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followed me speaking down and I appreciated his consideration.
"You don't have to speak quietly. This is a cafe, not a library."
But he kept whispering to me. (Ah! Because of this.)
His eyes were only coming into my eyes.
We was looking at each other in between the tables.
His deep eyes were clear and honest.
He often smiled, but he had never built the wall forward me.
He didn't modify my words, he didn't copy mine.
It's usually like this going on.
My guests arrive on time or a little late. They evaluate my English.
'Mine is Good' or keep asking me to say it again.
People who have lived only in English or had the privilege of speaking English are unfamiliar with the environment in which they speak only their languages other than English.
Even though they are not the center of the world.
He was courteous all the time and as if I were an interviewer, he was calm and pleasant.
Have done I miss someone's smile?
I thought I was already having enough fun with nice people,
I thought I had been receiving the eyes and smiles of the guests who came to meet me as gifts and holding hands more.
There was a warm feeling in his eyes, and there was no criticism in his expression.
His pigtails, braided and tied back, seemed to just have left the Indian quarter.
I couldn't hold back my curiosity, so I asked.
"You look like a mixed race."
He answered He's Mexican.
In my head, However, in a scene from a drama,
I have portrayed a character who lives in an Indian community, but studies downtown, drinks at a bar,
always feels the gap between tradition and reality.
Unlike ordinary guests who speak sharply and accurately, he spoke softly, showed some shyness.
He seemed to be an emotional, a man who had recovered from a serious illness or was preparing for a new plan.
It was like after a time of his deep thought.
As far as I'm concerned, it just feels like that I felt.
But he looked solid.
I pondered why I kept thinking of him and trying to remember his details.
'What can l do?' 'What can I dream of?'
I thought I was a person with no limits, nothing afraid of change. I thought there was nothing to be worse, nothing to fear.
But I realize I have too much. My place and my role to protect,
what I had to do right now were waiting one after another.
No matter how chemical he was, there was no more I could do.
Another important fact was that this was purely my own feelings.
I opened the file and looked at the crammed letters.
'Those are too heavy...'
But I have to send anything today. I just have time now. And I just wanted to finish copy quickly.
Person who is in the association asked me that they want my story for their autumn magazine 2 weeks ago.
I already have 2 pages enough to send, but I wasn't sure if the two pages would be okay.
As I tried to expend the simple story, the sentences become verbose.
After roughly making the pages, I put a plausible file name.
Since it was a request without fee anyway, I decided that there was no need to struggle anymore.
Quick after I sent an e-mail, new request came to reduce the amount.
'Are you kidding me?'
I numbered the paragraphs and sent them a reply to pull out the paragraph whichever you wanted.
Then, I leaned my neck against the chair.
I still have been dopey.
I thought I knew why I was so dazed.
The guest I met yesterday was definitely different.
He was polite and nice, just like any other guest.
But he was different.
It wasn't because he was a transgender.
I felt him as his gender from start to finish.
And whatever surgery he did was not the reason.
I kept looking for a reason in my head.
'Why my heart flutters?'
I was already aware.
His smile, tattoos, clothes and shoes, hair and piercings.
Every single one of them was left as an afterimage in my head.
White T-shirt and black pants, black sling back on his shoulder, Tuck it behind from the front of braid and tied behind back, long hair. piercings on nose and ears, arm tattoos, small but neat appearance, humble and warm attitude from beginning to end....
All I know is that he is a 24-year-old college student and Mexican-American.
He said he doesn't have a girlfriend, but I can't believe it. Luckily, I know his Instagram, so I can look into it.
He told me I wasn't old yet, and I didn't look old. But the facts are true, and flattery is flattery....
After a long time, I opened the box, took out the stone and took out the paints.
I started dotting the Blue Evil Eye for him.
'I knew it already. I knew it at first sight. So what can I do?... Nothing.'
I am supposed that I'll be angry when I see him tomorrow. Because I know I can't do anything. If he reads my feelings, he'll be fed up with me....
I really have naver ever even imagine.
I never thought I'd feel it again.
If I were his age, I had go straight to him, then no matter what.
요즘 재미있는 뉴스도 넘치고, 현직에서 똥볼차기가 실시간 생중계되는데도 여전히 박근혜 탄핵 보복 찌라시가 돌고있네요. 역시나 극우의 공주마마는 맞나봄...
가짜뉴스 요약은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신상몰이 뉴스로 명예훼손이 유력한데요, 이정미재판관이 여성에다가 가해자를 용서해준 일이 있어서 인지, 공격 타겟이 된 듯합니다. 탄핵심판때 이정미 재판관 살해협박범이자 박사모카페 회원인 대학생을 이정미 재판관이 처벌불원서를 내고 풀어줬다고 합니다.
아래 가짜뉴스 내용 중 군부대 해체주장은 해체가 아닌 개편으로 인구가 줄어들고 있어 개편이 필요함에도 군부대 개편당시 지역경제가 어려워진다는 반대가 있었는데, 부대인근 자영업자들이 이익을 위해 국군이 있는 건 아니니까요.
??????? 왜 이 이제서야 이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사실을 ...발표하는..?? ● 이재명의 뒤에는 이재학 목사라는 좌빨총책이 있다. 이재학의 딸이 이인영 장관의 아내다. 성남에서 처음 시행되는 제도들은 모두 공산화와 관계있다. 공유재산제도는 정부재산을 좌빨 세력들이 소유하려는 방책이다. 정신차려서 당신의 돈과 생명을 지켜라! - By 최상열 -이정미가 원천적인 빨갱이였군요.우파들은 이런 정보를 이제서야 아는데... 좌파들은 이를 이미 알고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을 이런 빨갱이 이정미 앞으로 이끌어 간 것이다. 그래서 법정에서 싸우자 하고 청와대를 떠나게 만든 것이다.💃 박근혜대통령을 탄핵했던 헌법재판관 이정미의 부친은 울산 용잠초등 이재만 교장출신이고 그녀는 그의 딸이며, 학교설립자 이종만은 월북하여 이북에서 김일성 대학설립. 이정미의 부친은 교장 재직 때 북한에 돈을 보내었다는 현 생존 교사의 증언, 박대통령 탄핵은 문재인과 이정미의 공작정치의 계획된 탄핵의 칼이다. 💃헌재 이정미는 문재인과 오래 전부터 절친 사이이며 친정가족들과 문재인 양산집에 방문하는 사이이고 이정미의 남편은 통진당 당원이다. 💃이정미는 박정희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를 의롭게 보여 법대 지망. 💃이정미는 김재규의 후예다. 🆘 군부대 해체! 세계 유일 분단국가에서 군부대 해체를 왜 하는가? 해체한 부대 ●2사단 ●27사단 ●23사단 ●20기계화사단●26기계화사단●28사단●30기계화사단 등등 아래 열고 보면 더더욱 많아서 기절 초풍 합니다요. 완전 중 무장사단을 거의다 해체하네? 성질나서 말이 안 나오고 잠도 안옵니다. 이 놈의 문재인 죽일놈 입니다. 이글 혼자만 보면 절대안됩니다 널리널리 퍼뜨려 주시길 꼭 부탁 드립니다. 전국민 공유 좀 합시다. 파주 사는데 무서워 죽겠습니다. ^^^^^^^^^^.(펌글)
참고로 탄핵심판 결정문입니다. 그날 떨리던 기분이 기억나네요.
