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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똑똑한 사람들
똑똑해서 조금만 가르쳐 주면 잘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자식 교육열까지 남달라 다음 세대가 똑똑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 배우기만 잘한다고? 이것저것 버무리는 융합력도 좋고 남다른 손재주까지 있다. 다 머리가 좋아서다.
근대화 독재 세대를 부모로 두어서일 뿐이지...
혁명을 통한 사회의 뒤집힘- 세대의 단절을 경험해 본 적이 없어 뿌리깊게 내린 보수 기득권의 눈치를 끊임없이 보고 그들에게 내어줄 자리를 마련한다. 기득권에게 기득권을 누릴 자리를 마련해준다니...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를 부정 하지 못하고 다른 부모- 다른 가치의 기득권 을 저격한다. 보수의 지붕아래 발을 디밀어 넣고 지붕아래 모인 이들 사이에 난리가 났다. 지붕밖도 참 좋은 세상인데...
한국사회에 걸출한 인물은 없지만 자잘한 똑똑이 들은 너무 많다. 하늘에서 내려준 영웅 하나만 있는 사회가, 노력해서 똑똑해진 백명이 있는 사회보다 안정감있고 단합될거라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우리 사회의 자산 이 똑똑이들을 어디다 써먹을 것인가

만화 주인공 도라에몽이 타고 다닌 대나무 헬리콥터가 진짜 나타날 듯 하다. 향후 30년은 사람들에게 적응하기 어려운 시기가 된다는 주장이 날카롭게 들린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우리는, 민족 몰살의 역사를 여러번 거치고도 살아남은 실제적인 예를 들지않아도 잘 적응해 살아남을수 있을 것이다. 다만, 지금껏 하지않고 자제했던 기존 질서의 부정과 앞선 세대를 과거로 보내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현재를 살 것이 아니라 미래를 살 것이라면 과거는 현재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http://m.news.naver.com/rankingRead.nhn?oid=001&aid=0009214905&sid1=105&ntype=RA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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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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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현재 우리 삶에 만족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언가를 얻기는 아주 힘든 사회속에 살고 있다.
학창시절 배움에서도 절반 이상의 학생은 '우수' 하지 못하며 설사 '우수'했어도 밝은 미래를 보장받지는 못한다. 상위 10%의 내신을 받고 서울소재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도 새벽같이 일어나 붐비는 지하철에 끼어 대기업 사무실로 출근하고 지친몸으로 돌아오는 삶은 딱하지만 부러운 삶이기도 하다.
부모를 잘 만나는 운이 따라야 하고 학창시절을 순조롭게 보내는 운도 있어야 하며 변태같은 상사나 동료를 만나지 않아야 하는 운도 있어야 한다.
태어나 계속되는 절망속에서 생존을 위한 부족함을 채워야만하는 욕망을 늘 커져갔고, 살아남았지만 불안감은 어떤 식으로든 변형되어 우리를 조종한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부잣집 여인과 결혼한 전 청와대 수석은 남부러울것 없이 다 가졌지만 더욱 강하고 견고한 권력을 위해 욕망을 드러냈다. 그정도 부와 명예를 가진 이들이 그의 주위에 적지 않았을 것이고 계속 욕망을 추구해야 만족하는 삶을 살았을것 같다.
자식들을 장성시키고 지난 세월을 다살아왔음에도 다음세대에 자리를 비켜주지않고 버티려 몸부림치는 지난 세대의 모습 또한 불안감이다. 나이듦을 받아들이지 않고 뱀파이어처럼 영생하려는 욕구는 일차원적인 걸까 삼차원적인 걸까?
우리의 소득은 적지만 주위에 소비할 것들은 넘쳐난다. 해외여행을 다니고 인기있는 식당을 찾고 핫한 브랜드의 옷을 입고 차를 모는 이들을 쳐다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자기연민과 허영심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길이다.
우리는 서로 너무 비슷하고 가깝다.
무어가 비싸고 맛있는지 몰랐어도 주위에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다른 사람의 소비는 내가 알게될 때까지 방송되는 것 같다.
내공을 쌓아 주위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지만 우리는 서로 너무 잘 엮어있고 함께 붙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에서 산다.
결국 자신을 지지하고 믿는 것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길고 긴 인류 역사를 먼저 살아간 이들 중 누군가는 이미 답을 알았을 것이고 그것을 내가 찾아내는 것이다. 또 내가 운좋게 찾아낸 답을 기록하고 알리며 차곡차곡 이어서 역사를 쌓아 가는 것, 미시적 사회에서 버둥거릴 수 밖에 없지만 내 존재의 의미는 역사속에 있다는 걸로 만족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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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10일 탄핵심판은 결국 그렇게 끝났다.
패배한 흰머리 변호사는 촛불이 이석기이고 대한민국을 망치는 세력이라고 했다.
그럴수도 있다. 난 촛불속에 섞여있던 여러 구호들에 전부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법치와 정의를 위해 여러 의견을 가진 이들이 촛불아래 모였던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다시는 그렇게 광장에 안가고 싶다. 거리에 나가서 호소해야할 억울한 일이 안 생기기만 바랄뿐이다.
하여튼 이번 일로 우리는 누가  폭력적이고 위험한지 알게되었다. 극우적인 이들이 우리 사회 어느 곳에 있었던 어떤 이들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세상엔 내 선의를 이용하려는 이들이 넘쳐난다. 이 '괴물'은 누군가 만들었지만 내가 끌고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 의도를 끌어다 괴물의 힘을 키우는데 쓰고 있는지 잘 보아야한다. 괴물과 싸워 이길 힘은 없지만 지금 내가 뭘하고 있고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려면 항상 생각해야한다.
난 노루보다 늦고, 매보다 눈 나쁘고, 곰보다 약해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 좋다.

