나 외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나아가 과거와 미래를 인식하기 시작해야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식은 검색하면 얻을 수 있지만 현명함은 못구한다. 

멍청함은 어디든 언제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수업내용 이었다. - 물론 당시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겠지...  

3.1운동은 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일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여론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 일지라도 무리가 지어지면 반대편의 소수는 두려워하게 된다.  더군다나 명분도 정확한 옳고 정의로운 일이었다.

        

세상은 결국 가장 힘있는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만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핵심을 쥐었던 주먹을 벌리면서 자신 주변으로 힘과 함께 핵심이 전달되면서 통제의 오류는 발생하고 결국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깔끔한 메신저가 아니라 손때와 체취를 묻히는 성실하지 못한 심부름꾼이다.  

어디든 틈은 생기고 그 틈을 비집고 결국 할 말은 하게 된다. 

 

조선 후기 고부민란에서 이어지는 동학농민운동, 고려 무신집권기의 망이 망소이 난, 이언년의 난, 신라 시대의 적고적의 난 등 가만히만 있었던 우리 조상들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난 이후로 세상이 확 바뀌는 결과는 없었지만, '난'의 대한 데이타 - 그 시작과 진행, 전개 - 는 착착 쌓아갔을 것이다.

또한 진압은 되었을 지 언정 멍청하거나 착하지만은 않은, 목숨을 걸고라도 타고난 팔자를 고치려는 지독한 사람들이 나말고 여기저기 많다는 공감대 혹은 기득권측에서 보면 두려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사람들이 모인다고 촛불이 켜진다고 세상이 변하겠냐고 한다.

세상이 두어달 동안 모여서 나누어 붙인 촛불에 의해 변한다면, 세상 바꾸기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모인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생각을 했다. 아니 성찰을 반성을 했다.    

촛불 들었다고 세상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지만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거꾸로도 간다.

거꾸로 간다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다. 내일 내가 공권력의 고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일제 위안부가 될 수도 있고, 노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5차 집회까지 촛불이 모이지 않았다면 검찰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청와대는 대국민담화라며 계속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었고,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촛불을 켜서 대통령을 퇴진시키지 못했고 여당을 해산시키지도 못했고 이상한 보수들의 생각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세상을 하루 아침에 바꾸려면 돈많고 힘있는 외세가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느끼고 성찰하여 무언가 바꾼다면 그것은 비가역적일 것이다. 다시는 거꾸로 돌아가지 않을 자발적이면서 무의식으로도 존재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춘기를 겪고 부모에게 비난당하면서 느꼈던 처절함과 두려움, 그러면서 동시에 느껴지는 해방감.

이 사태는 어느 순간 적정선에서 정리가 되고 또 적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 꿰차겠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그 주인공이 대사를 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우리는 절대 이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의 데이타로 저장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7767048583A3DE31E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728x90
반응형


2016년 11월,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화나는 이유는 가만히 보면 미묘하게 다른 듯 하다.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버린 미즈 최 Ms.choi가 권력을 조종하여 비리를 저지른 것에 대한 분노,
새누리당이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했다는 보수세력에 대한 실망,
그리고 또 하나 무속신앙에 대한 비난이다.


역대 여러 대통령들이 본인의 종교적 성향을 숨기지않았고 오히려 득표에 이익을 본 점도 있었다.
여러 중요한 인사 청문회에서도 종교적 성향이 이수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개인의 신념으로 정리되어 낙마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기독교, 불교, 혹은 원불교, 카톨릭등 개인적 종교 성향을 존중하는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지배적이다.
유독 무속신앙에 대해 비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동네마다 점집이 넘쳐나고 또 공중파tv에도 무속인 내지는 점쟁이들이 등장한다.
재미로 본다, 웃고 넘긴다, 로 정리되기에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기대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샤머니즘이라고 무속신앙 대해 공격하는 것이
마치 자기부정같아 보이기도 한다.


목소리가 큰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종교적 기득권 측면에서 무속신앙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무속신앙이 비논리적, 비합리적이라서 문제라면, 기독교는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가?
불교는 또 얼마나 비이성적인가?