"피청구인은대국민담화에서 진상규명에 최대한 협조하겠다고 하였으나 정작 검찰과 특별검사의 조사에 응하지 않았고, 청와대에 대한 압수수색도 거부하였습니다. 이 사건 소추와 관련한 피청구인의 일련의 언행을 보면 법 위배 행위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여야 할 헌법 수호의지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청구인의 법 위배행위가 헌법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가 중대하므로 피청구인을 파면함으로서 얻는 헌법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입니다.이에 재판관 전원의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 결정에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피청구인은 생명권 보호 의무를 위반하지는 않았지만 헌법상 성실한 직책수행의무 및 국가공무원법상 성실 의무를 위반하였고 다만 그러한 사유만으로는 파면 사유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재판관 김이수, 재판관 이진성의 보충의견이 있습니다. 또한 이 사건 탄핵 심판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헌법질서를 수호하는 문제로서 정치적 폐습을 청산하기 위하여 파면 결정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재판관 안창호의 보충 의견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선고를 마칩니다.
이 주문은 이정미재판관 혼자의 결정이 아닌 7명 전원의 인용 즉 찬성이었고 자신을 개신교도라 밝힌 안창호 재판관이 탄핵보충의견에 성경을 인용해 구구절절 탄핵 찬성에 대한 변명을 했었습니다. 그냥 반대를 하던가...
성별, 성별고정관념, 외모와 옷에 집착하는 트랜스젠더를 이해하는 방법은 왜 이렇게 어려웠을까?
트랜스젠더는 솔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가진 성별혐오나 성별고정관념을 인정하고 스스로를 성별에 가두는 것은 자유이나 그들이 여자가 되었다고 혹은 남자가 되었다고 자신 외에 세상을 위해 생각할 여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너는 여자가 됐고, 다른 여자들은?'
여성들이 지난 세월동안 싸워온 성별고정관념을 깡그리 무시하고 '아 됐고, 나만 여자면 돼!' 트랜스는 트랜스이지 패미니스트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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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작가 라이오넬 슈라이브의 프로스펙트 매거진 기고문 2016
<성별 아무짝에 쓸모없는. 나의 자아는 성별에 갇히지 않는다>
성별 -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 정체성에 대한 집착은 문화적 퇴보입니다. 저의 자아는 섹스를 초월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는 여자라는 것을 충동적으로 경험했습니다. 두 형제 사이에서 자라면서, 저는 바보 같은 드레스를 입어야 했고, 제 팬티가 그네에서 보여지는 것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제 형제들은 무더운 노스 캐롤라이나 여름 동안 셔츠를 벗어야 했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몇 년 동안 제 가슴은 그들의 것과 똑같아 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들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월경은 끔찍했습니다. 한 번 씩 부었고, 심한 요통을 겪고 냄새나는 실제로 기저귀 차기를 제 남자형제들은 반복했을까요? 저도 임신에 대한 신의 공포를 느꼈던 사람이었어요. 부모님은 부모님의 아들들에 비해 제 직업 전망에 대한 기대를 분명히 줄여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87세의 나이로, 아버지는 마침내 작년에 허락하셨습니다: "알다시피, 우리가 너를 과소평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전히 이유를 인정할 용기를 내지 못했고, 나는 아버지의 딸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역사적으로 운이 좋았습니다. 1974년 제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혁명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여성의 해방"은 여성스러운 프릴이 달린 쿠키 커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성이라는 것은 더 이상 치마, 하이힐, 가정주부로 정의되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평등했습니다. 남녀 모두 그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포스트 젠더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2016년으로 넘어가면: 제가 틀렸습니다.
대신 우리는 억압적으로 성별이 있는 세상에 들어갔고, 그 어느 때보다도 정체성이 자신의 성에 더 많이 묶여 있습니다. (참고: 사전적 정의는 성별과 성별을 상호 교환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며, 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제미마 루이스가 3월에 데일리 텔레그라프에 쓴 글에서, "당신은 젠더, 바이젠더, 시스젠더, 데미젠더, 그레이젠더, 인터젠더, 젠더리스, 젠더 퀴어 또는 제3의 젠더가 될 수 있지만, 하느님에 의해, 당신은 라벨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게이와 레즈비언의 세계는 주류로 발전하여 이제 그들은 지루해졌고, 서구 미디어는 트랜스-레즈비언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성차별은 기이하게도 실제 성별 공포증의 통계적인 희귀성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어린이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암시적이긴 하지만, 그 상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더 흔해질 것입니다. 페이스북은 1년 전에 도달한 71개 이상의 성별 선택권을 확장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복잡한 자기 정의의 두 가지 옵션은 "남자"와 "여자"입니다. 이제 사용자는 자신의 프로필을 무제한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 다양성팀이 발표한 대로, "자, 만약 당신이 미리 입력된 성 정체성의 목록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의 것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성별 용어를 최대 10개까지 추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스펙트럼상에 있는 위치가 개성의 핵심 지표일 것입니다. 젠더에 대한 이 피곤한 대화에서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이것이 더 이상 섹스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섹슈얼리티는 어쨌거나 불만족스러운 만능이 되었고, 이를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게이 문화가 성장했습니다. 동성애는 이성애보다 더 이상 정체성을 충분히 나타내지 않습니다.) 젠더는 당신이 하는 일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스펙트럼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자"와 "여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고하게 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 정체성이 성과 관련된 사회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젠더 퀴어"일지라도, 사회 규범으로부터의 소외는 사회 규범의 영속성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여러분이 젠더 퀴어라는 꼬리표를 채택한 거칠고, 근육질이며, 독단적인 여성이라면, 여성스러움은 당신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수다스러움, 연약함, 그리고 수동성과 계속 연관되어야만 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스펙트럼은 고정관념에 따라 달라집니다.