<괴물과 맞서기> 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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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촛불이 켜지는 이유는 참 무겁고 심각하다. 하지만 촛불을 켜든 많은 이들은 애써 심각함을 누르고 광장에서의 시간을 즐기려한다. 카페에 잠깐 앉아 거리의 시민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겸사겸사 외식하는 기회로 삼기도 한다. 당장 해결되지 않는 다고 조급해하거나 노골적인 감정적으로 분노를 드러내봐야 오히려 민주주의 아마추어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절제되면서도 목적이 분명한 촛불광장문화는 우리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뿌듯하게 생각한다.
서울광장을 중심으로 모이는 태극기집회도 점점 커지는 듯하다.  그들도 나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해서 모인다고 믿고싶지만, 나라가 곧 박근혜라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집회장소에 나부끼는 수많은 태극기와 함께 펼쳐진 대형 성조기와 십자가의 연관성도 금방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번 탄핵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고는 있을까?
대다수가 내용을 잘 모른채 그저 광장을 차지하고 있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그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마치 추억의 컨서트장에 나온 듯 지난날 익숙했던 문화를 꺼내어 즐기는 것이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받았던 반공교육,  이웃 동료들과 함께 불려나갔던 관제데모, 정부에서 미는 후보를 그저 찍어주었던 거수기 투표, 주한미군을 통해 엿보았던 미제에 대한 선망, 교회다니면 세련된 계층으로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등 지난 추억으로 간직하고 살았던 그들의 현역 시절 문화를 다 꺼내어 서로 나누는 장이 바로 태극기 집회가 된 것이다. 그들은 집단에 소속되어야 안심이 되고 집단이 말하는 대로 따라야 안심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제 그런 바보짓은 그만 해도 된다고 말해도 거역할 의지를 잃었고 대신 새롭게 채워갈 이야기를 찾을 의지도 없다. 늙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젊음을 그리워하고있다. 과거 시절 이데올로기가 옳고 그르건 간에 그들의 리즈 시절을 바쳤던 당시의 문화는 다시 못 올 소중한 젊은 시절의 추억이자 더이상 업데이트할 이유도 없는 종결편인 것이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들이 존재하지 않을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자식들이 살아갈 미래라 하지만 당장 자신에게 닥친 노화와 죽음이 더 큰 문제다. 다만  잊혀지기 두려워 제사에 무덤에 집착한다.
우리는 그들의 소멸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 밖에 없다.
문득 북한사람들이 궁금해졌다. 근대 왕조국가을 살고있는 현 북한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공동의 미래를 고민해야 할 시대가 온다면 어떨까? 우리가 겪은 의식의 도약을 그들에게 그것도 압축적으로 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건 타임머신체험이 될 것 같다.

http://m.news.naver.com/hotissue/read.nhn?oid=421&aid=0002568222&cid=1054181&sid1=100&iid=1985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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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실수한 것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기만 했다면, 불행이 되풀이되는 사회는 없었을 것이다.