 

세월호 인신공양설 등 고대 야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들이 돌면서 우리 스스로를
비논리적으로 모는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대통령이 "우주의 기운" 운운하고 오방랑이니 하는 것들 모두 우리 삶에 실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은 다 알고 있다.
청와대에서 새벽기도회를 암만 열어도 우리에게 특별한 복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결국 정치든 뭐든 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종교적, 신념적 활동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여 똑똑하게 올바르게 일을 하라는 정도이다.

 

샤머니즘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핵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맹목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엉뚱한 인물도 대통령으로 세우는 당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주고 그나마 나은 대안을 선택해야 한다. 
나라가 아닌 '사람'을 위하는 정치를 하도록 해야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전세계적 큰 웃음거리가 된 이 마당에 그나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해방 후 우리 정치도 시민들의 의지 없이 거저 이룬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jtbc 썰전

일상에서건진글 2016. 8. 26. 12:23
728x90
반응형




jtbc에서 목요일 밤 방영하는 썰전의 시청률이 상당하다고 한다.
케이블 방송임에도 동시대 지상파 방송 시청률을 넘었다고 하니 팬덤이 확실한 듯하다.
유명 정치평론가들이 나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방송 구성은 흔하다. 단지 진행자가 인기 연예인 김구라라는 점도 강점이 되겠지만, 그 한 가지 이유로는 부족하다.

왜 유독 썰전은 시청률이 높을까?
출연자들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무대 구성과 발언의 무게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가 분명 느껴진다.
다른 정치쇼는 뉴스세트에서 조금 확장된 정도이거나 연예인들이나 패널들이 다수 출연하여 마치 주부대상 토크쇼를 보는 듯 하다. 둘의 공통점 이자 썰전과의 다른 점이 바로 출연자 발언의 경중인 듯하다.
물론 썰전에서도 출연자들이 썰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출연자 본인의 소신에 맞는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그 발언에 무게를 실어주기 위한 흐름이라 보여진다.

두번째,
사람들은 사회현상을 궁금해는 하지만 분석하기는 싫어한다.
누군가 분석해서 설명 해주는 것을 받아먹고 싶어한다.
jtbc 뉴스룸도 다른 방송사 뉴스와 다른 점을, 그들이 말하는 것 처럼, 내세우기를 '한걸음 더 들어간다'는 것이다.
공중파 3사의 뉴스처럼 취재된 내용만 말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이어질 예상 시나리오나 사건의 이유 또는 의도, 과거 사례 혹은 해당 발언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보거나 등의 친절한 해석이 있어 시청자로 하여금 사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이 대부분이 결국 이기주의로 귀결되기 때문인지, jtbc 뉴스룸에서도 어떤 해석의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다.

사람의 목숨이나 인권에 관련된 문제는 명확한 답이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외 뉴스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그 해석이 내 의견이자 내 가치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고서를 사면 따라오면 해설서 처럼 우리는 해설서를 필요로 한다. (우린 아직도 중립이라는 애매한 잣대 아래서 오락가락 한다.)

이건 교육 시스템과 관련이 없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은, 정확히 75년생부터 수능이라는 시험을 치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이전 세대는 수능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험제도가 변해봐야 얼마나 바뀌냐고 하지만 이전의 학력고사와 수능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학력고사가 단편적 지식의 방대한 암기력을 측정했다면, 수능은 문제의 요점과 흐름을 파악해 관련성 있는 답을 찾는, 이것 역시 암기력을 측정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부분을 콕 짚으라던 시험이 전체를 훑으라는 시도로 변했다는 것이 내 말이다.
부분보다 전체를 보고 과목을 통합해 생각하라는 수능 이란 시험이 근본적 사회변화까지 일으키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사고체계가 바뀔 것이며 그래서 앞으로 뭔가가 달라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물론 둘 다 빠른 시간에 정답을 맞춰야하는 시험이라 정답찾기 훈련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은 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부분을 보는 것에 익숙한 학력고사를 치른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
곁가지 쳐낸 핵심 요약을 원하고, 정해진 답을 알려주면 기억할 훈련이 된 사람들이다.
스스로 분석내는 것은 지루하고 소비적이며 시간낭비라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정작 원문보다는 전문가들의 친절한 해석과 각주에 더 주목하는 것라고 본다.