우리는 트랜스여성이 남자로 태어났을 수도 있지만, 여자처럼 "느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삐딱하게 굴려는 건 아니지만, 여자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여성으로 태어나게 된 것은 항상 생물학적 사고인 것처럼 보여왔는데, 단지 유전자가 끌어당긴 행운일 뿐입니다. 솔직히, 여성이 "느낌으로" 느끼는 것은 저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일부 사람들이 그들의 몸으로부터 소외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합니다. (제가 나이가 들면서, 저는 아주 많이 소외되어 있는데, 내가 생각하는 "진짜 나"는 관절염을 앓는 무릎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서 제가 제 무덤을 파는 것을 알고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체적 변화는 옷과 매우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특히 남성에서 여성으로 가는 방향에서는 - 그리고 나는 왜 누군가가 어떤 특정 선택권이 있는 여성이 되고 싶어하는지 당황스럽습니다. 여성이라는 "느낌"은 마스카라, 하이힐, 헤어 익스텐션 및 스타킹을 신는 것과 같은 느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좋을 대로 하세요. 누가 뭘 입든 상관없어요. 하지만 저는 이것을 제 성별을 바꾸는 이유로 꼽고 싶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여성들은 대부분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고 돌아다닙니다. 케이틀린 제너(카일리제너의 아버지 트랜스젠더)가 제시한 여성스러움의 버전은 제게는 생소합니다. 과장되게 과장되고, 과장되고, 과장되고, 과장되고, 과장된 느낌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표면으로 구성된 여성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초등학교들이 빵을 팔아 후원하던 방식으로 "트랜스젠더 데이"를 여는 이 계몽주의 시대에, 우리는 아이들에게 그들의 성별을 융통성 있게 보고, 남자 아이 혹은 여자 아이 혹은 그 중간쯤 되는 것을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선택을 제시하면서, 우리는 성 중립적인 장난감으로의 진보를 뒤집고, 남성이나 여성에 대한 가장 낡아빠진 목소리를 가차없이 보강하는 것입니다. 소년은 거칠고 시끄럽고 공격적이며 트럭을 가지고 놉니다. 소녀는 부드럽고 조용하고 예민하며 인형을 가지고 놉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제가 본 인기있는 십여 편의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트랜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옷으로 귀결됩니다. 어린 소년은 드레스를 입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신이 소녀가 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은, 제가 오래 전에 성별 선택 싸움을 마무리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이 훨씬 좋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여성이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꺼이 그 곳에 갑니다. 남자든 여자든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두뇌의 차이를 토론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차이들이 성별에 속하는 개인들 사이의 차이에 따라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고통스럽게 어떤 종류의 분석을 하는 것보다 당신이 어떤 성별인지에 관심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데 훨씬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자아의 본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일련의 외부 사실과 존재에 대한 주관적인 경험으로 구성됩니다. 혼란스럽게도, 자아는 우리가 태어나는 것이고 우리가 만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수상 스키를 탈 수도 있지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선택할 수 있는 외적인 것들, 즉 시대, 국적, 부모, 부모 종교, 부모 경제 계층, 인식된 인종, 성별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외 외부와의 관계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 외부와의 관계를 강조하거나, 절망하거나, 포용하거나, 또는 우리 자신이 외부와 반대되는 모습을 볼 수는 있지만, 사실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지난 제 경력 동안, 저는 미국에서 모유수유와 양육을 하는 Tar heel 노스 캐롤라이나 뿌리 남부 작가를 연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신에 저는 제 조건의 확대를 최소화하는 경향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에서 30년을 산다고 해서 제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제가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도 사실인데, 저는 싸움을 거의 멈춘 지 오래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대안이 훨씬 좋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키가 작은 경우 다리를 쭉 늘릴 수 있습니다(권장하지는 않지만). 큰 가슴은 줄일 수 있습니다. 음경은 길어질 수 있습니다(비록 권장하지는 않지만). 코는 모양을 바꾸고 노화를 위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별도 문제가 없습니다.
성별은 더 이상 고정불변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택입니다. 성전환 외과의가 자기 자신에게 성별이 있다는 생각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매우 좋습니다. 젠더화된 자아는 잘못된 신체로 태어날 수 있으므로 성의 물리적 기표를 변형함으로써 의사는 신체와 자아를 일치시킵니다.
그러나 자아에 성별이 있습니까? 남성과 여성은 영혼 자체가 남성과 여성입니까? 아니면 신체를 재구성할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만지작거리지 않습니까? 성형 수술은 주로 사회적 조작 행위가 아닌가?
하지만 자아는 성별을 가지고 있을까요? 남자와 여자는 영혼 속의 남자와 여자입니까? 아니면 신체를 재구성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로 만지작거리지 않습니까? 성형수술은 주로 사회적 조작이 아닌가?
우리의 귀 모양과 같은 정체성의 외부와 심지어 우리의 성별이 의학적으로 유연해지면서,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이 수정의 대상이 되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저는 노스 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르지만, 마치 뉴욕에서 태어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신학교 총장이었던 아버지가 계실지 몰라도 탄광부의 딸처럼 느껴집니다. 제 동료들이 제 자신에 대한 생각에 쾌활하게 동의하고, 뉴욕 탄광 노동자인 제 아버지의 안부를 묻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트랜스젠더 반전이라는 대명사는 외부 세계가 주관적 경험에 부합한다고 주장하는 불안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한 오늘날의 광범위한 준수는 "관용의 신호"일 뿐만 아니라 소름 끼치는 방황, 겸손한 공모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성으로 전향하는 여성들에게 여성으로 태어난 것은 비록 그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사실일지라도 사실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이 느끼는 성별로 아기를 식별하기 위해 출생 증명서를 변경하면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씁니다. 이것이 바로 오웰의 진리 감각인 집단 최면이 있는 방식입니다. 젠더는 단순한 사회적 구성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물학적 구조입니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자아는 구성적이고 완전한 멈춤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가 붙어있는 요소들로 만들어지지 않고, 완전히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작년에 트랜스섹슈얼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처럼 느낀다며 흑인으로 가장하고 있던 전미 유색인종 발전 협회의 지역 지부 회장인 레이첼 돌레잘을 비교했을 때, 그 평행은 많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이 비교를 거부하더라도) 분명히 우리는 우리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료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황제는 항상 옷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념에서 몇 가지를 얻는 것은 다행입니다. 1978년에 태어난 브리스톨 약사의 아들이 아니라 19세기 프랑스에서 태어난 귀족의 딸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우리가 처한 상황의 세부 사항은 제한적일 수 있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스스로 만든 지옥에서 방황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그래서 나는 여성이 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태어난 이유이고, 남성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 모든 공포 쇼 수술을 하는 것은 싫었을 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 말괄량이였고, 제 형제들과 함께 모형 자동차를 가지고 놀거나 장난감 기차가 높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충돌하게 만들면서 흙 속에서 스크랩을 했습니다. 저는 바비를 피하고 아기 인형을 싫어했습니요. 저는 청바지와 플란넬 셔츠를 위해 드레스를 싫어하고 레이스와 플라운스로부터 도망쳤습니다. 15살에 이름을 마가렛에서 라이오넬로 바꿨습니다. 만약 내가 50, 60년 뒤에 자랐다면, 부모님이 나를 치료사에게 데려가 호르몬 치료를 받게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여자라는 게 너무 멋져서가 아니라 여자든 남자든 내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여성으로서의 제 자신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방에 혼자 있고, 잠들고, 숲에서 혼자 하이킹을 하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생각하며, 저는 여자로서 제 자신을 가장 먼저 경험하지 않습니다. 저는 하루 종일 입술과 가슴, 난소를 생각하며 돌아다니지도 않고, 손톱 손질이나ㅌ미용실 약속도 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자신의 성별이 없습니다. 분명히 저는 제가 아는 한 사람이라는 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만 증언할 수 있지만, 저 혼자 그런 자기 인식을 즐긴다는 것은 상상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자아성이 신경학적 착각이 아닌 진짜라면, 그것은 성별을 초월합니다.