그 실수라는 것이, 정말 한순간의 판단 착오에서 오기도 하지만 오랜 기간 쌓여온 사람의 버릇이나 사고방식에 의해 저질러지기도 하다. 그래서 그것을 실수라고 인정하기도 쉽지않고 반성은 더 어렵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도 남 앞에서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결국 자기부정을 피하기 위해서 인 것 같다.

인생을 살면서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의미를 만들어나가려 하고 혹은 종교나 철학등 외부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스스로 깨닫거나 다른 사람의 이론을 가져오는 과정을 더 이상 하지않으려 하는 시기, 노년기가 오면서 더이상의 타협 없이 고집스러운 불통으로 자아를 확인하려 한다. 

반성은 곧 자기부정이 되고,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시기가 실제 눈앞에 다가오면서 옳고 그르건 간에 자신을 더욱 강력히 인정하고 주장한다 생각된다.

이러한 노년기가 60세를 넘는 순간, 혹은 70세를 넘는 순간 갑자기 온다고 생각이 되진 않는다.

30대에도 40대에도 이미 잠재되어 있던 습성이다. 비록 젊은 시절에는 타협의 여지가 있었지만, 더 나이들면서 타협의 여지를 없대 버린 것이다. 

이런 말이 안통하는 노인이 되기 이전에 이미 젊은 시절, 눈앞의 이익에 매몰되어 행동하거나 가치판단 없이 그저 집단에 동조되어 목소리를 높이고 순간의 즐거움을 쫓으며 살았던 것이다.

샘 해리스의 책 "자유의지는 없다" 에서

"자유의지는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수도 없는 배경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고 하였다.

결국 우리의 의지를 만든 것은 배경원인이고 과거라는 뜻이다. 시간의 퇴적물을 쌓을 것인지, 알맹이만 골라 모을 것인지 우리 자신인 그 '태풍'의 방향을 생각해야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어른이 되자고 한다.

사회구조적으로 발생하는 오류에 대해 어른으로서 부끄러워 해야 하고, 부족한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부끄러워 하며, 개인적 욕심만 찾는 데에 부끄러워 하자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정작 자기 반성과 같은 부끄러움을 체면에서 찾고 있다.

다른 사람이 비싼 물건을 살 때 사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과 다름 없는 부모의 재산 없음을 부끄러워 하고, 얼굴 생김새와 키를 부끄러워 한다.

내가 가진 가치관에 살을 붙이거나 때론 과감히 수정하는 과정은 뒷전이고 물질적 외모적인 차이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 희안하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행운- 대물림 재산과 외모를 쥔 이는 역으로 일그러진 가치관을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기는 커녕 엉뚱한 인과관계로 결국 총체적 자기부정을 거부하는 고집불통쟁이가 되고만다.

부끄러움이 없어진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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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한테서 전화왔었어요, 그런데 나가지 말라고"

같은 동네사는 이웃과 촛불집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들은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라는 내 뒤이은 물음에

"뭐..."

라며 그는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내가 3차 촛불집회에 다녀왔노라 꺼리낌없이 공개하는 데에 대해 그는 놀라면서도 웃음을 곁들였다.

무슨 의미였을까? 무슨 생각을 한걸까?

 

과거에 본인에게 경제적 이득을 제공하였던가, 앞으로 무언가라도 제공할 부모가 싫어하는 행동을 대놓고 하기엔 금전적 손해 확률을 키울 수 있다는 중요한 핵심이 있다. 내 앞의 모래를 끌어 모으기 위해 넓은 백사장의 모래 유실은 눈감는다는 것과 똑같아 보인다.

부모 혹은 시부모로부터 받는 경제적 도움은, 부모세대가 공유하는 과거 가치관을 경제적 수익자 자녀가 공유해야 하는 의무를 포함한다. 단 하나 진리, 공짜는 없다.

   

또 하나, 양도세와 상속세에 대해 불만을 말하고 월급에 붙은 소득세에 대해 부당하다는 푸념을 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가만히 그 내용을 들어보면 집을 매매하면서 얻은 이익에 대해 부과되는 세금을 내기 싫다는 말이고, 부모에게서 받은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세금을 내기 싫다는 말이다. 이미 무노동, 행운 같은 이득을 얻었음에도 수수료를 내기는 싫단다. 왜냐면 공평하지 않아서 라고 덧붙인다. 정확하게 내는 사람이 손해라는 생각이 확고한 것이다. 