학생과 시민들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자체 해석을 하는 능력이 커져, 사회 지도층의 말을 듣지 않고 대들까 염려하는 현상이 교육에 반영된 결과라고 하면 너무 빅 브라더스 이론 같을까?
사회지도층, 멀리 찾을 것 없이 그들은 바로 우리의 부모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자식이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들의 가치관 안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왜냐면 그것이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라 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그만 해도 싶을 정도의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계속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똑똑하다. 해석과 이해력이 빠르다는 이야기다.
조그만 가치관 눈뭉치라도 잘 만들어 놓으면, 눈밭에 굴려서 큰 눈덩이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 젊은 세대만은 공존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노예는 주인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728x90
반응형

2016년 8월 15일 또 한번의 광복절을 맞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연설에 대한 기사 밑으로 댓글이 이어지고 있다. 약 1만 개의 댓글이 달렸고, 좋아요 수는 10만 건이 훌쩍 넘어보인다. 휴가철도 얼추 지났고 여전한 폭염에 쉬고 있는 시민들은 기사 검색 중인가보다.

 현직 대통령이 비민주적이라는 비난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우리나라는 그래도 민주적인 나라이다. 국가기관의 불법개인사찰이 있다고는 하지만 털어봐야 털릴 것이 없는 사람들인지, 불의를 못 참는 것인지 국가원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의 글이 매일 생겨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말에 대해서는 별로 짚어보고 싶지도 않다. 그냥 여전하신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하야까지 요구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분노를 나타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대통령에게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부산에서 한 가족에 대햔 비극적 기사가 있었다. 한 가족의 아버지가 사망한 것을 동거 가족들이 한 달이 지나서 알았다는 내용이다. 그 가족은 최소한의 형태만 유지한 채 이미 해체되었었을 것이다. 그 가족의 진실은 모르지만 추정해 보건데,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비소통적 모습에 다른 가족들은 아버지로부터 점점 멀어졌을 것이고 관심이 없어졌을 것 같다. 그래서 사망 후 한달 동안 생사여부를 확인 못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일방적 의사소통만 했을 가부장적 아버지로부터 가족은 살아남고자 아버지를 거부했고, 아버지는 스스로 자초한 고립 속에 빠져 가족의 관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지내다 결국 죽음으로써 남은 가족이 반인륜적이라는 비난을 받게 만든 셈이 되었다.

 

 자신을 선출해 준 시민의 의견을 두루 듣지 않고, 일방적 소통을 하는 대통령에 대해 우리는 그래도 멀어지지 않는 듯하다. 대통령도 단지 부족한 인간일 뿐인데 그가 여전히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이 완벽한 대통령인가? 아니면 완벽한 시스템인가?

 베르너 지퍼는 <우리 그리고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것들> 이라는 책에서     

"공감이라는 감정보다는 공정함에 대한 욕구가 한결같고 안정적이다. 공정함에 대한 욕구는 세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욕구로 심지어 일부 발달한 동물들에게도 확인이 되는 특징이다. 우리가 늘 공존을 위해 강조하며 정치권에서 매일같이 들을 수 있는 신뢰라는 개념 역시 공정함의 한 결과물이다...공감도 신뢰와 마찬가지이다. 공정함이 전제되어야만 공감이 가능해지고 공평하고 공정한 상호작용 속에서만 공감이 발생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최고 통치권자에게 공감 이상의 공평함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권력이 집중된 자리인 대통령에 대한 희망적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에 태어나 살기 때문에 사람 사이의 갈등이 많은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갈등의 원인이 되는 서로의 입장 차를 토론으로 이야기 나눠보면서 갈등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갈등은 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이런 수준 높은 문화는 자주 벌어지는 일은 아님을 우리모두가 다 알고 있다. 사적 토론의 결과는 늘 '건방지게! 너 나이 몇살이야' 로 산불 번지듯 번지고, 사회적 통념을 인정할 수 없는 측 역시 감정적 대립으로 맞선다. 서로 함께 공유할 가치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현재 우리 사회, 즉 말이 안 통하는 사회에서는 법만이 최후의 보루이다. 그 법의 공정성을 시민들은 절실히 바라는 것이다. 