"인생은 우리 자신을 완전히 화해시키기에는 너무 짧습니다. 약사의 아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귀족의 딸이라고 결정하기에는 말입니다."
자신의 성별을 제약한다고 간주하는 경향이 더 강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그 제안을 더 매력적으로 보게 마련입니다. 남성들은 종종 그들의 성별이 그들에게 주는 제한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제한들이 더 적기 때문입니다. 눈치채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여전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의심스럽다면 세계 지도자들의 회의를 스캔하십시오.) 하지만 두 성별 모두에게, X 대 Y 염색체의 사고를 강조하는 것은 확실히 우리가 어떤 스펙트럼에서 우리 자신을 찾는 정확한 지점을 정하는 것보다 더 유력한 방향입니다. 그 자체는 시대에 뒤떨어졌어야 할 진부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개념에 의존합니다.
제가 자주 하는 남성 캐릭터의 입장에서 어떻게 설득력 있게 글을 쓸 수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비밀이요? 비밀은 없습니다.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은 다른 여자의 입장에서 글을 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페이스북의 71명의 성별과 숫자를 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신에 대한 경험은 크게 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 우리의 캐릭터들이 다르네요. 하지만 우리 성격의 중요한 구성 요소는 성별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강인함, 폭력성, 울지 못하는 능력, 부드러움, 배려심, 운전할 수 없는 능력 등 여러 자질들을 남성과 여성에 국한시키는 것을 고집하지 않는 한 말입니다.
내가 여성이라는 육체적인 불편함을 생각하면서도 잉태할 때의 이니, 마이니, 마이니, 모의 결과는 긍정적이었습니다. 나는 중년의 대머리와 성행위 불안에서 벗어나 안심했습니다. 내가 백인, 번영하는, 미국인인 상황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인류의 한 부류에 속하는 것은 확실히 내 세계 감각에 도움이 되었고 더 나쁜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동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동전 던지기는 내가 그와 같은 장비를 자랑했다면 그의 애정을 위한 후보로 나를 의아하게 여겼을 이성애자인 매력적인 남편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 글이 선동적으로 보일 것이라는 바로 그 사실은 성별이 얼마나 파괴적으로 매우 중요했는지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는 문화적으로 한 걸음 후퇴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내 사춘기의 여성 해방 운동은 성 역할의 해방을 주창했고, 이제 우리는 성 역할의 해방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 정체성의 연속체에 우리 자신을 고정시키고 있습니다. 마치 진부한 것과 올바른 관계에 도달하는 것은 자기 인식과 마찬가지인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제 묘비명에는 "그녀는 여자였어요"라고 쓰여있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는 작가, 요리사, 조각가, 테니스 선수입니다. 입도 크고 머리도 화끈하고 상처도 잘랐고 햄도 잘랐어요 여자요, 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그러나 그 세부 사항은 부수적인 것이며, 목록보다 훨씬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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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글에 대한 반박문 아비가일 맥스웰 MtoF 맥스웰은 트랜스젠더가 되기 위해 겪은 어려운 과정을 통해 성전환이 쉽지않고 필연적인 결정임을 강조했다. 허나 스스로를 다른 성별로 느낀다는 점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모르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유가 너무 명확해서가 아닐까? 끝에 트랜스젠더가 사회에 무해하다고 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유의미한 발전을 가져온 것 같지는 않다.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틀렸다 - 젠더 문제 저는 트랜스젠더 여성입니다. 그리고 명확하게 정의된 정체성을 가짐.
주말에 파티에 참석해 햇살이 비치는 친구 정원에 앉아 있었는데, 네 살짜리 캐시가 “저 사람 남자예요?”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는 아비가일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말하기도 전에 아이의 아버지가 아이를 낚아채 앗아갔습니다. 내가 설명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여기 여자애들만 있다고 아이에게 말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나는 캐시가 일반적인 대답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도전할 수 있는 대답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딸을 키우는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정원을 가로질러 약하게 소리쳤다.
기사에서 라이오넬 슈라이버는 성 정체성과 그에 따른 트랜스 운동이 고정 관념에 달려 있다고 주장합니다. 네, 물론 축구를 하는 모든 소녀나 발레를 하는 모든 소년이 트랜스젠더는 아닙니다. "남성적" 또는 "여성적"이라고 생각되는 특성은 모든 사람에게 공존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광범위한 경향을 식별할 수 있다고 해도 둘 사이에 큰 간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있습니다. 수술적 변화를 원했습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내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그것을 원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이 중 어느 것도 나에게 의미가 없습니다. 여자 옷을 입고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터닝포인트가 찾아왔습니다. 나는 더 이상 사람으로 변장한 신을 숭배할 수 없다고 교구장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항상 그렇게 보이고 싶단 말입니까?" 그 이후로 의상 센스와 메이크업 솜씨가 좋아졌지만 대답은 '그렇다' 였습니다. 나는 차라리 지금의 남성보다 명백한 성전환자처럼 보이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의복이나 활동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의된 정체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도움이 됩니다. "부치 레즈비언"은 인간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며, 여성이 자신이 어느 한쪽이라고 결정하면 갑자기 자신의 감정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정체성은 우리가 우리가 될 수 있는 허가를 줍니다. 스스로에게 “나는 트랜스섹슈얼이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는 것이 부끄럽기보다는 달성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슈라이버는 “트랜스젠더 운동 전체가 옷과 끔찍하게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무시하며 씁니다. 그러나 옷은 정체성을 전달하는 데 있어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옷은 우리가 자신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저도 청바지를 입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스타킹은 한 켤레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1950년대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남성적인 여성과 여성적인 남성은 점점 더 많이 받아들여지고, 다양성은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트랜스젠더 및 기타 정체성에 대한 수용 증가는 문화적 성별 차이를 전복하고 자유의 성장을 촉진합니다.