정확히 부과하지 못하는 정부에도 문제가 있지만 법을 피해보려는 이기심 역시 문제다.

이런 개인적 이해득실에 과도하게 집중하는 사람은 촛불집회에 나가기가 망설여질것이다.

개인의 시간과 노력, 돈을 투자해야 하는 데 당연히 아까우니까.

 

무슬림들은 민주화를 원하지 않는다고 한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느정도 합리적인 왕정을 원할 뿐이라고 하였다.  캐런 엘리엇 하우스의 <중동을 들려여다 보는 창, 사우디아라비아> 2016년 발행   

저자는 그 이유를 문화라고 하였다. 복종과 억압의 문화는 사람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었고,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사람들을 무기력 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대학교육 까지 받은 무슬림 여성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집안에 가두고 둘째 처로 자청하여 남편의 폭력, 강간, 억압이 허용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자신이 강요받았듯이 딸들에게도 똑같은 삶을 강요하면서 말이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니어도 좋다는 의지라고 하면 심한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인류 역사 속에서 이슬람 문화의 발전이나 전파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촛불집회에 나가 촛불 하나 더 밝히는 것이 뭔 의미가 있겠냐는 생각은 광화문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

내가 이런다고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방송에  얼굴이라도 나오고 주위에서 알아보면 불이익 당할 가능성만 커지는데 괜한 짓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착하면서도 길들여진 태도를 가질 수는 있다.

북한을 보라. 4.19, 5.18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있을까? 

북한이나 우리나 뭐가 다를까?

백년전 프랑스 시민혁명이나 미국 독립전쟁, 일제 강점기 3.1운동을 지금 우리가 되새기긴 무리가 있다. 정서는 공감이 되지만 하도 옛날 일이라 그냥 역사책 같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80년대 시민 운동의 증인을 볼 수 있고, 그 증언을 듣을 수 있다. 기억할 수도 있고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운 아닌가? 민주화 역사를 함께 써 가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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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2차 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된 뒤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그리고 뒤이어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나 의열단의 노력이나 국내 항일투쟁 덕분이라는 내용을 국사문제에서 봤던 기억이 있지만,

해방을 맞은 나라에 또 다른 나라 - 미군정이 시작된 것이 우리 스스로 해방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에서 결국 해방에 우리가 기여한 부분은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 역시 있다.

거기서 부터 문제 였을까?

 

우리 역사에는 혁명이 없었다고 한다.

가만히 국사시간에 배웠던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배세력 교체말고 혁명적으로 제도가 뒤바뀌는 일은 식민지 때 와서나 있었던 것 같다. 준비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던져진 선물 꾸러미처럼 신분과 성차별제도는 갑자기 폐지되어 버렸다. 그래서 노비, 성불평등, 지역차별 역시 어쩌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것 같다. 내가 필요해야 쓰니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참 무기력하거나 멍청하거나 답답한 사람들로 밖에 생각되지 않아 화가 난다. 그 수많은 전쟁과 전쟁보다 악랄한 사회적 부조리 속에서도 인정을 잃지않고 서로 도닥거리며 살아온 사람들인데 착한 멍청이들로만 정리되야 할까?

 

내가 3.1 운동을 별 의미없게 생각한 이유도 중학교 시절 사회선생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3.1운동을 유래없는 비폭력운동이라고 설명하면서, 준비없이 진행되어 오히려 비폭력적인 운동이라 사람들만 죽고 얻은 것은 없었다고 했던 것 같다. 당시 나는 그것이 참 시크하면서 예리한 분석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근대를 살아간 못 배우고 무식한 사람들의 멍청함이 문제라 생각했다.

멍청함은 배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이 들고 그래서 나 외의 존재를 인식하고 또 나아가 과거와 미래를 인식하기 시작해야 없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지식은 검색하면 얻을 수 있지만 현명함은 못구한다. 

멍청함은 어디든 언제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수업내용 이었다. - 물론 당시 선생님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다고 하겠지...  

3.1운동은 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일제에 반대하고 저항하는 여론을 분명히 보여주었고, 힘없어 보이는 사람들 일지라도 무리가 지어지면 반대편의 소수는 두려워하게 된다.  더군다나 명분도 정확한 옳고 정의로운 일이었다.