 

 경제적 양극화를 제외하고, 사회가 세대별 계층별로 양극화 되었다는 점을 가만히 따지고 보면 금새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라고도 보인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혈연과 지연과 학연에 얽힌, 서로 아주 가까운 사회이다. 원론적 사상적 갈등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듯 하지만 사실, 그것은 일부 학자나 정치인들의 문제일 뿐, 먹고사는 문제가 중한 대다수 시민들에겐 단지 그것은 개인적으로 내재된 불만을 담은 갈등을 촉발시키는 문제일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드배치를 반대한 칠곡주민들 처럼 농사짓고 있는 내 땅만 아니라면 사드를 배치하건 말건, 한반도 안보나 신냉전 시대의 등장은 하등 중하지 않는 것이다. 먹고 살기 힘든 내 친척과 친구를 각자가 의무적으로 조금만 보살피고 애정을 쏟는다면, 서로 간의 정이 중한 우리 시민들의 대립은 조금씩 줄어들 것이다.

 

 사람은 실수를 한다. 매번 할 수도 있고 한 번에 크게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믿을 것은 역시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시스템에서 우리도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다음 정권을 선택할 우리의 기회도 다가오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3&aid=0007409493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
728x90
반응형

개그맨 김영철이 소장 도서 328권을 도서관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기부된 소장도서를 따로 분류한 장소에 그럴듯한 이름도 붙여 김영철 개인적 홍보효과가 꽤 있어 보입니다.

 일간스포츠 기사에서 김영철 씨가 도서관을 출입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 도서관을 출입하는 모습이 "있어 보여서" 라고 했다고 합니다. 

 10년 이상 거의 매주 공공 도서관을 출입하고 있는 나는 왜 한번도 내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세월 동안 도서관이 나에게 준 지적 행복을 모두 꺼내 보이기는 불가능하겠지만, 목록정리라도 조금 해보려 합니다.

 

 도서관을 안 가던 사람이 어느날 도서관에 간다면, 아마도 인기신간 도서를 보려는 이유가 클 것 입니다. 

하지만 막상 자료실을 둘러보면, 인기 신간 소설이나 에세이집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도서관과 서점의 다른 점이 바로 이것이지요.

공공 도서관은 이용이 무료이지만 그 개방성 때문에 소수 자료에 대한 접근이 어렵기도 하죠. 

물론 검색을 해보면 1년 미만의 신간이 자료실에 분명 존재는 하지만 이미 대출이 되었거나 대출예약도서로 등록되어 있거나 혹은 속이 부풀대로 부풀어 얼룩덜룩 해진 채, 지친 모습으로 서가에 꽂혀 있죠.

굳이 인기 신간을 봐야만 하겠다면 예약을 하고 기다리면 되지만 글쎄... 신간 짝사랑 보다는 숨은 보석인 구간 찾기가 더 재밌다는 것을 알려드리고 싶어요.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도서관과 이미 친해져 있을 겁니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도서관과 친하고 서가를 자연스럽게 누비고 다닙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독서관련 활동이나 도서관 방문 프로그램이 아주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책도 금방 찾지요.

거의 대부분 도서관이 어린이 자료실을 따로 마련해두어서 초등생 이하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 성인책만큼 많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가정집 거실 벽면이나 아이들 방 벽면을 책으로 채운 집이 많이 있습니다. 계속 책을 사들여 집 벽을 채워 나가다 보면 순수한 독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또다른 형태의 소유욕을 채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책으로 벽면을 채워도 도서관만큼 책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책 자체에 대한 애정이 책을 읽는 열정으로 저절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출발은 나쁘지 않습니다.

 

 학생 시절 도서관에 가면 대출도서가 많아야 두 세권이라 그냥 손에 끼고 오면 되었죠. 그 때는 내가 빌린 책의 제목을 누구든 볼 수 있었고, 그것으로 나에 대한 인상이 정해질 수도 있었음을 알면서도 오히려 엉뚱발칙한 제목의 책을 들고 다니며 진짜 내 자신을 숨기려 했었었습니다. 귀여웠었죠.     

 

그 뒤 아이가 생기며 아이가 타고 있는 유모차에 아이와 함께 책을 실어 나르고 다녔습니다.

유모차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대부분 엄청난 실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이를 편안하게 싣고 다니는 것 뿐만 아니라 미는 사람도 많이 힘이 들지 않는 구조에, 또 수납도 상당히 많이 됩니다.

유모차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어느 날, 그 많은 짐들을 다 어깨에 매아 한다는 상황에 당황스러웠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이불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커다란 포셀린 백에 책을 담아 다녔습니다.