슈라이버는 그녀가 지금 성장했다면 그녀의 말괄량이 같은 행동이 호르몬 요법으로 이어졌을지 모른다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가능성이 낮습니다. 트랜스 사람들은 호르몬을 "달콤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전달되지는 않습니다. 수술이나 호르몬 요법이 일어나기 전에 많은 평가가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는 호르몬이 임신 또는 심지어 성관계를 갖는 능력에 미치는 손상을 알고 있습니다. 외과의사는 환자에게 적합하다고 확신하는 경우에만 유방이나 고환을 제거합니다.
슈라이버는 또한 소셜 미디어에서 그녀의 기사에 대한 화난 반응을 기대합니다. 이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우리를 도깨비로 만들기 위해 여장을 한 남성이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를 수집하는 여성들과 같이 이보다 시스-섹시즘의 훨씬 더 나쁜 예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조롱과 편견에 시달립니다. 내가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가 나에게 "빌어먹을 헛소리"라는 소리를 냈을 때, 다른 낯선 사람이 지나가는 차 앞에서 나를 밀어내려고 했을 때, 나는 우리가 불러일으키는 증오에 대해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무해합니다.
혹자가 나의 정체성이나 내 신념에 대해 설명해보라거나 증명해 보이라고 한 적이 있었다면, 나는 많이 당황했을 것이고 화가 났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트렌스젠더를 이해하고 말 권리는 나에게 없다. 그들은 그들이고, 나는 또 나의 신념을 지키며 살아갈 뿐이다.
고통을 감수하고 트렌스젠더가 된 이들보다 이미 훨씬 더 나쁜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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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I'm going to sort out my position on social minorities. As a feminist, as an adult responsible for society. I agree with author Lionel Shriver, and I'm still on the same side. This is my position about LGBTQ. It was hard for me to understand these people. But I finally found answer. There are the worst people than me and us.
Someone ask me about my identity or my beliefs to explain or prove it, I would be very embarrassed and angry. To be sure, the right to understand and not understand transgender is I don't have it. They're them. I just live up to my beliefs. There are far worse people than transgender who risk discrimination and suffering to become who thet are.
사건의 파장이 워낙 크다보니 학교측이 내놓은 내놓은 대책이 cctv확대 설치인데 아직도 원인을 잘 이해못하는 듯하다.
한편, 가해자 신상을 보호한다는 기사가 나온 것은 이미 마이너 사이트 커뮤니티 등에서 퍼질대로 퍼졌다는 것. 남들보다 먼저 신상정보를 알았다면, 너무 마이너에 빠진 것?
cctv 더 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어떤 넘들은 술먹고 충동적으로 성범죄를 저질렀다는데 술이나 성욕이 결정적인 문제가 아니다. 술먹고 성욕이 끓으면 길거리에서 나무에 대고 마운팅을 하거나 바운스 하겠지. 사람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그간 그러한 시도를 해봤거나 지속적으로 준비했거나 그런 게임이나 동영상에 빠져 살았거나 그냥 사이코패스 인 것이다. 강간이 그렇게 쉽게 순간의 충동으로 벌이는 간단한 범죄가 아니다. 강간 후 살인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역시 강간은 권력을 폭력적으로 드러내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약해 보이는 상대를 자기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권력욕.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여성이 살해당하고 또 당하고 매일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차별은 없다느니 몇몇 발정난 미친놈의 소행이라며 축소시킨다. 20살 대학생이 이번 미친놈이고 다음 미친놈은 어디서 나올까? 사망한 대학생은 억울하게 죽었고 학교와 학생은 피해자에 대해 슬퍼하나 가해자에 대한 멘트가 없다. 이들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에 빙의된 듯하다.
세상에서 한 명 정도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그곳에서 만큼은 마음대로 하고, 그 시간 만큼은 하고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그것이 권력이고 폭력이며, 세상인 것이다.
페미니스트 교사의 '은밀한' 성평등 수업 이야기[헤드라인 속의 'OO녀'] 신지혜 기자 조형국 기자
초등 6학년 국어교과서에는 한 여성을 사랑한 도깨비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예쁜” 버들이가 아픈 어머니를 위해 쉽게 샘물을 뜰 수 있도록 몽당깨비는 샘물을 그의 집 근처로 옮기고, 그 죄로 1000년 동안 구덩이에 갇히는 벌을 받았다. 몽당깨비는 버들이가 자신을 속여 샘물을 독차지 했고, 집 근처에 말 피를 뿌려 도깨비가 접근할 수 없게 했다고 했다. ‘인물들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를 이해하는 게 이 단원의 교육 목표인데, 많은 교재는 몽당깨비가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고 버들이는 ‘현실적 이익’을 추구한다고 설명한다. 몽당깨비는 순수하며 버들이는 계산적이다. 이 추론의 근거는 모두 몽당깨비의 말에서 비롯됐다.
“그런데 말야… 버들이는 왜 집 앞에 말 피를 뿌렸을까? 몽당깨비가 한 말을 들으면 버들이는 뭐라고 답할까?”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 재직 중인 이신애 교사(31)는 다른 가능성들을 아이들에게 묻는다. ‘버들이는 정말 욕심쟁이였을까?’ ‘다른 도깨비들이 다 떠난 샘물에 혼자 남아 자신을 기다리는 몽당깨비를 본 버들이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이야기에 없었던 가능성이 채워지면서 버들이의 관점과 감정이 재구성된다. 아이들은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이 교사는 지난해 4월 ‘스토킹 처벌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스토킹 범죄의 처벌이 10만원 이하 벌금에 그쳤다는 점, 법 제정 이후 달라진 인식을 덧붙인다.
‘정치적 중립에 위배된다’ ‘그릇된 인식을 심는다’…성평등·페미니즘 교육에 따라붙는 대표적인 반발과 오해들이다. 여성가족부 폐지가 정부 목표가 되고 성 대결이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며 젠더갈등이 유행어처럼 쓰이는 상황. 교육 현장의 성평등 교육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교사는 ‘그 수업’을 이어간다. 단, 수업 방식은 보다 전략적이고 정교해졌다. 성평등을 직접 거론하지 않는, 성평등 미디어 수업이다. 지난달 23일 이 교사를 만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성평등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이 교사와의 일문일답.