        

세상은 결국 가장 힘있는 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지만 그들에게도 한계는 있다. 핵심을 쥐었던 주먹을 벌리면서 자신 주변으로 힘과 함께 핵심이 전달되면서 통제의 오류는 발생하고 결국 꼬리가 머리를 흔드는 격이 될 수도 있다. 사람은 깔끔한 메신저가 아니라 손때와 체취를 묻히는 성실하지 못한 심부름꾼이다.  

어디든 틈은 생기고 그 틈을 비집고 결국 할 말은 하게 된다. 

 

조선 후기 고부민란에서 이어지는 동학농민운동, 고려 무신집권기의 망이 망소이 난, 이언년의 난, 신라 시대의 적고적의 난 등 가만히만 있었던 우리 조상들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난 이후로 세상이 확 바뀌는 결과는 없었지만, '난'의 대한 데이타 - 그 시작과 진행, 전개 - 는 착착 쌓아갔을 것이다.

또한 진압은 되었을 지 언정 멍청하거나 착하지만은 않은, 목숨을 걸고라도 타고난 팔자를 고치려는 지독한 사람들이 나말고 여기저기 많다는 공감대 혹은 기득권측에서 보면 두려움이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본다.

 

사람들이 모인다고 촛불이 켜진다고 세상이 변하겠냐고 한다.

세상이 두어달 동안 모여서 나누어 붙인 촛불에 의해 변한다면, 세상 바꾸기 어렵지 않은 것 같다.

모인 사람들은 촛불을 들고 생각을 했다. 아니 성찰을 반성을 했다.    

촛불 들었다고 세상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지만 가만히 있으면 세상은 거꾸로도 간다.

거꾸로 간다는 건 무시무시한 일이다. 내일 내가 공권력의 고문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일제 위안부가 될 수도 있고, 노비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5차 집회까지 촛불이 모이지 않았다면 검찰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고, 청와대는 대국민담화라며 계속 거짓말을 했을 수도 있었고,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수도 있다.

물론 아직까지는 촛불을 켜서 대통령을 퇴진시키지 못했고 여당을 해산시키지도 못했고 이상한 보수들의 생각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세상을 하루 아침에 바꾸려면 돈많고 힘있는 외세가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 느끼고 성찰하여 무언가 바꾼다면 그것은 비가역적일 것이다. 다시는 거꾸로 돌아가지 않을 자발적이면서 무의식으로도 존재하는 의지가 필요하다.

사춘기를 겪고 부모에게 비난당하면서 느꼈던 처절함과 두려움, 그러면서 동시에 느껴지는 해방감.

이 사태는 어느 순간 적정선에서 정리가 되고 또 적당한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 꿰차겠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그 주인공이 대사를 외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공감하였다.

우리는 절대 이 경험을 잊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의 데이타로 저장하였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27767048583A3DE31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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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1월,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화나는 이유는 가만히 보면 미묘하게 다른 듯 하다.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져버린 미즈 최 Ms.choi가 권력을 조종하여 비리를 저지른 것에 대한 분노,
새누리당이 정권유지에만 급급하여 결국 스스로 무너지게 했다는 보수세력에 대한 실망,
그리고 또 하나 무속신앙에 대한 비난이다.


역대 여러 대통령들이 본인의 종교적 성향을 숨기지않았고 오히려 득표에 이익을 본 점도 있었다.
여러 중요한 인사 청문회에서도 종교적 성향이 이수가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 개인의 신념으로 정리되어 낙마에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적은 없었다.
기독교, 불교, 혹은 원불교, 카톨릭등 개인적 종교 성향을 존중하는 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지배적이다.
유독 무속신앙에 대해 비난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동네마다 점집이 넘쳐나고 또 공중파tv에도 무속인 내지는 점쟁이들이 등장한다.
재미로 본다, 웃고 넘긴다, 로 정리되기에는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기대는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러면서 표면적으로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샤머니즘이라고 무속신앙 대해 공격하는 것이
마치 자기부정같아 보이기도 한다.


목소리가 큰 기독교인들이 나서서 종교적 기득권 측면에서 무속신앙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드러낸다고도 볼 수 있지만,
무속신앙이 비논리적, 비합리적이라서 문제라면, 기독교는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가?
불교는 또 얼마나 비이성적인가?