체육관과 함께 지어져 멋졌던 그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던 시절, 가족수 대로 대출한도를 꽉 채워 빌리면 그 무게가 어깨가 빠질 만큼 큼 엄청났었습니다. 수영장 셔틀버스를 탈 수 있어서 그런 자가 운반이 가능했었던 것이었습니다.      

 많은 도서관들에서 두 세 권이었던 대출한도를 거기는 5권에서 7권까지 늘려 놓아 아이 둘과 함께 가면 열 댓권의 책을 대출할 수 있어서 한도를 꽉 채워 대출하곤 했습니다.  

특히 아동 도서는 책장수는 적어도 표지가 두껍고 거기다가 크기 또한 커서 질긴 포셀린 가방도 몇 개월이면 찢어지기 일 수 였습니다.    

 

최근에는 장바구니용 핸드카트를 사용합니다.

내가 사는 고양시는 본인의 대출카드에 가족대표로 등록을 해두면 온가족 대출을 한 사람이 다 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일인당 7권씩 4명분 총 28권의 책을 넉넉히 빌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독자들의 환영을 받지요. 무엇보다 고양시는 전체 도서관 수가 아주 많아 동네별로 걸어 다닐 수 있는 도서관이 없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10년 이상 책 셔틀을 한 덕분에 아이들은 책을 아주 자연스럽게 봅니다. 갑자기 심심해지거나 뭔가 할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릴 때 자연스럽게 책꽂이로 다가가 책을 집어 읽습니다. 각자 좋아하는 독서 분야도 있어서 아이의 취향을 유심히 보았다가 비슷한 책을 계속 이어서 빌려오고는 합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읽을 엄두도 안났던 삼국지를 덥석 잡아 읽는 아이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후 수호지 등 여러 중국 고전을 실어 날으기도 했습니다.

 

 어린 아이를 끌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도서관을 다니다 보면, 부지런하다 칭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꽤 많은 주변 사람들이 궁상떤다는 눈치를 주었던 것도 있습니다. 남들이 보던 더러운 책을 아이에게 읽게 주냐며 책에 투자 좀 하라는 의견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책을 찾아 재밌게 보고 나면 반납하지 않고 그냥 집 서가에 꽂아 두고 싶지 않냐는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마음이 가 가지고 싶은 책을 구매해 본 적도 있지만, 희안하게도 책을 사고나면 더 이상 읽지는 않고, 그 표지만 뿌듯하게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책 내용 전체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그 때의 감동이 계속 유지 되지도 않는데, 단지 아련한 이미지로 추억될 책을 계속 사재어 집을 복잡하게 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경험도 교육적으로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읽은 보석같은 책은 기억 속에 정리해두고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한 양서들이 더 엄청날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계속 도서관 서가를 두리번 거리고 있습니다.

책 자체보다는 바로 어느 작가의 특별하고 신선한 생각에 대한 공유 욕심이 도서관을 못 끊게 했던 이유인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읽어도 안 읽은 책이 계속 줄지 않는 화수분 같은 지식 창고, 어떻게 그 곳을 잊을수 있을까요.

 

조금 더해 20년 가까이 책장을 넘기며 살다보니 도서관 다니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아이들이 커서 더이상 두꺼운 양장 표지의 동화책을 빌리지는 않지만, 청소년 도서의 다양함을 또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 전 이사한 곳이 바로 동네에서 도서관 최단거리 아파트라 여기서 계속 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살기 바빠서 그렇지 책 구하기 어려워 책을 못보는 것은 아니에요. 

도서관에 오래 다니다 보니 도서관 돌아가는 시스템이나 직원들도 저절로 알게 되었습니다. 초보 사서의 어설픔도 3초면 알아채지요.  

 

 내가 매주 읽은 책 중 몇 권의 흔적을 sns에 남기다 보니 앨범을 만드는 재미 같은 것도 있습니다. 다시 뒤져서 예전에 담아둔 문구를 읽으며 세상살이 내공을 쌓아가기도 합니다. 책 표지에 딱 붙여진 00도서관 자료 라는 스티커가 동네에 대한 책임감을 갖게도 합니다.

 

 김영철 씨가 느꼈다는 도서관 다님이 있어보이는 것. 김영철 씨가 바로 가진 사람이자 내적 사치를 아는 사람이라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니까요.      

            

    

 

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20447697&cloc=

 

반응형
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