-‘성평등을 말하지 않는’ 성평등 미디어 수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성평등 수업을 하자고 하면 아이들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해서 몰입하지 않아요. 아이들 사이에선 성차별을 인정할 만큼 문제가 크지도 않고 이전부터 인권 교육을 받아서 어느 정도는 들어본 얘기이기도 하니까요. 처음엔 논리적으로 반박해야 하는 줄 알았어요. ‘네가 유튜브에서 배워온 혐오를 선생님이 깨주마’ 이런 욕심이 있었죠. 그런데 얻는 것도, 남는 것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어요. 외부 강의에서 성평등 수업을 하면 남자 아이들만 질문하고 대답해요. 여자 아이들은 고요해요. ‘메갈’ ‘페미’라 낙인 찍힐까봐 대답할 엄두를 못 내요. 편견이나 오해 없이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수업을 ‘빌드업’ 해가면 나중엔 아이들이 이해를 하더라구요.”
-‘빌드업’은 어떻게 하시는 건가요.
“예를 들면 경제 수업을 더 깊게 하는 식이에요. 온라인 쇼핑몰에서 특정 상품을 검색하면 가격도 비싸고 상품평도 적은데 맨 위에 뜨는 것들이 있잖아요. 왜 이 상품이 가장 위에 있는지 물어보면 아이들이 웅성웅성 얘기를 해요. 우리에게 노출되는 정보에 기업의 이윤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다음으론 같은 방식으로 아이들이 익숙한 웹툰을 다뤄요.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것, 댓글이 많이 달리는 것만 생각한다면 어떤 주제를 다루는 게 유리할까? 사람들이 싸울만한 주제일수록 댓글이 많이 달린다는 건 아이들도 알아요. 요즘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많이 싸우는 주제가 뭐냐고 물으면 ‘남혐, 여혐’이라 얘기해요. 알고리즘으로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유튜브도 마찬가지에요. 오늘 본 영상이 내일의 영상을 결정하고, 지속적으로 자극적인 콘텐츠가 노출되면서 재생산 되는 구조를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거예요.”
-‘여성혐오’를 아이들에게 설명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어떤 콘텐츠가 여성혐오적인지 아이들은 알아요. 다만 그게 잘못 됐다고 생각해도 그냥 넘어가거나, 또는 그냥 재밌다고 생각하는거죠. 재밌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여성혐오 콘텐츠와의 거리가 가까운 거예요. 아이들은 좋아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유튜브나 웹툰 같은 플랫폼이 전략적으로 여성혐오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면 얘기가 달라져요. ‘나한테 좋은 제품이라 추천한 줄 알았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어?’라고 생각하면 거리두기가 되잖아요. 그때부터는 교사가 파고들 틈이 생기는거죠. 여성혐오를 미끼로 쓴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아이들은 객관적인 시각에서 미디어를 판단할 수 있게 되겠죠. 여성혐오 미디어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 교사는 쇼핑몰, 웹툰, 유튜브를 거쳐온 아이들에게 인터넷·신문 기사의 제목을 내놓는다. 기사 제목에도 언론사의 의도가 담긴다는 것,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자극적·선정적 보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인터넷 기사를 많이 보나요? 언론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아이들도 ‘기레기’라는 말을 알아요. ‘얘들아. 너희도 잼민이(어린이를 비하적으로 일컫는 혐오 표현)라고 부르면 기분이 나쁘잖아. 기자들도 비하적 표현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텐데 왜 이상한 제목의 기사를 쓰는걸까?’라고 물으면 대번 “돈이 되니까요”라고 얘기해요. 누구도 좋다고 평가하지 않는 제목의 기사들이 왜 계속 생산되는가, 클릭만 되면 수익이 보장되는 구조에 문제는 있지 않은가까지 고민을 이어가게 돼요. 쇼핑몰과 웹툰, 유튜브를 관통해온 자극적·선정적 제목과 썸네일(대표 이미지·미리보기 영상)의 문제가 언론에서도 같은 형태로 발생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이해하는 과정이에요.”
이 교사는 우크라이나 여성 유도 선수 다리아 빌로디드의 소식을 다룬 여러 기사 제목에서 빌로디드를 지우고 학생들에게 보여준다. 그리고 그 기사의 주인공이 누구일지, 어떤 내용을 다룬 기사일지 묻는다. ‘눈물의 한판승, 동메달 획득한 역대 최연소 챔피언’ ‘외모 되지, 실력 좋지…반짝반짝 얼짱들’ ‘모델인 줄 아셨죠? 제 정체를 공개합니다’ 등의 제목을 본 아이들은 ‘17살, 피겨 선수, 아이돌, 인플루언서, 모델, 운동선수’ 등 각자 생각한 답을 늘어놓는다. 왜 유도 챔피언에게 얼짱, 모델, 미모를 붙일까. 이 질문에 대한 아이들의 답도 하나로 모인다. “조회 수를 높이려고”다.
이 교사의 성평등 수업은 ‘올바른 건 아니지만 솔직히 너도 그렇게 생각하잖아’ 식의 혐오의 씨앗이 공감을 얻어 싹을 틔울 수 없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가 학생들에게 “너희는 다 다른 사람이야.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야”라고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아이들은 반 친구들의 평균 발 사이즈(235mm) 실내화를 신고 머리 위에 공깃돌을 얹은 채 걸으면서 ‘평균의 함정’을 배우고, 마피아 게임을 하면서 ‘정체성을 숨기는 사람들’의 입장을 간접 체험해본다. 8년의 교직 생활로 얻은 노하우다. 그가 만든 ‘성평등 미디어 리터러시’ 강의 교안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젠더온’에도 게시돼있다.