 

세월호 인신공양설 등 고대 야샤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들이 돌면서 우리 스스로를
비논리적으로 모는 자충수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닌지 걱정된다.
대통령이 "우주의 기운" 운운하고 오방랑이니 하는 것들 모두 우리 삶에 실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점은 다 알고 있다.
청와대에서 새벽기도회를 암만 열어도 우리에게 특별한 복이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결국 정치든 뭐든 다 사람이 하는 것이기에
그러한 종교적, 신념적 활동을 통해 정신적 스트레스를 극복하여 똑똑하게 올바르게 일을 하라는 정도이다.

 

샤머니즘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핵심을 잃어서는 안된다.

맹목적인 정권 유지를 위해 엉뚱한 인물도 대통령으로 세우는 당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주고 그나마 나은 대안을 선택해야 한다. 
나라가 아닌 '사람'을 위하는 정치를 하도록 해야한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전세계적 큰 웃음거리가 된 이 마당에 그나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해방 후 우리 정치도 시민들의 의지 없이 거저 이룬 것은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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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도 수능이 80여일 남았다.
8살의 초등생이 입학하여 12년의 세월을 이 수능을 보기 위해 달려 왔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나고 보면 대입이라는 것이 인생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기도 하였지만, 그 어지러운 터닝을 어떻게 해내느냐는 결국 수능이 측정하지 못한 나의 잠재력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신 상위 4%에 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수행평가 하나도 놓쳐서는 안되며, 고등학교 3년간 12번의 시험을 완벽히 치루어야 한다. 좀 더 놀고 싶은 것을 참고, 좀 더 자고 싶은 것도 참으며 완벽한 이해와 암기를 위해 보고 또 보고 외우고 또 외운다. 이것은 대단한 성실성이자 지구력이고, 끈기이다.
고가 사교육을 받은 학생이 성적이 우수하다는 비판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는 하지만, 결국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이다. 학원에서 알려준 답안을 외우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공부하도록 판을 깔아준 부모의 투자 규모는 다를지라도 머리 속에 정답을 인위적으로 업데이트 시킬 수는 없기에 눈으로 보고 손으로 적으며 암기하는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다.
그래서 수능 성적을 대입에 반영하는 정시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수시의 불공정함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사회에서는 성적우수자 - 명문대 출신 엘리트의 성공에 박수를 치며 인정해준다. 엄청난 경쟁율의 공시도 불합격자들의 시험에 대한 불만은 없다. 게다가 시험을 통과한 이들이 비교적 어려운 환경이었다면 더욱 박수를 보낸다. 이들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는 성공을 하더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인정이다.
그러나 사회는 지난 날의 성실성에 더해 또 다른 것을 요구한다.
이제까지의 성적은 인과관계가 뚜렷한 자료이지만, 이후 필요한 조직에 충성과 복종하는 능력은 객관화 하기 어렵다. 많은 조직이 평가자의 주관적 평가를 믿는 모험을 하는 것이다.
객관적 학습 성적이 평가의 기준이 아니라면, 이제 불공정한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대물림 된 부, 행운,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의 틈새에서 승자가 되기엔 억울함이 너무 많다.

개인의 노력여하에 따라 성공을 이룰 수 있는 사회라면 좋은 성적을 가진 이들이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나라 시험 평가기준이 창의적 사고를 막는 암기력 측정이라고 해도, 사회적 발전의 득실에 관계없이 일단 공정은 하다면 사람들은 수긍한다. 우리들은 그만큼 불공정한 게임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로스쿨과 의학전문대학원 논쟁도 이유있다는 것이다.
성적순은 일단 공평하다.

그러나 12년의 수능준비 기간에 대한 결과가 남은 88년의 인생을 좌우하는 단 한번의 기회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또 다른 1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온 이들에 대해 기회를 주어야 하고, 언제든 노력의 결과를 보이는 이들을 성공의 대열에 끼워 주어야 한다. 동시에 게으른 무임승차자를 골라내야 하는 의무도 있다. 그래야 공평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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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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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썰전

일상에서건진글 2016. 8. 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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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목요일 밤 방영하는 썰전의 시청률이 상당하다고 한다.
케이블 방송임에도 동시대 지상파 방송 시청률을 넘었다고 하니 팬덤이 확실한 듯하다.
유명 정치평론가들이 나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방송 구성은 흔하다. 단지 진행자가 인기 연예인 김구라라는 점도 강점이 되겠지만, 그 한 가지 이유로는 부족하다.

왜 유독 썰전은 시청률이 높을까?
출연자들에게 집중하도록 하는 무대 구성과 발언의 무게에 힘을 실어주는 분위기가 분명 느껴진다.
다른 정치쇼는 뉴스세트에서 조금 확장된 정도이거나 연예인들이나 패널들이 다수 출연하여 마치 주부대상 토크쇼를 보는 듯 하다. 둘의 공통점 이자 썰전과의 다른 점이 바로 출연자 발언의 경중인 듯하다.
물론 썰전에서도 출연자들이 썰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분위기를 이어가기도 하지만, 결국 출연자 본인의 소신에 맞는 주장을 강력히 피력하고 그 발언에 무게를 실어주기 위한 흐름이라 보여진다.

두번째,
사람들은 사회현상을 궁금해는 하지만 분석하기는 싫어한다.
누군가 분석해서 설명 해주는 것을 받아먹고 싶어한다.
jtbc 뉴스룸도 다른 방송사 뉴스와 다른 점을, 그들이 말하는 것 처럼, 내세우기를 '한걸음 더 들어간다'는 것이다.
공중파 3사의 뉴스처럼 취재된 내용만 말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이어질 예상 시나리오나 사건의 이유 또는 의도, 과거 사례 혹은 해당 발언의 사실여부를 확인해보거나 등의 친절한 해석이 있어 시청자로 하여금 사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게 도와준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원인이 대부분이 결국 이기주의로 귀결되기 때문인지, jtbc 뉴스룸에서도 어떤 해석의 일관된 방향을 제시하는 듯하다.

사람의 목숨이나 인권에 관련된 문제는 명확한 답이 있다. 이것이 상식이다.
그외 뉴스의 해석은 각자의 몫이다. 그 해석이 내 의견이자 내 가치관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고서를 사면 따라오면 해설서 처럼 우리는 해설서를 필요로 한다. (우린 아직도 중립이라는 애매한 잣대 아래서 오락가락 한다.)

이건 교육 시스템과 관련이 없다고 절대 말할 수 없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이들은, 정확히 75년생부터 수능이라는 시험을 치르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이전 세대는 수능을 겪어 보지 않았다.
시험제도가 변해봐야 얼마나 바뀌냐고 하지만 이전의 학력고사와 수능은 확실히 차이가 있다. 학력고사가 단편적 지식의 방대한 암기력을 측정했다면, 수능은 문제의 요점과 흐름을 파악해 관련성 있는 답을 찾는, 이것 역시 암기력을 측정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부분을 콕 짚으라던 시험이 전체를 훑으라는 시도로 변했다는 것이 내 말이다.
부분보다 전체를 보고 과목을 통합해 생각하라는 수능 이란 시험이 근본적 사회변화까지 일으키기 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분명 패러다임이 바뀌었고, 사고체계가 바뀔 것이며 그래서 앞으로 뭔가가 달라질 것을 예상하게 한다.
물론 둘 다 빠른 시간에 정답을 맞춰야하는 시험이라 정답찾기 훈련이라는 중요한 공통점은 있다.
아직 우리 사회의 기성세대는 부분을 보는 것에 익숙한 학력고사를 치른 사람들이 버티고 있다.
곁가지 쳐낸 핵심 요약을 원하고, 정해진 답을 알려주면 기억할 훈련이 된 사람들이다.
스스로 분석내는 것은 지루하고 소비적이며 시간낭비라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정작 원문보다는 전문가들의 친절한 해석과 각주에 더 주목하는 것라고 본다.

학생과 시민들이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자체 해석을 하는 능력이 커져, 사회 지도층의 말을 듣지 않고 대들까 염려하는 현상이 교육에 반영된 결과라고 하면 너무 빅 브라더스 이론 같을까?
사회지도층, 멀리 찾을 것 없이 그들은 바로 우리의 부모이다.
우리의 부모 세대는 자식이 스스로 잘 살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들의 가치관 안에서 움직여주기를 바란다. 왜냐면 그것이 안전하고 편안한 길이라 보기 때문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계속 변하고 있고, 그만 해도 싶을 정도의 변화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지금은 기성세대의 가치관이 계속 가치를 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점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똑똑하다. 해석과 이해력이 빠르다는 이야기다.
조그만 가치관 눈뭉치라도 잘 만들어 놓으면, 눈밭에 굴려서 큰 눈덩이로 만드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우리 젊은 세대만은 공존할 수 있는 미래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한 노예는 주인에게 심각한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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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저주가게 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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