-성평등 수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2015년에 교사가 됐어요. 6학년 담임을 맡게 됐고, 한창 철구(여성 비하, 5·18 폭동 발언 등 혐오 콘텐츠로 유명해진 인터넷 BJ)가 유행하던 때였어요. ‘선생님 섹스 해봤어요?’를 묻는 애도, 수업 중에 제 뒤에 100원을 던지고 ‘반응이 궁금해서 그랬다’는 애도 있었어요. 그땐 제가 무능해서 애들이 저를 만만하게 본다고 생각했고 카리스마 있는 교사가 돼야겠다고 했죠. 빨간 립스틱 바르고 진한 향수 뿌리고(웃음). 나아지는 건 없었어요. 결국 그 남학생이 저를 밀어서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크게 다치는 일이 있었어요. 고통스런 1년을 보내던 차에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이 터졌어요. 사건이 있기 직전 주말, 사건현장 근처에서 친구들과 만났거든요. ‘내가 약속을 하루이틀만 늦게 잡았다면?’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어요. 그때도 저는 그 사건을 ‘안전에 대한 위협’으로만 느꼈지 성차별로 생각지 못했어요. 교사 커뮤니티 인디스쿨에 ‘여성의 안전을 위해 학교에서도 성평등 교육이 필요하다’는 글이 올라왔을 때만 해도 몰랐는데, 나중에 ‘꼴페미가 이상한 수업 만든다’ 이런 댓글들이 달리면서 논란이 됐어요. 그래서 알게된 게 초등성평등연구회였고 활동한 게 6년쯤 됐네요. 2018년부터 제대로 된 수업안을 개발해 성평등 미디어 교육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의 변화를 체감하나요.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대중가요의 여성혐오를 다뤄보겠다며 감히 방탄소년단(BTS)을 건드렸다가 역효과가 거의 교사 탄핵 수준으로 일었고요, 장학사 참관 수업에서 육아휴직 통계를 꺼냈다가 수업 내내 ‘육아휴직이 뭐냐’ 설명하다 종이 친 일도 있었어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나아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많이 받아서 일상의 차별도 잘 발견해요. 아이들이 말과 행동으로 차별 또는 혐오를 하는 건 못 봤어요. 그들에게 말을 거는 어른들, 온라인 플랫폼이나 미디어가 훨씬 문제가 많죠. 언론에 문제적 아동·청소년들 얘기를 다루면서 교권 보호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많아요. 공감 가는 부분도 있지만, 어른들이 만든 콘텐츠가 아이들을 그리 만들었다 생각해요. 제가 이 인터뷰를 하면 ‘아이들은 무지한데 구원자 같은 교사가 짠 나타나서 성차별이 없어졌다’ 이렇게 보일까봐 걱정돼요. 현장은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잘못된 아이들이었는데 교육을 받아서 착해졌다’ 이런 게 절대 아닙니다. 다만 차별적 발언을 하는 사람이나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아이들이 알게되는 점은 작은 변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체적인 변화를 소개해주세요.
“저희 반 아이가 지난해 학교 방침에 이의를 제기한 일이 있었어요. 방역상의 이유로 교사가 출근하는 오전 8시30분 이전에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정문 앞에 있게끔 했어요. 정문 앞에 있던 아이가 너무 추워서 못 참겠다며 들어와버렸어요. ‘밖은 춥고, 모여있는 건 교실과 똑같은 데다 정문 앞은 차도여서 더 위험하다’는 논리를 갖고서요. 그 뒤로 교사들이 돌아가면서 8시까지 출근하는 걸로 바뀌었어요. 물론 교사가 좀 피곤해지긴 해요. 제가 2주 정도 병가를 썼는데 대체교사로 오신 분이 화가 많이 났었어요. 아이들이 ‘차렷, 경례’부터 왜 그렇게 해야하냐고 따졌거든요. 나중에 제가 돌아오고 나서 ‘너희 의견이 존중돼야 한다. 다만 전달하는 방식이나 전략도 함께 고민해야한다’는 얘기를 했어요. 수업을 통해 달리 바라는 건 없구요. 본인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그게 부당하다는 사실을 좀 더 빨리 알 수 있는 아이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초등학생 대상 ‘성평등’ 수업을 진행하는 이신애 교사(31)가 교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이미지 크게 보기
초등학생 대상 ‘성평등’ 수업을 진행하는 이신애 교사(31)가 교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한수빈 기자 이 교사는 ‘성평등은 바람직하다’고 강변하는 대신 ‘왜 그럴까?’를 묻는 방식을 택했다. 그 과정에서 자극적·선정적 이슈나 성 대결 구도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미디어의 문제점이 자연스레 녹아든다. 아이들은 기사 속 혐오 표현에 맞설 논리를 스스로 갖추게 된다. “아이들은 더 나은 상태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커요. 미디어 수업 이후 본인들이 냉철한 시각을 가지게 됐다고 기뻐하거든요. 교사가 충분히 납득할만한 근거를 제시하면 편견 없이 다가설 수 있어요.” 혐오에 맞서는 이 교사의 수업은 오늘도 계속 된다.
“한국 사람은 참 나이브해. 하라는 대로 다 하더군. 마스크 쓰라면 바로 자기 돈 주고 사서 쓰고, 집에 있으라면 집에 쏙 들어 가 있고. 왜 그런지 알아? 그게 다 군대 때문이야. 군대에서 배운 거라고는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그 것 뿐이라고. 그런데 군대 안 갔다 온 여자들은 왜 그러냐 고? 그들 남편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기 때문이지.
미국에서 왔다는 외국인은 신나게 떠들었다. 상대 기분을 봐 가며 내 이야기를 할까 말까 하고 머뭇거리며 살았던 적이 별로 없었던 나 였지만, ‘헐, 뭘 모르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곧바로 이어 붙여 대꾸하는 것을 평소와 다르게 나는 머뭇거렸다. 이 외국 국적자가 우여곡절 끝에 고양시에서 집도 사고 아이들 학교도 보내며 자리를 잡아 잘 살고 있는 것에 내가 꽤 감동을 받았었던 것 때문도 있었고, 또 그가 진짜 뭘 너무 몰라서 하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식적인 대답보다는 솔직한 의견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발언 하나로 지금껏 내가 알던 사람이 갑자기 달리 보이는 것도 유감이었다. 가끔 한 사람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가 마치 해파리 몸 속 들여다 보이듯 뻔히 보이는 때가 있다. 조만 간 적당한 기회를 찾아서 찬찬히 설명을 해 주어야 지 생각했고, 다행히도 이후에 기회가 생겨 내 의견을 분명히 말해 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아쉽게도 그는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고, 어쩌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고 느꼈다. 저 사람이 고양시에 너무 오래 살아서 일까? 아니면 한국에 너무 잘 적응해서 일까?
미디어는 미국을 아주 풍요롭고 자유가 넘치는 곳으로 그리지만, 그 속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인종차별이나 불평등을 청소 안 된 화장실 정도로 축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들의 거대한 저택 속 작은 화장실 하나 정도의 약점은 별 것 아니고, 한국의 약점은 치명적인 것이 된다. 대단한 숫자는 아니지만, 그간 내가 만나 온 미국 사람들의 태도나 말을 통해 그들이 차별을 더러운 화장실처럼 받아들이고 있고, 하지만 그래도 너희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만나온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유연한 사고방식이 너무 부럽다! 여기서 그저 개인적 경험을 무리하게 확대 해석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내가 차곡차곡 주워 모은 사례들이 일반적인 통계적 평균치를 낼 정도로 충분한 수라고 하기에는 오차범위까지 압도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할 수도 있다.
안 그래도 스웨덴 게이트가 이슈다. 초대를 받아서 온 것도 아니고, 며칠 전에 미리 알리지도 않고 갑자기 집으로 놀러 온 아이 친구를 굶기는 것은 너무 야박하다 혹은 숟가락만 하나 더 얻는 것을 아이 친구가 싫어할 수도 있다 논쟁이다. 스웨덴 게이트는, 스웨덴 친구 집에 놀러 갔더니 친구와 가족이 식사를 해야 한다며, 놀러 온 본인에게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었다는 경험담인데, 이 이야기는 빠르게 온라인에 퍼졌고 스웨덴 게이트라는 이름까지 붙여졌다. 워 낙에 비싼 물가 때문일 수도 있고, 초대를 받더라도 본인이 마실 술이나 음료를 따로 준비해 간다는 암묵적 약속이 있는 나라 답다. 한 스웨덴 사람이 해명한 글을 보면, 스웨덴인들은 가족과의 시간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란 다. 아무튼, 스웨덴 게이트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 대한 구설수, 어떤 문화에 대한 구설수는 언제든지 생겨나고, 이럴 때 마다 등장하는 해명 논리는 ‘모든 경우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이다. 모든 스웨덴 가족이 사전 예고 없이 놀러 온 아이친구는 굶기자는 사회적 약속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만약 모든 경우가 그렇다면 그 어떤 논쟁이 될 이유도 없다. 한국인은 대중 목욕탕을 좋아한다 던데 왜 목욕탕 가기 싫어하냐 고 묻는다. 한국 여자들은 일찍 일어나 밥도 짓고 나가서 돈도 번다던 데 너는 왜 안 그러냐 고 묻는다. (오 제발, 입 좀!) 문제는 다른 사람이 예전부터 주장해 오던 것을 또는 어디서 ‘줏어’ 들은 것을, 그대로 별다른 비판 없이 따라하는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으니 원래 그렇다는 것은 없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어떤 일관된 맥락을 찾았다면 그것은 세상을 읽은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실제 경험을 통해 쌓아 온 어떤 뚜렷한 확신은 그 개인에게 있어서 강력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될 수 있다. 이를 선입견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생존요령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가 차별적 대우를 받고 성적 불쾌감을 느끼는 어떤 상황이 반복적으로 있어 왔다면, 그 상황의 특성이나 가해자의 공통된 특성을 특정해 먼저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너는 왜 그렇게 불평 불만이 많냐 고 지속적으로 묻는다면, 그 불평불만이 논점이 아니라 불평불만을 하게 만드는 세상을 향해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나이브’ 하다고 말한 그의 의견에 내 나름대로의 의견을 가지고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라는 반박을 열심히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가 개인적 경험을 통해 쌓아 온 공교한 판단기준을 뒤엎을 만한 반박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그간 만나 온 한국인들이 정말 그랬을 지 모르고, 한국 사회의 코로나 대처를 그가 이해하는 방법은 그런 이해방식 밖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의 발언대로, 일본 열도가 온몸으로 쓰나미를 막아주어 한반도가 멀쩡한 데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개인의 자유조차 쉽게 버리는 약해 빠지고 멍청한 즉, 나이브한 사람들이라는 그의 서사는, 그가 한국 사회에서 이방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온 나름의 용기의 단면일 지도 모르겠다. 암튼 여기서 좀 앉아서 숨돌리고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껏 거쳐온 수많은 사람들 중 나이브한 사람도 있었고 상황에 따라 상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나이브한 사람도 꽤 많았다. 곧 뒤돌아서 속상해 할 거면서 면전에서는 거절하거나 거부하지 않고, 애써 피해기억을 지우고 고상한 척하기도 한다. 자신의 차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타인의 차별에는 둔감하거나, 차별에 대한 불평을 덮어놓고 피곤해 하는 사람이 있으며, 차별이 이익을 준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결국 각 개인의 생각을 뒤엎을 수 있는 전 우주적인 진리를 찾아서, 또 선명한 사례와 논리를 꺼내 들 수 있어야 그 어려운 설득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한국이 아시아 대륙 꼬다리에 붙은 작은 나라로 있어왔지만,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이라는 집의 환상적인 거실을 지나 뭔가 숨긴 듯한 화장실까지 열어보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내가 매일 사용하는 냄새나는 화장실이 사실 진짜 화장실은 아니라며 꽁꽁 닫아버리고, 말끔하게 닦은 손님용 화장실만 언제까지 보여줄 수 있을까? 내가 사용하는 화장실은 절대 더럽지 않다고 절절히 호소해봐야 결국 매일 내가 쓰는 화장실은 묵은 때 가득한 더러운 화장실이다. 케이-환상 뒤에 숨은 한국인의 민 낯, 성착취 영상공유를 성장의 한 과정처럼 받아들이는 문화와 어머니와 부인, 딸에게 차례차례 엄마 역할을 선사 받는 문화를 이미 눈치 빠른 외국인들은 알아채고 있다. 케이-컬쳐가 해외 소수자들의 시선을 먼저 당겼고 색다른 밈으로 퍼지고 있으나, 정작 한국 문화는 소수자를 독특한 양념 정도로 생각한다는 것과 페미니스트는 조롱 당해도 싸다는 차별이 들키기까지는 안타깝게도 얼마 안 걸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0년 해외 온라인 성희롱 조사에 따르면 18세 이상 성인의 12%가 온라인 성희롱을 경험했습니다
<온라인 성폭력의 정의>
온라인 혹은 사이버 성희롱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해 개인에게 전달되거나 공유되는 성적 내용으로 원치 않거나, 승인되지 않은 다양한 행동을 포함합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고자 피해자와 가까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고묘하고 악랄한 형태의 괴롭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를 감지하고 조치를 취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사이버 성희롱의 가장 놀라운 측면은 피해자가 직면했을 때 무력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가해자가 찾는 대상은 여성이지만 괴롭힘의 피해자는 양성별 모두의 개인과 어린이일 수도 있습니다. 가해자가 각계각층의 개인이 될 수 있는 것처럼 피해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온라인 성희롱은 성별, 성적 취향, 인종, 특별한 필요 또는 장애 등에 근거한 증오 범죄 및 차별과 겹칠 수 있습니다.
사이버 성희롱은 고도로 젠더화될 수 있으며 전통적으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퍼진 불평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통념 중 하나는 그러한 괴롭힘의 대상이 여성뿐이라는 것이나, 남성도 괴롭힘을 당할 수 있습니다.
방정식에 LGBT+ 커뮤니티를 추가하면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젊은 LGBT+ 응답자의 32%가 온라인 성희롱을 경험했다는 보고가 발표되었습니다. 전 세계 설문 조사에서 훨씬 더 심각한 결과가 나왔는데 성별 스펙트럼 및 성적 취향 모든 범주에서 응답자의 50%가 온라인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보고했습니다.
가명으로 추측이 되지만, 01085734433 곽명진이라는 자가 보낸 성폭력 메세지 내용입니다. 전혀 모르는 자이고 카카오스토리 친구를 보면 남성인것 같습니다